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8화

바람과 추위를 막으려 두꺼운 천을 둘러둔 마차엔 열 명의 아이들이 오밀조밀 모여 앉아있었다. 시도폰을 포함한 여자아이 넷, 남자아이 여섯이 올해 거주관에서 북부 수행을 가는 아이들이었다. 같은 거주관 소속이라지만 친한 친구들끼리만 놀다 보니 바로 제 옆자리 사람과 어색한 아이도 있었다.

시도폰은 저와 함께 신전에 올라갔던 아이, 그렇지는 않았지만, 술래잡기에 참여했던 아이, 어쩌다가 같이 빨래 담당이 됐던 아이, 얀과 저가 싸울 때 말렸던 아이 등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기운 넘치는 시도폰이 이야기를 주도하자 아이들은 금방 왁자지껄하게 떠들었고, 호위를 맡은 거주관 소속 기사들도 새어 나오는 이야기를 즐겁게 엿들으며 말을 몰았다.

신전 소속인 사람들과 1차 워프 지점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니 그 전까지는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말라는 사제의 지시가 있었다. 나이가 많은 편인 아이는 ‘바깥 물건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기 냄새는 못 막네. 좋다.”

목소리에서 황홀함이 묻어나오는 말을 한 것은 아까까지 잠들어있던 아이였다. 자고 있어도 냄새는 맡아진다며,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린 듯 기지개를 켠 아이는 저에게 집중된 시선에 오히려 당황한 듯 ‘너희는 이 냄새 안 맡아지니?’라고 물었다.

시도폰이 ‘자는 줄 알았어.’라고 말하자 아이는 아까까지는 자고 있었다고 답했다.

“내 이름은 두코야. 열세 살이고 1구역에 내 방이 있어.”

혼자만 늦게 통성명하는 게 머쓱했는지 두코는 긴 머리를 비비 꼬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도 잠시였고 말이 몇 마디 오가자 바로 수다스러워졌다.

1차 워프 지점에 도착했다며 사제는 마차를 멈추었다. 가장 바깥에 앉아있던 시도폰은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고, 처음 보는 워프 시설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우와 저걸로 워프해요?”

“그래. 멀미할 수도 있으니까 워프할 동안은 마차에서 돌아다니지 마라.”

시도폰이 마차를 모는 기사에게 묻자 그는 익숙한 듯 빠르게 답변했다. 아직 신전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기다리는 동안은 나와도 괜찮다는 허락에, 아이들은 조심히 마차에서 내렸다.

“워프 지점이래도 1차라서 그런지 아직 남부를 벗어나진 못했네.”

“새로운 게 없어서 아쉬운 거야?”

주머니를 들고 있던 아이가 힘없이 걸어 다니며 혼잣말을 하자, 시도폰이 그것을 주시하다가 말을 걸었다. 얀과 센이 한창 장난치던 시절에 가끔 지나가다가 그들을 말려준 아이였다. 나이는 얀과 동갑, 열네 살이었고 이번 거주관 출신 북부 인원 중 최연장자였다.

“응. 난 이것저것 모으는 게 재밌어서.”

“거주관에 있을 땐 뭘 모았는데?”

“꽃을 주워서 말린다거나 표면이 매끈해서 기분 좋은 돌이라든가 뭐 그런 것도 모았고 맘에 드는 글귀도 모았지.”

시도폰은 나중에 컬렉션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요청이 기쁘다며 프라이에는 본인의 이름이 적힌 노트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아까 말했던 글귀를 모은 노트였다.

“이거 멋지다. 어디서 나온 글이야?”

“우리가 있는 테르미너스 지역에 있었던 왕국이, 이민족 국가의 침략을 막아낼 때 부른 노래 중 일부야. 수세에서 밀려서 질 뻔했는데 천운으로 몇 번이나 이겨내서 노래 제목이 <신이 우리를 수호하시네>였지.”

