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6화

“그렇게 기뻐?”

환하게 미소짓는 폰에게 카리타스가 물었다.

“응. 솔직히 그전까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도 능력이 안 되어서 힘들었거든. 내 몫만 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단한 힘을 받게 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네.”

“좋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 근데… 지나간 일이지만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날, 왜 거기에 나가 있었던 거야? 왜 신전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거기서 그러고 있었던 건데?”

‘아차.’

차분하게 칭찬하던 카리타스는 마지막 말에 무심코 감정을 실었다. 폰은 그제야 카리타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고 그다음으로는 치마를 세게 움켜쥔 카리타스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참는 것이 눈물인지 화인지, 붉어진 얼굴로 카리타스는 화를 내려던 게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참 후에 간신히 폰은 대답을 꺼냈다.

“미안. 화났구나. 무모하다고 생각은 했어, 그런데….”

‘무모하다고 생각하긴 했구나. 그래서?’라는 표정으로 카리타스가 빤히 바라보았다.

“화 안 났다고 하지 않았어?”

“너한테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었어. 다른 사람한테 화가 난 거지.”

“어….”

“그래서? 왜 내가 지키고 있는 신전으로 들어오지 않았어? 거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잖아. 모르지 않았을 거 아냐.”

“나는 널 지키고 싶었어.”

개미만 한 목소리로 시도폰이 대답했고 둘 사이에는 또 정적이 흘렀다.

“정말 고마운 얘긴데, 무모했어.”

“응.”

“지켜줘서 고마워. 덕분에 무사했어. 나는 널 지켜주지 못했는데 이렇게 도움만 받아버렸네.”

“무슨 소리야. 네가 자리를 지킨 덕분에 사람들이 무사할 수 있었잖아.”

부정하려던 카리타스는 또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속으로 욕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우는 거냐고 물어보며 폰이 카리타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카리타스는 쉰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마침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카리타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헤일로와 베론은 뒤따라온 프라이에와 두코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며 묻을 굳게 닫았다. 베론이 문을 잠그는 동안 헤일로는 의자에 앉았다. 못 본 새 베론의 눈 아래 그늘이 짙어져 있었다.

“그래, 몸은 좀 어떻냐.”

“괜찮습니다. 다쳤다는 게 진짜인지 의심될 정도로요.”

“다행이구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마. 아까 네가 콘피테오르(cōnfiteor) 중 하나를 발동시켰다고 들었는데….”

헤일로가 카리타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둥절한 폰은 조심스레 콘피테오르가 무엇인지 물었고 베론이 대답했다.

“주기도문은 주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말씀이라 가장 신성력을 강하게 담을 수 있는 문장이지만, 그대로 도구로써 사용하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래서 고대 사제들이 기도문을 모티프로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고 그게 콘피테오르, 신성력을 발현시키는 언어다.”

“이번 보호소 방문이 끝나면 성가를 배울 예정이었는데 콘피테오르는 성가에도 들어가 있단다. 그래서 전투를 하기 전엔 다 같이 성가를 부르기도 하지.”

헤일로는 덤덤한 얼굴로 폰의 다음 일정을 이야기했다. 카리타스가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아 폰은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폰이 궁금해하는 내용이 끝까지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폰은 헤일로의 말을 자르고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저는 언제 남부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교황께서 귀환식을 성대하게 여시겠지. 그때 잠깐 다녀올 수 있을 거다.”

“…다녀온다니요. 전 원래 거기 살았는데.”

“이것까진 듣지 못했나 보군, ‘집행자’는 기사단의 상징이야. 네가 정식 기사가 될 정도로 성장하고 나면 바로 북부 기사단 단장 자리는 너에게 넘어갈 거다.”

헤일로의 단호한 말에 베론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연실색한 폰이 카리타스를 향해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다그쳤지만, 카리타스는 슬픈 얼굴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심상찮은 폰의 태도에 헤일로는 북부에도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언제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하러 오라고 애써 호탕한 척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제 전부가 거기에 있다고요…. 친구들이랑 풍경과 추억, 전부 거기에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떨어뜨려 놓는 게 어딨어?”

