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자관] 그 모든 것을 끊어내리라

PVNQ님의 자관 과거 스토리는 이거로 마무리하려고요

1. 미친 남자

그리고 사랍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몇 안되는 군중이 수군거렸다. 가엾게도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거야. 사랍은 날카롭게 갈아 푸르게 빛날 지경인 식칼을 들고 디어에게 찾아왔다. 그의 눈은 눈물에 젖어있었지만 총명하고 냉철하게 빛났다. 사랍은 칼을 내밀었다. 찌르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찌르려고 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는 칼을 요리할 때나 써본 사람이었다. 티가 났다. 디어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사랍을 쳐다보았다.

2. 사천 사람

살짝 맵게 해주면 안되나.

새벽제비는 점점 음식 투정이 늘어났다. 흰 죽만 먹어서 질린 탓도 있겠지만, 고통과 외로움이 그를 메마르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디어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몇 번 매콤한 요리를 만든 적이 있었다. 새벽제비의 몸은 그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숙주볶음을 맵게 먹는 사람이 어디있나?

하지만, 흰 죽에 담백한 숙주볶음은 느끼하단 말이네.

새벽제비는 음식투정이 늘어나는 만큼 식탐도 늘어났다. 먹을 수 없는 요리를 자꾸 탐냈다. 저번에는 기름에 푹 절어있는 튀김을 먹겠다고 떼를 썼다. 결말은, 뭐 알다시피. 한번 토하고 끝나면 눈 딱 감고 먹였을지도 모른다.

자네. 후추 좀 넣었다고 사흘동안 배앓이를 하면서 아무것도 못 먹은 것은 기억나지 않나?

새벽제비가 자신의 명치를 짚으며 말했다. 시체인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자라고 있다고. 그게 자신을 죽인다고. 디어는 간단하게 축약했다.

그걸 병이라고 하는걸세.

3. 졸도

병은 도처에 있었다. 세상이 병이 들어서 그런 것이겠지. 사랍은 디어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식칼을 들고 사랍이 말했다.

내 아들 엔리케가 죽었습니다.

몰락자들의 습격 때문이었다. 사랍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디어에게 책임을 물으러 왔다. 그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식칼은, 적어도 사랍을 하찮게 여겨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디어가 말했다.

당신의 아들 일은 유감입니다. 그러나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디어는 이빨을 꽉 깨문 채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높이보다 약간 위였다.

당신의 빈틈을 왜 당신이 채우려고 하는거죠?

사랍이 물었다.

우리에겐 자경단과 교역, 튼튼한 방벽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호의에 언제까지 기댈 수는.......

식칼이 떨어졌다. 사랍의 눈이 희게 굴러가고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디어는 그가 완전히 넘어지기 전에 잡을 수 있었다. 그의 집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두려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사랍의 광증은 무서웠지만, 디어의 힘은 더 무서웠기에, 사람들은 디어가 말하는대로 찬물과 수건을 가져왔다. 사랍은 가늘게 경련하며 눈을 떴다. 눈에 초점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정신은 어느정도 돌아왔다.

사랍, 당신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몸이 괜찮아지면 저의 집무실로 와주십시오.

사랍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집을 묻고, 군중 중 한 사람을 시켜 그를 집으로 보냈다. 사랍은 디어의 집무실로 출근했고, 미친 사람을 귀히 쓴다는 소문이 부락에 쫙 퍼졌다. 디어는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4. 삽관

새벽제비는 가래때문에 입에 얇은 관을 집어넣고 누워있었다. 그의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지 한나절이 되었다. 디어는 죽을 것이라도 품위를 지키며 죽는 것이 어떻겠냐고 새벽제비를 설득했다. 새벽제비는 그래서 의료시스템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모두에게 잘 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 점점 더 잦아지겠죠?

디어가 간호인에게 물었다.

가래를 못 뱉어내는 것이요? 아니면 깨어나지 못 하는 것이요?

둘 다.

간호인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제비는 죽어가고 있었다. 기절한 채로 새벽제비는 무슨 꿈을 꾸는지 궁금했다. 새벽제비는 안에서부터 파헤쳐진 사랍의 무덤을 모두 메꾸고 오열했다. 그가 병을 안고 죽겠다고 디어에게 선언한 날이었다. 그의 아늑한 죽음 속에는 사랍이 없었다. 그건 새벽제비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 속에 자기가 그리워하는 보석들을 집어넣고 매일매일 수건으로 닦았다. 그가 움직일 때 마다 그의 자식들과, 그와 사랑을 나눈 이들, 그가 짝사랑했던 이들, 짝사랑을 주었던 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을 나눈 이가 서로 부딛혀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이옌이....... 그러니까 새벽제비가,

디어는 담담하게 말했다.

죽는 것을 돕겠다 하였지만 사실 알고 있습니다. 난 그를 잃는 것이 싫어요.

