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일방해후
BookWar RPG MagicaLogia fanmade scenario based
TRPG 마기카로기아 동인 시나리오 "순회하는 별빛 여행"의 A엔딩 직후, NPC의 시점을 소재로 창작한 글입니다.
시나리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시나리오 본문을 인용한 구절도 다수 존재합니다.
운명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작성: 2023. 10. 02
一方邂逅
열차가 멈췄다. 그가 그 마도서를 회수한 모양이다. 객실 안에 걸려있던 시계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이 감기며 열차 내 풍경도 하나둘 바뀌었다. 아날로그 방식의 시계는 디지털 방식으로, 고전 양식의 의자 덮개는 깔끔한 천으로, 탁자에 놓인 1905년의 신문은 2000년대의 신문으로. 역행하던 열차가 원래 가야 했던 방향을 찾으면서 열차의 오류가 하나씩 수정됐다. 열차의 사물은 성질이 바뀌며 제 모습을 되찾고 있다. 그럼, 승객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내 몸을 먼저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손끝에서부터 몸이 옅어지고 있었다. 열차 창문에 비친 몸이 간헐적으로 깜박거렸다.
나를 세계에 묶어두고 있던 힘이 점점 사라진다. 나는 이 열차가 향하는 시간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다. 시간의 역설을 순리대로 해결하려면 나의 존재가 말소돼야 마땅하다. 내가 열차에 탄 흔적도, 열차에서 한 언행도 없던 일이 되겠지. 그런데 마지막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몸이 완벽하게 사라지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오늘 일을 곱씹을 겸, 떠난 그를 생각하면 딱 맞을 시간이다. 나는 창가로 향했다. 창 너머로 억새밭이 보였다. 이파리 끝에 빛나는 별무리가 머물고 있었다.
우주에서 백 년이란 시간은 보잘것없는 시간이다. 수많은 별이 궤도에 맞춰 순회할 뿐, 기껏해야 개중 하나가 빛났다 꺼지는 시간. 그러나 지구에서는 그 가치가 다르다. 한 세기 동안 두세 개의 세대가 어울리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열차의 물건들이 계속 바뀌는 것도 그런 이치다. 우주와 지구의 시간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구의 인간은 백 년 동안 하늘의 별 개수만큼의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
열차에 올라선 순간, 나는 내 몸에 깃들 백 년의 기억을 마주했다. 이 육체의 주인인 아무것도 아닌 자의 미래였다. ‘아무것도 아닌 니엔테는 안개의 길잡이 카스미 마논을 만난다. 니엔테는 육신의 한계를 마주한 상태였지만 어째서인지 살아갈 의욕을 되찾는다. 생사의 고비에서 니엔테는 어떤 결단을……’
내가 탄 열차는 미래에서부터 출발한 것인가.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았다. 니엔테는 나를 받아들였으나 나의 존재 이유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그와 나의 최종목표는 달랐다. 그는 삶을 바랐고, 나는 모든 자의 죽음을 바랐다. 나의 업화에 공명하지 못한 육체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그에게 죽음은 필연일 터. 그런데 카스미 마논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려 하는가? 나는 카스미 마논이란 사람이 궁금했다.
그런데 이 무슨 우연인가. 나 다음으로 열차에 탄 손님은 카스미 마논이었다. ‘미래의’ 카스미 마논. 그는 니엔테를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본 기억에서 니엔테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었다. 자신을 세계에 묶어두는 힘이 부족한 탓에, 세상 사람들은 니엔테를 잠시 잊었다. 이 자도 예외는 아니겠거니 생각했다. 니엔테를 잊은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 잠이 많았고, 묘하게 의욕이 없어 보였다. 말끝마다 체념이 묻어나왔다. 어떤 종류의 체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치사키를 만났으려나?”
실없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나와의 만남을 기억해 두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살던 곳에서 니엔테는 ‘무라카와 치사키’로 존재했다. 그는 이미 무라카와 치사키를 알고 있었던 걸까. 날카로운 분위기에 눌려 대화를 많이 나누진 못했지만, 무라카와 치사키를 언급하며 나를 비교하던 태도가 기억에 남는다.
“역시 말해줄 걸 그랬나.”
