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8화

그리고 생각보다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리는군요. 장작을 더 넣어두고 가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시도폰의 말에 시종은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일렁거리는 불꽃을 보던 시도폰은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하고 이불 속에 책더미를 넣었다. 머리와 몸통의 굴곡까지 표현이 되도록 섬세하게 모양을 잡은 뒤 캐노피를 치고 침대를 벗어난 시도폰은 잠옷 그대로 창문을 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두코와 프라이에가 벽에 붙어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고 반가운 마음에 시도폰은 손을 흔들었다.

“옷… 입으라고? 아 괜찮아. 괜찮아. 오히려 둔해져서 이게 나아.”

큰소리를 내지 못해서 입만 벙긋거리는 두 사람에게 시도폰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 없이 두코와 프라이에는 천을 펼쳐서 섰고 폰은 그 위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프라이에한테 업혀. 신발도 안 신었네, 이거 참.”

“건물에 정면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일부러 벗고 왔어.”

“너랑 두코랑 혹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거니? 두코는 네가 벽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는 둥 헛소리를 하길래 안 따라오려다가 걱정돼서 따라왔는데.”

“오…. 미안 정확하게 그 생각으로 신발 안 신고 나온 거야.”

“미치겠다. 밑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무 힘들면 그냥 떨어져, 알겠지?”

프라이에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폰은 자기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했고 두코는 폰의 팔을 만져보며 ‘그새 근육이 이렇게 많이 붙었네.’라고 감탄했다. 조용히 하라는 프라이에의 경고에 두코는 한껏 소리를 낮추면서 말을 끊지 않았다.

“갇혀서 뭐했어? 네가 뭘 하는지 전혀 말씀해주시지 않더라고.”

“훈련하고 쉬다가 공부하고 쉬다가 기도했어. 진짜 그것만 시키더라. 가구랑 벽, 천장 전부 하얀 곳에서 종일 혼자서 그러고 있으니까 정신 나갈 것 같았어. 아, 당연히 훈련이랑 공부할 때는 사제님들이 오셨는데 그분들도 사적인 대화는 전혀 안 하셨고.”

“힘들었겠다. 진작에 탈출시켰어야 했나?”

“사실 프라이에는 이 계획 반대했거든. 너라면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거라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면 너한테 안 좋을 거라고. 그래서 이 몸이 설득했지! 폰은 방에 갇힌 건 의외로 잘 견딜지는 몰라도 혼자 있어야 하는 건 못 견딜 거라고.”

“아주 정확해. 그럼 여기서 올라가면 되는 거야?”

“응, 우연히 프라이에 방 바로 위가 카리타스 방이어서 올라가는 동안 들킬 일은 없어. 프라이에가 커튼 쳐놓고 나왔으니까 도중에 방문이 열린다고 해도 문제없다는 말씀.”

그 말에 폰은 1층 창문틀을 밟고 올라섰다. 그 아래엔 폰을 지켜보는 두 쌍의 눈이 있었고 어두운 밤 시간대라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프라이에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혹여 올라가는 동안 들킬까 봐 각자 왼쪽과 오른쪽을 살피고 있기로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폰과 주변을 번갈아 가면서 봐야 했다.

“근데 이거 카리타스한테 우리가 말했던가?”

“네가 말한 줄 알았는데? 난 다른 층이잖아. 너 설마….”

프라이에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두코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코는 등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 깜빡했어.”

난리 난 아래의 두 사람을 두고 폰은 착실하게 돌을 밟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2층이라 굉장히 높은 건 아닌데도 눈보라가 쳐서 그런지 분위기가 살벌했기 때문에 폰의 감각은 매우 예민해져 있었고 근육도 잔뜩 긴장한 채 움직였다.

‘슬슬 춥네. 해볼까?’

아깐 추워도 프라이에의 등에 업혀있었기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걸어 다니는 불덩어리라니, 들키기 딱 좋은 조건이지 않나. 아무튼, 벽에 매달려 있는 폰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래서 지켜보는 둘뿐이었으니 시도폰은 작게나마 신성력을 발현할 수 있었다. 하늘색 불꽃이 옅게 일렁거리며 폰의 전신을 감쌌고 굳어가던 손끝도 다시 말랑하게 돌아왔다.