한창 문학 얘기를 듣던 시도폰은 신전 쪽 일행이 도착했다는 말에 노트를 흔들며 이것 좀 더 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프라이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폰은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가다가 눈에 익은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반대편에 있던 사람도 시도폰을 알아본 듯, 커다란 손을 높게 들어 인사했다.

“익숙한 꼬맹이들이 많군, 근데 인사는 나중에 하자. 1차 워프가 예상보다 늦어져서 여유 시간이 얼마 없어.”

렌이 신전 사람들보다 미리 도착해서는 양치기처럼 팔을 몰아 아이들을 마차 쪽으로 이동시켰다. 당황하던 아이들과 시도폰은 어영부영 마차에 탔고 프라이에는 시도폰을 마차에 먼저 태운 뒤 옆자리를 차지했다.

아이들은 조용히 있던 프라이에가 들뜬 모습을 보이자 신기했는지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정작 본인은 모르는 모습이었다.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할 수 있겠다.”

뿌듯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줍은 미소를 짓는 프라이에에게, 시도폰은 차마 자리를 바꿔서 밖을 보게 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언뜻 사제들의 옷자락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카리타스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긴 한 거겠지?’

잠깐 스친 생각에 불안해지긴 했지만 계속 그런 의심에 잡혀 있기엔 프라이에가 해주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필사집에는 단순히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써둔 것도 있었고 특별히 상황과 잘 맞는 글을 발견한 게 기뻐서 써둔 것도 있었다. 그저 필사만 되어있는 게 아니라 어디서 그 글을, 언제, 어쩌다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기록되어 있었다.

“워프 시작하겠습니다. 베론 사제님부터 차례로 문을 통과할 예정이니 천천히 움직여주시기 바랍니다. 워프 도중에 움직이지 마시고 다음 지역에 도착하시면 다음 사람을 위해 빠르게 문에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밖에선 한창 워프가 진행됨을 알렸지만, 시도폰이 탄 마차는 맨 마지막 순서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마차는 그렇게 크지 않아서 프라이에가 유독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이야기가 잘 들렸고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들은 어떤 글이 자기 맘에 들었는지 말하거나 프라이에에게 책 추천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마차가 덜컹거리더니 느리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 우리 차례인가 봐.”

“궁금하다. 무슨 느낌일까?”

“해본 애들은 잠깐 울렁거리고 만다고 하던데.”

“멀미 심한 사람?”

“어디 멀리 가봤어야 멀미가 심한지 알지.”

“맞네, 난 옆 마을까지 걸어가 본 게 제일 멀리 간 거야.”

“워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여름엔 바다로 휴양가야 한다고 생각해.”

“그때가 농사일 제일 바쁠 땐데.”

“북부 수행 끝나면 바로 와서 밭부터 갈겠지? 끔찍하다.”

설레는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아이들을 들뜨게 했는지 아이들의 말은 와글와글 터져 나왔고 워프를 담당하던 사제는 마차 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더니 벽에 등을 붙이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들이 놀라서 시키는 대로 하자, 사제는 그렇게 무서운 건 아니라며 달래곤 사라졌다.

마침내 마차가 아치를 통과했고, 잠시 후, 베크 산에 도착했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어…. 좀 갑갑하기만 하고 딱히 울렁거리진 않던데.”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로 시도폰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프라이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쟤 상태가 이상한데?”

프라이에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코가 그를 가리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다고 대답한 줄 알았다며 시도폰은 프라이에의 어깨를 흔들었고 입을 틀어막은 프라이에는 마차를 뛰쳐 나가버렸다.

“프…라이에, 괜찮아?”

“물은 내가 가져왔어. 자.”

따라 나온 폰이 프라이에의 등을 쓸어주었고 두코는 물이 든 잔을 건넸다. 혹시 멀미가 심해서 바깥에 앉은 거였냐는 질문에 프라이에는 입을 한번 헹구고 고개만 끄덕였다.

두코는 혹시 배고프면 말하라며 자기가 들고 온 (아마도 말린 고기가 잔뜩 들어있을) 주머니를 흔들었지만, 프라이에는 마음만 받겠다며 남은 물을 마셨다.

