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옷장으로의 초대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카우트! 인텔리전스 Disclosure'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음

귀가길, 미카는 그날따라 온몸에 힘이 쭉 빠져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오늘은 그저 울고만 싶고, 비명을 지르며 어딘가로 내달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밖에서는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무엇보다 앞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터벅터벅 무거운 걸음을 간신히 떼어 이츠키 가의 별채로 들어온 미카는 일단 방에 들러 그것을 내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가 슈의 방문을 노크하고,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스승님~ 있나? 들어가도 되나…."

대답이 없었지만 목을 움츠리고 아주 살살 문손잡이를 돌렸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문을 열고 눈만 빠끔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니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일단 침대를 확인하고, 방 구석들을 샅샅이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커다란 옷장 쪽을 향했다. 옷장 문이 요만큼, 정말로 실낱만큼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순간 어두웠던 미카의 얼굴에 약간의 빛이 돌았다.

"마 밖에 나가지는 않았을끼고… 스승님, 내 이거 열어도 되나?"

"…농…."

안에서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카는 정답을 맞힌 어린아이처럼 해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데이. 그라믄 내 저녁 가꼬 올 테니께 쫌만 기다리그라. 배고프제? 내 후딱 스승님 좋아하는 크루아상 데워 오께."

"필요없다는 것이야…."

하나같이 거부하고 밀어내는 대답뿐이었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미카로서는 기뻤다. 오늘은 그래도 기분이 좀 나은 날이구나, 하는 생각에 미카는 아까보다 조금 큰 소리를 내며 방을 나갔다.

빈 방에서 옷장 문이 정말로 손톱달만큼 조금 더 열리고, 그 속에서 자그마한 인형의 얼굴이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방문이 닫히자 인형은 다시 고개를 움츠리고 옷장 문도 꽉 닫혔다.

"필요없다고 했는데도, 저 실패작이…."

잠시 후 미카는 따뜻한 크루아상과 김이 피어오르는 홍찻잔을 들고 돌아왔다. 

"스승님, 저녁 가꼬왔데이~. 열어도 되나~?"

하지만 아까와 달리 옷장 문은 굳건히 닫힌 채였다. 미카는 잠시 그 닫힌 문을 응시하며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라믄 내 여따 놓고 갈 테니께 배고프믄 무래이~. 밥 굶으믄 안 된다카이."

"…."

조금 더 기다려 봐도 대답이 없었기에, 미카는 결국 옷장 앞 조금 떨어진 곳에 쟁반을 내려놓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방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옷장 문을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열리는 일은 없었다. 미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엎드렸다. 방금 전 가져다 놓은 그 무언가의 앞에.

***

정말로 깜깜한 방 한구석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오들오들 떨기만 하던 처음에 비하면, 오히려 자기 발로 움직여 옷장 속에 틀어박히는 일은 큰 진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미카가 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온 순간, 늘 당연하게 보였던 보라색 이불 덩어리가 보이지 않았을 때 처음에는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날도 교내 아르바이트에 심신 양면으로 잔뜩 지쳐 있던 미카는 순식간에 불길한 상상에 잠식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으나, 다행히도 고요한 방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먹먹한 흐느낌 소리를 감지했다. 

"스승님…? 안에 어데 있나…?"

"…."

코를 들이마시며 훌쩍이는 소리는 마치 고향에 있던 시절, 구석에 웅크려 곧잘 울곤 하던 어린 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소리가 들리는 옷장 앞으로 다가간 미카가 "스승님?"하고 부르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약간 커졌다. 마치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기에, 미카는 조금 기뻐졌다.

"스승님, 내다, 카게히라다. 연데이."

"…."

최대한 경첩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옷장 문을 열어 보니 그 안에는 아니나다를까 무릎을 모으고 웅크려 앉은 슈와 그 옆에 오도카니 놓여 있는 마드무아젤이 보였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던 슈는 문이 열리고 비쳐든 빛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미카를 바라보았다. 빨갛게 부은 눈과 구깃구깃한 얼굴이 그야말로 어린 시절 많이 보던 고아원 동생들과 너무나 비슷하게 느껴져, 미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옷장 속엔 우예 들어갔노. 응후후, 깜깜해가 무섭지 않았나? 어데, 같이 있어 주까? 이 미카…."

