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7화

“베론 님, 그래서 시도폰이 어떻게 지내는지 정말 말씀 안 해주시는 건가요?”

“그래. 기밀이다.”

두코의 삐쭉삐쭉 날 선 태도에도 베론은 눈썹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실망한 두코는 제 등 뒤에서 나타난 카리타스에게 혹시 아는 게 있느냐 물었지만, 카리타스도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시도폰이 집행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당일부터, 아이들은 시도폰의 머리털 한 올도 볼 수 없었다. 헤일로가 직접 나서서 설명하기로는, 시도폰이 집행자로서 거쳐야 할 관문이 많고, 정결한 상태로 대관식에 참석해야 하므로 격리는 필수적이라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드물었고, 오히려 시도폰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폰이 생활하고 있는 별관만을 흘끔거릴 뿐이었다.

“명령까지 해봤는데 말씀을 안 하시더라고. 나보다 높은 분이 막았다는 거지.”

“근데 뭐, 근황을 우리가 안다고 해서 그렇게 문제가 될 건 아니지 않아? 왜 그렇게 폰을 숨기려고 하시는 거람.”

“숨기려고 하는 거라기보다는….”

말을 흐린 카리타스는 베론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곤 두코의 소매를 잡고 그에게서 멀어져서, 말소리는 도저히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걸어간 뒤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폰과 우리를 멀어지게 하려는 생각인 거 같아. 정확하겐 나인 것 같지만.”

“어떻게 너만 떼어 놓으려고 한다고 확신한 거야? 우리 전부일 수도 있잖아.”

“북부 기사단과 남부 교회는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잖아, 그렇다고 기사단이 왕당파인 건 아니지만. 내가 남부 출신인 데다 폰과 친하니까 내가 폰을 꼬드겨서 남부 쪽으로 데려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슈바헨 님이 오토 님의 형님 되신다고 하셨지. 너에 대해서 뭔가 들었을지도 모르겠네.”

지난날 시도폰이 감금되어있던 건 때문에 오토를 간접적으로 고발했던 게 생각난 카리타스는 손에 흐르는 땀을 애써 무시했다.

“사실 나만 떼어 놓으려고 한다는 건 비약일지도 몰라. 학교 출신 사제들도 있으니까. 그들을 경계한 걸 수도 있지.”

“아냐 그건 아닐 것 같아. 그 녀석들은 너무 확실하게 왕당파니까 교황 성하와 가깝지도 않고 폰과 엮일 일 자체가 없어. 아무리 여기서 친해졌다고 한들 사회에서 만나면 친한 척도 할 수 없을 거 아냐. 하지만 넌 다르지.”

“….”

애써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것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카리타스는 이따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만 나는 별관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사람 비명은 들리지 않는 걸 보니 폰이 인형을 부수는 훈련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폰이 살아있다는 것밖에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날 저녁, 카리타스는 방문에 걸려있는 네모난 통 속에서 편지를 발견했다. 봉투 끝에 적힌 발신인은 당연히 코지였다. 시도폰이 겪은 일을 편지에 써서 보냈는데 드디어 답장이 온 것이다.

책상에 앉아 조심스레 칼로 편지 봉투를 뜯은 카리타스는 한 장뿐인 편지지를 보곤 내용을 읽기도 전에 지끈거려오는 이마를 짚었다. 얼마 전 카리타스가 보낸 편지는 두 장, 첫 장에선 시도폰이 집행자가 된 것을 알리고 교회의 반응을 물어보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엔 단순히 북부 생활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물론 거기엔 시도폰에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서술했다. 그리고 그 둘 중 첫 번째에만 ‘두 편지에 대한 답장은 각각 따로 작성해줘.’라고 써두었는데, 지금 카리타스의 손엔 단 한 장의 편지지만 들려있었다.

‘검열됐구나. 다 읽어봤다는 거겠지. 슈바헨 사제님, 그렇게 안 보였는데 철저하시네.’