간호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간호인의 따듯하고도 형식적인 눈빛에 디어는 왜인지 위로를 받았다.

5. 흰 솜털을 가진 낮은 꽃

꽃다지, 뱀딸기, 꽃무릇, 솜다리, 봄까치꽃, 사랍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집중할 때면 항상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단순했고, 높낮이가 거의 없었으며, 한없이 꽃 이름을 읊을 뿐이었다. 디어는 맞은편에 앉아 그가 해야할 일을 했다. 펜은 허공을 헤메고 있었다. 쉰 개의 꽃 이름이 그 노래 안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꽃다지, 뱀딸기, 꽃무릇, 솜다리, 봄까치꽃, 어느샌가 디어도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자 사랍은 화들짝 놀라 데이터패드를 떨어뜨렸다.

미안하오.

디어가 멋쩍게 사과했다.

아니에요....... 제가, 제가 너무 시끄러웠죠.

그들은 부락의 방벽을 보수하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사랍은 그가 생각한 것 보다 유능했다. 그는 부락의 중심부에 있는 도서관의 책과 음반을 괴짜 부호들에게 팔아넘길 계획을 짰다. 확실히 황금기의 여흥거리는 돈이 되었다. 그 돈으로 부락의 담에 회칠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신은 어떤 꽃이 제일 좋소?

사랍은 부끄러운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솜다리라고 했다. 이 근방에서는 나지 않는 꽃이라, 사랍은 책에서만 솜다리를 봤다. 책에 찍힌 그림과 수록된 삽화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봄까치꽃이 옛날에는 개불알꽃이라고 불렸다는걸 알고 있소?

디어의 고스트, D가 해줬던 말이었다. 그는 농담인줄 알았다. 나중에 책으로 된 사전을 펼쳐보고서야 D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게되었다. 사랍도 그건 몰랐는지 세 번을 다시 물었다.

엔리케에게 말해줬으면 자지러지게 웃었을텐데요.

사랍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가 웃는 모습은 정말 진귀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자신의 아들에 대한 감상에 빠져 무채책의 표정으로 데이터패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짧은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6. 리프의 이방인

선봉대에서는, 새벽제비의 절친한 친구인 디어에게도 그 사실을 통보했다. 새벽제비가 이제 리프, 정확히는 마라 소프 여왕을 대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디어는 조금 불만이었다. 새벽제비는 자신을 도구처럼 여겼다. 항상 자신을 필요로 하고 부르는 곳에 갔다. 그가 편을 갈라 투신했던 때는 친씨엔의 복수를 위해 전쟁군주를 멸하고자 강철군주에게 갔을 때 뿐이었다.

아니, 잘 보게. 내 성씨의 퉁은 나무할때 목에 같다할때 동을 붙여서 쓴거야. 오동나무란 뜻이지.

오동나무인데 왜 같다라는 글자가 들어간단 말인가?

그건 그냥 발음이야, 발음기호같은 거라고 생각하게. 중요한건 이 나무야.

새벽제비는 별로 좋은 선생은 아니었다. 방금은 나무 목은 변이기 때문에 같을 동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디어는 글자를 확대해봤다가 작게했다가 새벽제비의 이름을 이해해보려고 했다. 퉁까지는 이해했지만, 슈에서 디어는 두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은 지친 채 의자에 기대 널브러졌다.

자네는 되살아났을 때 부터 그걸 알았나?

멜이 좀 가르쳐줬지만, 기초적인걸 배우자 뭔가 기억이 난 것 처럼 쉽게 읽혔지.

디어는 몸에 새겨진 기억이라고 이해했다. 새벽제비의 재능이라고 하기엔 질투가 났으니까. 두 사람은 말 없이 연필이나 까닥거렸다. 디어가 갑자기 물었다.

자네, 리프를 위해 일한다고 들었네.

아.

새벽제비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런 거창한건 아니고, 여왕의...... 여왕의 개인적인 고용인일 뿐이네.

계약 조건이 뭐였나?

여왕이 나의 죽음을 지켜봐주겠다 했네.

다소 낭만적이었으나, 디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친구인 나는? 새벽제비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디어가 마주할 확률이 더 컸다. 그리고 새벽제비의 입장에서도 자신을 잘 아는 친구가 임종을 봐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새벽제비는 디어의 표정을 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한쪽 눈이 거의 먼 상태였다.

7. 돌아오지 않는 자

졸도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사랍의 거처를 억지로 옮기게 한 효과였을지도 모른다. 사랍은 집에서 낡은 종이 상자를 들고 왔다. 디어는 상자 구석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혀있는 엔리케란 이름에서, 그 상자는 사랍의 보물임을 알았다.

무엇이 들어있소?

디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 깃털이요.

아비를 닮아 자연에 관심이 많았나보오.