저도 모르게 미카 형아가, 라고 말할 뻔했던 미카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풀이 죽어 있던 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분노의 빛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징그럽고 흉한, 실패작 인형 주제에… 네가 내 어머니라도 되는 것이야? 건방지기는!"

"응아아! 스승님, 잘못했데이!"

"나가!"

옷장문이 쾅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닫혔다. 미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금세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미카가 몸을 갈아 가며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보면 부조리한 처사라며 슈에게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미카 입장에서 방금 일어난 일은 너무나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의 무대 이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입고 방에 틀어박힌 슈는 그 후 마드무아젤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마드무아젤이 하는 말도 언제나 '미카쨩, 슈 군이 지금은 혼자 있고 싶대.' '미카쨩, 지금은 슈 군한테 말 걸지 말아 줄래?' '슈 군, 지금은 아무 말도 하기 싫은가 봐.' 등등 소통을 거부하는 말들뿐이었다. 미카도 마드무아젤과 슈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런 말을 들으면 늘 얌전히 물러나곤 했지만, 그래도 역시 예전처럼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욕설과 매도뿐인 차가운 말이라 해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슈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오히려 옷장 속에 들어가면 무슨 갑옷이라도 얻은 양 마드무아젤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고함을 지르는 슈의 모습을 보고 미카가 기뻐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응후후, 예전처럼 실패작이라고, 망가진 인형이라고 불러 줬데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나즈나가 떠나고, 세상에 단둘이 내팽개쳐진 지금 슈가 유메노사키 제왕으로서 복귀하기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말 그대로 미카 하나뿐이었다. 세상이 자신들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미카는 슬프거나 괴롭다기보다는, 순수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승님은 잠시 쉬고 있을 뿐이고, 그 실력과 열정은 전혀 빛바래지 않았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면 금세 다시 돌아올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찌나 보는 눈이 없는지, 그 간단한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스승니임~! 내 옆방에 있으니께 머 필요한 거 있으믄 부르래이~!"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을 걸고,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미카는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슈의 방을 나섰다.

그렇게 처음 옷장에 틀어박힌 후로 슈가 방 안에 보이지 않으면 미카는 제일 먼저 옷장 쪽으로 다가갔다. 오히려 마드무아젤을 거치지 않은 슈의 날것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설레기도 했다. 

'미안하데이, 스승님. 내 모지란 인형이라, 스승님은 힘든데… 내 좋은 생각만 하고 있구마.'

그래도 미카는 좋았다. 어쨌든, 슈가 정체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미세하게나마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 좋았다. 비록 그것이 한 정체에서 다른 정체로 옮겨 간 상태라 해도.

***

"…칫, 칫칫!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야. 나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밤이 아니면 작업을 할 수가 없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도…. 원만한 공동생활을 위한 첫 번째 규칙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야만인이…!"

슈는 쉴 새 없이 혀를 차며 손으로는 바지런히 실과 바늘을 놀리고 있었다. 비좁은 옷장 안, 작은 조명 하나로 손을 비추며 열심히 만드는 그 옷은 얼핏 보기에도 기묘한 생김새였다.

이즈미가 귀국하기 전까지 슈의 밤샘 작업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쿠로도 마오도, 쓴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너무 늦게까지 일하면 건강을 해치니 적당히 하라는 정도의 조언만 할 뿐 못 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부 가꾸기에 진심인 이즈미는 밤에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하는데 불을 끄지 못하는 상황에 화를 냈고, 언쟁이 벌어진 끝에 이즈미는 나가버리고 슈는 바느질감을 챙겨들고 옷장에 틀어박히고 만 것이다. 

그만 토라지고 거기서 나오라고 한참을 달래던 쿠로와 마오의 목소리도 이제는 포기했는지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문을 닫아버리면 쉽게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이 옷장이라는 좁은 상자는 정말이지 편리하다. 

전에도 자주 그랬지, 하고 손을 놀리며 슈는 문득 상념에 잠겼다.