이마에서 손을 내린 카리타스는 천천히 편지지를 열어보았다. 폰이 그렇게 수행을 떠나고 나서 심심해하는 코지를, 얀과 센이 어떻게 잘 놀아주고 있다는 내용이 처음부터 나왔는데 코지는 성가시다는 듯 써놓았지만 싫지는 않은지 자주 놀았던 것 같다. 멧돼지 고기 수프는 나름 괜찮았다고 써서 보냈더니 ‘그거 솔직히 궁금하긴 한데 먹어보고 싶진 않아. 그래도 맛있었으면 됐지.’라는 답이 돌아왔고, 폰이 여기서 오드샤라는 귀족과 싸웠다가 화해했다고 썼더니 ‘성격 좀 죽이라니까 말 더럽게 안 듣네. 그렇지만 이건 정당방위로 인정해줘야 할 듯? 오드샤랑 화해했다지만 솔직히 개운하진 않네. 그런 애들은 일주일만 농사짓게 해도 못 하겠다고 뛰쳐나갈 게 분명해.’라는 답이 거친 필체로 돌아왔다.

그렇게 끝까지 편지를 읽으며 웃음을 흘리던 카리타스는 추신에서 입꼬리를 굳혔다.

[그나저나 너는 이렇게 길게 편지를 써서 줬는데 폰은 어디서 뭘 하길래 편지도 없어? 글씨 연습도 어떻게든 잘 시켜서 보냈는데! 네가 다 알려줬으니 괜찮을 거라며 안 쓴 건가, 진짜 그런 거면 좀 서운하다고 전해줘.]

폰도 편지 쓰고 싶었을 텐데. 아마 수행단 아이들과 친해진 이야기부터 신전에서 사람들을 구해내고 기절한 이야기까지 신나게 써 내려 갔을 거다. 철자가 틀린 것 같다거나 문장이 어색한 게 있는 것 같으면 나에게 보여주고 수정하든, 적당히 알아서 읽겠거니 하고 넘어가든 폰이 원하는 대로 편지를 썼을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선명했다. 하지만 코지의 답장으로 보니 폰이 따로 편지를 보내진 못한 것 같고, 설령 썼다고 하더라도 내 첫 번째 편지처럼 검열당해서 어딘가에 숨겨졌거나 폐기되었을 것이다. 남부의 여름이었다면 풀벌레 소리라도 났을 텐데 북부의 겨울은 아침에도, 밤에도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을 주기적으로 알려주는 종이 울리는 게 아니었다면 저녁과 밤을, 밤과 새벽을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 밤을 알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편지는 그대로 접어서 옷 주머니에 넣고 방문을 열었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곳은 슈바헨의 방 앞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잰걸음으로 왔는데도 숨이 차지 않았지만 한번 숨을 고르고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나직한 슈바헨의 목소리는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름을 밝히고 긴히 말씀드릴 게 있다고 하니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내 눈앞에서 문 걸쇠가 잘그락 소리를 내며 팽팽하게 당겨졌기에 발을 멈췄다. 좁은 틈으로 슈바헨은 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시도폰이 집행자가 되었다고 알렸을 때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환희와 경배로 가득했던 눈동자는 경계의 빛을 띠었고 촛불을 등져서 만들어진 역광에 슈바헨은 인간보다는 성자들의 석고상과 비슷해 보였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집행자님의 근황은 기밀이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아뇨 저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긴장하긴 했지만, 손이 떨릴 정도는 아니었다. 슈바헨의 위압감은 교황과 비교하면 괜찮은 수준이었으니까. 주머니에서 천천히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의 고개는 까딱거리기만 할 뿐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그 편지는 남부에서 받은 답장이지 않습니까?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이지요. 아, 혹시 잘못 왔다거나.”