“저게 시도폰 능력인가 봐. 북부에서 정말 유용하게 쓰이겠는데?”

“제대로 쓰는 거 한번 보고 싶네. 대관식 때나 보겠지만.”

두 사람이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폰은 마침내 2층 창문에 도착했다. 커튼이 쳐져 있어 안에 카리타스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책상 위 촛불이 켜져 있어 커튼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폰이 창문을 두세 번 두드렸지만, 방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이에 당황한 폰은 아예 창문틀에 서서 주먹으로 다시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커튼이 살짝 걷혀 사람 그림자가 비쳤고 이내 폰과 카리타스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 문 좀 열어줘.”

“….”

“어…. 안 들리나? 카리?”

눈을 크게 뜨고 폰을 바라본 채 멈춰있던 카리타스는 제 이름이 불리자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커튼을 걷었다. 카리타스가 책상으로 몸을 기울이자 촛불이 흔들렸고 그 빛에 폰은 카리타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며 카리타스는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너무 작은 소리라 폰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 얼굴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으악!”

덜컹 소리를 내며 창문이 열리고 거기 기대있던 폰이 그대로 방에 떨어졌다. 그걸 바라보던 두코와 프라이에는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서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방으로 떨어진 시도폰은 의외로 아프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아래에서 들리는 신음에 팔로 바닥을 짚어 상체를 일으켰다.

“….”

“이거 실수야. 절대 고의 아니야.”

금방이라도 코가 닿을 것 같은 거리를 두고 폰의 눈앞에 카리타스가 누워있었다. 상기된 얼굴과 동그래진 눈, 살짝 벌어진 입으로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하던 카리타스는 슬슬 일어나려던 폰의 위팔을 살짝 잡았다. 조금씩 몸을 일으키던 폰은 그대로 거기서 굳어버린 채 점점 달아오르는 제 얼굴을 느낄 수 있었는데 카리타스는 놔줄 생각이 없다는 듯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내, 내가 다리를 치웠으니까 무겁거나 하진 않을 텐데 그래도 바닥에 계속 누워있으면 감기 걸려. 일어나자.”

“보고 싶었어.”

솔직하게 튀어나온 말에 폰은 웃으며 ‘나도’라고 답했다. 바닥이라고 침대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숙소 전체를 데우는 도구가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폰은 딱딱한 바닥에 카리타스가 계속 누워있는 게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바닥은 청소해둬서 깨끗해.”

“침대 있는데.”

“각자 침대가 나뉘어있잖아. 싫어.”

답지 않게 단호하게 억지를 부리는 카리타스가 왜 밉지 않은가 생각하던 폰은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들어 올리던 상체를 다시 낮춰서 처음 바닥에 떨어졌을 때의 거리만큼 다가간 폰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는 카리타스 옆으로 몸을 던졌다. 카리타스가 눈을 떴을 때 폰은 그의 옆에서 ‘어때, 이러면 됐지.’라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누워있었다.

“하…. 아니 그래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무슨 일 있었어?”

“없었어. 혼자 공부하고 훈련하고 기도하느라 심심해서 죽을 뻔하긴 했지만.”

“죽을 뻔했다면서 왜 아무 일도 없다고 하는 건데.”

힘 빠진 얼굴로 피식거리던 카리타스는 문득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폰에게 뭐 잘못된 거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아깐 내가 잘못 봤나 했는데, 이것 봐. 요새 잠 잘 못 잤지!”

폰은 화를 내며 카리타스의 얼굴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카리타스는 그것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잡혀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 아래를 만져보는 폰에게 사실 요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잠을 좀 못 잤다고 털어놓았다.

“무슨 일인데?”

“너지 너! 누구겠어?”

“앗!”

이젠 폰이 카리타스에게 볼을 붙잡혔다. 결국, 서로의 얼굴을 붙잡게 된 두 사람은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웃어버린 폰이 먼저 손을 놓아서 풀려났다.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워선 둘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코지가 폰의 편지를 받지 못해서 화난 이야기라든가 스키피가 다쳤다가 금방 나아버린 이야기 같은 것을 들으며, 폰은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나저나 코지한테 편지를 써줘야겠는데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네? 두코가 다시 가야 할 시간이 되면 문을 두드려서 알려주겠다고, 그때 내려오면 된다고 말했거든.”