저 텐쇼인 에이치의 악랄한 계획에 넘어가 자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해 버렸을 때도 더러 옷장에 틀어박히던 기억이 있지만, 그 이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슈는 옷장 속에 숨는 일이 잦았다. 때로는 한 손에 인형을 안고, 또 때로는 한 손에 크루아상을 들고.

아이들은 보통 옷장 안의 어둡고 깜깜한 미지의 공간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곤 하지만, 그 반면 또 호기심을 자극당하기도 한다. 슈의 경우 본래 옷을 좋아하기 때문에 옷장은 그야말로 '좋아하는 예쁜 옷으로 가득한 곳'이었고, 피부에 닿는 포근한 천이 많아 그 안에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게다가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중 옷장을 통해 환상 속의 세계로 건너가는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에 옷장 속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뒤쪽에 혹시 문이 있지는 않을지 더듬거린 적도 많았다. 물론 그런 시도는 늘 무의미하게 끝나곤 했지만.

"…. …. …."

그때였다. 그야말로 옷장 뒤쪽에서 희미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슈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니, 잘 들으니 그것은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 같기도 했다. 울음소리. 공포를 자극한다기보다는, 너무나 처절해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뭐지…?"

슈는 무심코 등 뒤를 더듬었다. 그러자 새까만 암흑 속에서 그야말로 있을 리 없는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그것은 마치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문 손잡이 같았다. 아니, 정말로 야무지게 단단한 문 손잡이였다.

반신반의하며 손잡이를 잡고 돌려서 민 순간 눈앞에는 옷장 속이 아닌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여긴?"

슈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곳은 작년까지 슈와 미카가 함께 살았던 이츠키 가의 별채, 그 중에서도 미카의 방이었다. 메인터넌스는 주로 자기 방에서 했지만 미카의 방에서 한 적도 가끔 있었고, 또 감기에 툭하면 걸려 잘 앓던 아이를 간병한 적이 여러 번이었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성주관의 자기 방 옷장 뒤쪽이 왜 이곳과 연결이 되어 있단 말인가. 슈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흑, …으윽… 흡… 흐읍…!"

그보다, 울음소리였다. 이곳이 미카의 방이라면 울음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미카일 터였다. 그 당연한 사실을 한 박자 늦게 깨달은 슈가 다급히 옆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침대에 엎드린 미카가 있었다. 

"카, 게히라…."

하지만 미카는 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주위를 경계하듯 웅크리고 엎드린 채, 이를 악물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미카의 우는 모습도 낯설지는 않았다. 이 아이는, 어쩌면 자신과 닮아 감정 표현에 그리 인색하지 않았다. 격정가인 슈로서는 크게 웃고 크게 울고 크게 떠드는 미카의 목소리가 집중에 방해가 되어 짜증을 낸 적은 있어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조금 더 신중하게 굴라고 야단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예술가로서의 자질과도 연결되며, 미카의 그 커다란 감정이 예술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눌러 죽여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미카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슈는 조심스럽게 옷장을 나가, 거기서 바로 연결되는 미카의 침대로 살며시 내려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슈의 무게로 침대가 눌리지도 않았고 미카는 타인의 존재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어쩌면, 자신은 이 신기한 옷장 뒤 세계에 아무 개입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슈는 조심스럽게 침대를 내려가 미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흐윽, 흑… 흑…."

가만히 엎드려만 있는 줄 알았던 미카는 손으로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참하게 찢어진 Valkyrie의 포스터였다. 본래 벽에 붙어 있었어야 할, 라이브 공연의 포스터가 여러 조각으로 흩어져 있었다. 

미카는 그것을 투명 셀로판테이프로 이어 붙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지만, 흐르는 눈물이 자꾸만 포스터로 떨어지려 하는 통에 그 눈물을 닦느라 손이 다 젖었다. 그 젖은 손으로 포스터를 붙이려니 또 포스터가 젖어서 잘 붙질 않았다. 모든 것이 악순환이었다.

최소한 울음을 그치고, 얼굴과 손을 닦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조차 미카는 생각이 채 닿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이 슬픈 포스터를 원상복구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 가엾은 아이의 지상명제로 보였다.

