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넘어간 세상 (23.05.27 재업)
세상에서 벗어난 끝에 그녀를 기다린 존재는| 야크슈리| 야크샤 반려 설정 x / 날조 o| 마무리 위해 올립니답..
겉보기에는 새하얗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빛이 이곳저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한 공간. 분홍빛의 여인이 인식할 수 없는 시간에 나타나 죽은 듯 미동 없이 떠다니다가 번뜩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던 여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몸은 나른하니, 최악이 따로 없었다.
“…시간의 기록이 있다던 그곳은… 아닌 것 같고. …뭘 하다 이런 정체 모를 곳에…. …분명, 비슈누와 있다가…”
가만히 기억을 정리하던 여인은 떠오르는 것이 없어지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딘지도 모를 곳에 마냥 있을 수도 없었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니만큼, 가만히 있다가 위험한 것들과 마주치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옳을 터였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렇지만, 어디로? 이곳이 어딘지도, 돌아가는 방법도 모르는데. 아니- 꼭 돌아가야 할까? 돌아가려는 그 세상은, 어차피 그가 이미 떠난 세상. 유일한 미련이던 왕의 위가 지워진 느낌도 있다. 그러니, 차라리 이참에.
아.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이곳의 편린을 짚어낸 여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일반적으로는 영원해야 할 책임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이 죽었거나 그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이며- 여인에게 죽은 기억은 없었다.
즉, 이곳은 그녀가 원래 있던 곳이. 그가 죽은 세상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해서 버릴 수 없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여인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생각을 더 이상 잇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에 숨을 크게 삼켰다가 어디 하나는 박살 낼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제 머리에 손을 찔러넣었다. 머리가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아플 것 같은 소리가 주위를 울렸다.
하지만 의도한 소리가 아니었는지, 아니면 그 소리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여인은 떨리는 눈을 푹 내리깔고 힘없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기댈 곳 없이, 지탱할 곳 없이. 아슬아슬하게 허공에서 몸을 수그린 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원망을 삼켜냈다.
죽을 수도 없던 삶, 다른 세상에 와서도 끝내지 못하다니.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은 축축해진 눈가를 거칠게 쓸어내고 붉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아무렇게나 허공에 떠 있던 몸을 세웠다. 슬퍼하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는 같은 상황에 움직였을 테니까.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행동 원리는 여인을 굳건히 세웠다. 변하지 않는 수라라서, 이 순간만큼은 다행이었다.
여인은 서글픈 얼굴을 최대한 비워내며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아무래도 주변에 있는 존재의 의사에 따라 공간이 달라지는지, 서고 싶다고 생각하자 발이 무언가에 무게를 지탱하기 시작했다. 발을 몇 번 굴러 디딘 곳의 강도를 확인해 보고, 그녀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공간은 끝도 없이 멀리까지 뻗어있었다.
기묘한 빛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니, 빛은 두 갈래로 나뉘어 여인을 중심으로 길과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 너머를 비추는 시야는 아무것도 없어서 확 트여있었다. 보이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녀는 가루다족이 아니니 보지 못하는 곳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 모를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여인은 앞으로 나아갔다.
❈
얼마나 걸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돌아다녔을까. 어떨 땐 뭔가 보인 것 같아 뛰다가, 어떨 땐 살짝 지쳐 서 있다가. 정말 오랜 시간을 나아간 여인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다른 존재는 없을 것이다.'
수라인 여인의 기준에서도 오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끝없이 같은 모습만 반복되었으니, 당연히 나오는 결론이었다. 여인은 아마도 이런 장소에 오게 된 원인이라고 예상되는 이를 떠올리며 아득 이를 갈았다. 다시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밟아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나가지도 못할 가능성이 더 크긴 했지만, 희망은 가능성이 있는 한 품을 수 있는 것이니까.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다음, 여인은 힘없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빛방울에 시선을 두었다. 빛 하나하나에 제각기 다른 모습이 비치이는 것이 새삼스럽게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면, 이 빛보다 더 특이한 것도 없을 텐데. 여인은 멍하니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뻗은 빛 너머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
여인은 순식간에 바뀐 주위를 멍하니 둘러보았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풍경. 익숙한데, 어디서 봤더라. 무심하게 기억을 돌아보며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비교해보던 여인은 무언가 이질적인 색을 발견했다. 주변의 숲과는 달리 눈에 확 띄는 분홍색이 너무나 익숙했다. 여인의 눈이 당황과 함께 크게 떠졌다.
그 색의 주인은 한 사람이었다. 도망치듯 다급히 달려와서 구슬 같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는, 분홍빛 머리카락에 여우의 귀와 꼬리를 한 여자. …과거의 자신. 여인은 눈앞의 광경이 어떤 순간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저 멍하니 손을 뻗었던 그 빛이 무엇을 담고 있었는지도.
“…바보. 바보 같으니. …바보야. 바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야크샤. 왜 안 와…”
과거의 여인은 무언가에 상처받은 듯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닦아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원망하며, 이내 그리워하며.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굳어있던 여인은 떨리는 걸음을 옮겨 어리석은 과거의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안돼, 거짓말한 거야.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거야. 날 위해, …널 위해. 원망하지 마. 슬퍼할 거야. 후회할 거라고. 나중엔, 원망하고 싶어도. …그에게 돌아가. 제발… 제발.
여인에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새는 없었다. 과거의 자신을 말리기 위해, 후회했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속삭이고 붙잡을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여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인의 행동과 상관없이 주변은 움직였고, 과거는 기억과 같이 흘러갔다. 여인은 과거의 세상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아, 그냥 기억일 뿐이구나. 여인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허망하게 손을 떨궜다.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꾸지도 못하는 과거를 다시 보게 하다니.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도 잔인했다.
쓸쓸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여인은 가까이 다가온 또 하나의 빛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또 무슨 과거를 보여주려고. …바꾸고 싶은데 바꾸지 못하는 이 상황보다는, 무엇이든 괜찮으려나. 여인은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주변의 모습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누구~게.”
“이런… 이건 또 무슨 의도냐?”
“비밀. 누구게~”
“허허… 그야, 하나뿐인 내 사랑이 아니냐.”
