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봄을
글스터디/5월 주제 : 기적
누구보다 기적에 가까운 모험가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기실 사람이나 신조차 믿지 않았으므로, 그는 사랑을 알되 믿음을 모르는 자였다.
하지만 누가 그것을 탓하겠는가? 그로부터 사람을 앗아간 것은 빛이었으며, 신을 앗아간 것은 어둠이었으니. 세상의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 자신을 앗아갔으므로, 주변의 동료들은 그저 목적지를 모른 채 나아가는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늘 그러하듯이 기적은 소리없이 다가왔다. 그에게 그것은 늘 푸른색이어서, 온통 푸른 별바다가 펼쳐졌을 때에는 과연 멍한 얼굴을 보여준 것이다. 멍하니 서 있을 때는 아니었다. 종말은 시시각각 다가왔으며, 자신에게 절망하고 무너질 시간은 여전히 사치였기 때문에. 그럼에도 아름다운 푸른 알갱이가 꼭 붉은하늘에 번져 올렸던 그의 숨 같아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불타고 있는 아이테리스를 떠올리고 나서야 붙박인듯 멈춰버린 발걸음을 겨우 떼내며 영웅은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지금 이순간, 그들의 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그리 한참을 뛰어가던 모험가를 처음 맞이한 것은 푸른 제복을 입은 두터운 체격의 남성. 먼 곳을 바라보는 눈으로, 붉은 분노를 담고 검을 휘둘렀다. 우습지. 너의 죽음은 너의 선택이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장성에서 스러져 갔는데. 무엇을 위해 죽은 뒤에도 무기를 놓지 못하나. 영웅의 깊게 가라앉은 눈이 무감하게 그가 입은 제복을 스쳐지나간다. 누군가에게는 푸른색이 공포로 다가올 수 있겠지. 무엇이든 경험과 받아들이는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매듭을 지을 때였다. 모험가는 차분히 치유서를 펼쳤다. 자신에게 바수어질 상대가 어쩐지,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하면서.
*
그 본인이 입었던 푸른 제복보다 조금 더 환하고 옅은 빛으로 흩어지는 일베르드를 바라본다. 왜일까. 한참을 버티던 그 의념을 에테르로 돌려보낸 것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잃었던 사람이었다. 부러진 투프시마티의 형상으로 나타난 자신의 동료는 여전히 단호했다. 다른 동료들은 듣지 못한 듯 했으나, 오래도록 에테르의 속삭임 속에 살던 모험가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장성 위에서 자신을 희생한 다정한 이의 목소리였다.
—나참, 너희는 아직도 이런 녀석 하나 넘어가질 못하고. 이러면 도와줄 수 밖에 없잖냐! …이번 한 번만이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그를, 에스티니앙이 단단한 손으로 잡았다.
“어이, 지금은 일단 가자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다면 가야할 것 아니냐.”
…응. 모험가는 메여오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하며 발을 뗐다. 형상은 분명 부러진 지팡이였지만, 하지만…어쩐지 작고 외안경을 쓴 자신의 동료가 뒤에서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갈게, 갈게. 더 앞으로… 너희가 밀어주는 대로, 멈추지 않을게. 어느새 다시 눈가가 붉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앞으로…. 멈추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도 온갖 목소리가 소용돌이 치는 별바다를 건넜다. 자신을 원망하는 목소리도, 응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아씨엔의 숨을 거두는데에 자신의 숨까지 몰아넣은 달의 신부가 호탕하게 웃는 소리를 뒤로 했을 때는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어서, 후두둑 떨어지는 슬픔을 그저 놔두었다. 고통스러워. 삶이 저주스러워. 너희의 목소리를 듣는 건 과연 내게 축복인걸까? 나를 죽이려는 소리들은 오히려 괜찮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악의에 익숙했으니까.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붓는 흐려진 사념보다도, 너의 행운과 행복을 기도하겠노라 속살거리는 응원의 말들이 그의 심장을 얇게 저며내고 있었다.
그렇게 모험가는 저며내진 심장을 손에 쥐고, 붉은 눈물을 흘리며 칼에라도 찔린 듯 몸을 멈춘다.