"농, 카게히라, 그만…."

"응아아, 흐읍, 와, 이래, 흑, 안 붙노…."

그 무의미한 행위를 그만두게 하고 싶었지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금의 슈로서는 그저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카게히라, 가엾고 불쌍한 카게히라, 찢어진 포스터를 원래의 모습으로 깨끗하게 되돌릴 수는 없다는 걸, 머릿속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까마귀. 그저 까악까악 울어대며 허수아비 주위를 맴도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Valkyrie는… 최강이데이. 스승님은, 이 세계의, 흡, 제왕… 반드시, 부활할끼다. 이까짓… 포스터 찢은 거 가꼬, Valkyrie를, 끅, 무너뜨릴 수는 없데이…."

미카가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는 마치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같았다.

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미카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엎드린 아이의 등 위로 몸을 숙여 껴안았다. 분명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데도, 바들바들 떨리는 그 몸과 울다 지친 어린아이처럼 높아진 체온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늘 포옹을 조르던 아이에게 자신의 포옹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슈는 눈을 감고 최선을 다해 차분한 목소리로 미카에게 말을 걸었다.

"아아, 카게히라, 괜찮다. 이제… 네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야. 우리는, Valkyrie는, 단둘이 손을 꼭 잡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물론, 그것은 이렇게 내가 모르던 곳에서 너 홀로 감내했던 외부로부터의 박해와 비애라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한시도 잊지 않겠다. 맹세하마. 너의 괴로움에까지 눈을 돌릴 만큼, 그때의 나는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미처 몰랐던 것을 사과해 봤자 의미는 없을 터… 그러니 굳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다만…."

"…."

"우리가 함께 겪었던 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분명 빛나는 미래로 나아가는 연장선상 위에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 주렴."

딸꾹질하며 흐느끼던 미카의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슈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아닐 텐데, 미카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데에… 응아아, 스승님…?"

***

슈는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신이 있는 곳은 여전히 어슴푸레한 어둠 속이었지만, 옷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작은 불빛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전처럼 완전히 새까만 어둠도 아니고 아까까지 바느질을 하던 의상도 옆에 똑똑히 있었다.

"꿈이었나…."

슈는 한숨을 내쉬며 아직도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꿈이기는 했지만, 묘하게 생생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저 암흑의 시절, 마드무아젤을 껴안고 옷장 속에 틀어박혀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가운데 무의식중에 실제 들었던 소리일지도 모른다. 찬찬히 이츠키 가 별채의 도면을 떠올리니, 정말로 슈의 방 옷장은 미카의 방과 면해 있는 벽에 붙어 있었다.

자신은 스스로의 고통을 견디면서 어렴풋이 옆방 미카의 울음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미처 어루만져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애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것이 시간을 넘어 자신을 그때로 데려가 주었던 게 아닐까.

"하아…."

작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이것을 끝내면, 만나러 갈 사람이 있었다.

***

"후아아~ 피곤하구마. 낼두 일찍 나가야 하니께 빨리 씻고 자야제. 리츠 군은 오늘 더 늦게 들어온다 캤으니께 불만 안 끄고 자믄 되긋제…."

학교 일과를 마치고, 오후 스케줄까지 소화하고 저녁 늦게 돌아온 미카는 잔뜩 지쳐 있었다. 모처럼 파리에서 와 있는 스승이 무슨 일 때문인지 무척 바빠 기껏 성주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 며칠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서운했던 터라, 그 스트레스도 겹친 듯했다.

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들어와 재킷을 벗던 미카는 고개를 돌렸다가 순간 굳어버렸다.

"응아? 스승님?"

"어서 오거라, 카게히라."

목소리가 들리는 위치가 묘하다 싶었더니, 보통 슈가 오면 앉아 있는 소파가 아니라 미카의 옷장 쪽이었다. 의아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미카는 재빨리 슈의 앞으로 다가갔다.

"스승님 방서 옷장 속에 들어가 옷 맹글었다는 얘기는 내도 들었는데, 아직 안 끝난 기가? 결국 스승님 방에는 몬 있게 된 기가? 내는 상관없지마는, 아이다, 완전 대환영이지마는…."