“어머.”
“이거면 되느냐, 슈리야?”
“하나 부족한데?”
“그게 뭘까. 사랑해, 일까?”
“글쎄~?”
“장난스럽긴. 사랑한다, 나의 슈리.”
“후후, 나도 사랑해.”
아.
여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순간도 잊은 적 없던 그가 기억 그대로, 아니, 기억보다도 생생한 모습으로 앞에 있었다. 어느 누가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을 붙들 수 있을까? 인간, 수라, 신. 그 어떤 종족도 이런 상황에서 굳어버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인은 완전히 굳어서 과거의 자신을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받던 행복한 시절의 자신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곁에서 떠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사랑을 나누던 순간을 보게 하다니. 이건 머리 잘 쓴 고문이었다. 무엇이든 괜찮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벗어나려면, 과거를 이동하는 매개체는. 여인은 다급히 지금껏 보았던 빛을 찾았다. 보이는 것은, 사랑을 속삭이는 과거의 그들 곁의 하나 뿐. 하필이면 넘쳐나는 애정을 걷잡지 못하고 입 맞추는 과거의 곁에 있는, 그 딱 하나. 애타게 다른 것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여인은 결국 긴장한 것처럼 입술을 패이도록 물고, 천천히 과거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린 듯이 웃고 있는 그의 푸른 눈이 보였다. 자신의 분홍빛만을 담은, 기억에만 남아있는 푸른 눈.
들여다볼수록 그를 그리는 마음이 멋대로 술렁였다. 아직까지도 그를 사랑하는 가슴이 너무나 괴롭고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여인은 그 통증을 버티지 못하고 빛을 쥐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시야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람대로 바뀐 '기억'은.
“…야크샤…?”
“그만!”
허망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저, 믿을 수 없다는 듯 텅 빈 얼굴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눈물, 주변에 흩날리는 새하얀 털, 땅바닥에 고이고 이곳저곳에 흩뿌려진 피를 지나 산산이 조각난 뼛조각을 본 여인은 급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목소리는 떨렸다. 차마 서 있을 수조차 없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라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주위를 장악하던 광경은 비명이 터져 나오자마자 빠르게 사라졌지만, 여인은 다시 상태를 추스를 수 없었다. 마지막의 그 광경은 여인에게 있어 그런 순간이었다. 절대로 다시 마주할 수 없는 기억, 그 괴로움에서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과거.
그만, 그만. 안돼. 여인은 수 번을 외쳤고, 빌었고, 애원했다. 지워지지 않는 그때부터 정말 끝없이 해왔었다. 제발 저 처참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기를, 모두 꿈이기를. 그보다 더 간절할 수는 없도록, 여인은 여태껏 바라고 기도해왔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무자비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끝없이 반복되었다. 끝없이 떠오르고, 마음을 주저앉히고,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무너지며 가려진 아름다운 얼굴에 짙고도 깊은 서러움이 어렸다. 뜨겁고 흐릿한 눈물이 축축하게 얼굴을 적시고 옷을 물들여갔다. 잔인하게도 죽어서 떠나간 이를 불렀다. 아, …아아. …야크샤….
여인은 무너졌다. 마치 다 극복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깊은 기억 속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처절하게 울던 여인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에도 감정에 따라 종종 붉게 변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물론 그토록 울며 혹사했으니 눈의 실핏줄이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눈물은 그 이상 나오지 않았다. 여인의 눈물 없는 통곡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먼 옛날, 49일이 지나고서는 한 번도 쏟아낸 적 없던 감정이 간신히 세워놨던 어설픈 둑을 부수고 흘러넘쳤다.
그 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울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여인에게 누군가가 급하게 다가왔다. 무거운 푸른색 코트가 차게 식은 여인의 어깨 위를 덮었다. 따스한 체온이 여인을 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눈물에 가려져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가득 찬 것은, 그가 떠난 이후로 평생을 그리워한 그의 색. 햇빛과 같이 따스한 하얀색. 그 색을 본 여인은 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다정한 목소리가 여인의 귀에 내려앉았다.
“괜찮아… 기억일 뿐이야. 넌 이미 극복했고, 난 이곳에 있다. 이 공간에 쌓인 슬픔에 영향을 받았을 뿐이란다. 진정하거라. …울지 말렴.”
여인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그리던 그의 목소리지만, 바로 조금 전에 반복되는 기억에서 들었던 차였다. 자신의 눈 또한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떠난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스한 햇빛의 흰색 역시 방금 전에 보았다. 무엇보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필 평생을 그리워하던 그의 것인 것은 너무도.
“…이제 좀 괜찮아졌느냐?”
여인은 떨리는 고개를 들어 따끔거리는 시선을 옮겼다. 자신이 움직이자 살짝 떨어져 마주하는 얼굴이 드디어 선명하게 보였다. 따스한 햇빛의 백색 머리카락, 깊은 바다 빛의 차갑지만 다정한 눈. 여인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제 손길을 느끼듯 가만히 눈을 감는 것은 먼 옛날 그만의 습관이었다. …아아, 여인은 이 이상 그를 부정할 수 없었다.
“…야크샤.”
무너지듯 그 이름을 불렀다. 오랫동안 부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부드럽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보였다. 야크샤, 야크샤. 한 번, 두 번 이름을 부를수록 그의 입가에 머무르는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다시 한번 울컥해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흘리려는 여인을 살살 말렸다. 그녀가 했던 것과 같이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에 입술을 대어 달랬다.
여인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진정하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것처럼 지긋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이내 입술을 당겨 웃고는 그녀의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이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나누었던 인사를 떨리는 목소리로 입에 담았다. 재회에 보내는, 가장 보편적인 환희.
“오랜만이다…. …슈리야.”
헤어진 이래로 약 천 년, 이보다 적절한 인사는 없었다. 그 짧은 인사 하나에 많은 고민이 있었던 듯, 그리 말하곤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가 눈매를 살짝 휘어 웃어 보이는 모습이 정말 너무나도, 눈앞을 또다시 흐리게 만들어서.
