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베라

✶6 얼어붙은 우주

무너지려는 ―을 위로하고자|란 사이로페+야크샤+아난타

ESAVIR by Ri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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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6월 29일에 풀었던 사라질 가능성의 란과 야크샤, 그리고 아난타의 이야기입니다.

❅ 원작에 없는 캐릭터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꺼리신다면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 시점이 뒤섞여 있습니다. 원작에선 있을 수 없는 시점이고 시간선입니다.

❅ 쓰던 당시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최신화 스포가 있습니다.

❅ 란 사이로페 캐해가.. 어... 네. 우울합니다. 참고해주세요.


새하얀 빛이 났다.

그저 새하얀 공간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던 무렵, 란 사이로페는 한순간 시야를 가로막은 새하얀 빛을 피해 팔을 들고 눈을 감았다. 질끈 감지는 않았다. 의도한 바는 일절 없었지만, 그런 난데없고 곤란한 상황에 지긋지긋하게도 익숙해져 있었어서 그리 하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처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빛이 사라졌을 때, 곁에 있던 이의 존재감이 사라진 찰나, 그리고 주변의 온도가 미세하게 내려간 것 같은 순간. 란 사이로페는 자신이 흰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눈 감은 동안에 나타났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문 같은 건 없었는데. 란은 조심스레 주위를 경계하며 눈을 떴다.

그리고, 색을 드러낸 보랏빛 눈에 비친 모습은.

“…이건, 대체.”

온통 얼어붙은 우주가 보였다. 행성 바깥으로 나올 때 느껴지는 그 한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얼리려는 얼음의 한기가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얼어붙은 행성 그레스반과 윌라르브 바로 옆 얼음의 행성 할무트의 모습이 우주 전체에 널려 있었다.

그래. 보이는 것은, 한 마디로.

얼음 뿐이었다.

배운 역사에 이런 순간이 있던가. 란은 충격에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가히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사고가 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돌아갔다.

우주 전체가 얼었다. 이런 역사가 있는가? 아니, 배운 것 중에선 없다. 그렇다면 지워졌나? 수라나 신들만이 아는 역사인가? 아니. 말하는 것 좋아하는 성질 더러운 꼬맹이 신이 말하지 않았을 리 없다. 불 기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면 정말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일 텐데, 그 땅꼬마 신이 아니더라도 아그니 님이 브릴리스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라.”

본능에 입각해 이성 없이 생각하고 일련을 이으며 결론을 내리던 머리가 익숙한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네가 왜 여기에 있니?”

놀라서 바라본 옆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금빛이 감도는 분홍색 눈.

그 고유한 눈을 가진 최강의 존재가 저와 마찬가지인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란은 반가움과 당황이 동시에 어린 얼굴로 멍하니 상대를 불렀다.

“…아난타 님?”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여긴 곧 사라질 우주야.”

“…예?”

“얼른 돌아가자. 데려다줄게.”

아난타는 급하게 란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것처럼,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란이 그 답지 않은 모습에 의아해하던 찰나에- 한기가 느껴졌다. 새삼스럽고, 갑작스럽고, 아프게도 낯설지 않은 한기가. 여태껏 느껴왔지만 뼈저리게 익숙한 감정이 드는, 그런 한기가.

란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발을 멈췄다. 순하게 끌려가던 몸을 굳혔다.

“아난타님. 이건, 대체…”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아난타는 움직임을 멈췄다.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았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란은 속절없이 몸을 떨었다. 뼛속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가 너무나도 아팠다. 추위 때문만이 아니라, 한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탓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아난타가 결국 서럽게 웃었다.

“어서 와, 얼어붙은 세계에.”

“……아난타 님… 이거. 이 한기는,”

“많이 춥지. 넌 야크샤의 심장을 가졌으니까 아프기도 할 거야. 정말 슬퍼하고 있거든, 지금.”

“대체…”

“마지막 마음이 죽어서. …희망이 사라져서 그래. 그렇다고 들었어.”

그리 말하는 아난타의 목소리는 공허하게도 씁쓸했다. 타인을 마주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눈이 젖어있었다. 마치 희망이 사라진 것이 타인이 아닌 자신인 것처럼.