카스미 마논이 자신을 의심했을 때, 나는 과거의 기억을 전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이 그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그만뒀다. 미래로 나아가야 할 사람이 과거에 묶이면 어떡하나. 그리고 이 열차의 오류 범위에 우리의 대화도 포함된다면, 굳이 그에게 아득한 과거를 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랐다. 말에는 힘이 있다더니, 과거의 니엔테를 자처하며 설득하다 보니 어느새 정들었나? 괜한 미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편지라도 한 번 써야 하나…. 전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백 년의 기억을 되짚어 잠시 미래의 니엔테가 되어보기로 했다.
나는 나를 잃어가고 있었어. 나는 한때 마법사의 불멸이 궁금했어. 마법사는 세계를 자유자재로 바꿀 힘이 있는데, 왜 불사의 존재는 아닌 걸까 하고. 그래서 나는 머리에 피가 마르기 전부터 세상의 신비를 찾아다녔어. 지구에 현존하는 모든 마법이 사라지는 동안 꾸준히 마법 서적을 모으고, 여러 학파를 전전하며 세계를 여행했어. 가장 최근에 얻은 단서는 분서관의 불사조. 마법사는 마력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는데, 불사조는 마력을 잃어도 부활할 수 있어서 제일 불멸에 가까워 보였어. 그런데 그 당시 나는 불새의 업화에 관해 하나도 모르고 있었어. 어쩌면 얕잡아보고 있었을지도 몰라.
불새란 원한의 화염. 마법에 대한 근본적인 분노를 품고, 세상의 모든 마법사를 불태우려 하는 존재. 끝에는 자신마저 불태워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존재야. 나는 영생을 꿈꿨어. 그래서 분서관의 업화에 공감할 수 없었어. 나에게 마법이란 자연스러운 것. 마법사에게 마법은 인간이 마시고 내쉬는 숨과 같아. 그것이 없으면 삶을 제대로 살 수 없지. 나는 불새를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불꽃은 나를 먼저 표적으로 삼은 것 같아.
육체를 구성하는 힘이 약해졌어. 마력을 흡수하는 것도, 방출하는 것도 어려워졌지. 몸에서는 늘 숯이 탄 냄새가 났어. 불꽃이 서서히 내 몸을 좀먹고 있었던 거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지. 나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대법전 소유의 스코틀랜드 군도를 찾아갔어. 단순한 변덕이야.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마법사로 살며 맨 처음 머문 학파가 대법전이었어. 이곳이 내가 들어가야 할 무덤 같았어.
대법전은 너덜너덜한 배신자를 바로 처단하지 않았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지. 인간은 개미를 상대할 때 큰 노력을 들이진 않아. 나도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혹은 내게서 죽음의 냄새가 난 것일지도 몰라. 어느 쪽이든 날 건드리지 않아서 편했어. 나는 숲의 정령을 잡아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어. 이 발버둥마저 소용없게 될 때, 비로소 나는 죽음을 맞이하겠지. 체념하며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미 없는 시간만 흘려보냈어.
너를 만난 날도 그런 얕은 생각에 젖어있을 무렵이었어. 그때의 나는 잠드는 것도 어려워서, 고통에 지쳐 눈을 감고 뜨길 반복하고 있었어. 그날도 겨우 잠들었나 싶었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어. 눈앞에 앳된 소녀가 나타나서 내 팔에 붕대를 감아주고 있던 거야. 솔직히 난 깜짝 놀랐어. 다 썩어가는 팔에 무언가 닿았단 사실이 불쾌했지. 그래서 네게 화를 냈는데, 너는 그런 팔을 오래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어. 나는 있는 힘껏 너를 위협했지. 나는 엮여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잖아? 대법전에서 사용하지 않는 마법을 사용하면서까지 너를 내쫓았어. 그런데도 너는 끝까지 나를 찾아왔어. 여전히 같은 이유로.
나는 결국 너를 받아들였지. 포기한 것에 가까웠어. 너를 쫓아낼 정신이 있었다면 조금 더 대담한 일을 저질렀을 테니까. 네 주변의 다른 학생을 본보기로 삼는다던가, 학원 건물 근처로 자리를 옮겨 일을 키운다던가. 그러나 나는 누가 봐도 거동이 불편했고, 고통에 신음하며 금방 쓰러질 것 같이 구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네 관심이 아주 싫진 않았어. 나는 권태롭고 불안했거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고, 매일 밤 감았던 눈을 다시 뜰 수 없을까 두려웠어.