“미안. 의식을 잃은 줄 알아서 어깨부터 흔들었어.”

“아냐 괜찮아. 네가 흔들기 전부터 멀미는 이미 났으니까.”

시도폰이 눈치를 보자 프라이에는 신전 사람들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저쪽에 말 하나씩 차지한 사람들이 신전 사람들이겠지?”

“부럽네, 우린 수레 하나에 다 같이 앉아서 가는데. 나도 말 타고 가고 싶다.”

“두코랑 프라이에는 말 탈 줄 알아?”

셋 중 막내인 시도폰의 질문에 두 사람 다 고개를 저었다. 말이 워낙 비싼 데다 먹이도 많이 먹는 바람에 거주관에선 농사용 말만 몇 마리 키우고 있었고 아이들이 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여기서 조금 휴식할 모양인지 몇몇 사제들이 말에서 내렸고 베론이 탄 말에서도 누군가가 뛰어내려 이쪽으로 걸어왔다.

“조심! 하십시오.”

베론의 경고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조그만 아이는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아이가 가까워질수록 폰의 얼굴이 환해졌고 걸어오던 아이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프라이에는 평소에 자신이 알고 있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아이의 모습에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두코는 어린 애들끼리 동글동글하게 서로 안아주는 게 귀엽다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안 보이길래 혹시 북부에 안 가는 건가 싶었어!”

“미안 교황 성하께서 걱정하셨는지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서 조금 늦었어.”

“이쪽은 거주관 친구들이야. 두코랑 프라이에. 두코는 열세 살, 프라이에는 열네 살.”

“반가워요. 카리타스라고 불러주세요.”

“잘 부탁해~ 시도폰이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벌써 사제인 거야?”

프라이에가 미처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기도 전에 두코는 카리타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갑자기 좁아진 거리에 카리타스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제가 뭔가 노력한 게 아니라 운이 좋아서 얻은 거니까요.”

“뭐 어때, 착하게 살면 되는 거지.”

두코의 맞장구에 시도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파장이 잘 맞는 두 사람은 카리타스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았고 프라이에는 살짝 지친 카리타스의 표정에 아까 동승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북부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베론 님이세요. 다른 사제분들은 말을 탈 줄 아시는데 저만 아직 승마를 배우지 않아서, 염치없지만 동승하고 있어요.”

“사람이 나빠 보인다는 건 아니지만 베론 님보단 또래가 편하지 않을까?”

“괜찮아. 오히려 북부 관련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어서 이쪽이 더 재밌는 것 같아.”

시도폰은 어떤 얘기를 들었냐고 물었고 그쪽으로 한참 이야기가 빠지는 동안 프라이에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은근히 노려보고 있는 신전 측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와 동갑이거나 그 이상의 나잇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어린애를 노려보고 있는 꼴이라니.

‘저 애도 다 알고 있어서 꾸역꾸역 처음 보는 기사랑 같이 말을 타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쪽으로 온 건가. 저 나이 먹고도 어린애를 따돌리다니, 유치해…….’


프라이에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는 또 있었다. 베론은 아까까지 자신의 말에 타고 있던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의 분위기를 곱씹으며 속으로만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기존 규칙에 따르면 정식사제만 신전에서 생활할 수 있으므로, 여태까지 북부 수련 통솔자는 신전이 아니라 그 근처의 왕립 학교에서 그쪽 출신인 예비 사제들을 데리고 워프 지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저 어린 성녀를 모시고 와야 해서 부기사단장인 자신이 나섰고 신전까지 대규모 인원을 이끌고 들러야 했다.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교황과 그 옆에서 어린아이다운 생기라곤 보이지 않는 얼굴의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느꼈던 찝찝한 감정이 여전히 마음 한 편에서 덜컥거렸다.