그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또 우는구나. 못 본 새에 울보가 다 되었어. 여인은 흐린 눈으로 당연한 소리를 하는 그를 흘겨보고는 꼭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마주 안아왔다. 달래려는 듯 살살 머리를 쓰다듬고, 놓지 않겠다는 듯이 허리를 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따스한 햇빛과 차가운 물의 향이 그제야 여인의 예민한 후각에 닿아왔다.
너무도 그리웠던, 그의 향이었다.
❈
여인, 슈리는 야크샤의 손을 꼭 쥐어 잡았다.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마음과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은 접촉이었다. 야크샤는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하지 않고 손을 마주 잡아서 은근슬쩍 슈리를 제 쪽으로 가까이 이끌었다. 사락사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는 다시금 속에서 무언가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슈리는 하도 울어서 뜨거운 눈두덩이에 야크샤의 차가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순순히 슈리의 의도대로 손을 내어주고 낮게 웃는 야크샤의 소리가 들려왔다. 한 차례 식히고 나서야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머리로, 슈리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을 보여주는 빛, 마음대로 변화하는 공간. 여긴 대체 어딜까. 어떻게, 야크샤가 이곳에 있는 걸까.
슈리는 자신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그녀가 그를 못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확신과는 별개로 이 공간의 정체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뭐 하는 곳이길래 묻어뒀던 먼 과거의 기억을 들추었을까. 그 어설픈 감정을 동조시켰을까.
야크샤는 고민하는 슈리의 얼굴을 힐끔 확인했다. 그러고는, 짧은 망설임 끝에 여전히 잡고 있던 손을 살짝 당겨서 슈리를 불러냈다. 의아한 분홍색 눈이 다시 한번 푸른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곳은 과거의 빛이란다.”
“!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물었어?”
“글쎄?”
“야크샤.”
슈리의 고운 미간에 자그마한 금이 갔다. 오랫동안 묻어뒀던 옛 성격의 잔재였지만 그것도 잠시, 야크샤의 아, 하는 작은 목소리를 듣고는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다시 보지 못 하리라 생각했던 연인이었다. 재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차인데, 벌써 짜증을 내는 것은 너무 일렀다. 그런 건 나중으로 미뤄도 충분했다.
순식간에 바뀌는 얼굴을 보던 야크샤는 얕게 웃었다. 참으로, 변한 것 하나 없는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렇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지. 야크샤는 대답을 미룬 이유를 떠올리며 입가를 짚었다.
“…그건 아직 비밀로 남겨두고 싶구나.”
“…? 왜?”
“지금 말하기엔 네가 많이 놀란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나도, 이건 어서 말해주고 싶기는 하지만…”
…놀랄 것이 뻔해서, 세심하게 슈리의 얼굴을 살피는 야크샤의 어조는 조심스러웠다. 그 조심성에 슈리의 얼굴도 부드럽게 풀렸다. 자신을 생각해서 미루는 것이라고 하는데, 불만이 생길 리가 없었다.
슈리는 야크샤의 팔을 잡아서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 장난스레 서운한 표정을 보였지만, 당황한 얼굴을 보고는 또한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꼭 말해줘야 해, 슈리가 작게 속삭이자 야크샤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올곧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네, 슈리는 맑게 웃었다.
“그럼,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현재의 빛으로 가는 길이다.”
…현재의 빛? 슈리의 얼굴에 미약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조금 전에도 '과거의 빛'이라는 단어가 언급됐었지.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일까. 이 공간을 이르는 걸까?
야크샤는 으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 슈리는 야크샤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시간 끝에, 야크샤는 오랜만에 보는 곰방대를 들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새하얀 공간을 '과거의 빛'이라 이른다. 이곳에 있는 빛은 네가 보았듯이 모든 과거를 담고 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 우주가 확정되며 사라진 가능성의 자취도 남아있지.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빛이 있는 곳이라 하여 과거의 빚이라고 이름 붙였다.”
“…네가?”
“응. 정확히 말하면 아난타와.”
슈리는 익숙한 이름에 작게 호흡을 멈췄다. 너무 뜬금없는 이름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죽음을 방관한 것이나 다름없는 자, 야크샤와 비견될 만큼 선했지만 너무나 강했기에 경계 당했던 뱀의 왕. 분명 태초 시절 이래로 둘이 친하게 지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걸 묻는 건 적절하지 않겠지. 슈리는 간신히 혼란을 정리하고 가깝지 않은 사이에서 적절할 질문을 꺼냈다.
“……아난타도 있어?”
“얼마 전까진. 지금은 녀석의 이름이 우주에 꼭 존재해야 하기에 다시 내려갔다.”
“어떻게 온 거였대?”
“글쎄… 그건 말해주지 않던데. 여러모로 특별한 녀석이니 무슨 수를 썼던 것이 아닐까 싶다만, 안 그러냐?”
“…응, 그렇지…. …후회되네….”
“…무엇을?”
…아, 이런. 야크샤는 모르지. 슈리는 야크샤의 되물음에 잠시 멈칫했다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별로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인생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에게 말해줄 것을 생각하며 살아올걸.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선택을 할걸. 슈리는 뒤늦은 후회를 삼켜냈다.
“아니야. 만나서 어땠어? 둘이 태초 이래로 만난 적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색하진 않았어?”
“…어색이라. …그래, 오랜만이긴 했지. 반가워서 인사했더니 울기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야크샤 네가 울었다고?”
“아니, 아난타가. 놀랍지 않으냐? 내가 그 녀석 우는 꼴을 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야크샤는 재밌었다는 듯이 웃었다. 재밌다, 인 걸까…. 슈리는 어색하게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아난타와 울었다, 이처럼 안 어울리는 단어들이 또 있을까 싶었다. 저가 기억하는 아난타는 언제나 쓸쓸한 수라였는데도.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네.”
“아무래도 그 우주에서는 어울리지 않았지. 녀석 자신도 울음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말이다.”
“그 우주에서는…? …시간 얘기야?”
“그래. 벗어나고 다시 만나니, 그제야 마음 놓고 울더구나.”
“…”
“…그 우주 미쳐 돌아가는 것은 참 한결같았는데도, 혼자서 많이 애쓰지 않았느냐. 위로해주는 것도 고행이었다.”