마지막으로 갈수록 흥분하며 말하던 폰은 제 감정에 복받쳐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카리타스는 자신이 달랠 테니 두 분은 내일 오시라며 헤일로와 베론을 쫓아냈다. 쫓겨난 헤일로는 ‘저 나이에 연인이라도 두고 올라왔나?’라며 중얼거리다가 베론에게 발을 밟혔다.

“이 자식, 오냐오냐해줬더니 하극상이냐?”

“실수입니다.”

당당하게 말대답한 베론은 사과도 없이 빠르게 복도를 걸어갔고 그 뒤를 헤일로가 허겁지겁 따라갔다. 하지만 이전의 전투에서 무릎을 다쳤던 헤일로가 앓는 소리를 내자, 뒤도 안 돌아보고 걷던 베론은 놀라서 그에게 돌아갔고 헤일로는 자신을 부축하는 베론에게 어쩌면 폰에게 기사단장 직을 넘겨주는 건 자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며 농담을 던졌다.

“아무리 단장님이셔도 그런 농담은 재미없습니다. 아직 창창하신 나이잖습니까.”

“창창하긴, 세속에서 내 나이면 손자까지 볼 수 있는 나이라고.”

“예예, 전 단장직 같은 거 맡기 싫으니까 건강 관리 잘 해주십쇼.”


시시덕거리며 돌아가는 두 사람과 다르게 시도폰이 누워있던 방 분위기는 착잡했다. 짧게 숨을 내쉰 카리타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폰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있었지만 아이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나는 이번 북부 수행이 끝나면 남부로 돌아갈 거야.”

“…여기 남아있으면 안 돼?”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 오기 전까지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서 그 자리에 있을 거야. 자주 연락할 테니까 편지 보내면 빨리 답장해줘야 해.”

“….”

“코지나 다른 친구들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건 베론한테 따로 전달해야 할 거야. 내가 거주관까지 가서 편지를 전해준다거나 그 애들이 신전까지 올라오는 건 힘들 것 같거든.”

“….”

“그리고….”

“넌 아무렇지도 않아?”

억지로 감정을 누르고 담담하게 말하던 카리타스는, 시도폰의 퉁명스러운 말에 내면의 무언가가 뚝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이 신의 목소리와 수많은 꿈으로 어지럽혀져 있어서 빠르게 튀어나가는 말을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다.

“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 온 건지 모르잖아!”

이미 질러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카리타스는 깜짝 놀라 눈물을 허겁지겁 닦는 폰을 보고도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내가 괜찮아 보여? 지금 제일 힘들게 너니까 참고 있는 거잖아. 환경도 변할 거고 네 몸도 이전과는 다를 거니까! 그런 변화가 있는데 나까지 감정적으로 굴면 네가 더 힘들 것 같아서 일부러 덤덤한 척하고 있는 거라고.”

“…미안해. 내가 오해했어.”

‘그리고….’라며 무언가 더 말하려던 카리타스는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를 내지 못했다. 끝내 다물린 입속에선 이가 갈리는 소리만 살벌하게 울렸고 잠깐의 정적 후 정신을 차린 카리타스는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된 폰은 카리타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곱씹으며 침대에 눕지도 않고 기대어 앉아 눈을 감았다. 카리타스가 북부행을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그저 같이 간다는 사실에 기뻐서 북부에 가면 무엇을 할지 이야기하기 바빴던 것 같다.

수상한 사람을 통해 내 고민을 해결해놓고 정작 카리타스에겐 왜 북부로 가려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냥 그 아이는 직책이 있으니 나이가 되자마자 가는 것이겠거니 했는데,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이는 나름의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얼굴 보면 제대로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부끄러움에 혼자 있는데도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카리타스가 너무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속까지 괜찮은 건 아니었을 텐데. 섣불리 지레짐작하고, 내 감정만 앞세워서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사람을 밀어내 버렸다.

