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명헌│NBa Ace
소원을 말해봐
만약 우리가 서로를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헤어질 수 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
앞으로 나아가는 뜀박질이 가볍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다. 흐트러지지 않도록 숨을 쉬던 이명헌이 얼마 가지 않아 온전히 땅을 딛고 섰다. 지치지 않았음에도 허리가 굽어지고, 손은 허벅지와 무릎 어딘가를 향한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탓이었다.
최근 이명헌은 기분이 좋다.
푹푹 찌는 여름에 흐르는 땀조차 불쾌하지 않고, 그리 달리지도 않은 러닝이 끝내주게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최근 이명헌의 컨디션은 최상을 달린다. 감정 기복을 선으로 그린다면 느리게 뛰는 심전도보다 조용할 이명헌의 기분 그래프는 근래에 들어서 하늘로 올라가는 상향선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마지막 인터 하이의 충격으로 미쳐버린 거 아니냐 묻는다면 할 말 없었으나 어쩔 수 없다. 되려 묻고 싶다. 2년을 무리 없이 채웠던 사랑을 긍정 당한 게, 이렇게까지 기분 좋을 수가 있는 거냐고.
분한 마음으로 기숙사에 되돌아온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밤이 되면 거대한 어둠으로 변해버리는 산을 등지고. 끽해야 송별회를 준비하는 게 전부였던 시간에. 모든 것을 각오하고 내뱉었던, 말.
포기와 사랑이 동시에 담기니 뿅 같은 말꼬리가 없어도 제법 우스웠다. 해가 저문 덕에 덥지는 않으나 시원하지도 않았던 날. 먹먹한 습기를 머금고 제 안에서 영원히 곰팡이 피는 기억으로 남을 순간을 그림자 밖으로 끌어당긴 건 정우성이었다.
그거, 포기 안 하면 안 돼요?
밤인데도 새빨갛던 얼굴. 아랫입술은 꽉 깨물고. 떠나려던 제 옷깃을 붙잡은 손길까지 떠올리면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고백에는 허무하게 끝났던 인터 하이의 여파가 컸다. 산왕의 유니폼을 입고 고작 2회전에서 미끄러지면서 밀려온 상실감은 이명헌을 용감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비겁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안될 걸 알고서 차이는 게 우승을 예상하던 중에 맛본 탈락만큼 우울할까 싶었다. 패배의 충격을 덮어버릴 정도로 그를 사랑한다는 건 옷깃이 잡힌 순간에 깨달았다. 답지도 않은 마음이었으나 그것조차 기껍게 받아들일 만큼, 이명헌은 정우성이 좋았다.
미국까지 고작 한 달을 앞두고 둘 다 이기적인 선택을 했으니 남은 건 후회하지 않는 일뿐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롱디를 버티게 할 나날치고는 짧았으나, 막연하게도 이명헌은 이 모든 게 철없는 고등학생들의 치기 어린 장난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정우성이 입학한 이래로 오늘까지. 이명헌을 잔잔하게 태울 장작을 만들기는 충분했다.
다시 뛸 수 있을 만큼 호흡이 잡힐 때까지 도보를 걸었다. 그림자가 길어지지도 못하게 바로 위에서 내려찍는 것 같은 햇빛이 숨통을 조여온다. 그나마 근처에 산이 울창해서 귀라도 심심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기분이 좋아도 길에서 웃옷을 벗는 나그네가 될 만큼 미치지는 않았던 이명헌을 또 한 번 멈춰 세우는 건 길에 있는 하얀 석재의 토리이(鳥居)였다. 정확히는 그 너머에 있는 신사로 향하기까지의 계단 삼백 개. 인터 하이를 앞두고 정우성이 새롭게 찾았다던 러닝 코스였다.
본격적으로 녹음에 둘러싸인 그곳으로 한낮에도 제법 어둡다. 예로부터 토리이는 신의 땅과 지상의 경계를 이루는 관문, 내지는 결계 역할을 한다더니. 이끼가 뻑뻑하게 피어오른 돌계단이 끝없이 위로 이어지는 풍경은 이러는 순간에도 햇빛에 익어가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연결된 것만 같다. 색다름을 넘어서 이질적이기까지 한 그곳에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와서 더위를 식힐 그늘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명헌은 그 계단을 뛰어오를 때면 머리에 있는 고민이 전부 사라지고, 상쾌한 기분만 남는다던 정우성과 같은 것을 체험하고 싶었다.
폭이 넓은 계단은 확실히 러닝처럼 뛰어오르기에 적합했다. 미끄러운 이끼가 조금 거슬렸으나 발을 헛디딜 정도는 아니었다. 묵묵히 올라가도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고독함이 오히려 산과 어울렸다. 끝에는 허름한 신사뿐인데 중간에 쉴 곳도 없다던 계단인 만큼 웬만하지 않고서야 오르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체 생활의 주장을 맡고 있기에 더더욱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명헌에게는 제격인 곳이었다.
웅웅거리던 매미 소리마저 귀에 익고 나면 신선한 공기에 섞인 풀 내음이 무엇보다 크게 다가왔다. 처음엔 정우성처럼 뛰어올랐던 이명헌은 중간쯤 오른 뒤부터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온통 초록빛인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곳이 마음에 들수록 여길 발견한 뒤에 만족감으로 웃는 정우성이 떠올랐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생각이 정리돼서 여기가 좋다던 사람을 계속 생각하는 것은. 정우성은 아무 고민 없이 뛸 수 있어서 이곳을 좋아했는데, 이명헌은 정우성이 떠올라서 이곳이 좋았다.
주말에 같이 와보자고 해볼까.
