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의 또 다른 이름은 파국
테오는 개똥참외를 석석 깎아 먹더니 화분에 씨앗을 20개 넘게 심었다
디어는 끈적하고 미끌한 액체를 밟고 뒤로 나자빠졌다. 뒷통수를 심하게 찧어 머리가 왕왕 울렸다. 뺨에 액체가 툭,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실금이 간 곳부터 액체가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저게 바닥에 고인 것일 터.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테오!
디어가 소리치며 빠르게 몸을 추슬렀다. 머리가 여전히 울렸지만 그런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다시 한번 더 깔깔거리는 소리가 단지 복도를 울렸다. 메아리치는 것 때문에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겠다.
널 또 놓치긴 싫어! 장난치지 말고!
깔깔……. 디어는 무작정 계단을 뛰어올랐다. 계단에도 끈적 미끌한 액체가 흥건했다. 계단 벽의 노란 칠이 곳곳이 벗겨져 얼룩덜룩하다. 급하게 오르느라 디어의 손톱이 노란 벽을 긁었다. 갸름한 도색 조각이 손톱에 끼었다. 옥상 문은 다행이 열려있었다. 테오는 난간에 걸터앉아 몸을 까닥까닥 흔들고 있었다. 디어의 옷을 입고 있었다. 헐렁했다. 바람이 불면 들큰한 냄새와 함께 테오의 옆구리가 보일듯 옷이 들렸다.
대체 이게 무슨 장난인가.
디어는 화난 목소리로 엄중하게 말했지만, 정작 그의 눈은 아래로 향해있었다. 복도와 층계참에서 계속 들리던 그 웃음소리가 들렸다. 디어는 자신이 밟고 있는 액체 웅덩이를 보았다. 그 곳에는 자신의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다. 웅변을 시작할 때였다. 디어는 시선을 애매하게 처리하고 입을 열었다. 감점 사유였다.
참외는 오이 아닌가. 오이는 풀맛이 나고 비린데, 그걸 굳이 키우겠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그리고 진짜 이유는, 그 화분이 들어오고…….
자신의 부끄러운 점을 꺼내놓는 것 처럼 디어는 머뭇거렸다. 여기서 또 한번 감점이 들어갔다.
그 화분이 들어오고, 꿈자리가 사납네.
아하.
테오가 비아냥거렸다.
왜, 참외에게 내가 잡아먹히기라도 하나봐?
테오는 난간에서 톡 내려왔다. 소매가 주르륵 흘러 그의 손을 덮었다. 테오는 디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디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화분 하나 치우려고 한 것이네. 그게 그렇게 값진 것이었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나.
정확히 무슨 꿈인데?
참외가 나와.
테오는 들을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그 말에 폭소를 터뜨렸다. 사실 잘 기억은 안 난다. 참외가 테오를 잡아먹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잡아먹었다. 친구였나? 그랬다면 우스운 꿈이 되었겠지. 어쩌면…….
내가 가져온 새로운 것들에 다 훼방을 놓잖아, 꼰대 영감탱. 익숙한 방식으로 대화를 해야해? 이렇게?
자기가 내려왔던 난간으로 테오는 훌렁 넘어가버렸다. 아래는 긴긴 낭떠러지였다. 디어가 비명을 지르며 난간을 잡고 몸을 쑥 내밀어 손을 뻗었다.
그렇게, 다시는 두지 않을거야,
아함카라의 목숨은 하나이다.
뭘 그렇게 다신 두지 않아?
테오는 좀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 보는 옷이었다.
오 나의 반항아여.
아함카라는 몸집을 부풀렸다. 풀벌레가 울듯 츳, 츳, 츳, 하는 소리가 났다.
네가 부디 옷을 줄여달라고 소원을 빌었으면 한다.
그걸로 밥이나 되겠어?
테오는 점점 커지는 아함카라의 발톱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연한 사포 위에 손가락을 얹은 느낌이었다. 몸을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아함카라에게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아함카라는 테오의 눈에서 의지를 보았다.
네게서 소원은 받지 않는다.
아함카라가 선수를 쳤다.
