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7

진화랑 2개, 진화랑라스 1개. 2023년 9월 23일 연성.

1. 포뮬러 1 드라이버 진과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로 들어오는 화랑으로 진화랑.

후우, 헬맷을 벗은 진이 천천히 피트 차고 -팀의 모든 인원이 상주하는 곳-로 들어섰다. 피트 차고의 피트 월을 -실시간으로 날씨 정보, 노면의 온도, 레이스 카의 정보 등을 분석하는 곳- 지키고 있는 건 팀의 사령탑인 리와 기술 개발 총괄 감독인 라스, 그리고 연구 개발 감독인 알리사였다. 팀의 가장 중요한 직위에 있는 세 사람은 방금 전 진의 주행 데이터를 보고 있었다. 나쁘진 않지만... 리의 중얼거림에 라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사는 열심히 뭔가를 찾는가 싶더니 뒤돌아 조용히 다가온 진을 바라보았다.

" 저희도 빨리 레이스 엔지니어를 구해야하지 않을까요? "

" 레이스 엔지니어의 중요성은 잘 알지만... "

" 급하게 구해서는 진과의 호흡이 잘맞을 것 같지는 않은데... "

" 우리 쪽의 데이터를 빨리 이해하고 전달할 실력자는 많지 않아. 무엇보다... 본의 아니게 진의 악명과 견제도 심하고 말이야 "

레이스 엔지니어. 드라이버와 짝을 이뤄 경기를 치르는 1:1 개인 전담 엔지니어로 담당하는 드라이버와 그 드라이버가 운전하는 레이스카를 책임지고 피드백이나 의견을 바로 옆에서 듣고 라디오를 통해 팀과 드라이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하지만 현재 진의 팀에는 그 레이스 엔지니어의 자리가 공석이었다. 기존에 있던 레이스 엔지니어는 경쟁팀의 머니 공세로 슬그머니 은퇴를 선언하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새로 구하자니 진의 악명 아닌 악명과 경쟁팀의 노골적인 스파이 심기 시도 등으로 구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리의 말에 진이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자신의 악명, 그건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들이 연달아 사고로 크게 다치면서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악명의 결정타를 찍은 것이 자신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선수가 레이스 도중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고로 부상을 당해 결국 드라이버에서 은퇴를 하게된 사건이었다. 자신과 관계가 생기면 불운이 생긴다. 말도 안되는 오해였지만 3년의 기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도 제일 많이 화재가 되었던 라이벌의 부상으로 인한 은퇴는 관계자들과 진 자신에게도 상당한 충격이었기에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결국 다시 진이 헬맷을 쓰고 피트 차고를 나가 아직 시동을 끄지 않은 제 레이스 카로 향했다. 없으면 없는대로 가야지, 한번 더 간다.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레이스 카에 탄 진의 모습에서 초조함을 캐치한 리가 거칠게 제 머리를 헤집었다. 평상시 엘레강스라며 우아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 리도 지금 상황이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진의 말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가야하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했다. 진의 레이스 카가 출발선에 서고 이내 신호와 함께 다시 주행을 시작한 순간.

" 오, 여긴가? 여전히 우리 못지 않게 소수 정예로 굴리고 있잖아? "

" 당신은... "

" 진, 그 자식은 지금 주행 중인가? 그럼 실례 "

조용히 피트 차고로 들어온 그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덩그러니 놓여져있는, 최소 반년 이상은 아무도 쓰지 않았던 팀 헤드셋을 쓰고 빠르게 피트 월의 모니터를 훑더니 혀를 찼다. 뭐가 급해서 이 자식은 평소랑 다르게 마구잡이로 주행이야? 얼씨구, 차 온도는 또 왜 이리 높아? 혹사 시켜서 차라도 바꾸려고? 거기서 속도는 왜 안줄이고 무리하게 드리프트 하는데, 이 정신 나간 놈이. 한동안 신랄하게 진을 비판하던 그가 결국 참지 못했는지 팀 라디오 통신 스위치를 켰다. 그리곤.