란은 그런 아난타의 모습을 살피지 못했다. 혹독한 추위에 힘겨워서 그리 넓게 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온 신경을 다른 곳에 팔아두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마지막 마음이 죽었다, 희망이 사라졌다. …그 말은, 이 광경이 왕이 자살을 앞두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말.

“…아…”

이성이 사고를 가속했다. 곧 사라질 우주라는 아난타의 말이 다시 들렸다. 겪어본 적 없는 왕의 자살이라는 상황을 생각했다. 얼어붙은 우주를 보았다. 퍼즐 조각이 하나하나 맞아 들어갔다. 아까 전의 추론이 사실이라는 결론이 금세 내려졌다.

이곳은.

왕이 살아남은 가능성의 세상이다.

살아남아서 이토록 아파하시고, 슬퍼하시고, 못 버티시는 것이다.

“……이런… 이럴 바엔.”

살아남아서 이렇게 괴로우실 거라면.

차라리.

“!”

자신이 한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란은 양팔을 붙들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산 것보다 죽은 게 낫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어떻게.

어떻게……

스스로 했던 생각이 무서웠다.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 생각이, 끔찍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 마치 무언 마법사들을 보며 이따금 들었던 감정처럼.

두려웠다.

두려움에 잠겨 추위에 떨고 있는 란을 보는 아난타의 얼굴은 한결같았다. 약간 달라진 것 같은데… 하긴, 시간을 거스른 여정에선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럼.

어째야 할까.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최선을 다한 무표정으로 너무할 정도로 이성적인 생각을 이어가던 시간은 눈을 감았다. 어쩌긴, 살려야지. 살아가게 도와야지. 스스로 잠에 들려는 친우가 이런 상황에서 할 법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에, 생각을 잇는 대신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그래도, 응.

이 아이는 살려야지.

그렇지, 야크샤.

아난타는 몸을 숙였다. 다정하게 턱을 들어 올려서 고개를 푹 숙이고 하릴없이 바닥만 바라보던 보랏빛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왜 그래, 괜찮아?”

“…아.”

“추워서 힘드니? 얼른 와. 원래의 길로 데려가 줄게.”

란은 아난타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난타는 멀쩡해 보였다. 기억 속의 모습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다.

주변이 온통 얼어붙어서 정지한 상태인데도 이 추위에, 이 아픔에, 이 죽음에 조금도 영향 받지 않은 모습인 건, 이 자가 나스티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난타'라서일까.

…아니,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란은 빠르게 고개를 저어서 머릿속을 비웠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심장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이 따르는 곳을 보았다.

란은 그곳을 가리켰다. 아난타의 뒤쪽이었다. 아난타가 처음부터 한결같이 가리고 선 방향이었다.

그곳은, 왕이 울고 있는 곳이었다.

“저곳, 데려다주세요, 아난타님.”

흔들림을 멈춘 곧은 시선이 자신을 보내고자 마음먹은 시간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 담긴 의지를 읽은 왕의 친우가 한때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꺼내 담았다.

“…가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어.”

“더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괜찮아요.”

“보고 싶은 존재가 있잖아?”

“…절 죽이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근거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길이 없는 자신감이기는 하지만.

아난타는 말없이 란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얼어가는 땅을, 자신의 입에서도 나오기 시작한 희뿌연 김을 보았다. 살얼음이 에위는 바람에 붉게 터지려는 인간의 연약한 몸을 눈에 담았다. 오랜 친우를 위한 마지막 애정을 고민했다.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아난타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란의 손을 잡았다. 여태껏 등지고 서 있던 바로 그 방향을 란의 시야에서 보이도록 트여줬다. 다른 주변과는 차원이 다른 새하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란은 멍하니 입을 벌렸고, 아난타는 쓰디쓴 커피를 마신 것처럼 웃었다.

“야크샤는 이쪽이야. 네가 알아차린 게 맞아.”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것 같아?”

방긋 웃는 얼굴을 본 란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다, 웃고 있는데. 분명히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무섭지.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리며 빠르게 굴러갔다. 언제나 나쁜 쪽으로 예민한 감이 늦지 않게 정답을 알려줬다.

…눈, 평소와 달랐지.

금색이 감도는 진한 분홍색의 눈은 언제나 인간과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방금, 한순간에 스쳐 지나간 그 눈은, 금색의 뱀과 같은 눈이었다.