야크샤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벗어난 우주에 대해서는 그 이상 말해봤자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슈리는 더 자세히 캐물을 생각을 접었다. 지금은 그저 그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그가 숨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슈리는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다가, 장난기를 가득 담아서 밝은 어조로 물었다.
“친해서 아난타가 운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야?”
“마음에 안 들었던 건 아니다만…”
“나도 울었는데. 내가 운 것도 맘에 안 들어?”
“…하하, 이건 또 실로 오랜만에 듣는 날카로운 질문인데.”
“후후.”
야크샤는 곤란한 듯 쓰게 웃었다. 많이 울어서 아직 멀쩡한 상태가 아닐 텐데, 참으로 날카롭기도 하지. 배려도 너무나 고맙고. …그럼, 이걸 어찌 답해야 할까? 잘못 답해서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잠깐의 침묵 이후, 야크샤는 슈리의 뜨거운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랑 녀석은 달라. 다른 이가 우는 것도 물론 안쓰럽고 신경을 쓰게 된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우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멍청이가 어디에 있겠어.”
“어머.”
“…지금 말하는 건 조금 어긋나는 것 같기는 하다만… 네가 울면 정말 슬퍼. 울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누군가에 의해 울었다면 꼭 누구인지 말해다오. 설령 그게 나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너라면 괜찮은걸. 이유가 있을 걸 알아. …하지만, 응. …그렇지…. …후후, 알겠어.”
“그래, 고맙다. 그리고…. …난, 아난타가 울었던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냥?”
야크샤는 말을 멈추고 슈리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요한 얼굴에서는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 전 느꼈던 감각. 이걸 말해줘도 되나, 하고 고민하는 느낌.
슈리는 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과거, 지금은 걱정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의 자신은 그 고민에 상처받았었다. 지금은 저 우주에서도 벗어났고, 예상이지만 뭔가 위험할 것 같지도 않으니. 슈리는 그러니 알려달라는 마음을 그대로 내보였다. 슈리의 굳은 마음을 느꼈는지, 야크샤는 긴 침묵 끝에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녀석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더 시도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듯이 우는 것이 거슬리더구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려나. 하지만,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았다. 정말로…. …오히려 미안했다는 것이 더 어울리겠지.”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해?”
“…글쎄. 이 이상 그때 느꼈던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하겠구나. 상당히 무엇인가가 얽혀서 복잡한 사정이 있기도 했고…. …너무 어렵군.”
“…너한테도 어려운 거구나. 뭐가 얽혔는데?”
“우린 아직 모르는 것.”
야크샤는 어딘가 쓰라리게 웃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 우린 아직 모르는 것. 슈리는 저도 모르게 함께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분명히 무언가 아는 말투였는데. 쓰디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모른다니. 슈리의 눈이 붉고 차게 식었다. 모순이었다. 아마 야크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야크샤는 몇 발자국 더 나아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슈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슈리는 별말 하지 않고 다가가 야크샤의 옷자락을 붙들어 맸다.
“슈리야.”
“야크샤.”
“…응.”
“알고 있는 거, 가르쳐줘.”
나중에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 모르는 척 넘겼지만, 묻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모르는 채로 있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서 최대한 그의 뜻대로 해주고 싶은 마음이더라도, 모순이 일어났는데 재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연인이지만 연인 이전에 함께 종족을 이끄는 사이였으니까. 그의 뒤를 이어서 종족을 책임지는 왕이 되었었으니까. 야크샤는 가만히 슈리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야크샤?”
“한 발자국만 더 가까이 와보겠느냐?”
“그래…”
슈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야크샤가 해로운 것을 권할 리 없으니 걱정이 있지는 않았다.
야크샤의 바로 곁에 선 순간, 새하얗던 공간이 새카맣게 변했다. 공간과 같은 색으로 의미심장한 존재감만을 가지고 있던 빛들이 온갖 색을 띄어서, 주위가 검어졌음에도 어둡지는 않았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던 슈리는 빛 하나에 비친 모습을 보곤 다시 한번 놀라서 야크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야크샤.”
“응.”
“저 아이, 가루다의 아이야. 내가 키우던….”
“…”
“분명 2단계였는데, 3단계라니. 왜 저런 모습으로…”
“…그렇지.”
“여긴 뭐야? 대체―”
야크샤는 가만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제 소매를 잡은 슈리의 손을 꼭 잡아 오며, 잡지 않은 손을 가슴께 위로 들어 올렸다. 연회색을 띄는 빛이 포르르 날아오더니 야크샤의 손 위에 안착했다. 슈리는 빛 속에 비치이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았다. 차림새는 다르지만 분명 D500년에 본 적이 있는― 하누만의 후손이자 야크샤의 심장을 지닌 아이.
슈리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빛 속의 아직 어린 아이를 보며. 야크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곳이 현재의 빛이란다.”
❈
빛으로 이름을 구분지은 이유는 능히 알 수 있었다. 흰 세상의 빛이 세상의 과거를 보인다면, 검은 세상의 빛은 세상의 현재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야크샤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 슈리에게 그래서 그곳의 빛은 '기억의 빛', 이곳의 빛은 '반영의 빛'이라 했단다. 하고 덧붙여 가르쳐주었다.
“구분 짓는 경계는 없는 거야?”
“익숙해지면 자연스레 알 수 있다만, 특별한 경계는 없다. 지나다 보면 들어와 있게 되지.”
“흐응… 그렇구나.”
다채로운 빛들은 하얀 공간, 즉 과거의 빛에 있던 빛들과 같이 하나하나가 다른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신기한 듯 주변을 돌아보고 빛 하나하나를 조심히 살펴보던 슈리는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는 야크샤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슈리를 가만히 지켜보는 야크샤의 얼굴로는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나누던 이야기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슈리는 망설임 없이 그를 불러냈다.
“야크샤.”
“…응, 슈리야.”
“이곳이랑 해주려던 얘기,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그렇지.”