게다가 그 아이가 평민이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태생 귀족인 예비 사제들은 어린 성녀에게 자리 한쪽을 내어줄 생각도 없다는 표정으로, 인사가 끝나자마자 일제히 말에 올라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베론은 자신의 다리에 매달고 걸어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 아이를 제 말에 태우게 된 것이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북부 수행을 오는 아이들을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까지 조숙한 아이는 처음 보았기에 베론은 이 대화를 끝으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이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베론의 혼잣말을 들었을 때였다.

“거주관 아이들은… 저기 벌써 도착했군.”

안전을 위해 카리타스를 앞에 태우고 자신은 뒤에 탄 상황이었는데, 조그만 머리가 갑자기 통통거리듯 튀어 오르는 모습에 베론은 속도를 살며시 높였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다소 지체되어 아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1차 워프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 때문인걸요.”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이번 북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분을 우선시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위로하려고 덧붙인 말이었지만 딱히 기꺼워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아이는 다시 침묵했고 1차 워프 지점을 지나, 베론이 말을 멈추자마자 안장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어쩌면 승마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베론은 인원 점검과 물자 점검 등 간단한 정비를 시작했다. 그는 그게 거의 끝나갈 때쯤에야 카리타스가 다른 귀족 출신 예비 사제들과 이야기하지 않고 거주관의 아이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 할 일이 많겠군.’

아군끼리 편을 가르는 일만큼 멍청한 짓거리는 없다. 신분이든 성별이든 인간은 항상 나누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나뉜 덩어리를 차곡차곡 쌓아 위계를 만들어내는 짓을 즐긴다.

악마는 그것을 이용해 여태껏 인간들을 상대로 이겨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년 북부 수행에서는 이런 편 가르기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

다행이랄지, 이런 문제가 자주 생긴 만큼 해결 방법도 많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는 기존의 해결책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다시 출발해야 할 시간입니다. 다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베론의 손짓에 북부 기사단 한 명이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출발을 알렸다.

“나도 저기 타면 안 될까?”

“탈래?”

카리타스의 농담에 시도폰이 진심으로 기뻐하자 두코는 한술 더 떠서 시도폰의 옆자리에 앉으라며 키득거렸다.

“될 리가 없잖아. 마차로 이분 끌고 가면 잘못하다가 혼난다?”

“에에…….”

프라이에가 베론 쪽을 흘끔 쳐다보더니 시도폰과 두코의 팔을 한쪽씩 잡고는 마차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우는 소리를 내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론은 어느새 제 앞까지 걸어온 카리타스를 발견했다.

아까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은 보이지 않게 되어 마차로 따라 들어가 버렸는지,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카리타스는 말에 올라탔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베론은 카리타스를 올려 주고 느릿느릿 그 뒤에 앉았다.

아까 끌려간 후로 프라이에에게 카리타스에 대한 설명을 들은 두코는 자기가 신성 모독죄로 잡혀가는 거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시도폰이 괜찮을 거라며, 오히려 카리타스는 두코가 자길 편하게 대하길 바랄 거라고 수습에 나섰지만, 두코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다시 쉴 시간이 생겨서 두코의 오해는 풀렸지만, 카리타스가 어떤 존재인지 알기 전과 같은 반응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고 천막을 쳐야 할 것 같습니다.”

베론은 기사가 보여준 지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워프 덕분에 15일로 일정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는 길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첫날은 이 정도만 이동해도 충분했다.

“주무실 때는 거주관 아이들 쪽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신전 사람 중에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따로 자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베론이 카리타스를 내려다보자 간절한 눈빛이 은근히 베론을 압박했다. 베론은 아마 북부에 가서도 거주관 아이들과 같은 방을 써야 할 거라고 덧붙이며 카리타스를 말에서 내려주었다. 불편한 티를 냈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카리타스가 머뭇거리며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베론은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있을 때 즐거울 거라며 등을 밀어주었다.

“마침 데리러 오는군요.”

