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에녹
에녹의 오른쪽 귀 부근의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휑했다. 까마귀가 물어보니 에녹은 퉁명스럽게 그냥 스트레스성 탈모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냥 그러마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 때 까마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햇빛이 “탈모” 부분을 비추자 빛은 피부 부근에서 수많은 파편으로 깨져 산란했다. 까마귀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일순 반짝인 부분에 손을 댔다.
뭐 하는 짓입니까!
에녹이 버럭 화를 내며 까마귀의 손을 쳐냈다. 까마귀는 눈을 둥글게 뜨고 에녹을 보았다. 에녹은 부끄러운 것을 들켰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황급하게 “탈모” 부분을 가렸다.
그거……. 지금 피부가 수정으로 변한거야?
까마귀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에녹은 입을 꾹 다물고 까마귀를 노려보고는 자리를 떴다. 물론 떠나기 전에 까마귀의 귓가에 어디 누구에게 소문을 내놓는다면 영 재미없을 줄 알라는 “재미없는” 협박도 했다. 에녹의 머리가 전부 수정으로 변한 것 같진 않았다.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은 부분만 수정으로 변한게 아니었을까. 오른쪽 관자놀이부터 손바닥 하나 정도……. 까마귀는 에녹의 머리가 모두 수정으로 변한 것을 상상했다. 샤워를 하며 물을 맞은 부분은 수정이 자라고 아닌 부분은 작은 알갱이로 까끌한 머리카락마냥 붙어있겠지. 리프에서 자라는 자수정과는 달리 투명하고 맑을 것이다. 아름답다. 어쩌면 이름 값을 하는 것 일 수도 있고, 어쩌면 콩깍지가 씐 것 일 수도 있다. 까마귀의 생각이 뭐에 뿌리를 두는지는 차치하자. 이쯤에서 까마귀가 “왜 수정이 자란거지?” 라고 물으면 좋겠지만 까마귀의 인생에 찾아온 이 엄청난 아름다움은 미안하게도 “길가에서 술에 취해 기어다니며 왈왈 짖는 소리를 내는 아저씨” 와 층위가 비슷했다. 보통 왈왈 짖는 아저씨를 보면 저 아저씨는 무슨 울화가 있어 술을 마셔 저렇게 된걸까? 라고 묻지 않는다. 씨발……. 하고 못 본 걸 봤다는 듯이 지나갈 뿐이다. 까마귀도 마찬가지였다. 까마귀는 리프에서의 기억을 갖고 있는 수호자였다. 그는 보석들이 일종의 부적으로 쓰이며 몇몇은 과학적으로 일리가 있는 부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테키언들의 수정구. 울드렌 대공은 테키언들의 수정구를 생각하고, 또 에녹의 머리를 생각했다. 에녹의 머리에는 새로운 시야를 제시하는 신비로운 광물이 붙어있다. 까마귀는 그 수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직은 작고 어린 수정 싹들이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것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그래봤댔자 수정이라는 사실만 인지시켜주겠죠.
까마귀가 상상한 에녹의 답변이었다.
제 머리가 장난감입니까? 불쾌하니 가십시오.
까마귀는 이름답게 에녹에게 종종 엉뚱한 장난을 걸었다. 아마 지금 진지하게 수정을 봐도 괜찮겠냐고 물어도 에녹은 장난으로 치부하고 화를 낼 것이다. 그럼 에녹을 불쾌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물론 최선은 수정을 잊고 마치 없었던 것 처럼 행동을 하는 것이다. 까마귀는 그 선택지를 버렸다. 옛 지구에서는 수정구가 귀신을 보게 해준다고 했다. 테키언과는 다른 마녀들이 수정구를 들고 왜곡된 이미지를 통해 예언을 했다. 수정은 에녹의 머리에 붙어있다. 그렇다면 수정이 에녹에게 영향을 줘 에녹의 시야가 달라지게 하지 않았을까. 지금 에녹은 귀신을 보는가? 에녹의 머리통을 구경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질문거리를 싸들고 가서 에녹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단순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면 에녹도 그렇게 불쾌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당신도 과거를 조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까마귀의 시도는 칼같이 거절당했다.
당신은 과거의 자신과 화해를 했다면서 이렇게 어린 질문을 던진단 말입니까?
어쩌면 그건 수정의 의견일 수 있었다. 까마귀는 능글거리는 농담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에녹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는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갔다. 그에겐 목적지가 있었다. 적어도 그건 수정이 정해준 것은 아니다. 선봉대가 정해준 것일지라도……. 그리고 선봉대의 선택지에 반항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그 어떤 강압과 내부적인 폭정이 있었다고 해도……. 일단 수정이 정해준 길은 아니었다. 그렇다. 에녹의 수정은 머리통에 붙어있지 머리 안에 붙어있는 것은 아니다. 시신경과 뇌의 상호작용에 끼어들라야 끼어들 수 없다는 얘기다. 에녹은 수정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까마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물었고, 에녹은 어리석다고 답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다. 에녹의 독설이다. 에녹은 시각신경 청각신경을 활용해 (어쩌면 촉각까지도. 말하진 않았는데, 에녹은 까마귀의 뺨을 쳤다.)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서 처리하고, 그걸 출력기관으로 내뱉었다.
그건 머리가 수정이 아닌 사람들도 하는 거잖아.
까마귀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지고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수정이 달리지 않은 사람들도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럼 에녹의 머리가 수정이 된 것에 어떤 의미가 달려있을 것인가. 에녹의 머리가 수정이 되던, 까마귀의 뇌가 수정이 되던, 옆 집 고양이 팔다리가 수정이 되던, 이건 인지적 측면에서 결국 의미가 없는 일인 것 같다. 까마귀는 자신의 행동이 무례함을 인정했다. 에녹의 수정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도, 에녹의 수정에게서 통찰력을 얻으려고 한 것도, 수정이 자란 에녹에게서 예언을 들으려 한 것도 모두 무례했다. 그러나 까마귀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냥 다음에 만나면 붙임머리나 좀 추천해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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