예민해질 구석이 어디에 있던 거지? 다시 한번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괜찮으십니까, 평범한 질문이다. 특별히 뭐에 걸릴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오해했나? 오해라면, 그 아난타님이 오해할만한 요소는,

―아.

야크샤님에 관해 물은 걸로 착각하신 거구나.

란은 정답을 찾아냈다. 이유를 알아내니 난데없는 살기도 이해가 갔다. 계산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라서 인간답지 않게 순식간에 굴러간 사고를 짐작하지 못한 아난타가 급하게 내려간 고개에 당황해서 내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게 아니라. 란이 뭐라고 말하기 전, 곤란한 듯 시무룩한 얼굴을 하던 아난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 지금 약간 더 예민해져서.”

“아뇨! 전 괜찮습니다. 그, 제가 물은 건,”

“아. …나에 관해 물은 거였구나. 난 괜찮아. 나보단-”

아난타는 푸근하게 웃었다. 오해가 풀린 얼굴은 방긋 웃는 것을 가장하고 있던 얼굴과 다르게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란은 그 따스함에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서글픈 눈이 새하얗게 꽝꽝 얼어붙은 작은 공간을 향하자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아난타의 금물이 떠다니는 분홍색 눈도, 그 눈이 향하는 곳을 다시 본 란의 보라색 눈도, 걱정과 슬픔을 머금고 울렁였다.

“…야크샤가, 안 괜찮지.”

꾹꾹 억눌린, 물에 젖은 화선지처럼 먹먹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공간을 울렸다. 그게 보였다.

…어라?

란은 끔벅끔벅 눈을 깜박였다. 추워서인가, 시야가 불안정해진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벌써 시야가 흔들리는 건…

다소 다급한 얼굴의 란을 봤는지 아니면 무언가를 다짐했는지, 아난타는 란의 어깨를 짚으며 단단한 목소리를 냈다.

“상황을 알려주자면, 자신마저도 얼어붙는 한기를 머금고 있어서 혼자 우주 구석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고 있는 상태야. 내가 최대한 막아주겠지만 얼기 시작하면 떨어지렴. 야크샤는 널 죽이고 싶지 않을 테니.”

아난타의 얼굴은 비장했다. 절대 실패하면 안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기라도 한 듯 조심스럽고, 침착하고,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란은 찬찬히 심호흡했다. '아난타'의 그런 비장한 얼굴은,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다.

흔들리던 시야가 가라앉고 힘이 들어가지 않던 손이 주먹 쥐고 굽어졌다. 슬슬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생각했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란은 짧고 굵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준 건가. 아난타가 조치를 취해줬을 가능성을 고려하던 보랏빛 눈이 조용히 깜박였다. ……대답이라도, 열심히 하자. 아무도 듣지 못하는 마음속 다짐이 곧게 일어났다.

“네!”

란은 아난타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빛의 명멸조차 보이지 않는 세상이 인형을 보는 것 같아 소름 끼쳤다. 란은 본능이 거부하는 세상을 밟고 마른침을 삼키며 꿋꿋이 아난타를 따라갔다.

침묵이 버거울 즈음, 란은 입술을 아프지 않게 씹다가 입을 열었다.

“신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앞서가던 아난타의 시선이 뒤로 돌아왔다. 란은 숨길 수 없는 초조를 애써 숨기려 노력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건 왜?”

“바람이 없고, 빛도 가물가물하고, 하늘은 어둡고…”

“……”

“있는 건 어둠과 물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을 입에 담으려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란은 주먹을 꽉 쥐며 어느새 새하얗게 바랜 주위와 아난타를 바라보았다.

아난타는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대답해 줄 것처럼.

“제가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면, 신이 원인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선 급이든… 시초신이든.”

아난타는 눈을 감았다.

란은 그를 눈여겨봤다.

“……시초신은 없어. 오선급 신은, 행동 가능한 건 넷밖에 없고. 그 넷 중 둘도 발이 묶여있고.”

“!”

“이 이상은 알고 가지 마. 넌 걔네랑도 안면이 있는 모양인데… 이거 알면 돌아가서 힘들 거야.”

친절한 배려였다. 란은 눈을 크게 뜨고 얼어있던 몸을 움직여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미래가 있지 않느냐는 숨겨진 의미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세상이 다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하자 아난타는 란의 손을 잡고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의아한 란의 기색을 눈치 빠르게 읽었는지 상냥하게도 고려했는지, 급한 목소리가 란이 입을 열기 전에 들려왔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하니까, 시간의 영향이 거의 없을 때 도착하는 편이 낫지. 그치?”