유학이 가까워지면서 정우성은 인터 하이 때보다 더 바빠졌다. 대회가 끝나고 주어진 선수들 휴식 기간에도 하루의 절반은 감독님께 이끌려 다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떠난 뒤에도 혼자서 계속 이곳을 찾아오게 될 것을 직감한 이명헌은 이 산속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우성을 심어놓고 싶었다. 그런 마음은 상대 역시 비슷하리라. 남겨질 이명헌이 곳곳에 그를 묻어두고 싶어 했다면 떠나는 정우성은 뭐라도 더 들고 가고 싶어 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든, 추상적인 기억이든 산왕의 주장이라면 뭐든 상관없어했다.
때문에 이명헌은 계단을 올라가는 걸음 하나하나에 자신이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를 담았다. 산왕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정우성에게 말해주기 위해서였다. 아마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정우성은 기뻐하겠지. 같이 가자는 제안은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고.
우거진 숲은 보는 눈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정우성과 단둘이 아무도 없는 신사로 걸어 들어가는 걸 상상하던 이명헌이 또 한 번 혼자서 웃음을 터트렸다. 대범한 생각을 품으려 해도 그와는 손잡는 일조차 버벅거리는 게 현실이었다. 출국 전까지 입술이나 문대면 다행일까 싶다. 그런데, 그런 미적거림이 또 싫지가 않다. 누군가가 롱디까지 한 달 남기고 손도 겨우 잡는 게 고민이라고 들고 왔으면 조언하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쫓아냈을 텐데, 자신과 정우성의 일이라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든 좋았다. 어지간히 중증이었다.
무턱대고 오르기엔 은근히 부담스러웠던 숫자는 의식 없이 걸으니 금방 끝이 보였다. 다다른 신사는 말마따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왼쪽에는 연못과 물레방아가 있는 등, 나름대로 조경을 신경 쓴 게 보였으나 그런 것도 지금에 와서는 죄다 방치되어 있었다. 신사는 산 정상에 있을 텐데도 계단 입구보다 더 침침했다. 어두워도 상쾌한 기분으로 올라왔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작정하고 음산한 그곳에서 이명헌은 빌 소원이나 생각했다. 정우성의 말에 의하면 신사는 겉보기와 다르게 용한 듯했고, 효과가 좋다면 생김새 따위야 상관없었다.
필요한 경험을 달라는 정우성의 소원에 산왕 전체에게 패배를 선물해준 걸 보면 정말 빌어도 되는지 헷갈렸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이명헌이 빌 소원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비틀어서 들어주면 곤란했다.
손을 모은 뒤 정석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한옆에서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음에도 서늘한 신사 앞에서 이명헌은 즉시 하던 걸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인위적으로 난 소리는 연못의 반대편,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수풀 근처에서 들려왔다. 산토끼라고 하기엔 크고 멧돼지라고 하기엔 묘하게 느리다. 뭐가 됐든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으로 몸을 틀던 그때였다. 이곳으로 걸어오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산토끼는 물론, 멧돼지보다 훨씬 위험한 선택지였다. 그러나 이명헌은 현명한 판단과 다르게 도망치지 못한다. 도망칠 수 없었다. 커튼처럼 나뭇가지와 수풀을 걷고서 나타난 건,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이명헌이 결코 지나치지 못하는 얼굴이 점차 환해진다.
“명헌이 형?”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정우성이었다.
“무슨…….”
분명 숙소에서 자신을 배웅했던 정우성을 떠올린 이명헌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혹시 놀라게 해 주려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나? 그러나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완전히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정우성에게도 러닝 뛰고 오겠다고 했을 뿐, 구체적인 목적지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니면 머리 식히려고 와있었다든가. 그런데 정우성에게 저런 옷이 있었나? 브랜드 로고가 떡하니 박힌 트레이닝복이, 우리 학교에 반입이 되던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앞뒤를 짜 맞출수록 위화감이 온몸을 감쌌다. 머리 한구석에선 도망치라는 경고등이 울렸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진짜 형이에요?”
이상하다. 소름 끼치게 이상하다. 그건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수풀에 싸여있던 정우성이 다가올수록 이명헌의 고개가 점점 젖혀졌다. 평소엔 살짝 눈길을 올리는 정도로 그쳤던 키 차이가 지금은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중량을 해도 얄쌍하기만 해서, 오늘까지 골격으로 고민하던 정우성이, 두껍다. 다르게 말하면 더 이상 애로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컸다. 눈앞에 있는 정우성은 고등학생이 아니다. 머리는 산왕 시절과 똑같았으나 한옆에는 처음 보는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고등학생이 아닌 정우성. 이명헌이 처음 보는 정우성.
그게 정말 정우성인가?
고등학생도 아니고, 정우성도 아니라면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여기는…, 여름이구나.”
주변을 둘러본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체가 어떻든 똑같은 인간인 주제에 지구라는 행성에 처음 방문한 듯한 발언이었다. 아주 얇은 바늘로 옆구리가 콕 찔린 기분이다. 그러면서 뚫린 작은 구멍으로 긴장이 줄줄 샜다. 곧이어 이명헌은 그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헤아린다. 사실 남자가 나타났을 때부터 하나뿐인 정답이었다. 오늘 하루가 완벽해서,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지.
“꿈을 꿔도 무슨 이런.”
이명헌이 눈가를 짚었다. 그런 뒤에는 남자로부터 대놓고 고개를 돌렸다. 진정하고 다시 본 미래의 연인 상상도는 낯 뜨겁기만 하다. 아무리 그래도 정우성 얼굴에 이런 몸이면 큰일 나지. 일단 정우성이라서 누구처럼 우락부락한 느낌보다는 미형이 남아있긴 했는데, 그래서 더 부정하고 싶었다. 이게 내 상상이라니. 아무리 무의식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취향이 다 드러나도 되나. 꿈이어도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꿈 아닌데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빈정 상한 것 같기도 했다. 같은 무의식이니 제 생각이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꿈치고는 생생하긴 하다, 뿅.”
이명헌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라니까요.”
