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다(1)
헤르아젬
논컾에 가깝습니다
아젬의 성별을 특정해두지 않았고, 본명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평범한 연애같은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끝까지 갈등만합니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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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엘피스에서 생물들을 살펴보던 헤르메스는 뒤에서 들려온 경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채 다 돌리기도 전에 누군가가 매달려왔다. 헤르메스는 익숙하다는 듯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잡고 매달린 팔을 살며시 잡았다.
“아젬”
“오랜만이지?”
아무렇지않게 볼에 뽀뽀를 한 아젬은 깔깔 웃고는 주변 친한 이들의 볼을 부여잡고 돌아가며 억지로 뽀뽀를 건넸다. 그 모습에 진저리 친 이들은 이미 저 멀리 떨어진 뒤였다. 그중에는 익숙한 모습도 있었다.
“아, 하데스. 가버렸네. 여기 있다고 해서 온 거 였는데. 다음에 해주지 뭐."
“별로 바라지 않을걸”
“그러니까 더더욱 해줘야겠어.”
“하하, 휘틀로다이우스한테나 가봐. 너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서 한참 기다렸어.”
“그건 놓칠 수 없지! 그럼 전송장치까지 같이 갈까?”
한참 볼을 문지르던 헤르메스는 그새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아젬을 바라봤다. 언제나 그렇듯 해진 옷과 부스스한 머릿결이 보였다. 또 얼마나 신나는 모험을 했을까, 헤르메스는 웃으며 아젬에게 다가갔다.
“이번 모험은 어땠어?”
아젬은 손서리치며 얼굴을 구겼다.
“끔찍하게 힘들었지! 아, 물론 전투가 있었던 건 아냐.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기로 했는데 내가 그걸 오히려 망가트리는 바람에-”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한 아젬은 얼굴에 빛이 돌았다. 헤르메스는 분위기가 어쩐지 즐거워 평소에는 잘 터뜨리지도 않는 웃음소리를 헤프게 냈다. 스스로조차 너무 웃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즐거웠다. 아젬은 그런 헤르메스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격정적인 몸짓과 함께 이야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배가 아플정도로 깔깔거리며 한참을 걸어간 그들은 어느새 전송장치 앞에 도착했다.
“또 사람들 만나러 갈거지? 다음에 보기까지 한참 걸리겠네.”
헤르메스는 아쉬운 기색을 최대한 숨기며 일부러 밝게 말을 건넸다. 그런 헤르메스의 말을 눈치챈건지, 아니면 관심도 없는건지, 아젬은 조용히 전송장치를 바라보다 말했다.
“응, 그러려고 했는데.”
“어?”
“오늘은 그냥 네 집무실이나 놀러갈까봐.”
아젬의 씨익 웃는 모습에 헤르메스는 당황했다. 내 집무실 상태가 어떻더라? 누가 찾아온지가 한참인데. 아니, 그보다 내 연구가 얼마나 진행됐더라? 그걸 물어보려는 건가?
“왜, 무슨 일로?”
헤르메스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아젬은 웃는 낯으로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냥 가는거지~간 지 한참이잖아?”
“완전 난장판일텐데…”
“그냥 네 옆에 있으려는 거야.”
순간 심장이 덜컥였다. 살며시 웃는 그 미소에, 휘어진 입가에 걸린 미약한 애정이 마음에 걸렸다. 애정어린 눈빛이 뜨거웠다.
‘그냥 내 뺨이 뜨거운 건가’
“싫어?”
“아….”
아니. 대답하지 못한 채 헤르메스는 고개를 숙였다. 아젬에겐 감정을 조금이라도 내비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못한다에 가까웠다.
아젬은 예전부터 메테이온을 날려 보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렇다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태도을 보면 그러했다. 메테이온을 보았을 때 아젬의 모습은 신나게 모험을 얘기하던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헤르메스는 그런 아젬이 조금은 불편했다. 하지만 언제고 즐겁게 모험을 늘어놓고 웃으며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행복했고, 그 순간만큼은 불안함이 없었다. 그런 감정을 가져다 주는 이에게 불편함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구를 부정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그런 고민에 빠져든 것을 눈치 챘는지 아젬이 다시 원래의 밝고도 자연스러운 미소로 말을 걸었다.
“차나 오랜만에 대접해줘. 여기저기서 받아온 간식도 한참 남아있을 거 아냐. 내가 처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사이, 아젬은 마치 그 마음을 꿰뚫어 본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헤르메스의 팔을 잡아끌며 앞장서는 아젬을 보며, 헤르메스는 결국 말리지 못한 채(그리고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집무실로 향했다.
도착한 집무실은 역시나 어수선했다. 책이 이리저리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것은 물론, 연구 자료를 적은 종이가 바닥에 널려있었다. 푸핫, 웃음을 터뜨린 아젬은 종이를 주워 헤르메스에게 건넸다.
“나보다 정리 못하는 것 같은데?”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민망하네. 차는 뭘로 먹을래?”
“나는 잠 잘오는 걸로. 요즘 계속 새벽까지 돌아다녔더니 몸이 영 안좋….”
아젬은 헤르메스에게 종이를 건네다 한 장의 종이에서 멈춰섰다. 그 종이는 메테이온을 날려보낸 기록이었다. 날려보낸 주기와 보고들이 적혀있었다. 헤르메스는 순식간에 종이를 낚아채 손에 모아들었다. 책상에 종이를 탁탁 치며 정리할 때까지 아젬은 말없이 헤르메스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날리고 있었구나.”
“…아직 답을 찾는 중이니까.”
“그래”
아젬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손가락을 들어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적막이 불편했다. 딱히 더 할 말 없다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르메스는 구태여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내가 메테이온을 날리는 게 마음에 안들어?”