어색한 웃음기를 띈 목소리였다. 겨울이 다 왔는데도 버티고 매달린 작은 잎사귀 같은 목소리에 란은 네,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난타가 서두르는 게 느껴져서. 알고 싶지 않은 그 이유를 심장이 알려주는 것 같기는 하지만, 모르는 채로. 그렇게.

우주 공간의 푸른색과 검은색, 그리고 얼음의 새하얀 색으로 가득한 현실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에서부터 보였던 얼어붙은 감옥이 이젠 실감 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에 따라 더욱 강해진 한기가 아난타의 조치를 뚫고 란에게 닿았다. 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차갑지.

아난타는 란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우주가 얼어붙고 있어서 더 차가운 거야.”

“…!”

“이 한기 때문에 얼고 있고… 얼고 있어서 한기가 더욱 강해지고. 상호 작용을 해서 더 차가워졌어. 야크샤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조절하던 게 엉망이 됐지.”

하나같이 규모가 엄청난 얘기라서 질린 눈을 하지 않기 힘들었지만, 란은 무사히 가장 중요한 지점을 들었다. '어느 정도 조절하던', 그들의 왕이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왕들의 스케일 다른 강함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말릴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비수같은 질문이었다. 상처받을 것이 훤하니 공격이라고 보아도 할 말이 없었지만, 누군가 말을 들어줬다면 무너지지 않았을 왕을 알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란은 그렇게 자신의 질문을 합리화하며 상처받은 얼굴로 아난타를 바라보았다.

아난타는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상처, 라기보다는 미련에 가까운 감정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눈을 뜬 아난타는 이윽고 고개를 돌려 이젠 정말 가까운 친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말리면 야크샤가 마르고 힘들어질 텐데.”

“……”

“그런 걸 감수하고 싶진 않아서. ……많이 봤으니까.”

아난타는 란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란은 많이 봤다는 그 말을 기다림에 지친 왕의 모습을 봤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그러자 뭐라고 말을 붙일 수가 없어서, 란은 조용히 아난타의 걸음을 따랐다.

왕의 감옥에 도착하자 점차 커지고 넓어지는 얼음의 옥을 볼 수 있었다. 어쩐지, 스스로로부터 타인을 보호하려는 분이 이렇게 큰 공간에 자신을 가둘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줄곧 품어왔던 의문을 해소한 란은 고개를 돌려 여기까지 저를 이끌어준 인도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난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울음을 참는 듯한, 그래서 붉게 물든 눈으로 잔뜩 머금은 눈물을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솔직한 감정을 온전히 드러낸 그 얼굴은.

아난타가 지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아난타님. 실례지만…,”

“응. 뭔데?”

“우실 것 같아요.”

“……”

“…많이 봤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별인걸. 언제 겪어도, 슬프니까. …아프니까.”

주저가 많은 조심스러운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하곤, 아난타는 문 앞에 섰다.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에서도 멀쩡하게 움직이던 아난타의 손에 성에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놀라서 숨을 삼키는 란에게, 아난타는 방금의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이 너머는 나도 얼 수 있어. 넌 더 위험할지도 몰라. …그래도 갈 거지?”

“…네.”

란은 비장한 얼굴로 몸에 힘을 주었다. 아난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음 새는 소리를 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란의 목에 걸어줬다.

“응. 그럼, 이걸 가지고 가.”

“? 이게 뭔데요?”

“아그니의 마지막 선물.”

붉고, 노랗고, 따스한 색을 띈 불꽃 모양 목걸이. 아그니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에 란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 가자.”

란에게 딱히 부연 설명을 덧붙여주지는 않으며, 아난타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서 단단히 닫힌 문을 열었다. 열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서진 문 안에서 여태껏 가둬져 있던 가늠할 수 없는 한기가 불어나왔다.

“…윽,”

“괜찮아? 여기서 돌아가도 난 괜찮은데.”

“괜찮아요. …버틸 수 있습니다.”

란은 사정없이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부드럽게 만들어 보였다. 문 하나로 나뉜 저 너머의 공간은, 그곳에서 나온 공기는, 정말 바깥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차갑고 아팠다. 왕의 진정한 고통이 이제야 느껴졌다. 겉 피부에 새하얀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너 얼고 있는데.”