“이게 꿈이 아니면,”
말을 잇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이명헌의 뺨을 붙잡아 당긴다. 기억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손아귀가 억세다. 두어 걸음 정도 떨어져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고개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옆으로 비틀렸다. 이해를 압도하는 상황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잠깐, 정신 차린 이명헌이 다급하게 손을 올려 상대를 밀어냈다. 그러면 남자는 처음부터 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듯 이마끼리 가볍게 부딪쳤다. 진짜 정우성과도 가져본 적 없는 거리에 이명헌이 숨을 참았다. 분명 빠져나갔다고 생각한 긴장감이 온몸을 쓸었다. 더 피할 공간이 없어서 마주친 눈에는 빛이 없는데 빛이 있었다. 항상 침착함에 잠겨 있던 이명헌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것조차도 똑바르게 바라보던 정우성이, 남자가 눈을 감았다.
“꿈이라고 해도 내가 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형이 부정하지 마요. 멍하게 있던 이명헌이 뒤늦게 그의 손목을 붙잡고,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남자가 닿아있는 모든 곳에서 보이는 것만큼이나 단단한 세월이 느껴져 왔다. 단순히 멋으로 운동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근육이었다. 계속 농구를 해온 몸이다. 거기다 분명히 살아있는 체온은 어떠한가.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맥박은?
나를 보고 안심하던 그 얼굴은?
“…이게 정말 꿈이어도 난 진짜로 만들 거지만.”
남자가, 정우성이 감은 눈을 떴다. 다 큰 정우성이라고 나타난 게 자신의 상상과 똑같았을 때부터 눈치채야만 했다. 미래의 정우성이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들, 농구 말고 다른 걸 하고 있었다면 끝까지 부정할 수 있었을 텐데. 불길을 앞둔 사람처럼 남자로부터 급하게 몸을 뺐다.
“형은 언제예요?”
미묘한 취급에도 정우성은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자연스레 숙였던 상체를 되돌린 다음에는 태연하게 물었다. 아랑곳하지 않는 뻔뻔함에 이명헌은 상대가 순순히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 놓아줬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정우성이라는 걸 인정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껄끄러움만 쌓여간다.
“1학년, 은 아닌 것 같고. 2학년? 아니면 설마 3학년??”
이명헌은 입을 다물었다.
“맞네요, 3학년.”
그러나 다 커버린 정우성에게 그런 건 상관없는 것 같았다. 훌쩍 커버린 생김새가 낯선 정도였다면 여유롭고 능숙한 그의 행동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방향을 잃어버린 거리감이 갈피를 못 잡고 헤매인다. 너무 가까워서 밀쳐내면 완전히 모르는 곳까지 멀어졌다.
“잠깐, 형이 3학년 여름이면…….”
“여기서 뭐가 더 나올 게 있다고.”
“…그때구나. 그래서 그때 형이.”
의미심장하게 말하던 정우성이 들으라는 듯 말끝을 흐렸다. 이명헌은 되묻는 대신에 오른쪽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사람을 추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걸 본 정우성은 맹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금방 바보같이 웃었다. 반가움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그런 게 있어요. 형은 모르지만 저는 겪은 거요.”
이어진 목소리에 담긴 감정도 직전과 비슷했다. 이명헌은 그게 꼭 정우성의 결백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당신과 모든 걸 겪은 정우성이라는, 얄팍한 주장.
“뭘 겪었는데.”
“형도 참, 이럴 땐 스포일러 금지인 거 몰라요?”
뻔한 대답이었다.
“스포일러라도 해야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뾰족하게 물어도 그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 지은 채 고개만 살짝 틀었다.
“설명해봐라, 뿅.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지.”
장난스러운 모습에도 이명헌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오늘 하루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이 전부 꿈이 아닌 사실이라면 이곳은 분명히 자신이 살던 세계였고, 곧 유학을 떠나는 한 살 어린 연인으로부터 배웅받은 기억이 있는 이상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정우성이어도 이방인이었다.
“이럴 때도 뿅뿅뿅뿅…….”
“…….”
“미안해요. 뭔가 좀 그리워서.”
말마따나 정우성은 유치하게 트집 잡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말을 곱씹는 모양새였다. 한 번 숨을 들이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기다가 빌었거든요. 형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이명헌은 습관처럼 뒷짐 지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근데 여기로 보냈네. 저거 진짜 엉터리예요.”
그의 시선이 신사의 지붕 끝으로 향했다.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입구처럼 보였던 토리이. 이끼 낀 삼백 계단. 묘한 분위기의 신사. 아닌 척해도 그것을 신뢰하던 연인이 뇌리에 남아서 여기까지 온 이명헌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끝을 모르고 멀어지던 정우성이 낯설음의 너머로 사라진다.
“그런 것보다 더 궁금한 건 없어요?”
“왜 그런 걸 빌었는데.”
“사랑한 사이니까요.”
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게 연인이라는 비밀을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명헌은 이제는 정말로,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정우성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자신이 모르는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이라면 아득한 미래의 자신은 이런 정우성조차도 익숙하고 편해하는 걸까.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면서.”
“아, 3년 전에 헤어졌어요.”
그게 아니면 미래의 자신조차 모르기 때문에 유난히도 멀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서 말인데, 명헌이 형. 나 좀 도와줘요.”
정우성이 웃으며 말했다.
*
설마 지금부터 헤어져 달라는 건 아닌가 했던 예상과 달리 그의 도움 요청은 심플했다. 어쨌든 여기에 계속 있을 순 없으니,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 몸을 숨겨달라는 것이었다. 울타리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으나 훌쩍 커버린 정우성을 세상 밖으로 풀어둘 수도 없었던 이명헌은 결국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남자를 제 방에 들였다. 대대로 1인실을 쓰는 주장이라 가능한 짓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온 모교─졸업을 안 했으니 엄밀히 모교는 아니었다─를 반가워하면서도 어제도 이곳을 다녔던 사람처럼 익숙하게 숙소를 누볐다. 예정대로 인터 하이를 치르고 있었다면 꿈에서도 못 꿨을 일이었다. 꿈 같은 일은 이미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긴 했지만.
