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 우리 결국

하라다 미노루×이소이 라이

백업 by 結

이소이 미노루는 얕은 눈밭을 밟는다.

곧 연구소에 도착한다. 길을 따라 안으로 갈수록 발자국은 점차 줄어들고, 입구 앞에 서자, 오직 그가 남긴 발길만이 뒤를 따라왔다. 네에. 에테르 계간 기자, 하라다 미노루입니다. 입에 붙은 인사말이 신코보다도 먼저 튀어 나갔다. 명함 대신 외부인 전용 정식 출입증을 내민 지도 꽤 되었는데, 습관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메에게 인사하고, 우츠기 군과 잡담을 마친다. 시간을 충분히 보냈으니 일정이 끝났으리라. 그는 아마 도서실에 있거나……. 그렇지, 안뜰이다.

문을 열자, 수풀 너머로, 꼭 그처럼 파릇한 머리카락이 보인다. 마냥 좋다. 시야에 끄트머리만 담아 놓고도,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며 올라간다. 손을 들어 흔든다. 한 아이를 둔 아버지치고는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서 젊은 티가 난다.

“라이~ 나 왔어!”

마주하는 얼굴이 똑같이 미소로 물든다.

부부는 벤치에 앉는다.

이소이 라이는 앞쪽에 놓인 작은 묘목 하나를 바라본다. 이곳에서 나무를 계속 보고 있었던 듯, 고개가 자연스레 기울었다. 미노루도 따라서 그것을 본다.

“미노루 군, 저거 꼭…… 크리스마스트리를 닮았지.”

“그렇네~ 좀 더 크면 트리로 딱 맞겠는데?”

“나, 이번 성탄절은 밖에서 맞이하고 싶어.”

“나하고?”

“응.” 라이가 미노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우츠기 군이 말한 게 이거였나?”

“응?”

“기껏 허락해 준 외출이니까 사고 치지 말라고 하던데.”

“아하하.”

순수한 즐거움이 담긴 웃음소리. 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아직 주교복을 입고 있다. 보통 옷을 미리 갈아입었을 텐데, 그런 외출에는 정당한 명분도 따라붙기 마련이다. 미노루는, 언짢은 티를 과하게 표출하던 우츠기를 잠시 생각한다. 멋쩍은 웃음이 뒤늦게 샌다.


“이거 봐. 미노루 군이 보고 싶다던 영화.”

“우와, 기억해 주고 있었어? 고맙네~”

포스터 속 주인공은 히어로 수트를 입고 있다. 그 옆에 나란히 붙은, 다른 버전 안에서는 그가 일상을 어떻게 영위하는지, 친구나 가족 앞에서는 어떤 표정으로 서 있는지를 부각해서 보여 준다. 미노루는 그것을 한참 응시한다. 영화도 픽션이다. 사실과 가상을 절묘하게 조합해 만들어 낸 누군가의 세계관. 히어로물. 권선징악이 개중 뚜렷하게 나타나며 모든 것을 유능한 영웅이 해결해 주곤 하는 전개……. 선이 승리하고 악은 징벌되는 세계. 그러니 취향이겠거니 한다.

라이가 손을 잡아 온다.

“으응. 그야 전에 들떠서 말했는걸.”

“하하! 나 그랬었던가.”

둘은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스크린 너머로, 방금 포스터에서 본 영화가 흘러간다. 미노루와 똑 닮은 배우가 주연이다. 그는 세계와 자기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를 멋지게 해결하고서 애인과 정열적인 사랑을 나눈다. 미노루는 입술을 우물거린다. 팝콘을 얼마나 집어 먹었더라. 갈증이 난다. 음료 두 개는 사 올걸 그랬다. 사과 주스를 라이가 이미 마시고 있다. 미노루는 오른손을 팔걸이에 한 번 걸쳤다가, 음료를 잡기 위해 앞으로 뻗는다. 두 사람 손끝이 스친다.

평소에도 손 정도는 가볍게 잡았는데, 스크린 속 연인은 서로 입술을 문대고 있다. 목만 공연히 더 마르게 생겼다.

라이가 상체를 왼편으로 돌렸다.

빈 주스 잔은 미노루가 가지고 나온다.


미처 녹지도 않은 길 위로, 눈이 재차 내리기 시작한다.

찬 기운이 뺨을 스친다. 흐릿해지려고 하던 영화 내용을, 미노루는 떠올린다.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 주인공을. 그 주변 인물을. 끝내 희생된 사람을.

미노루 군.

인파 중 두 사람 외에는 어떤 인자도 부여되지 않은 것처럼…… 모든 대화가, 사방을 에워싼 소음이 귓가를 지나치기만 할 뿐, 의미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경이다.

저기, 미노루 군.

숭고한 희생양 역할조차 맡지 못하고 죽어 나간 엑스트라를 떠올린다.

우리는 우리만으로 오롯이 실존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에서 너는 베아트리체로서 나와 함께해 줄까……. 끔찍한 발상이다.

“무슨 생각 해.” 라이가 손을 잡아 온다.

“아~ 그냥…… 영화 재밌었어? 나만 좋았나 해서.”

“응. 그것도 그렇고, 열중해서 보는 당신 얼굴도.”

“아아니, 너 제대로 안 봤단 뜻이잖아?!”

“당신, 우리 첫 데이트 때처럼 말하네.”

“둘만 밖으로 나온 거 간만이고.”

“레이지도 함께인데?”

라이가 배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6개월. 태아도 안정되어서 간단한 활동은 할 수 있는 시기였던가. 하루키를 가졌을 때도, 많이 돌아다녔더라면 좋았을걸. 바깥세상을 그렇게라도 보여 줬더라면.

그 위로 미노루가 손을 겹친다.

“라이.”

“응.”

그는 잠시간 숨을 내쉬었다. “집, 근처로 알아볼까.”

“내가 레이지 때문에 외출했다고 생각하는구나.”

“조금은~ 그렇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거로 생각해 줄래?”

“배포가 크시네요, 산타님.”

“그래서? 커튼은 무슨 색이 좋아?”

“벌써 인테리어 생각도 해? 음……. 초록색? 그래도 말이야.”

“응?”

“내 삶, 연구소에서 다시 시작했으니까. 거길 떠난다고 가정하니까 낯선 기분이 들어.”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 뒤로 라이는 다른 가게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미노루도 먼저 말을 걸지 않고, 혼잣말을 조금 중얼거리거나 말았다. 이제 아들도 둘이니까, 방은 하나씩 주면 좋겠다. 하나는 내 방, 다른 하나는 라이 방. 부엌도 물론 있어야겠고……. 그런 집을 가까이 구할 수 있으려나? 보자, 모아 둔 돈이……. 몇 달 내로는 잘하면 될지도…….

1990년 12월 25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 말이야. 결국, 뭘 하고 싶었던 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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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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