“편지는 제게 온 게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낸 편지 중 하나는 유실된 것 같아서요. 다시 쓰고 싶은데 혹시 가능한지 여쭤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아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지금 다시 보내려고 하셔도 도착하는 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다음번 정기연락 때 넣어주시면 발송해드리도록 하죠. 이제 용건이 끝났으면 돌아가 주십시오. 시간이 늦었습니다.”

“지난번처럼 렌테 사제님께 드리면 될까요?”

“예. 매번 렌테 사제님이 수고해주시지요.”

“최종적인 검수는 주교님께서 하시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편지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신가요. 열심히 썼는데 사라져서 속상해서 자꾸 여쭤보게 되네요.”

“저도 짐작이 가는 곳이 없군요. 제게 왔을 때는 이미 한 장뿐이었을 수도 있지요.”

말을 끝맺은 슈바헨은 곧바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렌테의 탓으로 돌릴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이렇게 제 입으로 증거를 뱉어주니 다행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편지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주교님, 저는 편지를 몇 장 썼는지 말씀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유실된 편지는 한 장이지만 남부에 도착한 편지가 한 장일지 두 장일지는…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요.”

“지금 제가 편지 봉투를 열어봤다고 의심하는 겁니까? 그 과정에서 편지를 잃어버린 것도 저라고 이미 확신하신 듯하군요.”

평정심을 잃기 시작한 슈바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교황이었다면 되려 당당하게 나에게 왜 그런 내용을 함부로 유출하려고 했느냐고 말했을 것이다. 권위와 권력을 신의 뜻으로 포장해서 휘둘렀을 텐데, 이자는 다행히도 물렀다.

“예, 저는 이미 주교님께서 제 편지를 읽어보시고 첫 장은 불태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이로 된 증거를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 거리는 아닌 것 같군요. 들어오시지요.”

“거절하겠습니다. 시간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이야기 도중 쫓겨날 것 같아서 불안하네요. 시도폰이 집행자가 되었다는 것을 숨기려는 이유가 뭔지만 말씀해주시면 편지를 검열한 건은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카리타스는 말처럼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슈바헨을 바라보기만 했다.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던 슈바헨은 그런 사실을 숨기려 한 게 아니고 아직 집행자로서 자격을 갖추는 중이라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변명했다. 그의 눈은 절대로 검열이라는 단어를 뱉지 않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리타스는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져버렸다.

“끝까지 진실을 말씀하실 생각은 없어 보이시군요. 그럼 마음대로 생각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린 카리타스가 그대로 나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문이 소리 내며 닫혔다. 슈바헨이 편지를 검열했고 폰이 집행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게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확증은 얻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결국, 폰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날 수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나는 내가 두 장의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

슈바헨의 검열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그런데 만약에 그가 검열 사실을 입증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떨떠름 해할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숨겨야 할 필요가 있는 사실이라고 모두가 생각해버리면 진실은 대관식이 될 때까지 감춰지겠지. 게다가 슈바헨은 앞으로 더 당당하게 그런 짓을 해나갈 것이다. 핑계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지금은 검열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린 것만으로 만족하고 더 나아가면 안 된다.

‘또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네.’

거주관의 규칙 일로 교황과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내가 하려던 것들은, 내 노력은 폰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번 일도 그렇게 되려나? 나는 또 괜한 짓을 했을 수도 있다. 아, 이 일로 슈바헨이 폰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얼핏 본 슈바헨의 모습에 겁이 나서 긴장을 하긴 했지만, 그는 시도폰에겐 다정할 것이다. 시도폰은 집행자가 되었으니까.

정신없이 걷다 보니 내 방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깜한 방이 표정 없이 나를 반겼다. 적막한 방에서 불을 켜고 문을 닫았지만 바뀐 것은 단지 그뿐이었고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없었다. 빈 침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이부자리와 텅 비어버린 책상은 여전히 주인을 기다렸다. 할 수 있는 것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가까웠던 사람의 귀환을 바라고만 있는 모습이 나와 닮아 보였다.