“괜찮아요.”

“…그래.”

아난타는 침묵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속까지 얼어붙은 게 아닐 테니까, 괜찮겠지. 안 죽겠지. 걱정으로 칠해진 생각을 삼켜내며 아난타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속도를 높일게. 아그니의 선물이 없으니까 어느 정도에서부턴 같이 못 갈 거야, 난.”

“…”

“…야크샤를 잘 부탁해.”

란은 어느 거대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난타는 없었다. 이 이상은 안되겠다고 미안을 금치 못하던 얼굴이 선명했다. 그 최강의 존재조차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추운 곳에서, 란은 버티고 있었다. 심장 때문인지 더 쉽게 얼어붙고 있었지만 아그니의 선물 덕분인지 어쨌든 아직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성에가 끼고 우둑 소리가 나는 몸이 어떻게든 움직였다. …왕이 죽이려고 하실 리는 없지만, 저인지 모르는 상황에선 혹시 모르는데. 뒤늦게, 혹은 이제야 쓰게 웃으며, 란은 만지자마자 손이 얼어붙는 문을 그에게 배운 초월기를 통해 부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그의 바로 앞인 이곳은 여태 지나온 곳들 중에서도 유난히 추웠다.

“…야크샤님.”

그 추운 곳에, 새하얀 남자가 몸을 옹송그리고 잠들어 있었다.

소년의 모습만을 보았던 란이지만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은 굳이 그의 확언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야크샤는 굳게 감긴 눈을 뜨지 않았다. 서글프게 울상을 지은 란은 한걸음, 한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야크샤님.”

“…”

“저 왔습니다.”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들이쉬는 숨으로 폐가 얼어붙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야크샤의 몸에도 성에가 내려앉아 있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아니, 그건 원래 그러셨던가.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으며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렸다. 많이 언 몸은 이제 아프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프다기보단 힘겨운 걸음을 내디디며, 란은 천천히 왕에게 가까워졌다.

“안 반겨…주시, 나요. 저 기대했어요.”

말 한마디 내뱉는 것이 버거웠다. 몸이 더 이상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계에 다다른 몸을 억지로 이끌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폐부를 찌르는 언 공기에 속까지 얼어붙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마지막까지 생명을 빌었다.

란은 마침내 왕의 바로 앞에 다다랐다.

“…보고 싶었습니다.”

“…”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으셨어요. 조상님은… 하누만, 님인데도. …제게는.”

“…”

“이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만나서… 다행…”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란은 더는 무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깨닫고 자시고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저 새까만 공간에 홀로 외로이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란은 최대한 더듬거리며 야크샤를 찾았다.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느끼지도 못했지만 다른 이가 보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손을 뻗고 발을 내디뎠다.

그러다 문득, 너무나 따스해서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까맣던 시야가 천천히 제 색을 되찾았다. 란은 멍하니 눈앞의 새하얀 털을 바라보았다. 따스한 체온, 차가운 공기 속 뜨거운 열기, 그리웠던 존재감.

“…야크,”

“말하지 말거라. 아직 속이 얼었다.”

“…아…. ……네…”

“이 지경이 되면서, 내게 다가왔어…”

너무나 익숙하고 다정한 애정이 느껴졌다. 차갑게 얼어붙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올라왔다. 눈 사이로 뚝, 뚝, 떨어지는 더운 눈물이 제 볼을 적시는 게 느껴졌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푸른 옷에 자욱을 남기는 것이 보였다. 어디서 이런 따스한 게 남아 이리 올라왔는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란은 저보다 따듯한 앞 사람을 끌어안았다. 울컥 차오른 속을 견디지 못하고 내뱉었다.

“…당연히, 와야죠.”

“…!”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토록 그리던 분께서 홀로 아파하고 계신다는데… 스스로, 무너져내리고 계신다는데…”

“얘야.”

“보고 싶었어요. 못 다했던 말을 전부 전하고 싶었습니다. 절망할 때마다 당신을 떠올리면서 버텼어요. 제가, 당신께서 바라시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당신을 죽게 만든 이의 후손이지만. 당신께 끝도 없는 기만을 저지르고 결국은 제 이기심을 채웠지만. 그래도.”