스포일러는 안 된다고 했지만 한 번 가늠이 잡히니 그 뒤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렵게 빌려온 신현철의 옷을 아무렇지 않게 입고서 제 방에 있는 개인 농구공을 한 몸처럼 다루는 정우성은 계속 농구를 해왔고, 아직도 농구를 한다. 아직도 농구를 잘한다. 그런 그가 갔을 무대로는 뻔했다.
NBA에 갔구나.
알아버려도 딱히 김이 새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농구 불모지라고 불려도 작지는 않은 땅이었다. 밑으로 내려가면 해남이 있었고, 거기보다 더 내려가면 지학이, 끝에는 대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때가 되면 산왕을 만나기 위해 올라왔다. 그런 섬이 좁고 지루해서, 그걸 견디지를 못해서 뛰쳐나간 게 정우성이라는 선수였다. 흔히 말해 노는 물이 달랐다. 거기다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 앞에서 좌절보다도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천성까지 타고났으니, 정상에 도달한 건 놀랍지 않았다. 그의 몸을 보면 오히려 NBA 정도는 되어야 납득이 됐다. 그런데 이제, 나와는 헤어진.
“잠은 어떻게 자요?”
2층 침대가 기본으로 있는 보통의 기숙사실과 다르게 주장실은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벽붙이 장롱 앞에 선 이명헌은 대답 대신 예비로 갖춰둔 침대 시트와 이불을 바닥에 던졌다.
“…진짜로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우성이 물었다.
“그 몸으로 올라오면 내 침대 부서진다, 뿅.”
이명헌이라고 미국에서 뛰는 선수를 땅바닥에서 재워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방에 들인 와중에 침대까지 내어주고 싶진 않았다. 미국에서 뛰는 신분이라고 해도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일찍 운동장에서 구보를 뛰어야 하는 건 이명헌 자신이었다.
“에이, 현철 선배 체중도 버티는 침대인데.”
“지금은 현철이보다 네가 더 무겁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아마도. 정우성이 자신 없이 덧붙인다.
“저야 그렇다 치고, 이때 형은 되게 마르지 않았어요?”
이어지는 말은 묘하게 주제에서 비켜나간 말이었다. 당장 산왕 내에서 무게로 따져봐도 결코 가볍지 않았던 이명헌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다가, 뜬금없이 돌려진 화살에 그제야 그가 말하는 잠자리가 무엇인지를 눈치챘다. 좁디좁은 방에서, 더 좁은 침대에 같이 누워 자는 정우성과 자신. 고등학생 딱지를 달고 그 이상을 의식하지 않는 건 무리였다. 올해 여름을 이미 겪은 데다가 헤어졌다던 정우성이 어떤 의도를 갖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음험한 상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설레거나 낯 뜨거운 열기 대신 바싹 마른 텁텁함이 입안에 맴돌았다.
원래 헤어지면 그것만큼 다시 보기 껄끄러운 사이가 없다던데, 그럼에도 이렇게 구는 걸 보면 헤어지자고 한 건 내 쪽이었을까. 3년 전에 헤어진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걸 보면 그는 미련이 남은 걸 수도.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미래에서 왔다는 상황은 차치하고서 헤어진 뒤에 이럴 수 있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구분만 되어도 한결 편할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이명헌에게는 비교할만한 다른 경험이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정우성이 처음이었으니 이별한 뒤에 이야기는 이별보다도 더 먼 것이었다. 바란다면 아예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최근까지는 겪을 리 없을 거라 믿은 일이었고.
그러나 피하고 싶었던 순간은 다른 무엇도 아닌 연인의 형태로 자신의 방 안에 들어와 있다. 신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해맑게 웃으며, 당연하게 침대를 공유할 거라 말하는 모양새로. 보다 보면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명헌이 형?”
“억지로 형이라 부를 필요 없다, 뿅.”
이명헌은 그에게 의도를 되묻거나 하는 대신에 완전히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만난 직후부터 신경 쓰인 문제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불러야 형이 나를 정우성으로 보죠.”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면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농담이고요, 나보다 어린 거 알아도 형은 형 같아서요.”
그러고서는 금방 덧붙였다. 형도 제가 여전히 후배 같죠? 이쯤 되면 해맑은 척을 하는 건지, 진짜 해맑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지못해 그가 정우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할지언정 자신의 후배라 느낀 적은 없었다. 물론 정우성은 평생 저보다 한 살 어린 학교 후배일 테지만, 백 구십이 넘는 신현철의 옷을 무리 없이 입고서 정상까지 올라선 남자에게는 형이라 불릴 수 없었다. 불리고 싶지 않았다.
몸이 커서인지 그에게서는 정우성 특유의 어린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대책 없이 큰 눈과 당돌한 눈썹은 여전했으나 눈가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자신감을 표출하지 못해서 안달 났던 입꼬리는 은은하게 올라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선이 더 굵어졌다. 숨길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동양인 중에서도 특히 어려 보이는 얼굴에 묻어나오는 세월이란. 처음 본 순간부터 스물 중반 어딘가에 세워놓았던 숫자를 조금씩 올렸다. 현재와 멀어질수록 어른의 정우성이 가까워지는 건 직전에 자신이 흘려보낸 추잡스러운 상상들이었다. 정확히는, 나이가 있는 만큼 저와 해볼 건 다 해봤겠지 하는 실례되는 생각들. 기껏 돌린 주제가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어? 형 면도 안 해요?!”