“그럼 일단 지금 쓰고 있을래? 보내는 건 내가 하면 되니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카리타스가 종이와 펜을 준비해왔고 폰은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싸맸다. 책상에 앉아서 폰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카리타스는 집행자가 된 이야기는 쓰지 말고 다른 이유를 대자고 이야기했다.

“아 맞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지?”

“응.”

검열당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슈바헨의 뜻을 폰에게 이해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카리타스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폰이 다 썼다며 손을 종이에서 떼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곧 두코가 창문 아래에 서 있을 거야. 창문으로 내려갈 텐데 두코랑 프라이에가 잘 받아줄 거니까 걱정하진 마.”

“….”

“그런 표정이면 못 두고 가잖아. 웃어주면 안 돼? 아, 아니 울지마, 미안해.”

카리타스는 폰을 마주 보다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당황해하던 폰이 어찌할 줄 모르다가 카리타스의 얼굴을 제 품에 끌어안고 도닥였다. 자주 신전에 들르겠다고 폰이 변명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폰도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미안해, 이러면 너도 곤란할, 텐데. 큼.”

눈물을 닦던 카리타스는 자신이 폰에게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대로 있기로 했다. 폰은 곧 자신을 떠날 테니까 조금이라도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창문에 작은 조약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이젠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한 폰은 천천히 손을 뗐고, 카리타스는 활짝 열린 창문과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폰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네가 보여준 힘으로 모두를 지켜줘. 거기엔 너도 당연히 포함이야.”

울음을 참느라 눅눅해진 목소리였지만 폰은 기쁘게 끄덕였다.

“열심히 할게. 그리고…, 근거 없는 추측일뿐이지만, 이 힘을 얻게 된 건 네 덕분이라고 생각해. 이유는 비밀! 갈게.”

카리타스가 질문하기도 전에 폰은 목도리를 휘날리며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창문 밖으로 몸을 기울여 아래를 내려다보자, 프라이에의 등에 업히고 있는 폰이 보였다. 옆에서 보조하던 두코가 카리타스를 발견하고 창문을 닫으라는 수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더는 그들을 지켜볼 수 없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는 아까보다 거센 눈바람이 휘몰아쳤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따뜻하게 채워졌던 방은 다시 차가워졌다. 다 쓴 편지를 접던 카리타스는 폰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펜으로 죽죽 긋고 그 옆에 제 이름을 써넣었다. 코지라면 폰의 글씨체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 이렇게 해도 괜찮을 거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카리타스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 편지를 봉투에 넣고 노트 사이에 끼워 책상에 올려두었다. 커튼을 쳐서 풍경을 가리고 혼자 촛불을 끈다. 옛날엔 이게 일상이었는데 어느새 폰과 함께인 생활이 당연해져서 오히려 어색한 행동이 되었다. 침대에 누워도 맞은편에 사람이 없으니 벽을 보고 눕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네 덕분이야.”

폰이 했던 말을 혼자 되뇐다. 그게 자신을 탓하는 말이 아닌 것을 알지만 진실을 알게 되면 폰이 이전과 같은 눈으로 봐줄 리 없었다. 모두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도 거짓말이다. 너만 무사하면 아무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혼자 살아남을 생각 따윈 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방으로 잘 돌아갔을까? 돌아가서도 자기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내 생각은 얼마나 하고 있을지, 혼자인 생활에 너도 어색함을 느끼지는 않는지.