반성하던 폰의 마음속에서 ‘그래도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의견이 고개를 들었지만 ‘말할 수 없는 사정도 있는 거지, 나도 코지 일은 얘기하지 않았잖아.’라는 반론에 완전히 파훼 되었다.

‘근데 그렇게 생각해도 숨기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계속 드네. 내 일은 카리한테 굳이 숨긴 적 없어서 그런가?’

나는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모든 것을 카리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신전 밖을 나가지 못하고, 몰래 정원에서 대화하는 것만으로 바깥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카리타스가 조금이라도 세계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돌이켜보면 카리타스의 일상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딱히 없었고, 그 아이는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지 스스로 무언가 이야기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여름날의 백문 백 답이 떠올랐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가 질문을 던졌고 그건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카리가 웃으며 넘긴 거라 내가 구태여 그걸 주워다 들이밀진 않았지만 그래, 그날도 조금 거리감을 느꼈다.

종일 놀고 싶어진 계기가 뭐냐고, ‘혹시 그건 나 때문이야?’가 생략된 그 질문에 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심 나와 노는 그 시간을 특별하게 여겨줬으면 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아냐, 내가 잘못했는데 여기서 왜 걔 탓을 하는 거야. 이상한 생각 말고 내일 얼굴 보면 뭐라고 사과할지를 고민해야지.’

생각을 떨쳐 내려 열심히 고개를 젓고 있는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나가서 문을 열었지만 기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솔라는 잠깐 방에 들어와도 되냐고 물어보며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왔고 나는 거절할 생각도 하기 전에 추운 바람을 막으려 문을 닫았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와는 다르게 솔라는 자연스럽게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 무슨 일이야?”

“정신 차렸다길래 얼굴 보러 온 거야.”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묘하게 초연했다. 무언가 알게 된 것 같은 사람의 얼굴. 폰은 천천히 침대로 올라가 앉았고 솔라는 그 모든 행동을 눈으로 따라갔다.

“보다시피 난 이제 멀쩡해. 다친 곳도 다 나았고 정신도 맑은데 아직 기력만 회복이 안 되어서 못 나가고 있는 것뿐이야.”

“응, 보여. 다행이다.”

보호소에서 만났을 때보다 침착해진 솔라를 어색해하던 폰은 솔라의 바지 밑단에 붙어있는 풀을 발견했다.

“웬 쐐기풀이야? 무덤이라도 다녀왔어?”

“다 털고 온 줄 알았는데 못 본 게 남아있었나 보네.”

솔라는 잎을 떼어 밖에 버리고 온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폰이 뭐라 묻기도 전에 솔라는 전에 없던 반짝이는 눈빛으로 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에 잠깐 섬뜩한 기분을 느낀 폰이었지만 솔라는 그런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알고도 개의치 않은 건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네가 건강하게 회복될 거라고 믿고 있어서, 그걸 확인하러 온 건 아니었어.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거든.”

솔라는 숨을 한번 골랐다. 꽉 쥔 주먹이 그의 무릎 위에서 옅게 떨렸다.

“성령께서 내려오신 그 날…, 그분의 모습과 그 아래에 있던 너를 보고 알게 됐어. 신께선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주고자 하니, 종들은 따름을 의무로 알고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어. 네 덕분이야. 그게 고마워서 말해주려고 왔어.”

거의 숨도 쉬지 않고 긴말을 줄줄이 내뱉은 솔라는 말을 하면서 점점 흥분했는지 말을 끝맺을 때는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 무덤이라도 다녀왔냐고 했지? 정확하게는 사제님들의 공동묘지에 다녀왔어. 쐐기풀이 많아서 조심스럽게 걸었는데 붙어있는 게 있다길래 당황했지 뭐야. 아무튼, 저렇게 깨닫고 나서 사제님들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를 지켰는지 궁금해서 묘지를 갔다 왔어. 역대 집행자들 동상도 보고 왔는데 기분이 이상했어.”

