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한 갈래 길
다행히도 붐볼 실버가 터지기 전에 심판이 다가와 용의 굴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향은 자존심이 세니 지금은 그가 말하는 대로 따라주는 편이 좋을 거란 말도.
어찌저찌 실버를 달랜 제노는 센터에서 포켓몬들의 치료를 마친 뒤, 용의 굴 중앙에 있다는 사당으로 향했다.
“장크로다일, 괜찮아?”
제노의 물음에 두 사람을 등에 태운 장크로다일이 울음소리로 답했다. 게임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실 포켓몬 센터에서의 치료는 만능이 아니었다.
상처가 회복될 뿐 포켓몬이 받은 피로나 충격은 시간이 지나야만 해결되는 문제. 치료를 마치자마자 두 사람을 등에 업고 헤엄치는 일에 제노가 염려를 표했지만, 걱정과 달리 장크로다일은 씩씩하게 물살을 가르고 사당으로 향했다.
엘리게이일 때는 불가능했는데, 장크로다일로 진화하니 두 사람을 같이 태워도 끄떡없는 모양이었다. 실버의 뒤에 자리한 제노가 기특함에 장크로다일을 쓰다듬자 장크로다일이 기쁜 듯 크르릉 목을 울렸다.
어느덧 사당의 입구. 조금 젖은 발목 부근을 털어내며 두 사람이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들였다.
“너는….”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의외의 인물, 목호였다. 목호가 실버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가, 제노와 마주하고 표정을 풀었다. 제노가 물었다.
“목호 씨, 리그로 돌아가신 거 아니었어요?”
“돌아가기 전에 장로님을 잠깐 뵈려고 왔다. 그러는 너희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아, 그게….”
“배지를 받으려고 왔어. 검은먹체육관 관장한테.”
싸가지없지만 간결한 설명. 목호의 의문 섞인 눈빛에 제노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목호는 어쩐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그렇군. 미안하다. 녀석이 고집이 세서 말이야.”
“누가 고집이 세다는 거야!”
앙칼진 목소리. 이향이었다. 식식거리며 나타난 이향이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흥, 그래도 여기까지 올 재주는 있나 보지?”
“잔말 말고 배지나 내놓으시지. 아니면 이번에도 쓰러트려 줄까?”
그렇게 말하면 꼭 우리가 배지를 강탈하러 온 사람들 같잖아…. 제노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목호와 이향을 살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향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승부하자! 모처럼 모였으니까 2대2로 싸워보는 건 어때?”
갑작스러운 이향의 제안. 실버가 망설이는 사이 이향이 검지로 제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번에야말로 네 이상한 피카츄에게 이겨주겠어!”
“… 어떻게 생각하세요?”
“승부라면 나도 대찬성이야.”
제노는 그런 이향을 무시한 채 목호에게 물었다. 여기서 가장 어른인 목호가 잘 중재해 주길 바랐건만, 오히려 그는 제노와의 배틀을 반기는 것 같았다. 제노가 한숨을 쉬었다.
“… 그렇다는데, 어때? 나랑 팀 할 거지?”
“허, 당연하지. 당신이 나 아니면 누구랑 팀을 구성한다는 거야?”
이게 확, 진짜. 목호 씨 편에 붙어버릴라.
*
시합이 시작되고, 이향과 목호는 각각 신뇽과 갸라도스를 꺼냈다.
“장크로다일.”
실버의 부름에 장크로다일이 우렁찬 소리로 울며 앞으로 나섰다. 사용 가능한 포켓몬은 세 마리. 아마 목호의 망나뇽은 제일 마지막에 나오겠지. 잠시 고민하던 제노가 피카츄를 내보냈다.
“피카피!”
한쪽 귀가 뾰족한 피카츄를 보자마자 이향의 표정이 한층 사나워졌다. 그가 소리쳤다.
“신뇽, 화염방사!”
“장크로다일, 막아!”
피카츄에게로 쏟아지는 불꽃을 장크로다일이 하이드로펌프로 상쇄시켰다. 새하얗게 피어오른 수증기를 가르고 갸라도스가 커다란 입을 벌린 채 달려들었다. 피카츄와 장크로다일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피하며 흩어졌다.