네가 곁에 있는 날은 덜 불안하고 덜 아팠어. 네게 집중하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어. 나도 주의를 돌릴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 너는 내 몸을 치료하면서 말동무가 되어줬지. 너는 정말 어린 마법사였어. 기본적인 소환 마법도 불안정하게 사용하던 풋내기. 그런 주제에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냐고 놀리니, 금방 토라져서 돌아가려고 하더라.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사랑스러워. 여전히 순수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생각나곤 해.
그 이후 내가 너를 가르치게 되었지.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부터 시작해서 마나와 마소의 운용, 마법사가 사용하는 66가지 마법 각인, 마법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까지. 너는 꽤 똑똑했어. 이론만 한두 번 설명했을 뿐인데 서툴게나마 따라 하고 있었어. 지적한 것도 금방금방 수정하면서 따라오니, 너를 가르치는 학원의 마법사가 꽤 즐거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나도 신나서 여러 가지 가르쳐준 것 같은데, 그 탓에 너를 다소 조급하게 만든 것 같았어. 너는 나를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시간이 지나면 너도 금방 다양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너라면 나를 능가하는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어.
너는 주로 늦은 오후나 저녁에 날 찾아왔어. 학생들의 자유시간은 얼추 그 시간대니까. 그땐 전자기기가 발달하지 않아서 하늘의 햇빛으로 시간을 가늠하고 널 기다렸지. 그런데 어느 날 너는 내 곁에 온종일 머무르다 가곤 했어. 학원 수업이 없으니, 이곳에 남아있는 것이라면서. 방학이라면 가족이나 친구에게 찾아갈 법도 한데, 너는 그런 사람들은 모른다고 못박았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며 대화 주제를 돌렸어. 그렇게 말하는 네 눈은 아주 슬퍼 보였어.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고독이 가득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따금 한 번씩 물어보는 게 전부였지. 너는 괜찮냐고. 너무 혼자 많은 것을 담아 두지는 말라고.
너와 시간을 보내면 마음이 잔잔해졌어. 너는 내 곁에서 네 일상을 이야기하며 수다를 떨고, 나는 네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며 옛날이야기를 했어. 마법 말고도 가르쳐줄 게 정말 많았지. 인간 사회와 다른 학파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몇 날 며칠을 말할 수 있었어. 너는 자연스럽게 내 정체를 알게 됐지. 나는 여행자였고, 영생을 찾기 위해 대법전을 나와 적대 학파에 머물렀고, 불사조를 몸에 품느라 몹시 아프게 됐다는 것도. 너는 내 과거에 아무런 말을 건네지 않았어. 대신 이런 말을 했지. “언니가 죽는 거, 절대 싫어.”
너는 눈 깜빡할 사이 훌쩍 자라 있었어. 너와 있으면 시간 감각이 무뎌지는 걸까?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아이가 내 콧잔등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컸지. 서로가 그저 좋다며 웃던 모습도 어느새 말없이 양 뺨을 붉힐 정도로 달라졌어. 나는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고민이 되었어. 우리 사이에 어떠한 자격조건은 없다지만, 우리는 서로를 단순히 친구라 부를 수 없었어. 친구라기엔 지금까지 쌓아온 유대가 깊고, 그럼에도 상대방의 복잡한 사정은 서로 입에 올리지 않고, 무언가를 진지하게 말하고 싶어도 얼굴에 늘 망설임이 가득했지. 나는 차라리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먼저 입을 열고 싶었지만, 그 무엇도 선뜻 말할 수 없었어. 삶이 위태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참 서글펐어. 너를 왜 해가 저물어갈 때야 만났을까. 조금이나마 더 건강할 때 널 만났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네 슬픔도 기꺼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겠지. 너만 바란다면, 너와 함께 세상의 신비를 찾아 여행할 수도 있었을 거야. 너에게 아무것도 보장해 줄 수 없는 내가 싫었어.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너를 슬프게 만들까 괴로웠어. 지리멸렬한 감정이 나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어. 그리고 나는 나의 모순을 깨달았어. 나는 어느새 너를 내 삶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말이야. 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너의 삶을 전해 듣는 것보다는 네 옆에서 눈으로 직접 삶을 구경하고 싶었어. 내 목표는 잠시 접어두고 너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어.