이야기의 흐름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폰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카리타스와 그렇게 다투고 나서, 그 문제 행동으로 솔라에게 감사받고 있는 이 상황이 이상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헤헤 웃으면서 풀어지려던 폰은 카리타스에게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기억나버렸다. 조금 눈치를 보던 폰은 솔라에게 물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나선 거, 별로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솔직히 신성력도 별 볼 일 없고 전투 능력도 일반 기사보다 떨어지는 애가 굳이 나가서 싸우고 있었잖아.”

“무슨 소리야, 난 그 나서려는 의지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정색하면서 대답한 솔라에 폰은 얼떨떨해하다가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 뒤로 솔라가 집행자들 동상을 본 소감을 줄줄이 이야기했는데, 폰은 집행자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는 이 아이가 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집행자를 확고부동하게 존경하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다고 한들, 그래도 말하는 데 조심스러울 만도 한데 솔라는 이전에 불신자였기 때문인지 저런 망설임은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네가 이번 세대의 집행자가 되는 거야?”

“엇, 알고 이야기한 거 아니었어? 정확한 절차를 아직 거치진 않았지만 그렇게 될 거 같아. 혹시 모르니까 어디 가서 이야기하진 말고,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헤일로나 베론, 카리타스 중에 솔라에게 굳이 이 사실을 전달할 사람은 없었다. 솔라가 기사단 주요 인물도 아니고 신성력이 특출난 아이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날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흔을 다들 봤을 거야. 단순히 신께서 너를 치유하신 게 아니라 너를 살려서 네가 신의 뜻을 따르는 걸 보고자 하셨다는 걸, 그 자리에 있는 누구나 느꼈을 거야. 나는 그런 사람 중 하나일 뿐이고.”

기절해있느라 자신의 등에 새겨진 성흔이 얼마나 강하게 빛났는지 알 수 없었던 폰은 솔라의 말에 ‘그렇구나…. 응, 신께서 살려주신 목숨이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 되든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게 맞지.’라고 대답했다. 신난 표정으로 솔라는, 지금부터라도 신의 의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겠다며 나중에 기사단이 되어서 만나자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게.”

여자아이는 치료 사제, 남자아이는 전투 사제로 배정받는 것이 관례였고 그건 여태 깨진 적이 없었지만, 솔라라면 그런 규율 정도는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폰은 자신이 집행자가 되면 그런 관습은 폐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솔라를 배웅했다.

결국, 카리타스를 찾아가기엔 늦은 시간이 되었고, 폰은 내일 아침에 만나면 이야기를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뒤척거리다 잠들었다.

하지만 잠에서 깬 폰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북부 기사단 소속의 사제였다. 그는 폰이 오늘 집행자의 자격을 인정받는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고 확인 절차가 모두 끝나면 바로 서임식이 진행될 거라고 안내했다.

잠에 취한 상태로 듣고 있던 폰은 어제 나눈 대화를 기억하지 못하고 사제에게, ‘언제 남부로 돌아갈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가 당황스러운 표정의 사제를 마주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차린 폰이 이불을 걷어차고 문을 열어 뛰쳐나갔다.

“어, 어디 가십니까? 시험이 곧 시작될 겁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본관에 먼저 가 있으세요!”

날래게 도망치는 폰을 잡으러 가기엔 사제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허리와 무릎, 손목과 발목, 안 쑤시는 곳이 없을 정도의 나이임에도 그는 신을 섬기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 추운 북부에 남았다. 그런 그에게 집행자를 모실 기회가 주어졌기에 그는 오늘 새벽에 기도를 올리면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폰이 성흔을 받은 그 날부터 시작한 경전 필사를 마무리했다.