야크샤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슈리의 질문에 긍정했다. 그리고 또 한 차례의 침묵. 야크샤의 신중한 성격을 잘 아는 슈리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태껏 기다리게 해서인지, 아니면 슈리의 시선이 굉장히 집요해서인지, 야크샤는 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이곳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은데. 그렇지?”
“응.”
“그래…. …아까 말했다시피, 나도 아직은 잘 모른다. 알아 온 바로는, 네게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건… 이곳이 바깥의 세상이라는 것, 그 정도겠지.”
“…바깥의 세상?”
“우리의 세계와는 별개의 세상.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의 우주에서도 마지막의 '시간'을 바라보는 곳.”
슈리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일반적인 상식―물론 나스티카이니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야크샤 역시 그 얼굴에 깊이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해할 수 없어서 몇 날 며칠 인상만 쓰고 다녔었다. 시간 개념이 그게 맞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어떻게, 도움이 될만한 말을 해줄 수는 없을까. 야크샤는 고민하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소설을 읽는데 그 소설의 이야기가 실제로 살아있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이 소설 쪽이라는 부분에선 흔히 상상하는 부분과 다르지만.”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어?”
“저 너머에서 넘어오는 애정을 느끼고 있노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걸.”
“애정?”
“응, 애정.”
“…더 이해하기 어려운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겠어.”
“막 나온 순간엔 어려운 법이지. 그래도 있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게다. 그 애정은 너무나 달콤하거든. 직전의 아픔도 잊을 수 있을 만큼.”
야크샤는 온화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곳이 그만큼 편안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무색하게도, 슈리는 '직전의 아픔'이라는 말에 정신을 빼앗겨 저도 모르게 일그러트리던 얼굴을 펴고 떨리는 눈으로 야크샤를 바라보았다.
슈리에게는 인정하기 싫어서, 받아들일 수 없어서 머릿속 저편으로 미뤄놨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덤덤해 보이지만 야크샤는 죽은 나스티카였고, 죽은 나스티카는 0차원에서―.
슈리는 급하게 야크샤의 소매를 잡았다. 걱정, 불안, 혼란이 가득한 분홍빛 눈을 고요하게 애정 어린 푸른 눈이 내려다보았다.
“슈리야?”
“야크샤, 그.”
“응. 왜 그러느냐?”
차분한 목소리에는 숨기지 않은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막 알게 된 어려운 사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이가 갑자기 소매를 잡고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평범한 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평범한 이라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0차원을 언급하고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뎌졌다.'
0차원에 떨어진 나스티카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는 슈리는 야크샤의 반응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멀쩡한 상태를 가장하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슈리를 살피던 야크샤는 뒤늦게 아, 하고 침음을 내었다.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심한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야, 슈리야. 별거 없어서 잊은 것이다.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말아…”
“…아픔이라며.”
“그건,”
“0차원에서의 일이잖아. 내가, 내가. …0차원에서 우리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슈리의 붉은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야크샤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슈리의 어깨를 다급히 잡아 안았다. 먼 옛날과 같은 단조로운 심음이 슈리의 예민한 귀에 들려왔다. 이 단조로움은 습관적인 걸까? 괜찮아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정말 무뎌진 걸까.
아무리 야크샤라고 해도 영원의 시간 동안 자신이 찢겨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을 리는 없었다. 고통스러웠을 것이 분명했다. 누구는 육체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하지만, 찰나가 억겁이 되는 영원을 고통 속에서 지내면서 멀쩡할 수는 없었다.
슈리의 떨리는 몸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야크샤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파하는 슈리를 보며 자신도 더욱 동요하던 때가 있었다. 이 아름다운 얼굴에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뒤늦게서야 거부 없이 죽었던 저 자신을 욕하고 미워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가 감추기 시작함에 따라 더더욱 대신 아파하고, 그녀가 숨기는 눈물을 대신 흘렸었다.
다행이랄지, 지금은 숨기지 않으니까. 눈물을 닦아줄 수 있으니까. 야크샤는 조금 더 힘을 줘서 슈리를 끌어안았다. 울음과 함께 조금씩, 속절없이 떨리던 몸이 진정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진정했느냐?”
“…응. 미안해.”
“아니야.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었다.”
“응…”
이 정도면 괜찮을까, 야크샤는 잠시 고민하다가 슈리를 안아 올렸다.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쿵쿵 뛰는 심장이 맞닿았다. 야크샤의 심장이 아직 인간계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슈리의 눈이 놀라서 커졌다. 아니 그 이전에, 죽었는데 심장이 뛰고 있다니? 슈리는 꼭 붙이고 있던 몸을 떼어내 야크샤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던 야크샤가 더 짙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는 거, 알 수 있지?”
“…응. …어떻게…?”
“이곳에서의 심장은 감정의 지표이다. 가지고 들어오던, 안 가지고 들어오던, 누구나 감정이 격한 정도에 따라 일정하게 뛰는 심장을 지니고 있어.”
“그런,”
“그 증거로, 네 심장은 계속 빠르게 뛰고 있지 않으냐. 평소대로라면 진정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났는데.”
슈리는 야크샤가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벅차, 하고 웃으며 가리키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 빨라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지금껏 자각하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기억을 보던 순간부터 지금까지ㅡ 제 심장은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방해되는 시끄러운 심장 소리 속에서 야크샤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분한 건 순전히 귀가 좋아서였다.
야크샤는 슈리의 심장 소리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네가 모든 것을 듣기를 바라니, 나도 내가 겪은… 내가 아는 것들을 모두 말해줄 거야. 그러니 진정해도 괜찮다.”
“! …응.”
“별거 없어서 그리 비장하게 답해주면 곤란한데. …음, 그냥 0차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의식을 잃었고… 정신을 차리니 네가 처음 나타났던 그곳에 있었다, 이 정도 밖에 없다.”
“…정말?”
“응, 참으로.”
슈리는 야크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야크샤는 거짓말을 할 때 별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슈리는 이럴 때 야크샤의 거짓말을 언제나 알아차려 왔었다. 걱정시키기 싫어서 숨기고자 하는, 그 뻔한 이유의 다정한 거짓말을 말이다.
