바다를 등져

남사윤 -1-

내가 기억하는 풍경은 산과 논, 그리고 이따금 굽이치는 강,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크고 작은 단어들 뿐이었다. 물론 이 기억속의 풍경 중 어느 한곳도 이렇게 하얀 공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눈이 오지 않았음에도, 서리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하늘과 땅의 경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얀 세상. 그 하얀 세상 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슬픈 얼굴이 있었다. 

“바닷가로 가시지요. 귀공을 위한 선택지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바닷가가 어떻게 생겼지?”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답을 고르는 듯 말이 없다 결국 서글프게 웃는다. 

“안내 해 드리겠소이다. 직접 보시지요.”

그렇게 인도를 받아 도착하여 처음 본 바다는 너무나도 광활했고, 공허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이었다. 작은 언덕이 만드는 굴곡조차 없이 올곧은 선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렇게 먼 수평선에 홀린듯 한 발자국씩 물에 다가간다. 그러다 제 맨발에 조금 서늘하고 습한것에 닿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대한 물이 땅에 부딪히며 만드는 하얀선들은 야금야금 제 발을 갉아먹으려 들었다. 그 파도라는 것에 작은 모래알이 이리저리 힘없이 떠밀리고 있었다. 제 발에도 그 거대한 흐름이 주는 힘이 닿는다. 발목을 휘감고 밀어냈다가 끌어 당긴다. 어느 개울에서 물장구 치는 듯한 휘감음이다. 하지만 하얗게 부서지는 거품, 휩쓸리는 모래알,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물만을 보는 순간 두려움이 들었다. 

‘내가 맞서보려 했던건 이 거대한 바다였나?’

‘그리고 무참히 실패한 나는 이렇게 하얗게 부서졌다 사라지는 거품인건가.’ 

덜컥 찾아온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발을 간지럽히는 파도에게서 슬금슬금 물러난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땅에서 저 거대한 물이 자신을 삼키는 것 같았다. 강에서 들이켜봤던 물이 끝도 없이 몰려오는 기분이 들어 붙어 있지도 않는 숨이 턱 막혀 고개를 돌린다. 헛구역질이 나는 입을 억지로 틀어 막으려 손을 든다. 

‘저 무게가 날 갈갈이 찢고 갈아버려 한줌의 모래로 바꾸어 버리니’

 

난생 처음 상상해 본 맞설 수 없는 한계라는 미지의 두려움에 결국 바다에게서 등을 돌린다. 끝이 없는 물의 무게 대신 반대편에는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틈새로 하얀 마을이 보인다. 제가 늘 함께하며 꿈을 가졌던 공간이다. 그 마을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간다. 모래사장을 벗어나 경계선에 자리잡은 소나무 한그루에 잠시 어깨를 기댄다. 어깨 너머에서 쏴아- 물이 잘게 흩날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 틈바구니로 인도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다. 그는 이곳에 선택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저 바다는 나의 선택지가 아니다. 영원히 내 것이 아닐 것이다. 

“무슨 생각 해?”

“처음 왔을 때.”

누군가의 물음이 제 상념을 깨준다. 생각에서 벗어나 초점이 잡힌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면 어느샌가 높은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모래를 부스는 듯한 소리는 어깨 너머에서 들린다. 난생 첫 백야제, 그 자리에서 신이 된 나는 그 이후를 바다를 벗어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끝없는 물은 언젠가 터져 넘처 자신을 삼키는 것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바다 깊은 곳 한가운데 잠겨 있었다. 두려움을 느꼈던 그 물의 무게는 현실로 이루어졌고 나는 눌려 죽어가고 있었다. 밑으로 가라 앉어가며 손을 뻗어가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피와 죄로 가득찬 물과 의미 없는 휘적임으로 손가락에 감기는 소용돌이일 뿐. 그래도, 그래도 바다는 나의 선택지가 아니다. 비록 남은것이 몇 없는 내 마지막 선택지라 할지라도 나는 바다를 택하지 않으며, 바다가 나를 택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시체가 되어 떠오르는 한이 있더라도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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