폰이 망아지처럼 기사단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폰과 거의 겹치지 않는 일과를 보냈기 때문에 성흔을 입은 이와 폰을 겹쳐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사제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폰을 보며 기절하기 직전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열린 문에 이마를 부딪친 베론도 황당한 표정으로 폰을 바라보았지만,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굳이 그를 쫓아가진 않았다.

“저, 저분이 정녕 성흔을 입은 분이 맞으십니까? 아니, 신의 선택을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말을 고르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사제에게 베론은 ‘아마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먼저 본관으로 가 계시면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라며 변명했고 그의 말을 들은 사제는 비틀거리며 본관으로 향했다.

한숨을 쉰 베론은 곧장 남부 수행단 숙소로 향했고 뭉친 반죽처럼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뒤엉킨 무리를 자세히 보니 오드샤도 두코에게 붙잡혀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썩 싫은 표정은 아닌 것으로 보아, 붙잡혀 있는 게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싫은 건 아닌 듯했다.

“편지 자주 쓸게.”

“나도 프라이에 옆에서 한두 줄 정도는 같이 쓸게.”

“아잇, 어이없는 소릴. 너도 한 장 줄 테니까 아예 거기다가 써.”

“오드샤, 넌 얼마나 자주 쓸 거냐?”

프라이에와 두코의 대화가 이어지다가 오드샤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오드샤는 나중에 동생이 북부 수행단에 참가하면 거기다가 뭐라도 들려서 보내겠다고 대답했다가 두코에게 ‘인정머리 없어!’라는 말을 듣고는 편지도 같이 쓰겠다고 덧붙였다.

“근데 오드샤, 동생이랑 많이 닮았어?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눈매가 조금 다른 것 빼곤 닮았지. 그런데 걔가 그대로 클지 안 클지는 모르는 데다가 지금 이름을 말해준다고 해서 네가 몇 년 뒤에 내 동생 이름을 기억해낼 것 같진 않으니까 나중에 편지 봐.”

폰은 김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다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카리타스는 아까 화내서 미안하다며 (두코: 화냈어? 환자한테?) 달에 한 번은 꼬박꼬박 편지를 쓸 테니 확인하는 대로 답변을 해달라고 말했다.

“당연하지. 코지가 시켜서 글씨 연습도 했어. 물론 지금까지 생활해본 걸 생각하면 그렇게 다양한 일을 쓰진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정 쓸 거 없으면 딴 생각한 거라도 쓸게.”

“아마 내 생활이 더 단조롭다면 더 단조로울 텐데, 나는 정 쓸 거 없으면 도서관에서 재밌는 책 찾아다가 필사라도 해볼게.”

“기왕이면 네 생각도 덧붙여줘.”

카리타스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가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응, 열심히 할게.’라며 답했다. 대충 끝나가는 분위기라 베론은 폰을 불렀고 아이들은 잘 다녀오라고 배웅도 해주었다.

폰이 집행자로 인정받게 되면 더는 이런 왁자지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로 서로를 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분명했다. 그런 사실을 다들 예감하고 있었기에 배웅하는 아이들도, 그것을 받는 폰도 낯빛이 썩 밝지는 않았다.

“이 문을 다시 열고 나가면 많은 것이 바뀌겠지만 널 생각해준 사람들의 마음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 거라.”

긴장한 폰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관 문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폰은 문을 당겨서 열었다.

문이 열리는 동안 갑자기 솔라가 떠올랐던 폰은 보호소 아이들은 어디에 있느냐 물었고, 베론은 그 아이들이 오늘 아침 마차를 타고 기사단 아랫마을 보호소로 이동했다고 알려주었다. 솔라가 여기 있을 리 없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안심하면서도 불안감이 뱃속에 가라앉아있는 것을 느낀 폰은 본관으로 발을 들였다.

도열한 사제들이 본관 문과 제단을 잇는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었고 제단 바로 옆엔 아까 폰을 깨웠다가 먼지 바람만 뒤집어쓴 사제가 서 있었다. 베론은 폰이 그를 바라보자 ‘오토 대주교님의 형님 되시는 분이시다. 아까는 바빠서 설명을 생략했지만 슈바헨 사제님이라고 부르면 된다.’라고 빠르게 속삭였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가볼게요.”