시도폰도 나도 힘을 얻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랬듯, 나의 의지와 헌신이 쓸모를 잃는 일 앞에서 몇 번이나 그것을 견뎌야 할까. 애초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건드리지도 않았을 텐데. 분명 처음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일이었다. 내가 무언가 해서 폰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그런 다짐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는데. 행동하기 시작하면 일이 어그러졌다. 필사적으로 누군가가 내 일을 방해하는 기분, 쥐고 있던 체스 말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그 무력감이 너무 끔찍했다.

이 시간대엔 항상 폰과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매일 함께 보내면서 뭐 그리 이야기할 거리가 많았는지, 자기 전까지 대화가 멈추지 않았던 게 좋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쪽이 잠들면 다른 쪽이 조용히 일어나서 책상 위의 촛불을 끄는 게 습관이었고 다음날엔 기상 종소리에 나란히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창문에 쳐둔 커튼을 걷는 건 항상 시도폰이었다. 아침에 해가 뜨는 걸 보는 게 좋다며 반쯤 감긴 눈으로도 어떻게든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일어났냐고 물었을 땐 아니라고 대답했고, 항상 늦게 일어나서 코지가 깨워줬다며 부끄러워했다.

“어떻게 습관을 바꾼 거야?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여기선 해가 뜨면 나무들 사이로 빛이 들어오잖아, 그거 되게 멋지더라고.”

다소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렇게 말을 끝맺고는 폰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려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이라 부푼 머리카락 사이로 조금 달아오른 귀가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짧은 추억을 회상하다가 잠들었다. 다음날에도 커튼은 걷히지 않았다.


“저기, 카리타스 말인데 원래 저렇게 눈 밑 그늘이 진했던가?”

조심스럽게 두코가 프라이에에게 속삭였고 훈련이 끝나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던 프라이에는 고개를 저었다. 스키피와의 대련을 마친 카리타스는 지친 얼굴로 검을 정리하고 힘없는 걸음걸이로 본관을 나섰다. 베론은 카리타스를 흘끔 쳐다보았지만 뭔가 따로 조치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폰이랑 어떻게 만나게 해줄 방법 없으려나…. 두코 잠시만 떨어져 봐, 덥다.”

손을 휘젓는 프라이에에게서 떨어진 두코는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박박 닦았다. 어느새 옆에 서 있던 오드샤는 두코에게서 수건을 받아들고 제 수건과 함께 빨래통에 던져넣고 돌아왔다. 두코 옆에 털썩 주저앉은 오드샤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두 사람은 거주관으로 보낸 편지에 답장이 왔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 다 고개를 끄덕이자 오드샤는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도폰이 집행자가 된 사실도 적었나?”

두코는 고개를 끄덕였고 프라이에는 고개를 저었다. 프라이에는 두코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오드샤는 자신도 적었다고 말했다. 두코는 태연하게 있다가 오드샤의 말을 듣고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프라이에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프라이에였다.

“하지만 슈바헨 주교님이 함구하라고 하셨잖아.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지만.”

“이유를 말하지 않았으니 일부러 적어본 거야. 그런데 답장을 받아보니 그 내용에 대한 답은 전혀 없더군, 분명 평민이 집행자가 되었으니 그 애를 이쪽으로 끌어들여 보라거나, 그 사실 자체를 의심하는 답장이 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나도 그랬어. 중간에서 누가 편지를 검사한 것 같아.”

“너희 정말…. 오드샤야 그렇다 쳐도 두코 넌 뭘 믿고 그런 걸 쓴 거야?”

“미안 그래도 궁금했단 말이야. 쓰면 어떻게 될지. 근데, 오드샤랑 내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검사를 한다고 해도 편지는 갔다는 소리 아냐? 어떻게 답장에 폰과 관련된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있는 거지?”

“그렇군, 그 부분만 잉크로 가린다고 해도 티는 났을 텐데.”

두코와 오드샤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동안 프라이에는 스키피를 데려와 앉혔다. 심각한 두 사람에 스키피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꼬맹이한테 말하기엔 무거운 주제라는 이유로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고작해야 세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무슨 소리람.”