회피할 방향을 알려준 건 정우성이었다. 그는 어느샌가 몸 절반쯤을 화장실 안쪽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수시로 대화에서 조용해지는 상대를 기다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와, 나 형에 대해 모르는 거 되게 많았네.”
그러나 남자의 말에 대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구멍에서는 자꾸 쓸데없는 말들만 차올랐다. 모르는 게 많으면서 왜 헤어진 거냐는 식의 말꼬리. 혹은 네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서, 그래서 우리가 헤어진 거냐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을 질문들.
“…그, 아까 전에 그렇게 말해놓고서 이런 거 부탁하기 좀 쪽팔린 데요.”
“뭔데, 뿅.”
가까스로 이명헌이 늦지 않게 되물었다.
“혹시 나중에 면도기 하나만 사다 줄 수 있어요?”
상체를 뺀 정우성이 쭈뼛거리며 턱 근처를 쓰다듬었다. 곤란하면서도 뻘쭘한 모양새였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했다. 이명헌의 눈이 솔직하게 커진다. 흰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 중에서도 유달리 하얗던 만큼 체모가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수염이 덥수룩했던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완전히 의외인 미래는 또 아니긴 했다. 이명헌은 잠시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면도하는 정우성을 상상해본다. 거품을 내고, 거울 앞에 바짝 붙어서 턱을 이리저리 틀어가며 조심스럽게 면도하는 정우성.
“형 지금 제가 되게 낯설다고 생각했죠.”
“낯선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반사적으로 받아치면 아예 손바닥으로 하관을 가리던 그가 대놓고 눈을 빛냈다. 빠르게 돌려준 대답이 여러모로 의외인 것 같았다. 남자는 이번엔 보란 듯이 턱을 쓸었다. 꼭 화보를 찍는 사람 같았다.
“혹시 내가 너무 어른처럼 느껴졌나?”
우쭐하는 말투였다. 집중력이 바닥 치는 와중에도 득점 찬스를 알아보는 시야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날카롭다. 쓸데도 없이.
“이명헌 취향이 은근히 연상파라는 건 또 제가 잘 알죠.”
“스크래치 촌스럽다, 뿅.”
툭하면 우는 놈한테 꿰여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다. 그런데 연상은 무슨.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확신한 이명헌은 가벼운 눈짓으로 그의 왼쪽에 난 스크래치를 가리켰다.
“그럴 리가, 형 이거 되게 좋아했는데??”
처음 봤을 땐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웠고, 다음에는 현재와 지금을 구분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하고 말았으나 제 취향을 알고 있다고 확언하는 그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폼 잡던 정우성이 급하게 한 손으로 스크래치가 난 옆머리를 쓸었다. 형 이거 진짜 엄청 좋아했는데? 뭐지? 포즈만 놓고 보면 폼 잡은 직전보다도 지금이 더 화보 같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울까 봐 그랬나 보지.”
넌 항상 쉽게 울잖아. 남자에 대해 솔직한 감상 따위는 죽어서도 내뱉을 생각 없었던 이명헌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거 사실이면, 나 진짜 상처인데요. 그냥 던져본 말인데 진짜 어른이 돼서도 쉽게 우는지는 몰랐다, 뿅. 그래도 예전만큼, 아니, 지금만큼 엄청 울진 않거든요? 아니 지금도 그렇게 막, 울보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근데 이거 진짜 별로예요? 진짜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급하게 항변하던 정우성이 대놓고 집요하게 물어왔으나 귀담아듣지 않았다. 바닥에 던져진 침구 같은 건 아예 건들 생각도 안 하는 그를 대신해서 손수 정리에 나서다 보면 처음으로 그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물론 후배의 수발을 드는 건 어색했는데, 쉽게 들뜨는 그가 제 말 몇 마디에 당황하고 꼬여서 어버버 거리고. 자신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때로는 일부러라 할 정도로 놀리면서. 연인이라고 하기엔 짓궂어 보여도 단순한 선후배라 하기엔 지나칠 만큼 가깝게 시간을 보내는 지금이 마치,
“그럼 다시 기를까요? 스크래치 낸 거라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아니.”
이명헌이 단번에 대답했다.
“기르지 마.”
*
걱정뿐이었던 남자와의 동거는 생각보다 조용하게 흘러갔다.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방안에 처박혀 있어야 할 생활에 답답해 미치는 건 아닌가 했던 예상과 달리, 그는 무난하고도 무던하게 하루를 보냈다. 면도에 관해 떠들었던 게 무색하게도 이명헌은 남자가 면도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아침이 되면 산왕의 기상 시각보다 더 일찍 일어난 그가 자신을 조심히 깨웠다. 옷을 챙기거나 놓고 간 물건을 챙기러 낮에 잠시 들릴 때면 창가에 기대 숙소 밖에 있는 운동장이나 학교 풍경 따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훈련을 끝마치고 돌아가면 마지못해 받아들인 바닥 침구에서 먼저 눈 붙이고 있던 그가 반갑게 일어나서 저가 잠들 때까지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봤자 방안이 좁아서 훈련 일지를 적는 자신의 뒤에 우두커니 앉아서 쨍알거리는 게 전부였지만서도.
주장실이라는 거창한 명칭이 붙어도 크기 자체는 다른 방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있는 쾌척함도 2인실을 혼자 쓰니까 그랬던 거지, 용도에 맞게끔 둘이서 같이 쓰니 다른 기숙사와 똑같았다. 방구석이 편안한 사람이어도 미치기 좋은 패턴이다. 심지어 정우성은 방구석을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언젠가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그에게 심심하지 않으냐 슬쩍 물어본 적 있다. 돌아온 대답은 지극히 정우성다웠다.
그냥, 뭔가… 다 아니까 재미가 없네요.