불행히 나에게 시간은 많지 않았어. 내가 품은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정의하는 것보다, 내 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지.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더 살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어. 그러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어. 내 영혼을 다른 육체로 전이할 수만 있다면, 나는 육체가 무너질 때마다 영혼을 옮기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불사조의 업화를 다룰 수 있다고 믿었지. 그래서 나는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을 하려고 마음먹었어.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시도인지 모른 채.
너는 많이 불안해했어. 그러다 정말 죽으면 어떡하냐고. 하지만 나는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 어느 쪽이든 죽을 목숨이라면 더더욱. 나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한 가지를 간과했어. 내 실험에는 근본적인 모순이 있었어. 아무리 마력으로 혼을 담을 그릇을 만들고 백만 세계에서 나의 정보를 가져와도, 외부에서 영혼을 이어줄 존재가 없다면 나는 다시 눈뜰 수 없었어. 나는 마법사가 세계에 간섭하는 수단인 앵커를 이용하려고 했지만, 영혼 없는 그릇이 소원을 빌 순 없었어. 생명의 부활은 생명의 창조와 비슷하지. 나는 전능에 도전한 것이나 다름없었어.
결국 나는 육체를 잃고 유령이 되었지. 혼을 구성하는 마력이 다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지는 순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의식이 멀어지면서 나는 깨달았어. 그 어떤 마법사도 죽음을 완벽하게 피할 순 없어. 힘이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세계가 우리의 독주를 허락하지 않은 거야.
나는 결국 내 욕심으로 널 상처 입히고 말았어. 마법사는 죽으면 세계에서 잊혀지잖아. 나랑 어울렸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면 너는 어떡하지? 텅 빈 너를 달래줄 사람이 있을까? 네가 어른이 되는 순간을 지켜보겠다고 약속했는데, 이 약속마저도 기억할 수 없겠구나. 남겨진 너를 떠올리니 참 후회스러웠어. 아무도 네 슬픔을 달래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래야 할 텐데.
나는 마지막으로 간원했어. 평범한 인간처럼 죽어도 세상에 기억되고 싶다고. 나와 보낸 시간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네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니엔테는 영원을 꿈꾸던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세계와 단절되었기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만, 니엔테는 그 한계를 감히 뛰어넘고자 했다. 마법은 세계를 제멋대로 바꾸는 힘이다. 그런 마법사가 영원불멸히 세계에 존재한다면, 마법사가 아닌 존재의 자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 손에 역사가 바뀌지만 정작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러므로 마법사는 반드시 필멸해야 하며, 불온한 힘인 마법도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마법사들의 모임이 ‘분서관’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사조가 태어났다.
니엔테와 나는 양립할 수 없다. 나를 길들여서 품는 것보다, 새장 역할을 그만두고 일찍 떠나보내는 편이 그에게 좋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나를 길들이려 했고, 업화에 몸을 불태웠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서 벗어나길 갈망했다.
니엔테가 실험을 위해 자기 육체를 불태우고 유령이 된 순간, 나는 그의 몸에서 벗어났다. 니엔테가 저지른 일은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연결매체도 없으면서 영혼을 다른 육체에 전이할 생각을 한다니. 지금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릇은 그릇대로 식고, 육체를 잃은 유령도 언젠가 소멸한다.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하지 못한 미완성 실험이었다. 연구를 계속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대로 폐기될 실험이다. 나는 계속 니엔테의 그릇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카스미 마논도 있었다. 그는 니엔테의 곁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는데, 울음소리에 먹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대로 소리에 섞여 있는 감정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끝없는 원망과 걱정, 배신감, 고통에 젖은 슬픔…. 그 당시 카스미 마논은 아직 약한 마법사였다. 몸에 축적된 마력도 적고, 다룰 수 있는 각인도 많지 않아 보였다. 니엔테가 진행한 실험을 도저히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금방 익숙한 종소리가 들렸다. 카스미 마논은 울음을 그치고 자리를 떴다. 나는 카스미 마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리고 카스미 마논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니엔테의 유령과 빈 그릇을 감싸 안았다. 그다음 품 안에서부터 불꽃을 일으켰다.