문득, 폰이 전혀 그런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 않냐는 의견이 고개를 들었다. 내 빈자리를 느끼지 못한다면? 힘들다고 말했던 게 공부랑 훈련뿐인 거고 혼자인 건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끊기지 않는 생각에 애꿎은 머리카락만 매만졌다. 그러면 안 되나? 안 될 거 없지. 두코나 프라이에, 코지와 함께 있지 않다고 폰이 우울해하지는 않았다. 나도 그냥 친구 중 하나니까 폰이 그렇게 아쉬워하지 않는다고 한들 이상한 건 없었다. 오히려 계속 그 애 생각만 하는 내가 정상이 아닌 걸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카리타스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동안 폰도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아까 봤던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기에 도저히 눈을 감아도 잘 수가 없었다. 창문을 열었을 때의 반가워하는 표정, 실수로 덮쳐버렸을 때 당황했던 표정과 누워서 이야기할 때의 행복한 표정들이 번갈아 가면서 폰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나타났다.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애써 잠을 청하려고 해도 생각의 끝이 항상 카리타스로 귀결되는 바람에 폰은 촛불을 켰다.

“미치겠네. 책이라도 읽으면 잠이 오려나.”

하지만 방에 있는 책이라곤 성서와 역사서뿐이라 폰은 선뜻 책을 고르지 못했다. 지루한 책일수록 효과가 있겠지만, 지나치게 재미가 없으면 책에 집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고심 끝에 고른 책은 이미 멸망한 고대 왕국이 겪은 전쟁을 설명한 역사서였다. 따뜻하게 데워진 발로 책상까지 걸어간 폰은 결국,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책을 덮었다. 9장으로 구성된 책인데도 책갈피가 끼워진 곳은 2장의 맨 마지막 부분이었다.

“…. 눈은 그쳤네.”

새벽 기도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작게나마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지저귀고 눈을 쓸던 사제들은 종소리를 듣고 건물로 돌아왔다. 지쳐서 잘 수 있겠다고 생각한 폰이 침대에 눕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시네요! 이제 적응이 되셨나 봐요.”

명랑하게 인사하는 시종에게 차마 밤을 새웠다고 말할 순 없었다. 폰은 간신히 웃어 보이며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새벽 기도를 올렸다. 물론 그 방에 있는 사람은 폰과 고위 사제 하나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기사단 본관 옆의 교회에 있었다. 숙소는 본관과 가까이 있지만, 교회는 멀었기에 폰은 창문으로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카리타스와 친구들을 볼 수 없었다.

-

“이제 여기도 곧 끝이구나.”

“그렇지, 날도 따뜻해졌네.”

햇살을 받은 두코가 나른하게 늘어진 채 말했고 프라이에도 의자에 편하게 누워 답했다. 그사이에 앉은 스키피는 카리타스가 어디에 있느냐 물었고 그에 대한 답은 등 뒤에서 들렸다.

“다녀왔다.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졌어.”

오드샤는 지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카리타스에게 넘겼다. 오드샤의 옆에서 비슷한 표정으로 아무 말 않고 있던 카리타스는 그것을 받아서 제 것에 겹쳤다. 조용히 대기하던 시종에게 서류 뭉치를 건넨 카리타스가 한숨을 쉬며 스키피 옆에 털썩 앉았고, 오드샤는 두코 옆으로 향했다. 두코는 제 옆에 앉은 오드샤에게 차를 따라주며 회의는 어땠냐고 물었다.

“회의 내용은 기밀이라 말할 수 없어. 방금 시종한테 자료 넘긴 것도 봤잖아.”

“에이 그래도 대강 결과만 말해줄 수 없나? 그 편지 받고 나서 마을로 조사하러 간 것도 우리잖아. 그 마을 고리대금업자가 원한을 많이 샀다는 건 조사하러 간 애들은 다 안다고.”

“적당히 타협 봤어. 난 솔직히 금융 거래 쪽에 왜 기사단이 개입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 모르긴 해도 기사들보단 회계를 배운 학생들 쪽이 더 도움이 되는 것 같긴 했어.”

두코가 입을 삐쭉 내밀자 마지못해 카리타스가 적당히 대답했다. 오드샤는 어깨를 으쓱이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시종이 자리를 물리는 것을 확인하고 오드샤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고리대금업이 불법이긴 하지만, 그자는 멸망한 나라 출신이라 가진 게 돈과 자식 하나뿐이어서 영주가 눈감아 주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걸 이용해서 자기 배를 지나치게 불리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으니 문제가 된 거구나. 아까 잠깐 고해성사실로 그 사람이 들어가는 걸 봤는데 회개했을까?”