시간을 역행한 와중에도 이미 겪어본 과거는 시시하다는 말투였다. 재미가 없으니 최선을 다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나 어른이나 재수 없는 지론이다. 뭔갈 더 말하려다가도 관망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미래를 알고서 무언갈 바꾸려고 하거나 개입하려 했다면 그것대로 곤란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연인과 헤어져서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에게 과거를 바꿀 의지가 없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헤어져서, 더는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더니. 그에게 지금은 추억을 정리하는 이별 여행쯤 될까.
나에게 지금은 살아가는 현재인데 말이다.
“명헌이 형.”
뒤에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려던 이명헌이 그대로 멈췄다. 다가온 상대가 손을 잡아 온 탓이었다. 뒷짐 지고 있던 손을 끌어간 뒤에는 아예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었다. 체육관은 자율 연습이 한창이었다. 고개만 돌려 상대를 확인하면 백 명이 넘는 선수들이 각자의 농구로 바쁜 그곳에서 태연한 척 서 있는 정우성이 있었다. 저보다 키가 크지만 올려보는 데 부담이 없는 정우성. 앞으로 고정된 눈동자 속에 설렘으로 가득한 정우성.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하게 굴어보지만,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가려는 정우성.
“그렇게 쳐다보다가 들켜도 난 몰라요.”
바로 옆에 서 있는 자신에게조차 들릴 듯 말 듯 한 속삭임에 이명헌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조금은 급한 몸짓이었다. 언젠가 주변인들에게 사귄다는 사실을 말해도 그 주변인조차 같은 학교, 같은 팀에 있는 지금은 아니었던 그들은 종종 보는 시선이 없을 때면 남들 몰래 손을 잡고는 했다. 평소처럼 잘 살다가도 한 번씩 튀어나오는 사랑의 해소였고,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애정 표현이었다.
“…오늘은 안 바쁜가 보네, 뿅.”
이명헌은 간지러운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말했다.
“바쁜데 그냥 핑계 대고 한 번 들렀어요.”
“시간 많으면 아껴 써라, 뿅.”
“시간 많아도 형은 보고 싶거든요.”
여전히 앞만 보던 정우성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눈길이 그가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다시 본 정우성은 말해놓고서 스스로도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손을 붙잡은 속박은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다. 그 안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져도 뒤로 물리거나 빼는 일은 없었다. 그게 정우성의 진심이었다. 연습으로 시끄러운 체육관의 소리가 멀어진다. 현재를 살아가는 너는 이렇게나 벅찬데도. 그 너머로 하루종일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솔직하게 말할 때면 묘하게 삐쭉거리고, 상대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가 점점 더 높아져 간다. 하얀 티셔츠 위로 처음 보는 후드 집업이 걸쳐지고, 마침내 지금의 정우성에게는 있을 리 없는 스크래치를 봐버린 순간, 이명헌이 잡고 있던 손을 뿌리쳤다. 남들 몰래 가깝던 거리가 벌어진다. 매몰찬 손길에 뚝심 있게 앞만 보던 정우성이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오늘 좀 피곤해서.”
뿌리친 손으로 얼굴을 짚은 이명헌이 말을 얼버무렸다.
“몸이 안 좋아요? 열 있나?”
여름 감기가 제일 독한데, 큰일 났네. 금방 목소리를 바꾼 정우성이 속상한 듯이 살펴왔다. 한 번 봐봐요. 내쳐졌던 손이 열을 재기 위해 다시 한번 가까워진다. 이명헌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정우성이 좁히려던 거리가 메꿔지지 않고 남는다. 걱정으로 당황스러움을 지워버렸던 그의 표정이 점차 미묘해진다.
“괜찮다. 그냥, 오늘따라 조금…….”
이명헌은 그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급하게 입을 열었다.
“…형 진짜 많이 피곤한가 봐요. 말꼬리도 빼고.”
뭐라도 더 이어 말하려던 혀가 굳었다. 그즈음 주장과 에이스가 심상치 않다는 걸 슬슬 눈치챈 부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실상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궁지에서 심장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표정을 읽기 어려운 편이라는 게 위안처럼 다가왔다. 스스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였다. 어떤 실수를 저지르든 간에 정우성만 모르고 넘어간다면 상관없었다.
“정우성! 잠깐 이리 와 봐!”
저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명헌 그만 괴롭히고 자식아!! 목청도 전국구급에 가까운 신현철이었다. 그의 앞에는 신현필을 비롯한 신입생들이 있었다. 안 그런 척해도 산왕을 자랑할 일 있으면 누구보다 정우성을 앞세우는 센터답게, 그가 가진 장점을 빠삭하게 꿰고 있던 신현철은 떠나기 전까지 에이스의 지식과 경험을 착실하게 빼먹을 요량이었다. 불려 간 정우성은 1학년들이, 그중에서도 특히 신현필이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까지 슛을 던지고 드리블에 대한 기초를 읊어야 할 것이다. 산왕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는 이상 이명헌은 그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를 마주보기 껄끄러운 지금 같은 때라면 더더욱.
“…나중에 또 이야기해요.”
5분 뒤 펼쳐질 앞일을 예감한 정우성의 한풀 꺾인 채 말했다. 말끝에는 숨겨지지 않은 섭섭함이 배어 나왔다. 등 뒤로 손을 원위치시킨 이명헌은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흰자위로 꼼지락거리는 그의 입술이 보였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장이 완성되는 것보다도 더 먼저 신현철의 재촉이 꽂힌다. 안 오냐? 결국 한숨으로 대화를 마친 정우성이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도 잠깐이었다. 세 걸음 정도 내디딘 그는 금방 몸을 돌렸다.
“대신에 오늘 남은 일은 부주장한테 맡기고 푹 쉬는 거예요!”
“뭐, 나?”
마침 근처에 서 있던 정성구가 당황한다.