사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엔리케는 그와 핏줄로 이어진 아이는 아니었다. 사랍이 더듬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그 아이는, 그 애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했어요. 기술이 있으면 새를 따라가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이 부락을 떠나고 싶어했소?

예.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새의 이름은 사랍이 몇 개 알려주었다. 그러자 엔리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류사전에 고개를 박았다. 아이는 조류사전에 있는 새들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철새들이 날아가면 하염없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엔리케가 아끼는 깃털은 털발 말똥가리의 깃털이었죠.

사랍이 이 부락에 당도하고 나서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엔리케였다. 엔리케는 깃털을 들고 멍하게 앉아있었다. 사랍이 그 옆에 앉았다. 엔리케는 경계하는 모습으로 사랍을 쳐다보았다. 털발 말똥가리. 사랍이 아는 척을 했다. 그것도 알비노 개체의 깃털이구나. 엔리케는 뭘 해도 안되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이방인 사랍에게 돈을 뜯어내려다 실패하고 아들을 버린 채 도망갔다.

이젠 엔리케가 돌아올 차례인데.

사랍의 눈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디어는 그가 다시 졸도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를 의자에서 내려 바닥에 뉩혔다. 그리고 사랍은 자기가 바닥에 누웠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 애를 너무 엄하게 키웠나봐요, 가출 했다가 돌아오면, 어르고 달래주려고요,

엄하게 키우는 것만은 능사가 아니니까.

디어는 옆에서 맞장구를 쳐줬지만 사랍은 듣지 못했다. 혀를 깨물지 않게 입을 적당히 벌려주었다. 욱, 하고 숨이 막히는 소리가 들리고 사랍은 경련했다.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기절하고 깨어나기까지가 길었다. 사랍은 정신을 잃고 무슨 꿈을 꾸는지 궁금했다.

8. 바위

새벽제비가 명치를 붙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디어가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입에서 피 섞인 위액을 뱉어냈다. 그는 몸부림치며 계속 토했다. 점점 피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디어는 굳세게 친구를 돌봐주려고 하였지만, 피가 역류해 코피처럼 쏟아져나오자 그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새벽제비를 마구 흔들었다.

하이옌, 제발, 병원에 가자. 병원에 가서 증상을 완화라도 시키자,

디어는 마라 소프야 말로 새벽제비의 죽음을 보기 가장 적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랍이 새벽제비에게 자신의 죽음을 떠넘긴 것 처럼.

9. 그 모든 것을 끊지 못하다

자네를 배웅해주겠네.

디어는 친구를 위해 자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안은 새벽제비보다 쪼그라들고 또 쪼그라들어있었다. 새벽제비는 미소지었다.

고맙네.

분명 그의 속을 들여다보았던 것일테다. 디어는 생각했다. 내가 자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말해주게, 왜 나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인가? 새벽제비가 그들의 부락을 방문하고 사랍은 더 이상 기절하지 않았다. 사랍은 새벽제비를 밤마다 찾아갔다. 디어는 당황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 안도했다. 사랍도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사랑하고, 몸을 섞고, 그리고 자기가 가진 슬픔을 꽁꽁 싸메 짊어지고 다음 역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가 자신을 떠나 새벽제비를 따라가겠다하면 그렇게 두겠노라고 다짐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랍이 새벽제비를 방문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의 모습은 엉망이 되었다. 디어는 그게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새벽제비를 따로 불러 개인적인 부탁을 하였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솜다리를 구해주십시오.

새벽제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유를 물었다.

펠윈터 봉우리는 춥다하니...... 솜다리가 날까 싶은 마음에 그렇소.

그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새벽제비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중요한 서류들을 봉해 새벽제비에게 넘겼다. 다음 방문 때, 새벽제비는 솜다리를 꺾어왔다. 생각보다 작은 꽃이었다. 시들시들했지만, 그것까지 전령이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사랍은 솜다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냥을 하는 모래도마뱀이 쉬어가는 가장 좋은 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사랍이 물었다. 디어의 손에 들린 솜다리는 어색하게 허공에 피어있었다.

바로 건조한 바위 위랍니다.

사랍은 그의 고민을 떼다 새벽제비의 침실에 독처럼 풀어놓았다. 새벽제비는 그 독을 마시고 다른 곳에 가서 게워냈다. 사랍은 드물게 생기가 돌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떼다 새벽제비에게 먹였다. 새벽제비는 똑같이 그 독을 다른 곳에 가서 게워냈다. 사랍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디어는 엔리케의 무덤에 서있었다. 이제는 새벽제비의 차례였다. 새벽제비도 그 만의 이방인을 찾은 것이다. 자신의 병을 떼어 여왕에게 진상하면 여왕은 사람을 시켜 다른 곳에 옮길 것이다. 새벽제비는 죽기 전에 쉴 건조한 바위를 찾았다. 디어는 정말 간만에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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