“신뇽이 공격하는 사이 갸라도스가 용의춤을 춘 것 같네.”
범상치 않은 공격력과 속도. 계속해서 능력치를 올리게 둘 순 없었다. 하지만 장크로다일이 공격을 위해 가까이 붙으려 하면 신뇽이 화염방사로 견제해 왔다.
두 마리 포켓몬이 서로의 사각을 보호하면서도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모습. 이향과 목호가 훌륭한 호흡으로 태그배틀의 정석을 보여주는 사이, 피카츄와 장크로다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격을 피하는 데에 급급했다.
한 명이 두 포켓몬을 다루는 것이 아닌 두 명의 트레이너가 함께 싸우는 방식. 피카츄의 움직임까지 실버가 지시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초조함을 느낀 실버가 인상을 찌푸렸다.
“실버.”
“….”
“실버!”
“어, 어?”
“괜찮으니까 네 방식대로 해. 내가 거기에 맞출 테니까.”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맞춘다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은 실버의 정신을 돌아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실버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원한다면 내키는 만큼 실컷 날뛰어주겠어!
“장크로다일, 얼음엄니로 갸라도스를 물어뜯어!”
“그렇게는 안 되지, 신뇽, 화염방사!”
신뇽이 달려드는 장크로다일을 견제하기 위해 기운을 모으던 그때, 사당 주변의 물살이 거세지더니 파도가 일었다. 피카츄의 파도타기였다. 신뇽이 내뿜은 불꽃을 삼켜버린 거대한 파도가 신뇽과 갸라도스에게까지 닿은 순간, 파도를 타고 순식간에 갸라도스의 앞으로 나타난 장크로다일이 목을 물어뜯었다.
“갸라도스, 떼어내라!”
“장크로다일, 버텨!”
갸라도스가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장크로다일이 그 힘에 휩쓸려 날아가지 않게 팔다리를 모두 써 갸라도스의 몸에 매달렸다. 그 공격에 이미 당한 적 있는 이향이 신뇽에게 외쳤다.
“신뇽, 갸라도스를 도와! 장크로다일을 떨어트리는 거야!”
“막아!”
허공으로 날아오른 신뇽에게 피카츄의 아이언테일이 부딪혔다. 신뇽이 피카츄에게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갸라도스와 장크로다일의 체력이 점점 빠지고 있었다. 제법 튼튼한 장크로다일을 상대하기 위해 목호가 지시를 내렸다.
“갸라도스, 전기자석파!”
“잠깐, 목호, 안돼!”
이향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갸라도스가 뿜어낸 전격은 장크로다일에게 닿지 않고 한곳에 모이더니, 흡수되듯 전부 피카츄에게로 향했다.
“이럴 수가…!”
“피카츄, 돌려줘.”
“피카!”
악동처럼 이를 드러내며 웃은 피카츄가 구의 형태로 모은 전기 에너지를 갸라도스에게 날렸다. 장크로다일이 갸라도스에게서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일렉트릭볼이 갸라도스에게 적중하고, 이내 큰소리와 함께 갸라도스가 쓰러졌다.
“갸라도스, 수고했다. 돌아와.”
“장크로다일, 너도 돌아와.”
“이것 봐, 저 피카츄 이상하다니까! 파도타기를 쓰고, 전기 공격은 전부 흡수하고!”
두 사람이 지친 포켓몬을 들여보내는 사이 이향이 검지로 제노를 가리키며 성을 냈다. 제노는 닿지도 않은 손가락에 찔리는 기분이었다.
“저게 배지 한 개인 트레이너의 실력이란 게 말이 되냐고!”
그 말에 제노가 답했다.
“지금은 다섯 개야!”
“어쩌라는 거야!!”
아무래도 이향의 화만 더 돋운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목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피뢰침이군. 숨겨진 특성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그리곤 씨익 웃었다. 이향의 고집에 적당히 맞춰주려 시작한 배틀이었는데,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미소에 제노는 속으로 기겁했다. 관장들도 그렇고, 챔피언들도 그렇고, 왜 처맞으면서 기뻐하는 건지.
다행히도 그런 제노의 속을 모르는 목호가 다음 포켓몬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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