폰은 바닥에 깔린 붉은 천을 따라 걸어가 제단 앞에 섰다. 제단 양옆의 창문으로는 눈이 내리지 않는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바람도 강하지 않은 세기로 마른 대지 위를 지나다녔다.

사제들은 처음처럼 꼿꼿하게 서서 폰의 등을 바라보았고 광활한 기사단의 본관엔 그들의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온화한 표정을 되찾은 슈바헨 사제의 지시에 따라, 폰은 제단 속 그릇을 들여다보았고 그릇을 가득 채운 성수와 그 너머의 콘피테오르를 볼 수 있었다.

“그릇 바닥에 적힌 콘피테오르를 따라 읽으면 된단다. 그러면 네 신성력의 크기와 형태를 알 수 있게 되지.”

아직 집행자라고 확정된 것이 아니니 슈바헨은 말을 낮추었지만 업신여기는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하는 것이 있는 아이가 부모의 대답을 기다릴 때 긴장하는 표정과 비슷했다. 폰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잠시 맡겨두신 힘을 이롭게 사용하고자 합니다. 무지한 자들이 검을 다루려 하니 남을 베지 않도록 그것의 길이와 방향을 가르쳐 주소서.]”

“윽!”

신성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눈을 감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 사제들은 밝은 빛에 익숙한 상태였다. 그중 슈바헨 주교는 몇십 년 동안 이 일을 해왔으니 엔간한 빛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그가 놀라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감을 정도의 빛이 뿜어졌다.

당사자인 폰조차 눈을 뜨지 못해서 공중에다가 손을 허우적거렸다.

밝은 아침의 햇빛조차 그 빛을 이기지 못했다. 창문 밖으로 강하게 튀어나오는 빛에 풀과 나무들은 색을 잃고 하얗게 바랬고 본관 내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폰, 눈을 떠라! 저걸 봐.”

헤일로는 적응이 되었는지 무언가를 보고 폰에게 소리쳤다. 겨우 눈을 뜬 폰의 앞엔 성수가 떠올라 일렁이고 있었고 그 속에서 하늘색의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폰은 손을 뻗어 빛을 가렸다. 가늘게 뜬 눈으로 겨우 바라본 그것은.

“하늘색… 불꽃?”

점점 넓어지는 성수가 거대한 불꽃을 본관 벽에 비추었고 그것은 건물을 태울 것처럼 활활 타올랐다. 강렬한 빛이 점차 사그라들자 사람들은 하나둘 눈을 떠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슈바헨, 헤일로, 베론이 모두 무릎을 꿇은 가운데 폰만이 그 불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이게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느낌인가?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뭔가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 들어. 이 힘으로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거구나.’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중심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계절을 가릴 것 없이 맑은 날이면 언제든 볼 수 있는 하늘의 색을 가진 사람.

‘닮았네. 우연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 애 덕분에 얻은 힘이니까.’

슈바헨은 떨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불꽃에 홀린 것처럼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던 폰은 시야에 불쑥 들어온 슈바헨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간신히 소리를 집어삼킨 폰에게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이 있으실 겁니다. 그걸 말씀해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던 폰의 입에선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뱉어진 말, 그 순간 폰은 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검을 쥔 손은 그것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때에야 그것을 내려놓으리.]”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처음 성수에서 떠올랐을 때처럼 작아진 그것은 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그의 심장으로 돌진해서 사라졌고 성수는 콘피테오르가 적힌 그릇으로 되돌아갔다.

작게 찰랑거리는 성수가 아니었다면 아직 의식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착각할 정도로 본관은 침묵에 잠겼다. 폰이 머쓱하게 뒤돌아 헤일로와 베론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저기, 슈바헨 사제님. 이제 저는 뭘 하면 되는 건가요?”

