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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 of You

M1STYP1CTUR3S by Ki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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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티니앙 드림 커미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1.

 

하얀테 전초지를 나와 대심판의 문까지는 완만한 언덕이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 언덕을 절반가량 올랐을 때였다. 뺨에 차가운 것이 스치고 지나가 손을 뻗어 거칠게 비비니 물기가 묻어났기에 겨우 알았다. 눈이구나. 지긋지긋한 싸락눈이로구나. 언젠가부터는 이 날씨도 제법 호전되어 미친 듯이 눈이 내리지는 않는다더니, 커르다스는 커르다스인가보다. 비스듬히 아래로 보이는 하얀테 전초지는 폭설에 대비하기 위해 이리저리 오가는 병사들로 분주해 보였다. 에스티니앙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쌓이기 전에 문 앞에 도착하고 싶었다. 적어도 그곳에는 머리 위를 가릴 지붕은 있지 않던가. 이슈가르드로 들어가는 것은 눈이 그치고 난 뒤여도 좋다. 다만 무릎까지 쌓여 걸음마다 푹푹 가라앉는데도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것만은 사양이다.

왜 그랬을까, 순간 치고 올라오는 생각도 잠시다. 그는 그 생각이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굳이 이런 날을 골라 걸어가겠다고 했던 것도 그였고, 홍옥해니 쿠가네니하는 동방으로 향하기 전에 이슈가르드를 잠시 돌아보고 싶어진 것도 그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집에 잠시 돌아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집. 집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조차 우습다. 그의 집은 오래전에 타서 사라졌을 텐데, 그는 어느 사이엔가 성도에 몸을 뉠 곳을 찾아 그곳을 대충 집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이. 그러나 어딘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이요, 누구에게나 있을 무어라 콕 집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기이한 것이니 에스티니앙은 그 마음이 그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집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그것은 뭘 어찌할 수가 없어 그저 그 자리에서 가만히 그를 기다리는 장소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여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돌아가게 되어있지 않던가.

꽤 매정하게 이슈가르드를 등지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러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그리 매정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비스듬히 날리는 굵은 눈발 사이로 걸음을 딛으며 시야 가득 담은 커르다스는 마찬가지로 눈이 내리던 수없이 많은 날을 그의 기억 속에서 깨우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아는 범위 안에서 눈을 좋아하는 이는 드물었다. 이슈가르드에 태어나 그것에 애정을 가지기란 어려운 일이지 않던가. 커르다스와 그도 그렇다. 그가 기억하는 한 그는 커르다스에서 살았고, 커르다스에서 살아갈 생각이었으며, 커르다스야말로 그의 삶의 모든 부분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너무도 익숙하기에 지겹지 않은 것이란 얼마나 진부한가. 또, 그것에 역정을 내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땅은 고통이었다. 눈이 휘날려 온통 잿빛인 하늘이며 발아래 가득 쌓인 새하얀 눈을 제외하고 그가 볼 수 있던 다른 색이라고는 용이 흘린 피 밖에 없었다. 목적이라고는 그 붉은 빛을 보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달성하는 것보다는 낮은 빈도로 그의 피가 눈 위에 흩뿌려졌고, 그보다 더 낮은 빈도로 그는 죽음이라는 골짜기로 떨어지는 벼랑 위에 눈을 가리고서 올라섰다. 그 땅이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한 그를 제대로 떠올려 달라 그를 바라보아도, 결국 떠오르는 그런 것뿐이다. 그 땅에서 즐겁다는 것은 과거를 향한 일종의 반역이었다. 그보다 앞에 있었기에 먼저 절벽 아래로 떠밀린 이들을 향한 무례였다. 즐겁다고 하더라도 등에 죄책감을 짊어지고, 입가에 웃음이 스치더라도 돌아서면 괴로워해야만 하며, 눈을 감으면 마땅히 비명을 들을지어다. 그것이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이니.

 

아, 이미 다 지나버린 날들의 망집이여. 다 지나버린 날들의 실수여.

에스티니앙은 그가 세간에서 말하는 종류의 현명함을 갖춘 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하여 눈앞에 보이는 것마저 외면해버리는 사람이 아님은 알았다. 혹은, 믿었다고 해도 좋다. 그 어떤 순간들은 후회할 수 있기에 빛나는 것이다. 후회할 기회가 주어졌기에 그리워해도 좋은 것이다. 하나로 엮여 너무도 길게 늘어진 까닭에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원한의 반복은 끝에 불이 붙자마자 순식간에 타올라 사라지지 않았던가.

 

눈발이 한층 거세졌다. 바람이 강해진 탓이다. 뺨을 할퀴며 지나가는 것이 분풀이처럼 느껴진 탓에 그는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를 향하는 모든 것에 화만 내던 풋내기 병사는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분노하던 용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제 더는 눈을 맞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웃었던 걸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이들은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알아차리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리기 마련이었고 그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는 심지어 세간에서 특히 현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거리가 있는 편이었으니, 더더욱.

대심판의 문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에게 자신을 돌아보라는 듯이 몰아붙이던 커르다스와 잠시 헤어질 시간이었다.

 

문을 지키는 병사는 유감스럽게도 그를 알아보았다. 다만 성도의 소식이랍시고 이것저것 떠드는 대신, 그는 언젠가 동경의 대상이었던 푸른 용기사를 여전히 공경한다는 듯이 눈이 그치실 때까지 이곳에 더 있다 가시라고 권했을 뿐이다. 권유하지 않았어도 뻔뻔히 눌러앉을 생각이었으나, 그는 그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걸어야만 하는 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대심판의 문은 이슈가르드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 성도 이슈가르드는 아니지 않던가. 그것은 그저 문일 뿐으로 커르다스와 이슈가르드를 이어주는 얇은 선 같은 것이었다.