“그러게나 말이야.”

“혹시 카리타스 때문인 거야? 쟤가 저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건 처음이라 당황스럽긴 하던데.”

“아, 아니 그것도 문제긴 한데 쟤네가 고민하는 건 다른 일이야. 카리가 혹시 무슨 이야기 안 하든?”

스키피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마디도 안 해. 아까 나갈 때 표정 그대로 칼을 휘두르는데 말을 걸 엄두가 안 나더라고.”

“그런 표정이면 나라도 말 못 걸어. 이해해.”

“편지를 처음부터 재구성했다는 말인가? 아예 그 내용이 없었던 것처럼.”

“…, 읍!”

두코는 자신의 말에 대답하려던 오드샤의 입을 급하게 막았다. 그러곤 스키피에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비밀이니 먼저 가보라며 손짓했다. 어이없어하던 스키피는 프라이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프라이에도 안 듣는 게 좋다며 시선을 피했다. 결국, 스키피가 나가서 문을 닫는 것까지 바라본 두코는, 제 품 속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오드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큰 소리로 대답하려고 했지, 조용히 말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면 이거 풀어줄게.”

오드샤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입을 막은 손을 툭툭 쳤다. 그제야 두코는 오드샤를 풀어주었고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뒤로 물러섰다. 처음 태어난 사람처럼 오드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고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문대어 닦았다.

“대필이야. 우리 글씨체를 흉내 내서 쓴 거지. 그렇게 하면 우리가 폰에 관해 쓴 부분을 쏙 빼버리고도 제대로 된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까.”

“렌테 사제님이 대필하셨을까?”

두코의 질문에 오드샤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우리가 편지를 제출한 건 렌테 사제님이 맞지만, 그 편지가 어디까지 올라갔을지는 모르지.”

그 말을 하고 프라이에는 두코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짓이라니까. 너 찍혔으면 어떡해.”

“이미 들켰는데 이렇게 나만 쥐잡듯이 잡는다고 뭐가 해결되냐? 아, 아파.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안 했으면 편지가 검열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을 거 아냐.”

끝까지 당당한 두코의 태도에, 프라이에는 알아서 하라며 짐을 챙기고 본관을 빠르게 가로질러 나가버렸다. 오드샤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두코에게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프라이에, 신중한 건 장점이 맞지만, 매사 조심스러워해서 가끔은 이렇게 세게 나가줘야 해. 안 그러면 지금 상태에서 나아갈 수가 없잖아. 나 걱정해서 그러는 건 아는데 그래도 이건 해야 하는 거였어.”

“뭐 나중에 알아서 화해해, 그나저나 우리가 쓴 편지 원본은 남아있을까?”

“그럴 것 같진 않아. 북부가 더운 것도 아닌데, 그런 건 진작에 땔감으로 다 쓰이고도 남았을걸. 굳이 그걸 남겨둘 이유는 없지 않으려나.”

“이단 재판 때 근거로 쓸 수도 있지 않아?”

“너 귀족이면서 오늘따라 그런 말 많이 한다. 그렇게 가정하니까 오히려 불태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네.”

“근데 불태워버렸으면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없어지는 꼴이니, 렌테 사제님을 신문하면 뭐라도 나오려나. 어떻게 안 돼?”

오드샤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코의 표정을 살폈다. 심각한 표정의 두코는 그를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평소완 다르게 진지한 말투로 대답하며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너 옛날에 나 본 적 있지? 그러니까…. 미안한데 의절한 지 몇 년이나 돼서 그쪽은 나 쳐다도 안 볼걸.”