“……”

“그래도… 제자라 해도 될까요.”

“……”

“애정을 바라도 될까요……”

오랫동안 묵혀왔던 곪은 속이 속절없이 드러났다. 꾸밈없이 너덜너덜한 마음을 내보인 몸에 힘이 턱 풀렸다. 흰 빛을 보고 눈을 감으며 잠깐, 아난타를 따라오면서 어렴풋이, 차디찬 복도를 지나 왕의 어전으로 걸음을 옮기며 끊임없이 해오던 이기적인 속내를 다 털어놓자 돌아올 대답을 듣고 건네줄 시선을 보기가 두려웠다. 결국 왕을 찾아온 이유는, 다 놓고 스러지려는 왕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또 그에게만 보이는 이기심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저지른 잘못이 또 한 번 더해졌기 때문에.

느리게, 하지만 분명하고 따스하게, 달래주려는 의도가 분명한 등을 토닥이고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진 것은, 고개를 숙이고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내가… 네게, 내 삶에 대해 말한 적이 있더냐.”

“…없습니다.”

“그래… 그랬지. …잠시, 네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길지도 모르지만. ……들어주겠느냐.”

나직한 물음은, 고요하고 잔잔하여- 호수에 맺힌 달그림자를 듣는 것만 같았다. 어둠 속 일렁이는 촛불의 불꽃 같기도 하고, 가벼운 바람에 떨어져 머리카락에 붙은 연약한 꽃잎 같기도 하고, 하나하나 가루처럼, 이윽고 펑, 펑, 쏟아지는 눈송이같기도 한 그 목소리를 끊어내지 못한 란은 천천히, 조용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하나 없는 그 대답을 어찌 알아들었는지 그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가만가만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너와 만나기 전, 내겐 반려가 있었단다. 태초에 노인으로 태어난 우리는, 아이의 모습으로 난 동족 나스티카들을 보호하고, 돌보며… 바삐 지냈지. 시간이 조금 흘러 그들이 지금의 모습을 취하게 된 이후에는, 굳이 자식을 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이미 길러보았고, 부인… 반려는 자식을 볼 때의 페널티를 싫어하였거든.”

“……”

“그리 지내다가… 반려가 세상을 떠나고, …그 범인은 그렇게 키운 동족 나스티카들이었어서. ……한동안, 자식과 같은… 내 아이라 볼 수 있을 법한 이들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

“그러던 중에 만난 것이 너였다.”

란은 푸르고 하얀 옷자락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와 손길에 가득한 애정이 듣지 않아도 이 이야기의 답을 알게 할 것 같아서, 왕의 이야기를 막지 않고자 제 손에 힘을 주었다. 구겨진 옷자락엔 한 톨의 시선도 주지 않고 란을 도닥이는 데에만 집중하는 손길이 뜨거운 온도를 품었다. 그런 것 같았다.

“내 심장을 가지고선 어리바리하고 미숙한 모습만 보여서 눈길이 갔고, 양심이 제대로 선 염치 있는 놈인 것 같아 마음에 들었고… 알려주는 것 잘 따라오는 똑똑한 놈이라 좋았고.”

“!”

“처음엔 일시적인 관계라 제자를 해보겠느냐 물었고, 헤어질 때는 첫 제자라 여겼는데. …헤어진 다음엔, 네가 이 시간엔 방문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네 시간엔 잘 돌아갔나… 많은 것을 궁금해하고 염려하다 보니.”

“……”

“네가 자식 같아졌다. ……내 아이라고, 여기게 되었어.”

도닥이던 손길이 멈췄다. 커다란 손이 힘이 풀린 두 손을 잡고, 반대쪽 손이 수그러진 어깨를 잡았다. 너른 바다를 품은 푸르디푸른 눈이 오랜 방황에 지친 보랏빛 눈을 마주 보았다.

“이름, 알려주렴. 얘야.”

왕은 웃었다.

“내 아이의 이름도 몰라서야 아비라 할 수 없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웃었다.

아들은, 잠들어있을 때에야 그 욕망을 겨우 한 번 드러내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진심을 토해낼 때에도 제자라는 이름 뒤에 숨었던 아들은, 울었다.

“……그래도 되나요.”

“그럼.”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고 말고.”