1초, 2초, 3초. 시간이 멈춘 것처럼 너무나 긴 수 초가 흘렀다. 의심을 숨기지 않고 훤히 드러낸 분홍빛 눈을 피하지도 않고 마주 보던 야크샤가 작게 웃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알아차리지 않았느냐?”
“…안 믿겨.”
“이런, 진짜인데. 그래서 방금은 굉장히 고민했는걸.”
“그런 거짓말 잘 하잖아.”
“넌 그런 내 거짓말을 늘 알아차려 왔지.”
당당하달지 뻔뻔하달지, 슈리는 야크샤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다시 한 번 얼굴을 확하고 찌푸렸다. 내용은 사실이긴 했지만 걱정하는 수라에게 할 만한 어조는 아니었다. 특히 그에게 당한 것이 많은 슈리에게는 더욱.
뒤늦게 그 사실에 생각이 닿은 걸까? 야크샤는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가 미안해, 라며 짧게 사과했다. 슈리는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고 재촉의 의미로 다시 바라보았다. 야크샤는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잇자면.
“…오랫동안 과거를 헤매다가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이곳에 존재하는 이들의 능력인 듯싶기는 하지만―”
“…미래도?”
“아. …응, 미래. 지금의 네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저 편 즈음에 있다. 완전히 검어서 언제, 어느 시점을 보게 될지 모르는 곳인데… 내가 보기에 그건 미래의 무지성을 색으로 나타내는 것 같더구나.”
“무지성은 검은 거야?”
“앞날이 깜깜하다고들 표현하지 않느냐. 아까 과거의 불가변성은 훤히 보이는 흰색이었고, 이곳 현재의 실시간성은 모든 색이 될 수 있는 다채색이듯이 미래의 무지성은 알 수 없는 검은색이라고 결론 내렸었다.”
“흐응… 그것도 아난타와?”
“음, 어쩌다 보니…?”
어라, 딱히 추궁하려고 물은 건 아닌데. 슈리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야크샤의 푸른 눈을 보곤 미소 지었다. 이전 세상의 상식은 잊고 살았을 법 한데도, 이런 걸 보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구나 싶어- 기분이 나아졌다.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돼. 나스티카끼리는 친구가 없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둘이 친한 건 이해했으니까. 그럼… 네가 죽고 나서의 나, 모두 본 거야?”
“그래… 아마도 대부분은. …후회도 여럿 했지만, 잘 이겨낸 듯 보여 안심했다.”
“…꽤 부끄러운 모습이 많았을 텐데? 비슈누랑 친한 척 한 거라든가…”
“네가 열심히 살았던 모습이 부끄러울 리 있겠느냐.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열심히 이끌어주고 있구나 싶어서. …수고 많았다, 슈리야.”
야크샤는 슈리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아 안았다. 직전에 똑바로 보았던 진심이 가득 어린 바다 빛 눈에, 자상하고 따스한 그 목소리에. 슈리는 왠지 모르게 먹먹해 오는 마음을 붙잡아 누르며 저를 안은 야크샤를 마주 안았다. 안 그래도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였는데 더 울 수는 없어서 찡해오는 코를 최대한 억눌렀다.
또다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슈리는 야크샤의 품에서 벗어났다. 다시 만난 그 이후부터 감정적인 추태를 너무 많이 보였다. 감정이 진정됐으니 이제는 그가 있는 곳에 대해, 그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절대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고자 말을 돌리는 것은 아니고.
“다른 새로운 것도 있어?”
“글쎄, 또 무엇이 있을까. …음, 제법 신기한 재주도 생겼다는 것? 이건 아마도 오래 있다 보니…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내게만 생긴 능력인 듯싶기는 하다만.”
“네게만…? 아난타에겐 생기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 친구는 나도 잘 모르겠고, 다른 나스티카들도 대부분 이곳으로 왔거든. 페투판도 이곳에 있었고… 가장 최근에는 간다르바족의 메나카가 고생 끝에 왔지. 대부분 맨 처음엔 이곳으로 온단다.”
“이곳으로? …난 다른 방식으로 온 모양이네.”
“아무래도. 네 경우엔 반영의 빛에서도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기억의 빛에 있어서 다행이지.”
“……미안해.”
“네가 무엇이 미안해. 자책 말고 이것 좀 보거라.”
야크샤는 슈리를 달래주고 빛들이 어우러진 구석을 바라보았다. 야크샤의 시선이 움직임에 따라 현세를 담은 빛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뒤바뀌었다. 여태껏 요지부동으로 한 사람만을 비추던 하나의 빛이 다른 사람을 비추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빛이 다른 장소, 다른 인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는 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속의 광경이 완전히 뒤바뀌다니. 슈리의 얼굴이 순수한 놀라움으로 멍하게 바뀌었다. 저 광경이 바뀌는 것은 그 긴 시간 걸어오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그마한 광경에서 눈을 떼며, 슈리는 빛과 공간이 이룬 빛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바뀐 것은 빛 속의 광경밖에 없는데도 이전까지와는 달라 보였다. …굉장해, 슈리는 속으로 그리 말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맨 처음 이후로는 줄곧 시선을 이쪽에 고정하고 가만히 반응을 지켜보던 야크샤가 갑작스레 질문해 온 것은 그때였다.
“…슈리야. 방금, 굉장하다고 생각했지?”
“…!”
슈리는 놀라서 야크샤를 바라보았다. 형형색색의 빛에 둘러싸인 채로 작게 웃던 그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가 머쓱한 얼굴로 들고 있던 곰방대를 만지작거렸다. …이걸, 지금 말해도 될까 잘 모르겠는데. 어색하게 꺼낸 목소리에는 묘하게 미안한 기색이 깃들어있었다. 야크샤는 머뭇거리다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나는 네 마음이 그대로 들린다.”
“…?”
“나중에 물의를 빚고 싶지 않아서 지금이라도 말하는 거다만, 타인의 마음 또한 들려.”
“…뭐?”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하구나. 네가 더 당황할까 봐서… 진정하고 말해준다는 것이 이렇게 늦어졌다. 최대한 안 들으려고 노력하기는 했다만, 초월기마냥 내가 바라는 대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야크샤는 드물게 당황해선 횡설수설했다. 나긋하던 목소리가 급하게 어영부영 이어져갔다.