“카리~,타스… 님.”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려던 폰은 카리의 뒤에 멀뚱히 서 있는 베론을 보고 다급히 존칭을 붙였다. 카리타스가 처음으로 폰에게 편하게 말하라고 했을 때처럼 폰은 어색하게 말을 이어갔고 베론을 등지고 있는 카리타스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편하게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큼, 네. 편히 쉬세요.”

“아, 안녕히 가세요!”

“이젠 반말이 더 편한 거야?”

“그런가 봐. 새삼스럽게 존대하려니까 말이 잘 안 나오네.”

카리타스는 기분이 좋아졌다며 콧노래를 부르며 거주관 아이들이 치고 있는 천막을 향했고 시도폰은 빨개진 얼굴로 뒤를 쫓았다. 프라이에는 능숙하게 아이들을 지휘했는데 두코가 보이지 않았다.

“폰! 혹시 두코 못 봤어?”

“응? 여기 없어? 오면서는 못 봤는데.”

주위를 둘러보아도 두코의 긴 머리카락 한 가닥도 보이지 않았다. 날도 어두워졌는데 혼자서 멀리 갔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냐고 말하던 프라이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자 시도폰은 자기가 찾아보겠다고 나서다가 카리타스에게 붙잡혔다.

“잠시만 있어 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감.”

다소 어이없는 대답과는 다르게 꼼꼼하게 주변 풍경을 훑는 카리타스를 보며 두 사람은 조용히 시선을 따라갔다. 마침내 카리타스의 손이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저쪽 식량 자루 근처에 있는 나무 중에 눈이 유독 덜 쌓인 나무 보여? 저기 있는 것 같아.”

“그게 보이는 거야?”

“정확하게는 보인다기보다는 느껴지는 거지만.”

“일단 가볼게. 멀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출발한 프라이에는 나무 뒤에서 식량을 노리고 있던 두코를 찾아냈다. 폰은 질질 끌려온 두코를 내려다보다가 천막이나 마저 치고 있겠다고 도망가버렸고 두코는 자기를 혼자 두지 말라며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 했지만, 나머지 두 사람에게 막혀버렸다.

“나 참, 아무리 먹을 게 좋아도 그렇지.”

“혼자 그렇게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아직은 그렇게 지형이 험하지도 않고 민가도 가까운 편이지만.”

“지금 여기서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습관 돼서 나중에도 그러면 어떡해.”

“아 그렇네요. 그럼 지금 미리 경고하는 게….”

“잠깐잠깐. 뭘 하려는 거야?”

“별 건 아니야. 그냥…, 네가 안전하길 바라면서 설교를 좀 하려고.”

“천, 천막은? 아직 다 안 만들어진 거 아냐?”

“그걸 알면서 안 돕고 나무 뒤에 숨어있었다고? 너 진짜.”

나름 화제를 돌려보고자 천막 이야기를 꺼냈지만 되려 그것이 화를 돋우었는지 프라이에는 간신히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떨어뜨리고 설교를 시작했다.

두코는 무릎을 꿇은 채 마지막 희망을 품고 카리타스를 올려다보았지만, 그조차도 두코의 편은 아니었다.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카리타스는 프라이에의 설교에 맞장구만 열심히 쳤고 마침내 두코가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었다.

“이 정도면 두코 씨도 조심할 거예요.”

“후…. 그래. 너무 뭐라고 하는 것도 보기 안 좋지.”

“이미 할 말은 다 한 거 같더구먼….”

“뭐라고?”

2차전이 시작하려는 낌새에 카리타스는 저녁 식사시간임을 알리며 도화선을 끊어냈다. 아이들은 이미 둥글게 모여 앉아서 음식을 받아가고 있었고 시도폰만 혼자 멀뚱히 서서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 늦으면 애들이 한 그릇씩 더 받아갈 거라고!”

폰이 뛰어오라고 손을 휘둘렀다. 한 그릇씩 음식을 받아든 아이들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여전히 조잘거렸다. 솥 옆에 서서 음식을 나눠주던 사제는 다른 건 몰라도 고기는 남기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이들 중 고기를 남기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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