불사조는 일종의 거대한 마력 덩어리다. 그래서 불사조를 잘 이용한다면 술자가 소멸했을지라도 그를 통해 부활할 수 있다. 불사조를 매개로 한 부활은 필연적으로 기억 소실이 발생한다. 아무리 좋은 육체를 준비해도 소용없다. 부활 자체가 술자 스스로를 좀먹는 행위기 때문에 부활을 거듭할수록 텅 빈 존재가 된다. 술자가 무엇을 어떻게 잊어버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번 사례에서는 빈 육체와 마모된 영혼이 잘 융합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그렇게 나는 나의 새장이었던 자를 살리고 떠났다. 그것이 다시 눈을 뜬 날은 그 일이 있고 몇 년이 지난 후였다. 대법전의 제1계제 마법사 수준으로 돌아간 영혼은 전생의 삶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생의 이름은 선명히 기억해서, 자신의 마법명을 전생의 이름으로 정했다. 그렇게 새로운 마법사가 탄생했다. 니엔테, 아무것도 아닌 무라카와 치사키. 니엔테의 앞으로 쌓일 백 년의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니엔테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사람이다. 마법사는 전능에 가까운 힘을 지닌 대신 치명적인 위험부담을 갖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죽음을 완전히 피할 순 없으며, 죽으면 그 누구에게도 기억될 수 없다. 마법사가 가진 힘의 무게를 생각하면 마땅한 대가다. 세계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이로울 텐데,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불멸을 원하는 이유를, 다음을 기약하며 삶을 좇는 이유를….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니엔테.”
그러나 니엔테의 마지막이 계속 눈에 아른거렸다. 그는 죽어가며 인간과 가까운 소원을 빌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남아있을 사람을 위해. 미래의 카스미 마논을 마주하고 나니 더 무시할 수 없었다. 기억 속의 카스미 마논은 미래의 카스미 마논보다 더 밝았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했고, 상대에 대한 경계심도 낮았다. 표면적인 분위기에서도 차이가 보일 정도면 속내에는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백 년 단위의 기억을 마주했어도 니엔테를 기억하지 못하는 슬픔을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마법은 사람의 인연을 너무나도 쉽게 빼앗을 수 있다. 마법사가 죽으면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기억을 가져간다. 그와 관련된 기억이 모조리 사라져 그 누구도 남은 자들의 슬픔을 깨닫지 못한다. 남은 자 또한 본인의 상실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서서히 감정을 잊는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마법에 회의감을 갖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그자들의 일부는 분서관에 합류했다. 불사조는 그들의 고통까지 떠안은 존재다.
니엔테는 겁 없이 함부로 불사조를 품더니 제 죽음을 앞당겼다. 그 뒤로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나는 모른다. 그를 동정하거나 이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와 니엔테 사이의 일로 어린아이를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다. 죽은 자를 추모할 수 없는 고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가장 잘 안다. 그 고통은 반드시 카스미 마논을 망가뜨린다. 미래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그를 살렸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미래의 카스미 마논을 위해서라도 그를 살리고 싶다. 이 분노의 화염이 꺼지게 되더라도.
니엔테와 카스미 마논을 생각하는 동안 몸이 꽤 많이 옅어졌다. 창문에 더 이상 내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 시야가 점점 까맣게 물들어 열차 밖의 풍경이 흐려졌다. 나는 곧 내가 있어야 할 시간으로 돌아간다. 나는 기억이 수정되지 않길 바랐다. 미래의 카스미 마논과 나눈 대화는 몰라도, 내가 이 열차에 타서 미래를 봤다는 일이 사라져서는 안 됐다. 이 일이 시간의 오류로 인한 가능성이 되어버린다면, 나는 미래의 카스미 마논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나는 아직 널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실망하게 할 수 없지. 정말 긴 여행이 될 거야.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당초의 목적도 확인할 수 없고, 동행자는 처음부터 잃어버렸고, 가야 할 장소도 잊어버린 지난한 여행.”
“마논, 우린 반드시 미래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그리웠던 순간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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