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단편
눈 앞에 놓인 것은, B4 크기의 커다란 종이와 빼곡히 적혀있는 의미모를 문자 배열. 고개를 들면 새하얀 벽면 위쪽에 자리한 오로지 시간만을 보여주는 디지털 시계가 있고, 등 뒤로는 시험을 끝마쳐야만 열리도록 설계된 두꺼운 철문이 있다. 이 방 안에 있는 것은, 나와 이것들 뿐이다.
수능에 목숨을 거는 대한민국은 수능에 지친 수험생들과 수능의 근본적 문제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더 나은 수험 환경을 조성했다는 말과 함께 전국구 단위로 수능을 위한 시험용 건물을 설립했다.
그렇게 설립된 수능용 건물의 실체는, 수험생을 한 사람씩 수용하는 격리실이었다. 층층이 복도는 물론, 격리실 안까지 CCTV가 돌아가고, 격리실 입장 후에는 한 차례 금속 탐지기와 소지품 검사가 진행된다. 그렇게 완벽하게 ‘나는 깨끗하고 공정한 상태로 이 시험을 치를 수 있어요.’ 가 확실시 되고 나서야 우리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자리에 앉은 후 시험이 이루어지는 기나긴 시간 동안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간간히 들려오는 시험 안내 방송과, 종이 넘기는 소리, 그리고 펜을 움직이는 소리. 자칫 숨을 쉬는 것 조차 잊어버릴 만큼 고요한 적막 속에, 한 교시가 끝났다는 안내가 나오고서야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한숨이 터져나온다.
앞으로 두 과목. 딱 두 과목만 더 치면 격리실을 나갈 수 있다. 애써 땀이 찬 손을 팔에 문지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으니 곧 다음 과목 시험지 배부를 위해 담당 감독관이 돌아보면 안된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애써 괜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 아예 눈을 감고 있으니, 감독관이 종이를 내려놓고 펜을 교체한 후 다시 왔던 길로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일순, 그 잠깐의 순간에 감았던 눈을 뜨고 무심코 문을 돌아보았을 땐 감독관이 문을 닫고 있었다. 격리실 안의 사람이 돌아볼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등을 돌린 채 그가 닫고 있는 문 틈새로는 다른 감독관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몸뚱이 하나가 보였다.
하얀 셔츠 위로 갈색 니트조끼가, 왼쪽 가슴팍에는 명찰로 추정되는 직사각형의 무언가가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순간, 두꺼운 철제 문은 그대로 다시 시험에 집중하라는 듯 묵직하게 쿵, 소릴 내며 닫혔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집중을 할 수가 있지? 방금 뭐가 끌려나갔잖아! 뭐가 질질 끌려나갔어. 목 부근 옷을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고! 그거, 살아있나? 죽은 거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격리실에서 어떻게 죽어? 어떻게 죽여? 나가려고 했나? 시끄럽게 군 게 cctv에 다 찍혀서 그런가? 근데 감독관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닫았잖아. 한 두 번 있던 일이 아니야? 근데 왜 논란이 되지 않아?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어? 그럴리가 없는데. 그럴리가 없는데. 그럴리가….
“제 3교시, 영어 영역 듣기 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머리 위로 번뇌에서 벗어날 시간이라는 듯 기계적인 여성의 음성이 울렸다. 아, 나 수능 치는 중이었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영어 영역이라고 적혀있는 커다란 글자와 듣기 평가에 대해 안내중인 단조로운 목소리, 전 시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주변 풍경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듯 마음이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난 이걸 풀어야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내가 이걸 풀어내지 않는 이상, 나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 새로 바뀐 펜을 들어 쥐는 소리. 듣기 평가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고, 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자 배열을 향한다.
바깥으로는 갖가지 사유로 격리실 안에서 기절한 이들이 감독관들의 손에 복도 밖으로 끌려나간다. 수능 시험 건물 바깥으로는 담벼락 너머에서 수능을 치고 나올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번 수능에서 무조건 좋은 점수를 받아야만 한다. 다시 이곳에 들어오고 싶지 않다면. 끌려나가는 몸뚱이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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