아함카라의 호의를 겸허히 받아들여라, 오 나의-
이 사냥을!
테오가 두 다리를 단단히 버텨 몸을 바로 세웠다.
이 사냥을, 이 전쟁을, 학살을, 끝내줘.
디어는 그 순수한 소원이 자신과 테오를 끝낼 것임을 알았다. 디어는 자신의 몸에 돋은 덩쿨을 펼쳤다. 소원은 수락되었다. 테오는 자리에 쓰러졌다. 오, 나의, 사랑하는, 아이여- 디어가 포효했다. 벌린 아가리 속으로 수호자가 던진 전기창이 꽂혀 들어갔다. 피를 토할 틈도 없이 그는 재가 되었다. 재가 속삭였다.
- 나는 불확실함에 몸을 던졌으나 오 나의 듣는이여,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
다행이었다. 디어는 테오가 떨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 그를 붙잡을 수 있었다. 테오는 바둥거렸다. 테오가 맞았다. 디어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죽음이었다. 그는 항상 죽음으로 말하고 죽음으로 들었다.
괴물!
테오가 소리쳤다.
맞아, 난 빛 없는 자의 소원과 소망을 지키겠단 이유로 모든 것을 꼬아듣고 학살했지. 괴물이다. 앞으로도 괴물로 살겠지.
디어는 손에 힘을 줘 테오를 끌어당겼다. 테오는 구조된 것이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디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 디어와, 괴물 디어가 너를 쳐다보았을 때……. 네가 가져온 새로운 것을 쳐다봤을 때,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그 차이에 희망을 걸고자 한다.
유려한 말투였다.
궤변 같지만,
테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 쓴 궤변이네. 참외 한 쪽 먹어봐.
테오가 품에서 전투용 나이프를 꺼내 건물을 슥슥 잘랐다. 하얀 과육에 노란 씨가 점점히 박힌, 오이보단……. 멜론에 가까운 조각이 나왔다. 테오는 손바닥만한 참외 조각을 반으로 갈라 하나는 디어에게 주었다.
그 누구였지, 꼰대네 친구한테 참외에 대해 물어봐. 나보단 잘 알 것 아냐.
만났나?
아니. 걍.
테오는 아작거리며 맛있게 참외를 먹었다. 디어는 참외를 잠시 쳐다보다 끝부분부터 갉듯 먹어보았다. 입 안이 단 맛에 까끌해지기는 해도 아삭하고 달콤한 과일이었다. 달콤한 과일은 항상 물컹거렸는데.
오이랑은 많이 다르군.
디어는 손바닥에 흐른 단물을 핥았다.
저기 봐, 안에 꿀이 가득 차서 밖으로 흘러넘치잖아.
테오가 끈적하고 미끌한 액체 웅덩이를 가리켰다. 디어는 무릎을 꿇고 웅덩이에 손가락을 담궜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달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참외인가?
참외는 속이 비었잖아.
테오가 옥상 문을 열었다.
마치 계단처럼…….
그래서, 너는 그 때 무슨 생각이었나? 날……. 내게서 등을 돌리고.
디어는 감정을 추스리며 말을 이었다.
뛰쳐나간 그 날.
테오는 무성한 참외 이파리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참외 화분은 3개로 늘어있었다. 너무 촘촘히 심어 분갈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칭 권위자라는 사람한테서 이파리 개수에 맞춰 열매를 솎아줘야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놔뒀다.
꼰대, 이거 봐.
조랑조랑 달린 엄지손톱만한 참외는 더 크지 않고 벌써 노랗게 익어버렸다.
너무 귀엽지 않아?
디어는 어처구니가 없어 폭소를 터뜨렸다. 귀엽다, 귀여워.
오늘 따서 먹을까?
이걸?
농담이야.
더 안 크겠지?
테오는 디어의 배를 푹 찔렀다. 디어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그게 문제가 돼?
남은 물을 버리러 테오는 자리를 떴다. 디어는 손가락으로 찔린 곳을 슥슥 문지르다가 뭐, 문제 될 건 없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날 테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감정이었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싶지만……. 어느정도 불확실한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있으니까.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