“아쉽게 됐네. 네 생일 파티에 참석했었어. 무슨 놈의 저택이 중부 한가운데에 있어, 남부에서 마차 타고 갔는데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왕권에 위협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하시더라고. 아, 이거 가지고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데 그만 끝내도 되나?”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검을 어깨에 툭툭 두드리는 두코의 모습은 다소 오만해 보였지만 오드샤는 전혀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뭐 더 할 말도 없어.”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싱겁게 끝났고 두코는 프라이에를 찾아 기사단 건물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물어보는 사람마다 프라이에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답하는 바람에 두코는 건물을 세 바퀴 돌아서야 프라이에를 찾아낼 수 있었다.

“미안! 사과하러 왔어.”

“정말로 미안한 거 맞아?”

“당연하지, 안 미안했으면 내가 찾아왔겠어? 다음부턴 그런 무모한 짓, 안 한다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똑같은 건 안 할게.”

“너나 시도폰이나 이상한 데서 천진난만하다니까. 둘 다 안전불감증이야. 뭐 하기 전에 한 번만 물어봐라. 제발.”

프라이에의 한숨과도 같은 말에 두코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프라이에의 표정이 풀린 것을 보자마자 그의 옆에 앉아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프라이에는 목소리를 낮추라며 책 표지를 보여주었고 거기엔 <성물의 역사>라고 적혀있었다.

“갑자기 웬 성물?”

“시도폰이 어떤 무기를 쓰게 될지 궁금해져서. 왜 역대 집행자들의 무기는 현재까지 성물로 취급되고 있잖아. 책 도입부에 무기의 형태에 그분들의 생각이 반영된다고 적혀있었던 게 관심이 가서 읽고 있었어.”

금세 신나서 작은 목소리로 떠드는 프라이에의 설명을 들으며 두코는 ‘어떻게 하면 몰래 카리타스와 시도폰을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편 그 시각 폰은 굳게 닫혀있는 문을 바라보다 옆의 경비병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열어주세요.”

“불가능합니다. 돌아 가주십시오.”

이런 대화만 며칠째 하고 있으니 폰은 ‘돌아가? 돌아가시겠다’라는 이상한 농담이나 생각하며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훈련, 공부, 기도가 반복되는 생활은 이전과 같았지만, 훨씬 강도가 셌고 그런 와중에도 혼자서 이걸 다 하고 있으려니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훈련은 헤일로와 베론이 번갈아 가면서 담당하는데 그들도 폰에게 외부 상황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아서 폰은 바깥 상황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바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아니, 그건, 당연한, 거죠!”

검을 맞대는 동안 나눈 대화라곤 이런 것들이었고 힘이 달리는 시도폰은 간신히 검을 들고 맞서는 데 급급했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헤일로와 베론은 짠 것처럼 ‘수고하셨습니다. 쉬십시오.’라는 말만 남기고 나가버렸고 또 혼자가 된 시도폰은 씻고 나서 공부 시간이 되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아무리 천진한 성격이래도 사람이 혼자 격리돼서 며칠 동안 새하얀 방에만 있으면 정신이 위태롭기 마련이었다.

“애들 보고 싶다….”

특히 보고 싶은 사람을 생각하며 폰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종이 어느새 옆에 서서는 공부 시간이라 알리며 책을 내밀었다. 두꺼운 신학서를 보며 시종에게 보이지 않게 눈썹을 찡그린 시도폰은 그것을 받아 책상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는 시종이 나가고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고 시도폰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 중간 부분을 펼쳤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걸 여기다가 넣어둔 거람.”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쪽지를 발견한 시도폰은 바로 그것을 읽어보려다가 소매에 넣어버렸고 잘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나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인자한 얼굴의 사제에게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폰의 신경은 온통 소매에 쏠려 결국 수업엔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시간까지 끝나 온전히 혼자 있게 된 폰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소매에서 쪽지를 꺼냈다. ‘눈 오는 날에 창문 열고 나오면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두코가.’ 단 한 줄짜리의 문장에 가슴이 따끈해진 폰은 쪽지를 벽난로에 넣어 불태웠다. 가지고 있고 싶었지만 발견되면 위험한 건 두코였으니까.

‘빨리 눈 왔으면 좋겠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GL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