“뭐?”
아젬은 당황한 눈빛으로 다급히 손사레를 쳤다.
“아냐, 그런거. 나는 그냥 네가”
헤르메스는 아젬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당황만이 서린 그 눈빛을 보며 헤르메스는 아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젬은 한참동안 말을 고르더니 토로하듯 내뱉었다.
“네가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내뱉고 싶은 말을 삼키고 헤르메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저 말은 너무나 무심했고, 단순했다.
“쉽게 말하는 거 아냐. 알잖아, 헤르메스. 나도 내가 널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아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을 뿐,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하는 자신의 분노를 어리광의 형태로 그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헤르메스는 이 모든 걸 아젬이 받아줄 것이라 생각했고, 아젬은 그러했다. 헤르메스가 가지고 있는 그 응어리는 이 세계에서 풀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것임을 알았기에 아젬은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자신조차 완벽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헤르메스.”
“아냐, 됐어. 내가 괜히…. 차 타줄게. 거기 앉아 있어.”
“헤르메스. 여기 봐. 나 봐봐.”
“….”
더 이상 괜한 짜증을 부리고 싶지 않았던 헤르메스는 억지로 아젬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아젬은 그런 헤르메스의 손을 잡고 자신을 보도록 재촉했다. 끝내 고집부리지 못한 헤르메스는 걱정어린 표정의 아젬을 마주했다. 아젬은 헤르메스의 얼굴을 눈으로 흝으며 손가락으로 조심히 그의 볼을 두드렸다. 아젬이 헤르메스의 볼에 입술을 맞춘 그 자리였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지, 헤르메스.”
“…친구.”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거야?”
“거기에 뭘 더할 수 있겠어.”
“뭘 더할 수 없는데?”
“….”
헤르메스는 입을 다물었다. 더하고 싶은 감정이 요동쳐도 자신은 더하지 않을 것이다. 아젬은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만 그 곳에 자신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이 끝없는 질문을 그만둬주길 바랄뿐, 모든 걸 그만두고 다른 답을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다면 헤르메스가 갈 곳에 아젬은 없었다. 아젬은 항상 자기만의 답을 찾는 모험을 떠나는 사람이니 온 우주를 뒤지고 있는 내 모습이 답답하겠지. 헤르메스는 그렇게 단정짓고 말했다.
“넌 항상 올곧아.”
“내가? 나야말로 실패투성이에 실수만 하는 걸.”
“그래도 결국 해내잖아.”
“그건 너나 친구나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지. 나 혼자서는 절대 못해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올곧다는 거야.”
“…헤르메스, 넌 내 삶이 더 나아보여?”
아젬이 헤르메스의 손을 꽉 잡았다. 헤르메스는 그 손을 놓고 싶었다.
“모르겠어.”
“우린 그냥 다른 거야. 우린 서로의 삶을 정답이라고 상대에게 요구할 수 없어.”
“…그게 너가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야?”
“무슨 말?”
“메테이온에 대해서. 싫어하는 거 맞잖아.”
“…그래. 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건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그걸 포기할 것도 아니잖아.”
“안해.”
“그래, 난 그저 네가”
“내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알아, 알아들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야 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지? 너도 그걸 모르니까 입 다무는 거 아냐? 아니면, 아니면 내가 지금 이짓거리 하는 걸 관두고 내가 너의 삶을 따라 살길 바라?”
아젬이 바란 건 그런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헤르메스는 입밖으로 무정한 말들을 내뱉었다.
“….”
“나도 모르겠어. 나는 네 삶이 옳다고 보는건가? 하지만 난 내 선택이 틀렸다고 보지도 않아. 그런데, 나는 왜 너만 보면 이렇게까지 슬픈 기분이 드는거야.”
혼란스럽다. 그의 삶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모든 고통 속에서 너는 어떻게 모험을 계속하는 거지. 아니면, 이정도 고통은 고통으로도 치지 않을만큼 가벼운 건가? 사라져가는 그 창조생물들이 너는 가엽지 않아? 왜 나만 이렇게 괴로운거지?
헤르메스는 아젬을 손을 놓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즐거웠지만 딱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너는 내 옆에 항상 있어 줄 수 없잖아. 헤르메스는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 말은 끝끝내 삼키고 열망과 분노로 점철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헤르메스를 향해 아젬이 물었다.
“내가, 너처럼 살아갔으면 좋겠어?”
아젬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전혀.”
너를 이 곳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좋은 삶을 두고 왜 내 곁으로 오려해. 절대 다가오지 말라는,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의미를 담은 분노가 아젬을 향했다.
“…차는 다음에 먹는 게 좋겠다.”
헤르메스는 축객령을 내렸다. 집어들었던 주전자는 내려놓고 널부러진 종이를 의미없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젬은 잠시 머뭇거리며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바라보고는 그 끝을 만지작거리다 말없이 집무실을 나갔다. 다 망쳐버린 분위기가 짜증났다. 좋게 보러와 준 사람한테 괜한 분노나 쏟고 끝내는 내쫓기까지 했다.
“하아….”
헤르메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남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감정을 퍼부을 대상으로만 여긴 사실이 한탄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린다해도 자신이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을거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아젬을 열망했고 질투했으며 분노했다. 그 감정을 없앨 순 없었다. 결국 그 후로 며칠이 지나도록 아젬은 보이지 않았고, 또 다시 며칠이 지나서야 다시 모험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헤르메스는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며 지냈다. 이따금 친구들과 가벼운 우스갯소리를 하고, 연구를 계속하는 것 외엔 변화라고 할 만한 일들은 없었다. 그런 평범한 일상에 갑작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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