“꼭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정우성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멀리 떠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손까지 휙휙 저어댔다. 서운함마저도 이겨낸 얼굴은 손을 잡아 왔을 때와 똑같다. 설레고, 벅차하며, 조금은 부끄러운 순간조차 좋아하는. 현철아, 저거 봐주지 마라. 어디로 봐도 발칙한 후배의 행동에 드물게 정성구까지 목소리를 깔았다. 부주장도 주장이라고 신현철은 제게 내려온 명령을 착실히 수행한다. 다년간 쌓아온 경험으로 잽싸게 피하려던 정우성이 얼마 못 가 바닥에 깔렸다. 눈치 보던 후배들은 못 본 척하고, 신현철은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정우성은 손바닥으로 바닥을 내리치고 항복을 선언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분위기가 팽팽해지던 산왕의 체육관에 다시금 일상이 찾아온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에서 홀로 서 있던 이명헌은 문득 자신이 선 밖에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당연하게 누리는 그곳에서 자신만이 한 걸음 밀려나 있다. 내디디면 그만큼 멀어지는 선 밖에 서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흘러가는 현재를 관망하는 게 전부였다.
*
인간의 망각이 축복이라면 혼자서만 알게 된 미래는 필히 저주이리라.
하늘에 깔린 구름마저도 유난히 어둡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이명헌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농구공을 집어 던졌다.
“형 왔, 아야!”
불이 다 꺼진 방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던 남자는 일어나는 와중에 얻어맞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돌아온 이를 한껏 반기려던 정우성은 항의하는 대신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아침에 들고 나갔던 짐을 푸는 듯 다시 나갈 채비를 하는 이명헌을 바라보았다.
“…형?”
“옷 입어.”
“네? 이 시간에요?”
“어, 이 시간에.”
세탁을 마친 후 깊숙한 곳에 숨겨놨던 그의 옷을 던졌다. 잠깐만요, 무슨 일인지 설명이라도. 급진전 되는 이야기에 당황하는 정우성을 무시하고 마저 자신의 겉옷을 꺼냈다. 농구부 전용으로 주는 트레이닝복 저지였다. 당장 이 방에서 쫓겨난다고 한들, 이명헌도 함께라는 것을 직감한 정우성이 금방 얌전해진다. 겉옷에 팔을 꿰어 넣는 것으로 밤에 나갈 준비를 마친 이명헌이 그때까지도 가만히 앉아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빨리 입어. 농구 하러 가게.”
영문을 몰라 하던 표정이 차츰 사라진다. 그제야 제게 던져진 옷을 매만지던 정우성이 다음에 눈을 깜빡였을 땐 이명헌이 아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갈아입고 올게요. 대답은 단순하고 짧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옷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새삼스러운 짓이었다. 그가 옆을 지나칠 때까지 무표정으로 제자리에 서 있던 이명헌은 남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방구석 모서리까지 굴러 들어간 농구공을 주워들었다. 산왕에 입학할 당시에 이미 손에 익은 그것을 쓰다듬고 있다 보면 밑바닥에 닿은 기분이었다. 이명헌은 자신이 느끼는 처참함을 들춰보는 대신에 먼저 신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밤중에 갑작스러운 농구 소리에도 순순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우성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방을 나설 때까지도 하는 말이라고는 갔다 오면 더울 테니 창을 열어두겠다는 게 고작이었다.
시간이 늦은 만큼 학교를 드나들 정문 후문은 모두 잠겨 있었다. 산왕이라면 한 번씩 하게 된다는 합숙 탈주 덕분에 월담에 대한 경험치가 남달랐던 이명헌이 먼저 공을 넘긴 뒤에 담을 탔다. 몇 번을 데리고 튀어도 일탈 행위 자체에 적응 못 하던 정우성은 손바닥을 간단하게 털더니 저보다 더 능숙하게 담을 뛰어넘었다. 신장이 미숙함을 덮어준 것 같기도 했다. 몇 년은 앞서 있는 그에게 위화감을 느끼기도 지쳤던 이명헌은 아키타에서 농구 하기 가장 좋은 곳을 두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공원을 찾아서 걸었다. 일부러 신사가 있는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발걸음에도 정우성은 침묵을 지키며 뒤를 따랐다.
풀벌레와 함께 개구리가 우는 소리, 이따금 바람이 풀숲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이 빈 곳을 채웠다. 운치 있는 자연 속에서도 어둠을 헤매는 것 같다. 뚜렷한 목적지조차 없었다면 이대로 영영 헤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시간이 늦어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어디에 서 있든 상관 않고 걷다 보면 농구 골대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있는 공터가 보였다.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그 뒤에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몇 점 내기예요?”
“15점에 나는 어드밴티지로 13점.”
“너무하네, 산왕 주전이면서.”
“넌 프로 선수가 양심도 없다.”
정우성이 옅게 웃었다. 아, 진짜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세상엔 숨기려고 해도 안 숨겨지는 게 있다니까요. 그래, 네 양심처럼. 이명헌이 감흥 없이 대꾸했다. 그런 것조차 대화라고 정우성은 계속해서 웃었다. 그 꼴을 더 지켜보는 대신에 입고 나왔던 겉옷을 벗었다. 자연스레 선공권을 가지고 시작해도 정우성은 말을 얹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명 브랜드 로고가 박힌 후드 집업을 벗은 뒤에는 골 밑을 지키고 섰다. 정우성은 고교생인 지금도 수비에 집중할 때면 빈틈이 없었다. NBA까지 거친 지금을 마주 보고 있노라면 미국에서 치렀던 첫 경기가 떠올랐다. 패배 의식과 가장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왔음에도, 이기지 못할 것만 같다.