당황해서 말문을 잃었던 슈리는 그 모습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래― 어쩐지 아까부터 말하지도 않았는데 의문이나 생각 등을 잘도 알아차린다 싶었다. 납득이 갈 수밖에 없는 정황과 본인의 부인에, 슈리는 빠르게 정신을 되찾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이 공간 속에 있는 존재의 생각을 읽고, 아무런 제약 없이 어디든 발을 들이며-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빛'을 바꾸는 능력. 가장 먼저 죽은 존재는 결코 아니고, 가장 강한 존재도 아닌 그에게 왜 이런 능력이 생긴 걸까. 보통 무슨 역할에 이렇게 지배적인 능력이 주어지지?
보통은, 지배자에게. 아니면 그에 준하는 존재에게-
“…야크샤. 솔직하게 말해줘.”
“무엇을?”
“내가 볼 때, 넌 이 공간을 지배할 수 있어. 그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건 확실해.”
“…그래. 거기까진 나도 생각해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야크샤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스스로도 잘 모른다는 것은 잘 알겠다. 슈리는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야크샤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진 걸까. 야크샤가 이 공간에 대한 지배를 부여받았다면, 죽어가는 이들을- 그리고 죽을 이들을 다 볼 수 있었을 것이고. 가뜩이나 삶에 지쳐있던 그가, 0차원에서 고통받던 그가 그런 걸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그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아난타처럼―
“…아.”
“슈리야?”
“…야크샤. 아난타가, 이름의 힘이 필요해서 다시 내려갔다고 했지?”
“그래.”
“그럼… 그럼 있잖아. 이건 네게 좀 미안한 질문이지만,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데.”
슈리는 야크샤의 옷깃을 잡았다. 분홍빛 눈이 간절하고, 다급했다. 그를 보는 야크샤의 푸른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놀란 듯 크게 떠졌던 눈이 짙은 미소와 함께 담담한 빛을 띄었다.
슈리가 깨달았을 때는 야크샤가 그녀의 머리에 그의 큰 손을 올린 후였다.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고, 야크샤는 느리게 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천천히. 손길과 같은 속도의 호흡으로.
“진정하거라. 너무 흥분했어.”
“…아, 응…”
“잘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건 너무 오랜만이지. 어색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은 이해한다. 그래도 천천히- 알아가는 데에 익숙해지자꾸나.”
“…응.”
야크샤의 눈은 단단했다. 오롯이, 굳건하게 버텨주는 그 눈이 너무나 믿음직스러워서- 슈리는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이곳에서 심장이 뛰는 건 감정의 격정을 의미한다는 야크샤의 말을 떠올렸다. 슈리의 숨이 다시 평온해지자, 야크샤는 다독이던 손을 떼며 슈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물어봐 줄 수 있느냐?”
“…아난타가 내려갈 수 있었다면… 야크샤, 너는 내려올 수 없었던 거야?”
슈리는 한 번 더 숨을 삼키고 질문을 건넸다. 이 질문이 탓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그렇기에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진정하고 나자 든 왠지 모를 안도감에 이 의문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마음이나 생각이 들린다고 했으니- 그는 아마 이런 자신의 의문을 이미 알고 달래준 게 아닐까.
예상대로, 야크샤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매개가 없으면 불가능하지… 적당한 것은 한 가지 있지만, 내 충분한 매개는 지금 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다.”
“매개가 뭔데? 충분한 것이나 적당한 건 뭐고?”
“그 세상에 머무를 통행증-같은 것이라고 할까. 적당한 것은 아주 일시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 충분한 것은 원하는 기간만큼 가능케 하는 것이란다.”
“…뭐가 필요한 건데?”
“적당한 것은 생기(生旗)가 남아있는 생전의 육신. 충분한 것은 이름이지.”
―이름. 슈리는 작게 입을 벌렸다.
“…이름… 충분한 게 없다고?”
“그래, 없다.”
“말도 안 돼. 야크샤족이 있는데? 오직 네 이름만을 지니고 네 영향만을 받는,”
“우선 내 영향만 받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나간 육신이 기능하는 것을 내 일부로 취급하지는 않지 않느냐. 같은 원리란다.”
야크샤는 미소 지으며 빛방울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는 빛 하나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자취를 남기고 아름다운 한 폭의 정경을 만들어냈다. 이따금의 유희란다, 하고 조용히 속삭이는 얼굴은 방금 말한 내용의 경중을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평온했다.
“…심장은?”
“제자에게 있지. 이따금 흔들리지만 잘 쓰고 있더구나.”
“아니, 그. …미안, 불쾌할 수 있는 건 아는데. …그걸로는… 못 내려오던 거야?”
“…심장과 같은 적당한 것은 일회성이니 말이다. 그저 보고 싶다- 뿐일 때 쓰는 것은 아깝고… 도울 수 있을 때 써야지. 그래야 남겨둔 의미가 바래지 않을 것 아니냐.”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남긴 건 아니긴 하지만, 야크샤는 멋쩍은 듯 길게 내린 제 머리카락을 두어 번 꼬았다. 제 행동을 보지도 못한 듯 굳어있는 분홍색 눈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분홍빛 눈이 답답한 듯 서글픈 빛을 띄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야크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슈리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야크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슬픈 눈을 하는 게냐. 너 자신도 모르는 마음은 나도 알 수 없단다.”
“…미안. 그냥…”
“…급하게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이곳에선 남는 게 시간이니 말이야.”
자, 저것 좀 보렴. 야크샤는 곰방대를 들어 여러 가지 빛을 가리켰다. 시선을 따라 움직이던 빛방울이 하나하나 색을 더해가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생생하게 보이는 '현실'이 행복의 웃음소리를 전해왔다. 왠지 그리운 밝은 소리에 슈리는 야크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꿰뚫어 본 사람처럼 담담히 웃던 야크샤는 다시 한번 곰방대를 들었다. 지팡이 휘두르듯 가볍게 돌리자 순간 주변이 온통 까매져서, 슈리는 다급히 야크샤의 팔을 잡았다.
“야크샤, 이건…?!”