슈는 심심풀이로 뜨던 레이스를 내려놓고, 옆의 빈 공간을 툭툭 쳤다.

"후후. 초대하기에는 기묘한 장소이긴 하지만, 어때. 내 곁으로 오지 않겠니? 생각보다 꽤 아늑하거든." 

"응아~ 또 스승님이 영문 모를 행동을 한데이…. 내, 일단 손 씻고 양치질하고 와도 되나?"

"그럼."

미카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어쨌거나 스승의 기분이 좋아 보이고, 또 자신을 곁으로 불러 준 것이 신이 나서 발걸음도 가볍게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을 마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미카는 옷장 앞으로 다가와, 잠시 망설였다.

"들어오라니까, 뭘 하고 있는 거야."

"내… 진짜 들어가도 되나?"

"음?"

"그… 스승님 혼자만의 공간 아이가? 내 실례해도 되는 기가?"

"이상한 말을 하는군. 이곳은 너와 사쿠마의 2인실이고, 이것은 네가 쓰는 옷장이 아니냐? 오히려 지금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은 내 쪽인데."

누구의 옷장이든, 미카도 슈가 옷장에 들어가 있는 일 자체가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옷장은 언제나 미카의 눈앞에서 닫혀 있었다. 미카를 향한 가장 큰 환영은 정말이지 새끼손가락만큼 열린 문일 뿐이었다. 그 사이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고함소리조차 미카 입장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그런 기억이 있으니, 슈가 옷장에 들어가 있는데 그 두 문이 자신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낯설게만 느껴졌다. 비록 둘이서 손을 잡고 지옥까지라도 함께 가기로 맹세했고, Valkyrie로서 둘이 동등한 인간이자 파트너로서 언제까지나 늘 곁에 있기로 약속한 지금도 한 번 박힌 인식은 좀처럼 바뀌기가 쉽지 않았다.

망설이는 미카를 본 슈가 잠시 이마를 짚은 뒤, 다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기이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사실 강요할 일은 아니지. 하지만… 카게히라, 나는… 네가 이곳에 들어와 주길 바라고, 이 좁은 공간을 너와 공유하고 싶어. 그런 지금의 내 소망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찢어진 포스터를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아무리 바짝 붙여서 그 위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인다 한들 찢어진 흔적까지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온전한 포스터가 아니라, 한 번 찢어진 적이 있는 포스터가 될 뿐이다.

그래도, 슈는 생각했다.

한때 자신이 미카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 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카를 거부한 일 자체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끌어당기면,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상태까지 한없이 가까워진 채로 쉴 틈 없이 붙어 있으면─조금은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그 일에 대한 속죄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포근한 어둠이 얼마나 편안한지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반드시 카게히라 미카 하나뿐이어야 한다고, 슈는 생각했다.

"응아… 응, 내는 언제나 스승님이 원하는 거라믄… 최선을 다해 들어 줄끼다. 싫다는 기 아이고…."

"싫은 게 아니면?"

주춤주춤 다가오던 미카는 옷장 속에서 두 팔을 벌리는 슈에게 결국 덥석 뛰어들어 안기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는, 항상… 스승님이, 흐윽, 어데 있든, 같이 있고 싶었데이…. 그, 근데, 옷장 문은, 닫아 버리믄… 흑… 바로 옆에 있는데도… 갈라져 버리니께…."

"응."

"저 안에, 내도, 같이 들어갈 수 있다믄… 얼마나 좋을까… 몇 번을 생각했나 모른데이…."

펑펑 우는 미카의 등을 토닥이며, 이윽고 슈는 한 손을 뻗어 옷장 문을 닫았다. 어둠이 깔리고 밀폐된 공간 안에 미카의 훌쩍이는 소리만 잠시 이어졌다.

한참 울던 미카가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머쓱하게 웃었다.

"응헤헤, 근데 이상하구마. 꼭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데이…. 내 우는데 스승님이 이래 토닥토닥해준 적, 전에 없지 않았나?"

슈는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카에게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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