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엔시오데스 실버애쉬 x 플로밀라
눈이 막 그친 하늘은 구름이 가득하다가, 이내 물러났다. 성산 밑 동굴에서 눈을 피하던 엔시오데스가 몸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나왔다.
“오늘 눈이 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부모님이 열차사고로 돌아가시고, 엔시오데스가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은 쉐라간드 뿐이었다. 그것이 허상일 뿐이라도 마음을 다 잡기에는 충분했다. 자애로운 쉐라간드께서는 성실히 기도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말 하나를 붙잡고 산을 올랐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직후 산 아래로 보냈던 텐진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밑은 눈이 내리는 것이 분명했다. 엔시오데스는 작게 숨을 내쉬며, 오늘은 내려갈지, 아니면 더 올라갈지 고민했다.
“저기,”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꼬리부터 귀까지 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한 두 발자국 앞으로 가고 나서야 뒤를 돌았다. 뒤에는 우산을 쓴 여자가 어색하게 손을 거두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엔시오데스는 그제서야 숨을 내쉬었다.
“놀랐어? 미안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거든.”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인이신가요?”
“맞아. 관광하러 왔어.”
아무것도 없는 쉐라그에? 엔시오데스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한쪽 귀를 쫑긋 세우고, 경계하듯 질문한다.
“쉐라그에 관광이라. 보기 드문 분이시군요.”
“이곳 저곳 가보는걸 좋아해. 여기는 오리지늄이 침범하지 않은 축복받은 쉐라간드의 땅이잖아. 궁금해서 와 봤지. 정말 ‘신’이 있는걸까? 싶어서. 그런데 눈이 내려서...”
여자는 곤란한 듯 웃었다. 확실히, 쉐라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편이었으며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길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엔시오데스는 그제서야 눈 앞의 여자가 정말로 이곳을 ‘관광’하러 왔음을 인정하고 내려가는 길을 가리킨다.
“내려가는 길은 저쪽입니다.”
“아니. 올라가는 길. 혹시, 너도 올라가는 길이니? 괜찮으면 가이드 좀 해줘.”
“... 그건.”
어린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에 아직 미숙했고, 그것이 성인이라면 더욱이 그랬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닌 성산을 올라가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가만히 버려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변사체로 발견된다면, 분명 사일 동안 꿈에 나올 것이 분명했다. 엔시오데스는 똑똑한 두뇌로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다행이도 여자는 자신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었고. 엔시오데스는 답을 내었다.
“그럼, 가이드를 해드리는 대신 제게 당신의 지식을 알려주신다면.”
“바깥이 궁금한 소년인가봐. 좋아, 내가 알고 있고, 네가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엔시오데스는 자신이 박사라고 소개한 여자와 함께 올라가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 협회 소속은 아니라는 점이 제법 흥미로웠다. 여지것 부모님을 통하여 들어온 박사들은 어느 나라, 어느 소속, 어느 학과라는 규칙성이 있었으니까. 그런 것 없이 그저 ‘박사’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여자는 하나를 알려주면 두가지의 궁금증을 던져줬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하던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깨닫고는, 멈춰서 뒤돌아 박사를 바라봤다. 저 멀리 한참을 뒤쳐져 헉헉 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가만히 보던 엔시오데스가 한마디 던진다.
“박사들은 전부 체력이 안 좋습니까?”
“... 글쎄... 와이번 출신의 연구자들은 아니지 않을까? 그들은 몸이 튼튼하니까... 헉... 조금만 쉬다 가자...”
“이 속도라면 해가 저물고 도착할지도 모르겠는데, 괜찮으시다면.”
“하아, 힘낼게...”
박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다리를 움직였다. 두 사람은 끝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성산을 오를 수 있었다. 혼자 올라갔다면 분명 세 시간은 전에 도착했겠지. 그러나 실보다 득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엔시오데스는 그녀를 부축했다.
“못 걷겠어... 어디로 데려가려는거야?”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조금만 어울려주시죠.”
엔시오데스가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러면, 박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엔시오데스에게 기대며 움직였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여자. 그렇게 생각하며 엔시오데스는 쉐라그가 가장 잘 보이는 장소로 그녀를 데려간다.