[ 어이, 너 지금 제정신이냐? ]

[ 이 목소리... 설마... 화랑? ]

[ 설마고 나발이고 평상시 자랑하던 그 침착함은 어디가고 막무가내로 주행이야. 거기다가 너 지금 기어도 제대로 안바꾸고 있지, 정신 안차리냐?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

[ 자, 잠깐만. 너 말이 너무 빨라 ]

[ 하아, 지금부터 제대로 해라. 현재 차 상태는... ]

그 후로 물처럼 자연스럽게 현재 상태와 피드백을 전달한 화랑이 정신차리고 마치 대회처럼 제대로 주행하기 시작한 진의 모습에 만족한 듯 그제서야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었다. 그런 화랑에 리가 그의 등을 퍽 손바닥으로 쳤다. 그건 공격이라기 보다는 반가운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와도 같았다. 백의 제자! 몸은 괜찮아? 걱정하는 것 치고는 너무 아프잖아, 이 아저씨가. 리를 노려보는 그 눈은 2개가 아닌 1개였다. 오른쪽 눈은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그건 사고 후유증일 것이다. 진의 라이벌 드라이버였던 화랑은 이 부상으로 드라이버를 은퇴했던 것이었다.

서둘러 주행을 끝마친 진이 피트 차고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화랑의 주먹이 진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 짧은 탄성과 동시에 화랑의 큰소리가 터져나왔다. 너 임마, 요새 뭐 어떻게 하길래 내 사범님한테까지 연락을 오게 만드는거야! 은퇴한 김에 당분간 쉬려고 했더니 덕분에 팔자없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잖아! 그 말에 진이 맞은 곳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 돌아왔다고? "

" 그래, 네 팀에 레이스 엔지니어 없잖아? "

" 설마 너... "

" 그래, 이 팀에 이 몸이 들어와준다 이거야. 명색이 내 라이벌이였던 놈이 나 외에 다른 놈들에게 지는건 못봐주겠으니까. 널 이기는건 오직 나뿐이야 "

" 화랑, 너... "

" 잠깐, 잠깐. 좋은 분위기 깨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화랑, 레이스 엔지니어 해본 적은 있나? "

라스의 말에 참으로 상쾌한 목소리로 해봤을리가. 라고 말한 화랑은 내쫓을까요, 라는 알리사의 말에 태연하게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지금 제 3자, 그러니까 타인들 중에 진을, 당신들을 가장 잘 아는건 나일걸? 진의 버릇, 드라이브 테크닉, 전략, 그리고 레이싱 카의 성능과 부품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나는 알고 있으니까. 내가 진을 이기겠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분석에 힘을 쏟았는줄 알아? 괜히 어설프게 외부인 썼다가 망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진에게 진심으로 한마디 할 줄 아는 사람을 쓰는게 나을텐데?

" 어쩔래? "

" ...너는 그걸로 만족하는거냐 "

" 나라고 너한테 그냥 도움이 되려고 온게 아니야. 나한테도 목적은 있어. 하지만... 내가 아까 말한대로 널 이기는 건 오직 나뿐이니까. 나 말고 다른 녀석들에게 지는건 보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

" 알았어. 잘 부탁해 "

" ...뭔가 쿨하게 받아들이니까 갑자기 하기 싫어지는데 "

그 말에 웃은 진이 가만히 내민 손을 보던 화랑도 피식 웃고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업계에 커다란 파장이 되어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카자마 진의 라이벌이었던 화랑이 그의 레이스 엔지니어로 아군이 되어 이 곳으로 돌아왔다고.


2.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화랑을 구하고자 계속해서 시간을 회귀하는 진과 화랑으로 진화랑.

처음 자신이 시간을 회귀했다는 걸 자각한 건 화랑이 23번째 죽는 순간이었다. 카즈야의 공격으로서 자신을 구하고 찬스를 만들기 위해 그의 공격을 대신 몸으로 막고 그의 팔을 붙잡은 화랑의 일갈에 진이 제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을 퍼부어 카즈야를 쓰러트렸으나 그와 동시에 화랑도 진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 제 품에서 화랑의 마지막 숨이 흩어지는 순간 마치 자각이라도 하듯 23번의 화랑의 사망 장면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흘러지나가고 무의식 중에 이번에도 구하지 못했다며 진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더. 몇백번이고 몇천번이고...! 반드시 널 구할거야, 화랑. 진의 등에서 이제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데빌의 날개가 스르륵 나타났다. 진이 화랑을 품에 안고 힘차게 하늘을 날아올라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시간을 거스를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빠르게...! 빛을 초월하는 속도에 다다른 순간. 진은 다시 한번 더 시간을 회귀했다.