프라이에의 질문에 카리타스는 턱을 괴며 시선을 피했다.

“돈맛을 본 인간이 쉽게 마음을 바꿀 것 같지는 않아. 진심으로 바뀌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말한 거나 제대로 지켰으면 좋겠네.”

“…동감이다.”

오드샤의 말에 두코는 ‘이열, 좀 변했네?’라고 말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고 스키피와 프라이에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오드샤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럽게 바라보지 마. 내가 너희를 만나기 전까진 다소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또 자각하고 싶진 않아.”

“그렇구나~.”

여전히 놀리는 어투였지만 두코의 얼굴은 함박웃음으로 가득했다.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늘어져 이야기하던 아이들은 북부를 떠날 준비를 하러 숙소로 향했고 각자의 방에서 짐을 정리했다. 카리타스는 이미 짐의 반이 사라진 방을 둘러보다 천천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책을 먼저 가방에 쌓고 그 위에 차곡차곡 가벼운 공책과 소품, 옷가지를 쌓아 올렸다.

오랜만에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바람을 쐬었다. 카리타스는 먼지떨이로 폰의 자리를 가볍게 털고 책상 서랍에 남은 게 없는지 살펴보았다. 뭐라도 있을까 싶어서 구석구석 들여다봤지만, 서랍 속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내일 아침에 입을 옷만 꺼내두고 나머지 짐을 전부 가방에 정리한 채 카리타스는 문을 닫고 본관으로 향했다. 헤일로가 북부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니 환송식을 준비했다며 수행단을 불렀기 때문이다.

“왔구나. 근데 시도폰은 여전히 준비가 안 됐나 봐.”

스키피가 문을 열고 들어온 카리타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 카리타스는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식사를 마쳤고 숙소에 혼자 돌아와서는 커튼을 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수면 부족으로 비틀거리며 마차에 올라탄 카리타스는 두코의 옆에 쓰러지듯 앉았다.

“상태가 안 좋으시니 안전상의 이유로 잠시 마차에 타고 계셔야겠습니다. 잘 부탁한다.”

“넵!”

베론의 부탁에 두코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답했다. 마차에 탈 생각을 하니 벌써 속이 좋지 않다고 투덜거리던 프라이에는 자리를 잡자마자 눈을 감아버렸고, 스키피는 프라이에가 기록한 북부의 일상을, 물론 허락 맡고,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인원수 점검, 물자 점검 전부 완료했습니다.”

기사의 상황보고를 들은 베론과 헤일로, 슈바헨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겠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여정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베론은 수행단 쪽으로 말을 몰았다. 수행단이 기사들과 함께 베론 뒤를 따르는 것을 보던 슈바헨과 헤일로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은 카리타스가 곯아떨어진 직후였다. 힘차게 눈을 박차고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점점 그들에게 가까워졌고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본 헤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도폰이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신성력을 온몸에 두르고 달려오고 있었다. 헤일로의 반응에 놀란 슈바헨이 급하게 돌아보다가 목이 삐끗했고 맨발로 열심히 달리던 폰은 정문을 나서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얘들아!!! 조심히 가!”

그 목소리에 두코는 제 옆에서 반쯤 눈을 뜬 카리타스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을 차린 카리타스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폰을 발견했고 마차 끝에서 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데리러 오겠다든가, 돌아오겠다든가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폰이 전혀 보이지 않고 기사단 건물만 흐릿하게 보일 때쯤 카리타스는 흔들던 손을 떨구고 자리로 돌아왔다. 두코가 걱정하며 카리타스의 얼굴을 살폈지만 의외로 눈물 자국 하나 남지 않았고 카리타스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았다.

이별은 슬픈 일이지만 눈물이 폰에게 전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끝까지 괜찮은 척, 태연하게 인사하는 게 혼자 남은 폰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었다. 마차는 워프를 통과해서 거주관과 학교, 신전에 도착했다. 맨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린 카리타스는 자신을 맞아준 교황이 더는 두렵지 않았다. 폰을 지키려면 그를 이겨야 하니까.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GL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