“말씀을 낮추십시오. 당신께선 이제 북부 기사단의 상징이자 악마들에 대항하는 모든 인간의 구심점이 되실 분이십니다. 예법에 따르면 집행자로 확인된 후부터는 북부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게 되지만, 아직 기사가 되지 않은 경우라면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은 후에 단장직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아직 열 살인데 다가 기사가 되는 훈련도 여기 와서 받은 게 다인데요.”

“괜찮습니다. 이제부터 배우시면 되니까요. 헤일로 단장과 베론 부단장이 성심성의껏 교육을 전담하실 겁니다. 그렇지요?”

어느새 슈바헨의 양옆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전에 없던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어색하게 웃은 폰은 슈바헨의 눈치를 보다가 제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 순간 사제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각각 시도폰을 찬양하는 말을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당황한 폰은 ‘위대한 집행자가 되실 분!’이라든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십시오!’ 같은 말을 듣고 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카펫을 거칠게 밟으며 달려나갔다.

“비명은 용케 안 지르시네요.”

“이 악물고 뛰신 것 같더라.”

베론의 태평한 말에 헤일로도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미 어제 폰의 방에서 빛을 확인한 상태였기에 이런 상황이 놀랍진 않았다. 앞으로 악마에게 대항할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단 것에 기뻐할 뿐이었다.

베론은 어제 일이 마음에 걸려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도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어리니까 금방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슈바헨이 제단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확인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사제님들께서는 수행단의 일이 끝나면 바로 남부로 이동할 수 있도록 채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바닥으로 내려온 슈바헨이 사제들의 환희에 찬 얼굴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들은 우렁찬 소리로 화답했고 빠르게 본관을 빠져나갔다. 평소에 엄숙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던 사제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우리 대에서 그런 분을 모시게 된다니!”

“이번 봄은 유달리 늦게 오겠는걸.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남부는 오랜만에 가보는데, 가면 새로운 책도 사 와야겠다.”

“대관식은 수도 제1 신전에서 진행되겠지?”

“아무래도, 교황 성하께서도 거기서 서임을 받으셨으니까.”

한편, 갑작스레 본관 쪽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숙소에 있던 일반 사제들과 수행단은 깜짝 놀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불길한 빛은 아니었지만, 너무도 강대한 빛에 몇몇은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잔상이 보인다며 힘들어했다. 폰을 배웅하고 온 아이들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얘들아. 이게 무슨 일이야?”

시도폰이 잠들어있는 동안 진행된 훈련에서 상처를 입었던 스키피가 목발 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다리에는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불편해 보이는 기색은 없었다.

“그게 우리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너 다리는 여전히 그 상태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사제님이 간단히 치료해주긴 했지만, 자연치유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도중에 중단해버렸잖아. 벌써 나았을 리가 없는데.”

프라이에는 스키피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며 물었다. 다른 아이들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다들 같은 것을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스키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도 안 믿기기는 하지만, 다리는 이미 다 나은 것 같아. 고통도 없고 부기도 빠졌어. 붕대는 혹시 몰라서 안 푼 거지만 이미 좀 헐거워졌더라고. 그 빛이 지나가고 나서 이렇게 된 거야.”

카리타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스키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잠깐 볼게.’라며 카리타스가 붕대를 풀었고 스키피의 다리는 다치기 전과 같이 멀쩡했다. 아이들이 놀라는 와중에 카리타스만이 덤덤한 어조로 ‘시도폰이 집행자가 된 게 확실한 거 같아.’라고 말했다. 아침에 소식을 들었던 아이들만이 착잡한 표정으로 납득했고 다른 아이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카리타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도폰이 집행자가 된 것을 북부 기사단의 모두가 알게 되었을 즘, 본관 밖의 덤불이 움직였다. 몰래 숨어서 시도폰을 지켜본 그는 감격한 얼굴로 덤불을 빠져나갔다. 일렁였던 불꽃이 꼭 제 머리 색을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GL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