“아름다워. 항상 여기를 보러 오는거야?”
“저는 기도를 하러 옵니다만... 아마, 쉐라간드께서도 이곳을 가장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엔시오데스, 너는 쉐라그를 사랑하는구나.”
여자는 웃었다. 왜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하나를 알면 둘의 궁금증을 던지는 사람. 눈보라가 가득한 이곳에 봄을 가져다 줄 것 같은 사람. 엔시오데스는 무심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박사는 두 눈을 깜박이며 손을 잡았다.
“다음은 어디로 갈거야?”
엔시오데스는 자기가 아는 쉐라그의 구석구석을 소개했다. 소개하면서, 본인이 놀랄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 박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변화해야할 장소, 보존해야할 장소를 나누며, 이따금 그녀에게 물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외부인이라는 점과,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의 말을 제대로 듣는 자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박사는 엔시오데스의 말을 귀기울이고, 조언했다.
“... 그러고보니, 박사님은 언제쯤 쉐라그를 떠나실 생각입니까?”
“거의 다 본 것 같아. 덕분에 즐거웠어. 엔시오데스. 네가 없었으면 아마 성산에서 삼일 동안 헤메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러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마중 나오시는 분은...”
“없어.”
“네?”
“여기까지 나 혼자 왔어. 그러니까 가는 것도 나 혼자 갈거야. 켈시와 약속한 시간이 다 되가거든. 그런데 말이야. 정말 몰라도 괜찮겠어?”
내 이름.
박사가 그렇게 말했다. 엔시오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들어둔다면, 나중에 바깥으로 나가 마주했을 때 무심코 의지할 것 같았다. 그런 요소를 혹시라도 만들어둬선 안돼.
“네. 대신, 나중에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면 됩니다. 박사님이 다음에 저를 만나게 되신다면. 그때는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정중하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 뒤에, 빅토리아에 유학을 갔을 때도, 카란을 세운 뒤에도, 카란의 이름이 널리 퍼질 때에도 그때의 ‘박사’는 찾아오지 않았다.
실버애쉬는 그 날의 일을 가끔 떠올렸다. 아마 그것은 쉐라간드의 허상이 아니었을까? 신을 믿지 않으나, 어쩌면, 쉐라간드가, 그 때의 자신을 위해 도움을 준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자신은 쉐라그를 강성하게 만들 것이고, 타국에게 빼앗기게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엔시아의 병세를 호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를 제약회사의 수장을 보러왔다. 수 많은 약과 진통제, 장사꾼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질이 좋은 곳은 드무니, 지원을 하면 분명히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거라 생각해 직접 만나기로 결정했다. ‘로도스 아일랜드’ 의 함선이 열리고, 다른 이들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이동한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온다.
“손님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 당신이 카란 무역회사 사장, 엔시오데스 실버애쉬지? 보고 받은게 있으니 자기소개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 손님 앞이니까. 예의상 벗어야겠지.”
상대방은 노출 없는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페이스 가드로 얼굴을 가린 뒤 후드로 한번 더 덮었다. 실버애쉬는 상대방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목소리를 듣고 상대방이 여성임을 알아챈다. 그가 얼굴을 가린 것을 치우자.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는 한 순간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카란의 수장. 역시... 쉐라그를 사랑하는 사람 같더라니. 보니까 알겠네.”
설산, 눈보라. 궁금증.
“그렇게 말한 의중이 궁금하군.”
“응? 당신이 온다고 했을 때, 쉐라그에 파견을 보냈으니까. 조사한 결과를 읽었을 뿐이야.”
“쉐라그에 와본 적이 없나?”
“궁금하긴 해.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나라. 느긋하게 관광이라도 해보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난게 아니니까. 나는 로도스의 박사, 플로밀라 라고 해. 광석병에 관한 걸로 왔다면 제대로 왔어. 실망할 건 많겠지만, 노력해볼게.”
하나를 알려주면 두 가지의 궁금증을 던져주는 여자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자와 닮은 사람. 흥미롭다. 그 여자와는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 여러 생각을 하며 엔시오데스는 손을 내밀었다.
“...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