그는 추우실 테니 화톳불에 장작을 더 넣겠다는 것을 말리지도 않았다. 병사가 장작을 가지러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는 화톳불 바로 옆의 눅눅하고도 서늘한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눈이 그칠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병사는 그에게 말을 더 붙여오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가 먼저 말을 걸어 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스티니앙은 그런 것에 신경을 기울일 정도로 섬세한 이는 아니었으며, 기억 속의 어딘가를 더듬던 신경은 관성적으로 다시 기억 속을 빠지기를 원했다. 그것이 저 끝도 없이 내리는 눈처럼 그를 어떤 종류의 우울이나 회한 속으로 던져 넣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여자를 떠올린 것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성도의 그 집을 찾아가는데 그저 한없이 후회만을 껴안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여자야말로 늘어진 그의 삶의 끝의 어딘가에다 불을 붙였고 그의 그저 쌓여 등을 짓누르던 과거는 덕분에 재가 되어 허상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허상을 쫓아내려면 그녀를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진정 올바른 선택이리라.

잿빛 머리카락은 눈이 내리면 멀리서는 보이지도 않았고, 눈이라도 슬그머니 흩뿌릴까 고민하는 하늘인 양 잿빛이 섞인 푸른 눈만이 깜박거리는 것이 제법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날리는 눈 탓에 온통 잿빛투성이인 날씨마저 고작 눈이 빛나는 것을 보겠답시고 기다렸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것이 왜 그리 재밌는지 알지도 못했던 것이 문득 목 아래에서 들끓었다. 이름을 붙여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곱씹으면 다 그런 식이 아니던가. 지옥의 날름거리는 불이 그의 발아래에 있다고 생각해 숨이 가쁘도록 뛰던 순간들도 돌아보면 미련이고 망집이며, 그저 장난이나 다름없던 것이 어느 순간 돌아보면 전혀 다른 이름을 달고 다시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다만 그것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모두 다 지나가 버린 순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길고 아름다운 흉터를 남겼든 그를 찢어버린 순간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지 않았던가. 그것에 뒤늦게 온기며 여러 이름을 가져다 붙여보려 애써도 그 순간과 같은 것은 될 수 없으니. 그렇기에 혹여 입 밖으로 내면 지나간 것에 후회할까 싶어 입안에서 굴리기나 하지 뱉어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이름도 모르는 그것에 지배당했음에도.

 

그는 그 단어를 입에 담던 순간들을 선명히 기억한다. 친구를 놀리기 위해서, 그의 부하를 놀리기 위해서, 혹은 그가 놓쳐버린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표현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 여자를 가리키며 그 단어를 말하는 것에 망설이게 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저 입 밖으로 뱉은 것들이 언젠가 현실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이유 중 하나이긴 하였으나, 그것 전부를 대표할 수는 없었다.

 

“경……,”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태도로 다가온 병사는 눈이 그쳤음을 알려주었다. 커르다스는 서서히 날이 개고 있었다. 세탁을 거친 잉크 자국처럼 옅어진 잿빛이 그가 눈발 속을 걷던 때와는 다른 선명함으로 가득했다.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섰던 것은 조금만 기다리면 늘 그러던 것처럼 파란 눈이 그 안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찬가지로 그를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는 커르다스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 결국은 돌아섰다. 성도로 향하는 그 길고도 긴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의 두 다리 말고는 아무것도 그를 저편으로 데려다줄 수가 없었으니.

그러다 그는 이윽고 더 터무니없는 생각과 만나고 말았다. 어쩐지 저 끝에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에스티니앙은 그가 기억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짧디짧은 휴가를 얻은 그녀가 이슈가르드가 아니라 코스타 델 솔 같은 곳을 고를 것을 선명히 알고 있는데도. 그를 어쩐지 성도의 그 에테라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부르지 않았음에도 먼발치서 그녀를 알아본 그에게 신기하다며 말을 붙이고서는 어디로든 데려갈 것이다. 그것이 어디든 좋았다.

 

에스티니앙이 이슈가르드의 문 안으로 뛰어들어 성도 하층의 돌바닥 위로 그의 왼발을 내디뎠을 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에테라이트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 눈과 얼음, 몰아치는 바람과 가끔은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 우울함이 춤추듯 살아나는 도시에서 보기 드문 뒷모습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기꺼이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냐며 덤덤히 돌아선 여자가 던지는 시선에, 그는 그것이야말로 유령이라 생각했다. 그 여자가 커르다스에서 마주쳤다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 그를 기꺼이 유혹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끝내 그 옆에 섰을 때, 에스티니앙은 그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는 천성적으로 말이 너무 많아... 사족을 안 붙이는 방법을 모르나 봅니다.

얼마 전 재개봉한 <러브레터>라고 하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여러가지 의미로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된 기억을 더듬어가며 그것의 새로운 의미를 찾다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쳤던 사랑을 발견한다...는 줄거리인데, 그 과정에서 사랑을 끝내 가질 수 없던 사람과 사랑을 가졌으나 알 수 없었던 사람이 교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고요. 사실 그건 누구에게나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감정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거니까요. 그리고 누가 되었든 지난 기억을 곱씹다 문득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꽤 흔한 일이기에 이 영화도 사랑받은 거겠죠.

5SOS의 Ghost of You도 마찬가지로 이미 사라져버린 연인의 흔적을 통해서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사랑을 느낀다는 가사니 참 잘 어울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글 속의 에스티니앙은 <창천>이 진행되는 동안 빛의 전사와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그 커르다스에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이름붙일 만한 사랑이 아닌 다른 단어를 찾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건 왜... 그게 사랑이라는 걸 알면 굳이 그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아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쪽으로 요령이 없는 사람일 수록 그것을 뱉어내기 힘들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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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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