24번째 세계. 또 다시 화랑은 이번에도 진을 구하고 목숨을 잃었다. 카즈야와 공멸이 되어버린 진은 점점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그런 진을 구하기 위해 화랑은 제 숨을 진에게 불어넣어주고 수면 위로 진을 올려보냈다. 이번에도 세상은 구했지만 화랑은 구하지 못한 진은 데빌의 힘으로 물을 가르고 화랑을 끌어 안은 체 다시 시간을 회귀했다.

시간을 회귀한 횟수가 두 자리를 넘어 세 자리, 네 자리를 넘어도 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죽음의 반복에 정신이 피폐해져 갔지만 진의 집념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를 계속해서 나 자신으로 봐준 너에게 미래를. 함께 같이 걸어가고 싶다는 진의 소망이 스스로를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 이번에도... 실패... "

삶은, 운명은 그런 진을 비웃듯 계속해서 화랑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정말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있고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남은 화랑의 숨소리를 들으며 진이 다시 그를 품에 안고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난 건지 화랑이 손을 올려 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 진... "

" 괜찮아, 화랑. 반드시 널 구할거야. 몇번을 반복한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널... "

" 이제 그만 깨달아, 내가 생존하는 순간은 오지 않아. 몇번을 반복해도... "

갑자기 화랑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곧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힘있는 목소리에 진이 날개짓을 멈추고 화랑을 바라보았다.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화랑에 진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그 말을 들은 화랑이 숨을 내뱉었다. 이건 기적이겠지. 아주 짧은 기적. 신일지 아니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널 막기 위해 나에게 잠깐 주어진 시간일거야.

" 몇번을 반복해도 나는 널 구할거고 그 과정에서 내가 죽는 건 필연이야. 절대로 바뀌지 않아. 그러니 이제 그만해 "

" 싫어, 화랑. 나는... "

" 젠장, 그러다가 네가 죽는다고! 너 이제 한계잖아! 날 구하려다 네가 죽으면 이게 무슨 본말전도야! 그리고 세상을 구할 수 있는건 너 뿐이잖아! "

그래, 그 말 그대로였다. 카즈야를 이길 수 있는건 진 뿐이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진이 죽어버리면 이번엔 세상이 멸망할 것이다. 결국 운명은 세계라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단 한 사람, 화랑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화랑의 말에 진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진도 알고 있었다. 몇번을 반복해도, 몇번을 회귀해도 화랑을 구할 방법은 없다는 걸. 그래도 진은 아주 작은 희망을 걸고 계속해서 시간을 회귀하고 또 회귀했다. 그리고 결국 정신적 한계에 봉착했을 때, 이번에도 진을 구하는건 화랑이었다.

" 괜찮아, 내가 없어도 너는 분명 잘할거야. 나 말고도 널 돕는 녀석들이 많잖아 "

" 화랑... 나는... "

" 넌 세상을 구하고 나는 너를 구하는 게 운명인거야. 뭐, 조금 아쉽긴 하지만 괜찮아. 네가 무사하면 충분해 "

" 읏... "

화랑의 말에 눈을 질끈 감은 진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상과 가까워지며 가까워질수록 화랑은 제 몸에서 생명이 빠르게 깎여져 나가는걸 느꼈다. 이게 죽음의 느낌. 생각보다 별거 없네. 아니다, 상처 때문에 통각이 마비되서 그런가... 그래도 아직 조금의 시간이 있을 때... 저를 품에 안은 진이 지상에 닿기 직전 마지막을 힘을 짜낸 화랑이 그의 목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게 하더니 가볍게 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제 마지막 숨과 말을 남기기 위해서.

" 잘 있어, 진 "

" ...잘가, 화랑 "


3. 점점 고장나는 자신의 몸에 진에게서 도망다니는 화랑과 그런 화랑의 뒤를 쫓는 진, 그리고 그를 숨겨주는 라스로 진화랑라스.