“제가, 당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숨기고… 재회의 희망을 이용해서 얻어낸 심장을 이용하고, 당신을 배신하는 인간의 후손인데도요. 그러면서 은인인 당신께 제 이기적인 속내만 털어놓았는데도. …그래도.”

“부모는 다 그런 법이 아니겠느냐. 그리고 인과관계가 틀렸다.”

“네?”

“내 아이이니 내게 그럴 수 있는 것이란다. 유일하게.”

눈물이 차올랐다. 차가운 한기에 식고 얼었던 몸 어디에서, 아까 마지막으로 남았던 온기를 전부 토해내듯 울었던 몸 어디에서 또다시 이렇게 뜨거운 물이 차오르는지.

흐려진 보랏빛 눈이 엉망으로 웃었다.

“…란.”

“란…”

“란 사이로페예요. 아버지.”

“…예쁜 이름이구나.”

“그렇죠?”

아들은 아버지의 너른 품에 파고들었다. 밀쳐내지 않고 떨구지 않을 그 다정하고 따스한 몸을 안았다. 그래도 용서받았다. 그것이 아버지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마주안아주는 온기에 아들은 웃었다.

아, 돌아가면. 나도 아버지처럼. …우리 애들을 안아줘야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보듬어주고 예쁘다고 칭찬해줘야지. 돌아가면.

째깍, 째깍.

길고 긴 세월에 망가졌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흘렀다. 란은 야크샤가 있던 시간을 떠나온 후에 있던 일들을 늘어놓으며 이때까지의 고통과 힘겨움을 다 털어놓았고, 야크샤는 란이 떠난 이후로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생각했던 모든 따스함과 다정함을 꺼내놓았다.

그런 두 부자의 대화가 끊긴 것은,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검붉은 시간의 구멍 때문이었다. 푸르고 하얀 왕을 위한 옥에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이 나타난 '길'에 란은 조용히 야크샤의 옷자락만을 잡았다.

“…시간이 다 된 모양이구나.”

“……가기 싫어요. 아버지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나도 헤어지긴 싫지만… 가야지, 아가. 네 가족이 기다리고 있잖니.”

가족. ……맞다. 또 다른 가족이 있다. 란의 눈이 희미하게 바랬다.

앤. 칸. 텐. 림. 내 자식들. 형. 백부. 백모. …그리고, 라나.

보랏빛 눈이 체념으로 어두워졌다. 그를 본 야크샤는 손을 뻗어 제 옷자락을 움켜쥔 란의 손을 감싸 들었다.

“만약 나를 또 만나게 된다면,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너와 만난 이후의 나라면 그 어떤 때든 널 아들이라 부를 테니.”

“…네…”

“네가 원한다면, 네 아비는 이 나라고 꼭 말하거라. 들은 이들이 부정하면 뭐 어떻겠니. 네가 내가 인정한 유일한 아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진실인데.”

“……그렇죠.”

가벼운 장난이 섞인 단단한 진심에 어두워졌던 보랏빛 눈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잡은 손을 놓지 못하다가, 웃고 있는 푸른 눈을 보며 머뭇머뭇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균열의 코앞에 이르자 란은 뒤늦게 떠올린 목걸이를 들었다.

“아버지. 그러고 보니 이거, 이곳의 아난타님께서 주신 건데…”

“……아그니구나.”

“네?”

“아니다. 그건 가지고 가도 상관없을 것 같으니, 그냥 가지고 가거라. 어차피 네 시간으로 돌아가면 사라질 거란다.”

“…알겠어요. 아난타님께는 안 돌려드려도 되는 건가요?”

“네게 줄 때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을 것 같은데?”

“그러시려나요…”

란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다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균열을 바라보고 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서 억지로 옮기던 그 순간.

“란아.”

아버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네, 아버지.”

왜 부르시냐고 묻는 듯이, 그러면서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이, 미세하게 들뜬 얼굴이 빠르게 뒤돌아보았다. 그 감정이 너무 선명하게 읽혀서 부드럽게 웃은 아크샤가 웃음 어린 진심을 내뱉었다.

“사랑한다. 또 만나기를 바라마.”

진짜 부모자식같은 마지막 인사에, 마지막 진심에, 란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웃었다.

“…네!”

