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에스) 탄생

탄생:태어나는 것을 높이어 일컫는 말

"있지. 있지. 그거 알아? 태내에 기억은 4살부터 옅어지기 시작한다고 하더라고."

죄수 번호, 002번. 카시키 유노에 첫마디였다. 밥을 대부분 다 먹어가던 이들은 그녀의 독특한 주제에 다른 죄수들은 하나둘 반응을 보였다.

"아. 알아. 어린아이 중에서 배 속에 있을 때 기억, 갖고 있는 애들이 있다는 거 말하는 거지?"

"엣. 그거 대단하잖아.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죄수들은 서로 자신들의 경험과 감정을 말했다. 그러는 중 우연히 지나가던 나도 그 대상이 됐을 뿐이었다.

"간수 씨는 기억나?"

태어난 순간이라. 그 단어를 곱씹으며 에스는 자신의 탄생을 떠올렸다. 무겁던 눈덩이나 몸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을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간수의 탄생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긴건지 꽤나 쏠리는 시선에 적당히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에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네. 나는,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직도? 우와. 그거 정말 굉장하지 않아?"

이쪽에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면서 순진하게 감탄하는 그 모습에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음을 지었다. 아니, 죄수보다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면 될 것을 구태여 말하고 있는 스스로일지도.

"눈을 뜨고서는 꽤 놀랐다. 그러면서도 울지는 않았지."

누군가는 오기로 괜히 기억난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냐고 비웃을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죄수들은 순진할 정도로 대부분 내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그거 부모님이 엄청나게 걱정했을 것 같은걸? 아기 울음소리가 전혀 안 나다니."

"그런가. 대답은 했으니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잠시 죄수들과 어울려 준 것뿐, 아직 할 일은 많았기에 몸을 움직였다. 그런 내 태도에 더 듣지 못하다는 아쉬움을 표현하긴 해도 붙잡지는 않았기에 식당을 빠져나왔다.

…부모라. 기억도 나지 않는 그들에 존재는 그저 단어로만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존재한다는 정도로. 남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만 없다고 서운하거나 하지는 않다. 기억도 없는 데다가, 없는 게 나은 부모인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나를 낳아준 부모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지기는 했다. 책에서는 유일한 내 편이고, 이유 없이 애정이 생기는 존재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다. 만날 수도 없다. 내가 이 밀그램에 간수인 이상.

-넌 에스. 이 밀그램에 간수다.

잭카로프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내 이름과 직책만을. 그것만으로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지만 잭카로프는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물어볼 수 없었다.

솔직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갑자기 간수라는 직책이 떠안겨지다니. 당혹스럽달까, 그걸 넘어 분노가 생겼다.

하지만 당혹. 적의. 분노. 허탈감. 여러 감정이 담긴 눈이 나를 향하자, 나는 그제야 이 밀그램에 대한 현실감이 생겼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간수의 업무나 행동은 잘 몰랐지만 나는 간수였고, 죄수들보다 부족할 수는 없었기에. 부족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법을 찾아보거나, 종교나 철학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대화 중에 무시당하지 않도록. 어린애 취급을 당하지 않도록.

솔직히 이곳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깨어있을 때는 간수의 업무와 심문을 하고, 심문이 끝나면 잠들어버리니 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심문이라는 명칭으로 그들과 대화할 때면, 스스로의 몸이 무척 무거워질 때가 있다. 무언가 억누르는 게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런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누군가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책임감일까. 아니면 대화를 통해 그들이라는 존재를 알아가면서 정을 주면서 느껴지는 위험 신호일까.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볼 대상조차 없었기에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저 견딜 뿐이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그것은 우연이고 운명이다. 싫거나 힘들어도 분명 그것에서 얻게 되는 것이 존재한다.

어느 책에서 본 건지 모를 그 말이 지금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스는 멈추지 않았다.

이 길에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건가. 내가 그들을 만나고, 내가 간수가 된 것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에 에스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간수를 하면서 많은 죄수들을 많났다. 몰랐던 그들에 점을 알아갔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들이라는 존재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다. 코토코에 말처럼 나는 그들을 친구나 가족처럼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런 나는 간수로서 안 되는 걸지도 모르지. 밀그램을, 그들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랐다. 그런 나는….

"윽. 머리가…."

분명 방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생긴 고통은 펑소보다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생각하지 말라는 것처럼. 간수 일에 충실하라는 것처럼.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말고 행동하라는 겅고처럼.

"…그래. 그래선 안될지도 몰라."

잭카로프도 그러지 않았나.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나 당황이나 의문은 전부 버리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의문을 품고 의심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도 몰랐다. 내 기억을 지운 것에는, 분명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을 테니까.

기억이 없는 건 의미가 있다. 이곳을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점점 사라지는 두통에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꾹꾹 눌렀다. 다만, 조금 전까지 생각도 못 할 정도로 강한 고통이 왔던 탓에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이곳이 식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내 뒤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어라. 에스군?"

갑자기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흠칫하려는 반응을 겨우 숨기면서 몸을 돌렸다. 군이라는 호칭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미약한 생기가 담겨있는 푸른빛의 투명한 눈동자를 보자 그 남자임을 확신했다.

남자는 나를 보자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지더니, 이내 평소에 표정으로 돌아오면서 살짝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속도를 높여 금세 내 앞으로 걸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가요?"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걱정을 깨닫는 순간, 머릿속에는 잭카로프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간수다. 두려워하지 마. 죄수들에게 있어 권력과 공포로 존재해야 해.

그래. 잭카로프는 그렇게 말했다. 간수는 권력과 공포로 존재해야 한다고. 그렇기에 나는 그들에게 한 치의 틈도 보여줘서는 안 됐다.

에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시도우의 손을 내치면서, 목소리를 낮춰서 살벌한 목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아니다."

걱정을 해준 상대에게 고맙다고 말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손을 내치며 화를 냈느니 당연히 사라질 줄 알았는데, 시도우는 떠나지 않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지?"

시도우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겁먹지 않게 부드럽게 눈동자를 휘면서, 큰 죄를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한 눈빛으로 내 손을 잡았다.

"에스군. 죄수에게 기대기 싫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면, 일이 고되고 힘들면 의지해 주세요?

뭐 하는 거지 싶어서 잡혀줬더니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였다. 에스는 저 푸른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걱정이라는 감정. 맞닿은 손을 통해서 느껴지는 온도. 듣기 좋게 조곤조곤한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불쾌했다. 정말 자기 자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걸까. 아니면 인형 놀이처럼 아들에 대타인 건가. 어느 쪽이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불쾌했기에 에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뿌리쳤다.

"네가 걱정할 건 없다."

그 말을 끝으로 에스는 등을 돌렸고, 시도우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시도우의 시선을 느끼면서 에스는 이를 갈았다.

그래. 궁금해할 필요는 없어. 그저 내게 주어진 의무대로 저들을 판단하면 될 일이다.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다.

앞으로 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고 판단하며 걷는데, 에스는 어쩐지 이 넓은 밀그램에 홀로 남겨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도 없고, 나만이 소외된 것 같은, 그 누구도 곁에 있지 않은 이 고립감은 마치….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에스는 억지로 생각을 멈추면서, 차라리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 누군가를 마주치기 전에 방에 돌아가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보면 이 이상한 기분이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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