화랑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끝났으니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진은 그런 화랑을 찾기 위해 세상을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와중에도 일부 철권중을 이용해 온 세계를 뒤지며 화랑을 찾았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들려왔다. 그의 사범인 백두산에게도 찾아가봤지만 그는 자신도 행방을 알지 못한다며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소중한 제자가 사라졌지만 뭔지 모를 미적지근한 반응에 진은 뭔가 있다고 알아차렸지만 말을 해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어디에 있는거야... 화랑. 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오늘도요? 아, 정말 기가 막히게 끈질기네. 여하튼 죄송해요, 사범님. 네... 네... 알겠습니다. 또 연락 드릴게요 "

통화를 끊은 화랑이 으쟈쟈쟈, 크게 기지개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더럽게 새파랗네. 이제 가을인가... 그나저나 오늘 기온이 어떻게 되더라... 이렇게 계속 나와 있어도 되나? 아, 진짜 어디가 어떻게 고장날지 모른다는 건 엄청 귀찮은 일이구만. 쯧, 화랑이 혀를 찼다. 그런 화랑의 뒤에서 조용히 나타난 건 분홍빛 머리칼의 인간과 흡사한 안드로이드, 알리사였다.

" 오늘의 기온은 약 16도로 그 복장은 좀 추운 복장입니다. 겉옷을 하나 입는 걸 추천합니다 "

" 오, 알리사. 여긴 무슨 일이야? 한창 바쁘지 않아? "

" 박사님에게 정기점검을 받으러 가기 전 잠시 화랑씨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

" ...라스인가. 내가 무슨 10대 꼬맹이도 아니고 말이지 "

" 혼자 있으면 분명 사고칠거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

" ...너무하네, 정말. 아무리 나라도 막무가내로 사고를 치지는... "

" 끓는 물에 손을 넣거나 하지 않으셨나요? "

그 말에 화랑이 윽,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맞다, 그랬었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잊어버렸네. 화랑이 여전히 화상의 흔적이 남은 손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화랑이 제 몸이 고장나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 챈 건 약 반년 전이었다. G사의 카즈야를 막기 위해 모두가 일본으로 모였던 그때 화랑은 다시 한번 더 괴물로 변한 진과 마주쳤고 이번에는 라스와 함께 공투하여 그를 원상태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몸은 한계였고 화랑은 더 이상 자신의 몸이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그 당시에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세계 전쟁을 일으킨 카즈야의 G사를 상대로 끊임없이 싸워야 되는 나날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여파는 모든 일이 끝나고 고스란히 화랑에게 돌아왔다.

갑자기 쓰러진 걸 시작으로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은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미 화랑의 몸은 한계였고 그 여파로 신경에 이상이 생겨 무통각증후군이 생겼다고 했다. 무통각증후군. 촉각이나 통각, 지각, 체온 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화랑이 갑자기 쓰러진 것도 더위를 느끼지 못한 몸이 스스로 체온 조절을 하지 않아 열사병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무통각... 의사의 말을 들으며 작게 중얼거리던 화랑은 제 눈에 들어온 메스를 집어 그대로 손가락 끝을 그었고 새빨간 피가 나오지만 조금의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제 몸에 쓰게 웃었다. 그 직후 뭐하는거냐며 백두산에게 한대 맞긴 했지만. 문제는 무통각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군데의 신경이 끊어지고 손상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백두산은 깊은 한숨을, 화랑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격투가를 계속 한다는 건 무리였기에 화랑은 시원하게 백두산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그 날 바로 정들었던 도장을 떠났다. 물론 백두산은 즉각 반대했지만 워낙 화랑이 강경하게 나오는 통에 백두산도 깊은 한숨과 함께 화랑을 보내주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에게 가끔 연락을 해달라는 말과 함께. 도장을 나온 화랑은 여기저기 세계를 돌아다녔다. 세상이 어떻게 회복되어 가는지 화랑은 마음껏 구경을 하며 돌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화랑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진의 명령으로 자신을 찾아다니는 철권중을 발견해 조용히 도망치기도 여러번이었다. 진짜 성질 많이 죽었다. 스스로 자조하기도 하면서. 그러다가 끝내 만난 사람이 바로 라스와 알리사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둘에게서 도망을 칠 수 있을리가 만무. 결국 화랑은 둘에게 순순히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의 몸이 죽어가고 있다고. 그 설명에 라스는 할 말을 잃어버린 듯 입을 다물었고 알리사는 병원에서의 치료를 권했지만 화랑은 단호하게 잘라냈다. 난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다가 갈거야. 병원 같은 곳에서 시간을 다 쓸 수 있겠냐. 그런 화랑의 말에 불쑥 제안의 말을 던진건 라스였다.