야크샤는 손을 흔들었다. 검은 망토가 흩날리며 사라지고, 짧은 순간에 뒤를 본 보랏빛 눈이 저물고, 검붉은 시간의 균열이 모습을 감출 때까지, 계속. 오랫동안, 배웅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균열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야크샤는 서 있던 자리에 쓰러지듯 털썩 앉았다. 되돌아온 심장이 다시금 몸을, 주변을, 우주를 얼리려고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제자리를 찾은 것이 빠르게 그간 놔두었던 것들에 손을 뻗었다. 이젠 조절도 되지 않으니, 원… 마지막으로 아들을 봐서 따스하게 풀린 눈이 흐릿하게 감겼다.

“아난타.”

힘없이 바스러지는 목소리에, 줄곧 존재감을 감추던 이의 그림자가 천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낸 담담한 척 가장한 금물 떠다니는 분홍빛 눈을 본 야크샤가 눈가의 힘을 풀고 입꼬리를 올려 나른하게 웃었다.

“…마지막까지 고맙다.”

“야크샤. ……이 선택은, 네게 행복이었어?”

“물론. 당연한 말을. 네가 내게 해주는 것이 행복 아닌 순간이 언제 있었더냐.”

“넌 기억 못하겠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네가 했다면 그건 날 위한 것이었겠지. 그렇다면 난, 네 선택을 행복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어떤 순간의 나라도.”

시간은 숨을 멈췄다. 왕의 그 말은, 그가 알았을지는 몰라도 시간에게 있어선 최고의 위로이자 찬사였다.

그것을 또 한 번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 들었다는 사실이, 시간을 행복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들었지만.

왕은 눈을 떴다. 언제나 그를 지켜준 소중한 친우의 서글픈 눈을 마주 보았다.

“마지막 순간에 이리 말해서 미안하다.”

“…아니야.”

“다음 번엔 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지 말거라. 난 언제나 네 덕분에 행복하고 즐거웠으니.”

“…!”

“…다음 번에, 만나자.”

왕은 그리 말하며 웃는 얼굴로 잠들었다. 잠들듯이 얼어붙어 영원한 잠에 빠졌다. 희게 번지는 얼음덩어리들을 본 시간은 맑게 웃었다.

“응. 다음 번에, 만나자.”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란은 눈을 떴다. 온통 하얀 공간, 다시 그 공간이었다.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균열 속의 세상.

【란, 괜찮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주홍색, 노란색, 붉은색으로 형형색색의 가루다족 수라가 큰 눈을 뜨며 말을 걸고 있었다. 칼라빈카, 미안하지만 잠시 잊고 있던 동료를 본 란은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 아니. 너 잠깐 기절했길래 눕혀둔 지 얼마 안 됐어. 걱정 마.】

“기절? 얼마나 걸렸는데?”

【어… 체감상으로 20분…? 그건 왜? 꿈 꿨어?】

꿈. 그건 꿈이었나.

란은 급하게 제 목을 더듬었다. 그곳에서 가지고 온 것은 딱 하나 뿐이었다. 아그니가 있는 세상으로 들어간다면 그 순간 사라질 덧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바로 나온 곳이 이 공간이라면.

초조함과 불안감이 회오리치듯 휘돌았다. 헛짚으며 몇번이고 움직이는 손이 마침내 멈췄다. 희게 질려있던 얼굴에 안온한 온기가 퍼졌다.

“아…”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던 목에서 잡혀 나온 것은, 붉고 아름다운 불꽃이 달린 목걸이라. 너무도 선명한 '증거'라.

“……다행이다…”

【엥?】

“꿈이 아니었네. 역시 우리 아버지…”

【나쁜 꿈 꿨나…?】

칼라빈카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도 듣지 못한 란은 붉은 불꽃을 손에 꼭 쥐었다. 꿈 아닐까 의심할 걸 아셨나 봐, 역시 우리 아버지. 조곤조곤 새 나오는 희미한 목소리가 천천히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불꽃에서 새 나오는 온기를 담으며, 란은 일어섰다.

“가자, 칼라빈카.”

【어… 너 움직여도 돼?】

“어서 가야지. 돌아가야지.”

【…그치! 얼른 가자!】

앞을 향한 우직한 걸음에선 더 이상 미련이나 고민 같은 것들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오랜 헤맴은 이제 끝이었다.

이제는,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으로. 무너지지 않고 안을 수 있도록.

차올라 숨길 수 없는 애정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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