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Anemone

Mrs. Danvers × Elisabeth von Wittelsbach

작성일: 2016-03-07
레베카 × 엘리자벳 크로스오버

대니, 오늘 꿈에 ‘그녀’가 나왔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자의 손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자는 흔들리는 눈으로 제 손가락 사이에 감긴 머리칼의 주인을 살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잔뜩 흔들어놓은 주제에 소녀는 조금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상대를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는 오만함이었을까, 그 모습을 한참 노려보던 여자는 한숨을 삼키고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그녀 자신과 자신의 삶을 가장 사랑했고, 때문에 자신을 떠받드는 남자들에게 일말의 애정도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날, 그녀가 정신을 잃은 소녀를 안고 잔뜩 젖은 모습으로 맨덜리 저택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여자는 며칠 전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짓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발코니로 몰래 숨어들어온 그 모습은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처럼 보였다.

따뜻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선 자신을 그녀는 만류했다. 내가 돌아온 사실을 너만 알고 있어야 해, 대니.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먼 옛날 하와에게 선악과를 종용하던 뱀의 것과 같았다. 여자는 오랜만에 돌아와 자신의 존재를 숨기라 말하는 그녀의 헝클어진 모습을 말없이 살폈다. 곱게 내렸던 머리카락은 다 풀어헤치고, 고결하던 그 드레스는 흠뻑 젖어 엉망이었다. 그리고 바람결에 흘러오는 것과는 별개로 느껴지는 짠 내음.

…머리가 다 망가졌습니다, 마님. 그 모습을 보며 제가 그렇게 말했던가. 그때 그녀의 표정이 어땠더라. 그 새까만 눈동자를 떠올리던 여자의 눈이 문득 흐려졌다. 자신만을 진심으로 대하던,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던 눈은 그 품 안의 소녀에게만 오롯이 향하고 있었다. 제게 돌아오던 시선은 찰나에 스치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올곧게 그녀를 기다리던 제 모습이 한순간에 처연해졌다. 

대니, 대니, 듣고 있어? 한참 소녀를 노려보며 그녀를 처음 본 순간을 떠올리던 여자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황급히 상념을 떨쳐냈다. 거울에 비친 소녀의 검은 눈이 마치 힐책하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뭐라고 말씀하셨죠? 제게 똑바로 향하는 그 눈이 묻는 말에 여자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뻔뻔하게 되물었다. 소녀의 말 따위야 들어도, 혹은 듣지 않아도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물론 제가 되물은 말 뒤로 자신의 말은 요만큼도 듣지 않느냐는 식의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지만 여자는 그 모든 단어를 한 귀로 흘리며 제 손에 감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소녀의 투정을 모두 받아주기에는 여자가 그다지 관대한 성격이 못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이 제게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제가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한참 소녀의 머리를 만지던 여자는 그 머리를 완전히 땋아 올리고 나서야 손을 떼었다. 소녀는 거울을 보며 이렇게 올리면 제가 무겁지 않겠느냐며 투덜거렸지만, 애초에 소녀 본인의 취향이나 불편함은 여자가 고려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당신이 보면 기뻐하셨을까요, 이 자리에 없는 그녀가 이 모습을 보고 지을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여자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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