" 그럼... 널 숨겨주지 "

" 뭐? "

" 숨겨주겠다고 했다. 네 진의는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진을 만나기 싫다면... 네가 원하는대로 숨겨주지 "

" 날 숨겨서 댁이 얻는 이득은? "

" 넌 꼭 이득이 있어야만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나? "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린 화랑이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제일 큰 목적은 진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었다. 진도... 제가 믿는 사람인 라스나 알리사가 저를 숨기고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을거다. 그리고 그대로 화랑은 라스의 자택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백두산에게 연락을 취한 화랑은 1시간 내내 제 사범님의 잔소리를 들어야했고 결국 일주일에 한번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나서야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전히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작업 중인 라스나 알리사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들리는 경우가 잦았고 혼자 있는 시간 동안 화랑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무언가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사고도 쳤다. 알리사가 말한 끓는 물에 손을 넣었다는 것도 그것이었다.

화랑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몸이 무통증이라는 걸 인정하기 위해서인지 제 몸에 상처를 낸다거나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밖에 나가있거나 하는 짓을 반복했다. 라스가 알리사에게 주기적으로 화랑의 상태를 확인하게 만든 건 모두 이런 일 때문이었다. 적어도 누군가가 있을 시에는 이런 짓을 하지 않으니까. 점점 늘어나는 상처의 흔적과는 다르게 화랑은 속은 멀쩡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일 뿐이었지만.

" ...어떻게 된거지? "

" 어서와, 라스. 근 2주만에 오나? 바빠도 집은 가끔씩 들리라고 "

" 어서오세요, 라스 "

라스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온 몸이 붕대투성이가 된 화랑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화랑의 말대로 2주만에 제 집에 온 라스는 온몸이 붕대투성이가 된 화랑을 보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손이 닿는 모든 부위란 부위는 다 붕대가 감긴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일부 팔과 다리의 붕대가 붉게 변해있는 것으로 봐서는 자해까지 한 것 같았다. 본인은 절대로 말해줄 것 같지 않고... 라스의 시선이 화랑의 손목 쪽 붕대의 매듭을 묶고 있는 알리사에게 향했다. 오, 고마워. 혼자하려고 하면 아무래도 힘들단 말이지. 태평하게 걸리는 곳은 없는지 손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화랑을 뒤로 하고 알리사도 라스를 바라보았다.

" 그래, 설명 부탁한다. 왜 저렇게 된거지? "

" 처음엔 말을 해주지 않았는데 결국 해줬습니다. 이물감이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

" 이물감? "

" 네, 마치 몸 깊숙한 곳에서 벌레 수백마리가 기어다니는 느낌이라고... 몸에 이상은 없을겁니다. 원인은신경계 이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

" ...... "

" 본인은 괜찮다고는 하지만... 화랑씨의 정신은 이제 한계입니다. 최근 이물감으로 수면도 힘든 것 같고... 강제로라도 병원 입원을 추천합니다, 라스 "

화랑이 잠시 방으로 사라진 사이 전말을 알리사에게 들은 라스가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볼게, 알리사. 라스의 말에 알리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행동도 거칠긴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심지가 굳은 사람입니다.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인 그 말에 라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새벽 조용히 제 방을 나온 라스는 거실 쇼파에 반쯤 누워 쿠션을 껴안고 있는 화랑을 보고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그와 대화를 하려 나온건 맞았지만 설마 깨어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여, 화랑이 라스를 발견하고는 태연하게 한손을 올리며 아는 척을 했다. 왜 깨어있는거지? 그 말에 화랑이 으쓱 어깨를 들어보였다. 어차피 알리사가 다 말했을테니까. 걱정이 너무 많아, 그 녀석. 그 말을 하는 화랑의 손에는 얇은 장갑이 끼어있었다. 라스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 그 장갑은 뭐지? "

" ...혹시라도 잠들었을 때 몸에 상처 같은거 안내려고 낀거야. 깨어있을 땐 이물감이 느껴져도 어떻게든 버티지만... 잠들면 무의식중에 상처를 내버리니까 "

" ...그렇군 "

" 진짜 기분 더럽다고. 피부 밑에 벌레가 우글거리면서 기어다니는 느낌... 최악이지. 무통증이라면서 왜 이런 감각은 느끼는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