“네게 필요할 것 같아서.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이지. 꽉 잡거라, 느낌은 순간이란다.”
슈리는 눈을 꾹 감았다.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원래 세계에 있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철렁였다. 이것도 무지가 불러일으킨 과장된 공포일까- 최대한 공포를 억누르던 슈리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 순간보다 두려운 순간은 있을 수 없으니, 어떤 것이 보이든 이겨낼 수 있으리란 의지였다.
그렇게 눈을 뜬 순간 보인 것은 온통 새까만 어둠. 보이는 것은 꼭 붙들어 맨 야크샤의 새하얀 옷자락 뿐이었다. 따스한 체온이 더욱 강하게 잡아오는 것이 느껴진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는데― 슈리는 생각을 멈췄다.
방금 그건, …그 감각은, 대체.
“누구를 떠올렸느냐?”
야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자 온통 새까맣던 모습이 바람에 날려가듯 사라지고 그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슈리는 제 얼굴을 더듬었다. 무슨, 무슨 얼굴을 하고 있지. 방금 그 감각은, 난.
“…괜찮아, 아름다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응…”
“누구를 떠올렸느냐?”
“……”
슈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 이 감각이 뭐길래, 이렇게 묻는 걸까. 아니, 말하고 들을까. 벙긋거리던 입술이 날카로운 이빨에 찢겨나갔다. 야크샤는 슈리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어서 입술을 어루만졌다. 회복 초월기 특유의 빛이 나고- 야크샤는 속삭였다. 괜찮아.
“…하누만.”
“…”
“하누만을 떠올렸어. …이 느낌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
“무슨 감각을 느꼈는데?”
“고통스러운… 심장이, 아픈 감각. 그런데도 무엇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하누만이 이별의 아픔을 겪으려는 모양이구나. 역할에 갇혀 저지하지도 못하는, 서글픈 이별을.”
야크샤는 시선을 떨구었다. 새하얀 옷자락에 비치이는 서로 다른 현실의 빛들이 일순 어두운 색을 띄었다. 너도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었거늘- 안타까운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슈리는 말없이 그런 야크샤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원래의 세상에 있을 때는 깨닫지도 못했던 무언가가 생각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방해받았던 걸까. 그럼, 내가 해왔던 모든 것은 내가 내 의지로 행하고 경험했던 것이 맞을까? 계속해서 이어지려던 의문을 끊은 것은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자신을 바라보던 야크샤의 목소리였다.
“…그럼 슈리야, 이즈음이면 너도 느꼈을 것 같은데.”
“…”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의지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느냐?”
“…응.”
“…참 너그러운 분이지? 우리의 창조주께선. 자신의 개입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주시다니 말이야.”
창조주- 슈리는 눈을 크게 깜박였다. 창조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작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자, 브라흐마. 방관하면서도 심기에 어긋나는 것을 가만 두지 못하고, 모순적인 그 신. …그가 이렇게 생각까지 억제할 수 있다고? 너그러워? 슈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야크샤는 미소 지었다.
“브라흐마 님… 아니, 브라흐마가 아니지. 그도 충분히 대단한 권능을 지니고, 우리의 세상을 만들긴 했지만 그에게 이 정도의 권한은 없지 않았느냐.”
“…그렇지? 설마 했어. …그럼― 그 창조주는 누구야?”
“브라흐마를, 시바를, 비슈누를… 즉, 시초신을 만든 분. 우리가 있는 세상이 이야기로서 다른 이에게 보여지도록, 처음을 설계한 분이지. 오래 지내다 보면 절로 깨닫게 되더구나.”
“시초신을 만들었다고? 브라흐마가 만든 또다른 세상이 아니었던 거야?”
“그래. 그래서 비슈누도, 칼리도 이곳에 오지 못하지. 오히려 그들은 더 이곳에 올 수 없단다. 그 우주에 너무도 강하게 속해있기 때문에….”
야크샤는 상체를 낮춰 슈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새하얀 옷이 바닥인지 모를 곳에 끌리듯 내려앉았다.
“슈리야. 더 따라오겠느냐?”
“…”
“더 많은 것을- 알려줄게. 이제 정말 앞으로 나아가자꾸나. 이 넘치는 사랑을 네가 느꼈으면 좋겠어.”
야크샤는 웃었다. 이곳에서 만난 이후로- 아니, 언제나 웃고 있는 편이기는 했지만, 훨씬 더 깊게. 유혹하듯이.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홀려버릴 정도로 황홀한 웃음을.
그러나 그 내용은 너무나 당연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말이라서. 다정하고 상냥한 그 성품이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말이라서.
“…당연한 걸, 물으면 안 되지.”
슈리는 마찬가지로 웃었다. 화답하듯이, 아름답게. 물기 어린 분홍빛 눈이 찬란히 빛났다. 다시 만난 순간부터 헤어질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던 이에게- 그 질문은 영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갈 거야. 언제든, 어디로든. …야크샤. 나 잊은 게 있었는데, 대답해줄 수 있어?”
“응. 무엇이냐?”
“나 보고 싶었어?”
슈리는 물었다. 여태껏 불안정하던 모습과는 달리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를 확신하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분홍빛 눈이 반짝였다.
야크샤는 두어번 깜박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았었지, 기억 속의 모습이 얼핏 보여 반가웠다. 슈리의 손등에 짧게 입 맞춘 야크샤는 진심을 몇번이고 접어 담아서 대답했다.
“너무나도.”
드디어!!!!! 다썼다
드디어!!!
...이거 작년 4월부터 쓰던 거래요^ㅁ^ 1년 1(2)개월 실화냐
원래 플롯이랑 상당히 달라지긴 했는데 음...... 최대한 담담하게 감정을 깎아냈습니다.
지금은... 얔슐 다 포기해서...(바반 최고 귀여움) 쓰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지어야하니까....
밑에는 원래 트위터에서 썼던 태초의 버전이랄까.. 그냥 (남에게 보이기엔 부끄럽지만 그래도 기록은 남겨둘수록 이로우니까 하는) 백업용으로.... 별 내용 없어요!
.....얘 퇴고 해야해 말아...🙄..
암튼
끝!!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