한창 사념들이 공격을 멈춘 때였다. 저 멀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동료들이 보였다. 아니, 보이는 건가? 모험가의 눈에 비치는 깨진 방패와 검이, 아니, 오르슈팡이, 아니, 푸른 사념이…. 그제야 모험가의 시선을 따라간 새벽은 공중에서 따스한 빛을 뿌리는 방패와 눈이 마주쳤다. 모험가는 혀를 깨물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턱 언저리와 손이 덜덜 떨려왔고, 눈가는 붉게 젖어 흐르는 물이 멈추지 않았으므로.
귀에 부드럽고도 호쾌한 목소리가 다가온다. 늘 들려오던 과거의 목소리 보다 훨씬 선명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아, 오르슈팡. 나를, 너를, 아니, 나를….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눈앞에 보이는 방패는 상관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눈에 보이기 위한 에테르의 흐름일 뿐이었으니까. 진짜는 분명, 지금,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온기. 자신을 태워버릴 듯 다가왔었지만,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었던… 나의 푸른 태양이었다.
네 온기가 그리웠어. 아니, 네가 그리웠어. 온통 네 목소리로 가득찬 세상을 살아내면서도 삶을 저주했던 나날들이었어. 너는 그걸 보고 있었을까?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이 별바다에서, 흩어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 그게 만약 나를 이유로 삼은 거라면, 그렇다면….
다리가 무너진다. 소리가 들렸다. 그가 죽으며 함께 죽었노라 말했던 자신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굳혀놓고 잠가놓았던 마음이 녹아내려 오랜 겨울의 끝을 고하고 있다. 세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봄이라는 것은 따스하고도 잔혹해서, 영영 겨울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단호하게 녹여 흐르게 한다. 오르슈팡. 하지만, 내가 이대로 봄으로 나아가면…
—겨울밤에 홀로 남은 너는 누가 옆에 있어줘?
그에 호응하듯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웅얼대는 에테르의 속삭임이 아니었다. 훨씬 분명하고 단단한 목소리가, 다정한 손끝이 자신을 세워주고 있다. 그것이 너무나도 그리웠던 영웅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다.
영웅을 얼렸던 붉은 겨울은 이제 푸른 봄을 고한다. 등에서부터 온몸을 감싸던 에테르는 어느새 동료들의 손으로 바뀌어 있었다. 실제가 분명한, 커다랗고 작은 수많은 손들이 자신의 등과 어깨, 손을 꼭 잡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온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언제나와 같은 신뢰와 애정이라서, 모험가는 더 이상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가야지, 가야지. 갈게. 너희가 잡아주는대로, 나를 이끌어주는대로…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다. 기실 많은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이들이 있다. 등을 밀어준 이들이 있었다. 이런 자신이 걱정되어 죽은 뒤에도 온전히 흩어지지 못하고 마음을 남겨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험가는 지금 이곳에서 주저앉지 않기를 택했다. 별의 의지가 자신에게 원하는 결말이 있다면, 그렇다면.
보여주자,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자,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자, 우리의 희망을.
지금 자신을 끝으로 인도하는 민필리아가 그 마음에 화답하듯 웃는 것 같았다. 정확하지는 않았다. 더는 죽은 자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인도하기 위하여, 민필리아는 작은 영혼을 이 깊숙한 바다에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숨을 바쳐 지켜냈던 세계가 어떤 푸른 빛으로 채워지는지. 가장 마지막으로 들었던 오르슈팡의 목소리가 여전히 머리속을 맴돌았다.
—이 곳에서 주저앉을 네가 아니라고 믿고 있어. 부디 내게 보여다오. 생명이 고동치는 이 바다에서, 네 삶을 틔워내는 모습을!
설원과도 같은 내 삶에 피어나는 새싹은, 푸른 봄은 언제나 너였다.
그러니 네가 지켜냈던 내 삶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영웅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나를 보여줄게.
눈물을 닦는다. 더 이상은 흐르지 않았다. 동료들이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 적나라 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줄 때였다. 저 멀리 별의 의지가 보인다. 아아, 인간이 삶을 틔워내는 모습을 보기위해 시간에 자신을 가두어버린 신이, 아니,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가야지. 당신에게도, 우리의 삶은 이어져야 한다고 말해주어야지. 신이 알고 사람이 아는 답을, 종말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그의 얼굴에는 죽음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 오로지 결의를 담아, 그는 빛을 삼킨 사람에게 환히 웃어보였다.
베네스, 우리의 여행은 끝나기에는 아까운 것이라고 했었죠. 이제는 알아요. 세계를 사랑하게 되는 감각.
그러니 파란새에게도 보여주러 갈게요. 우리의 푸른 봄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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