그러면서 끌어안고 있는 쿠션에 머리를 기대는 화랑의 손이 쿠션을 찢어질듯 쥐고 있는 걸 본 라스가 다시 낮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도 화랑은 이물감과 싸우는 중이었다. 그래서 잠들지 못했다. 잠들면 무의식중에 그 이물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톱으로 마구잡이로 피부를 긁고 또 긁을테니까. 신체가 고장나는 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겠지만 정신이 고장나는 건 대처도 치료도 매우 힘들다. 차라리 잠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화랑에게 잠은 곧 자해의 시작이었다. 후, 숨을 깊게 내쉬는 화랑을 보던 라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왜 진을 피하는거지? "

" ...그 녀석에겐 내 이런 약한 모습따위 보여주기 싫으니까 "

" 이유는? "

" 그냥... 그 녀석에게 내 마지막을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남기기에는 왠지 억울하거든 "

" ...이해할 수 없어 "

" 당연히 이해할 수 없지. 이건 온전히 내 마음이고 내 감정이니까. 그냥... 그래, 내 자존심의 문제지. 그녀석에게 약한 모습 보여줄 수 있겠냐 "

" 약한 모습... 이라 "

" 그 녀석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진은... 조금 특별하니까. 라이벌이자 악우... 그리고... 음... 뭐, 그렇네 "

" ...왜 진이 널 찾지 못하는거지? "

" 그거야 내 집념이 진의 집념보다 강하니까. 잊어버렸어? 중동에서 진을 제일 처음 찾은게 누구인지? 잘난 G사도, 군인들도, 라스 너도 나보다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겠지만 결국 제일 먼저 찾은 건 바로 나였어. 정말 집념으로 찾았지. 그래서 만난게 진의 몸을 한 괴물이었으니 그때는 말도 못할 정도로 화가 나더라고. 하지만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자식도 슬슬 눈치 챌때도 됐지 "

" ...그래서 떠날 건가? "

" 그래야지. 2달 동안 편하게 쉬었으니까 다시 세상을 돌아다녀야지. 그 녀석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

" 왜 나한테 고스란히 이야기를 해준거지? "

" 물어봤잖아? "

" 너라면 대답을 안해줘도 그러려니 했을텐데 "

" 흐음... 글쎄... 그래. 라스, 넌 묘하게 그 녀석과 비슷한 면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 녀석 앞에서 하지 못하는 말을 왠지 털어놓을 수 있다고나 할까나... 고해성사의 느낌이지 "

그렇게 말하며 웃는 화랑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처연하게 느껴져서 라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화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머리 위에 툭 올려지는 손에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이내 포기한건지 아니면 귀찮은건지 얌전히 그 손길을 화랑은 받아들였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든 화랑이 쿠션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좋아, 이물감이 안느껴질 때 눈이라도 붙여야겠어 "

" 지금은 괜찮나? "

" 그래, 이럴 때 조금이라도 눈 좀 붙여야지. 그럼 난 잔다. 아, 대충 3일 정도 후에 떠날거야. 알고 있으라고 "

정말로 괜찮은건지, 아니면 괜찮은 척 하는건지 모를 말을 남기고 대충 손을 흔들곤 방으로 들어가는 화랑을 보던 라스가 흠, 소리를 흘리며 팔짱을 꼈다. 하나 화랑의 말에서 정정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네 집념이 진보다 강하다라... 하지만 그건 네 착각일지도 모르겠군. 진의 너에 대한 집념은 상상 이상으로 강해, 화랑. 아마 빠르면 당장 내일이라도... 들이닥칠지도 모르겠군. 

아무도 없고 불빛조차 없는 미시마 재벌 총수실에 남아있는 건 진이었다. ...화랑, 어째서...? 작게 중얼거린 진의 손이 천천히 책상 위를 손끝으로 훑으며 움직이다 이내 끝에 닿은 사진에 멈췄다. 불빛조차 없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진의 눈에는 사진이 선명하게 보였다. 끝끝내 찾아낸 화랑이 현재 머물고 있는 장소가 다름아닌 라스의 집이라니. 그럼 라스는 제가 지금까지 화랑을 찾는걸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는건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진은 간신히 찾은 화랑을 이대로 다시 놓칠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만나러갈게,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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