딱히 불길하진 않았던 예감이 맞아 들어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정우성의 말마따나 산왕이고 주전이었는데, 그래도 4할의 승률을 유지했던 게 무색하게도 이명헌은 그의 드리블과 압박에 밀려나지 않도록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건 사실 정우성이 프로 선수인 것보다도 그의 농구 스타일이 달라진 게 컸다. 철저하게 포워드로서 길러졌을 정우성은 꼭 포인트 가드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간 4할의 승률은 시야가 부족한 정우성의 허점을 찌르는 시선 페인트의 덕이 컸던 만큼, 포인트 가드와 같은 시야를 가지게 된 정우성은 뚫을 곳이 보이질 않았다. 신현철만 한 신장을 가지고도 NBA에서는 작아서, 포지션을 바꿨나. 그런 격차에도 이명헌은 압박해오는 남자에게 전력으로 부딪쳤다. 코트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공터가, 가지도 못한 인터 하이 결승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격렬하게 저항했다. 13점을 갖고 시작한 이상 이겨도 별로 명예롭지 않은 승리에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농구 하는 정우성의 눈빛이, 비로소 살아있었으니까. 야밤에 이끌고 시작한 원온원은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한 분풀이인 동시에 뒤늦은 발버둥이었다. 남자가 정우성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만큼, 그 역시 정우성이라는 사실을 느끼고 싶었다. 봐주지 말라고 엄포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고등학생을 상대로 3점 슛부터 레이업, 내친김에 백핸드 덩크까지 처박는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어쩌면 가장 재밌는 농구를 포기해야만 했을지도 모르는 NBA조차, 이렇게 즐겼겠구나.
넘겨짚었지만 역시나 그곳이 너에게 진정 어울리는 땅이었구나. 남자가 정우성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짧고 모르는 부분은 더 짙게 다가온다. 그중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그의 프로 생활이라는 파편 앞에서, 이명헌은 그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니. 은은한 충격이 뒤따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기 가치를 깎아본 적 없던 이명헌이었음에도, 하필이면 상대가 미국으로 떠나는 정우성인 탓이었다.
대체 미래에서 나는 뭘 하고 있길래 지금 내가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지? 익숙지 않은 자학의 끝은 남 탓이었다. 크게 보면 여전히 자학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미래로 떠넘기면 현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됐다. 돌이켜보면 그에게서는 정우성을 찾았다가 지워내기에 바빴지, 자기 자신에 대해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미간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의 감각이 유독 생생하다.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정우성이 파고들었다. 재빠르게 이명헌이 쫓아도 체격의 페널티가 컸다. 힘껏 손을 뻗어봐도 닿질 않았다. 길이가 부족한 걸 알아서 늘린 무게조차 그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온갖 슛을 선보이던 그의 마지막 세레머니는 풀업 점퍼였다. 고교 농구를 군림하는 농구 영웅의 시그니처 스킬이었다.
“이걸로 끝!”
농구공은 깨끗하게 망을 통과한다. 손쉬웠을 승리의 앞에서도 더없이 상쾌한 모습에 이명헌은 옷깃만 끌어 흐르는 땀을 닦았다.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던 건 한밤중에 펼쳐진 원온원의 이유보다도 뻔했다.
미래에서 내가 뭘 하든 너와 헤어졌다는 게 싫었으니까.
“형! 아직 안 지쳤죠? 한 판 더 해요. 이번에는 30점, 똑같이 어드밴티지 28점 줄게요.”
자신의 골로 바닥에 뒹구는 농구공을 멋없게 직접 들고 온 정우성이 시끄럽게 재잘거렸다. 지금까지 어떻게 방안에서 틀어박혔는지 모를 활발함이었다. 하기는 뭘 해, 수준 안 맞아서 힘들다. 고등학생 중에 지금 나랑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요. 일단 신현철, 그리고 해남의 이정환이랑…, 그러지 말고 딱 한 판만 더해요. 네? 솔직히 나랑 하니까 실력도 좀 느는 것 같지 않아요? 그가 원하는 대로 솔직하게 그의 압박을 견디고 수비를 뚫는 데 큰 힘을 소모했던 이명헌은 보란 듯이 숨을 골랐다.
“나 내일 훈련.”
“아, 그랬지, 참….”
손안에서 공을 빙빙 돌리던 정우성이 눈에 띄게 가라앉는다.
“넌 왜 3년이나 지나서 신사를 찾아갔는데.”
그것을 바라보던 이명헌이 덤덤하게 물었다. 우리는 함께한 학교생활조차 3년을 못 채웠는데 말이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자 표현이었던 농구를 마친 지금이라면 물을 수 있었고, 지금이라면 들을 수 있었다.
“잘 살다가 3년쯤 되니까 그리워진 거야?”
“못 지내서, 3년이나 지나서도 신사 찾아간 건데.”
정우성은 천천히 내려가던 입꼬리를 다시 끌어올리고는 말했다. 차마 환한 웃음까지는 가지 못하고, 금방 내려왔다가 어색하게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머쓱한 얼굴이었다. 얼마 못 가 시선은 자신감을 잃은 것처럼 아래로 떨어진다. 그의 손안에는 여전히 농구공이 있었다.
“잘살아 보려고 했던 건 사실이에요. 근데 그것도 형이랑 한 약속 때문이었고요.”
“무슨 약속.”
양손에 이리저리 굴리다가 아예 땅에 튀기며 부산스럽게 굴던 정우성이 이내 그것을 골대에 던졌다.
“아.”
원온원 중에 한 번도 빗나가지 않던 공이 림을 맞고 튕겨 나온다.
“지금 건 실수.”
성의 없는 거짓말이었다.
“말했잖아요, 스포일러는 금지라고.”
“그럼 애초에 궁금하게 만들질 말던가.”
이명헌이 쏘아붙였다
“하루종일 방안에만 있다 보니까 헷갈렸나 봐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움츠러들었을 뾰족함에도 어깨만 으쓱인 정우성이 다시금 농구공을 주워 왔다. 음, 이제 돌아가요. 춥다. 말마따나 밤공기가 쌀쌀했으나 추위를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풀잎 끝에 이슬이 맺힐지언정 우리가 서 있는 계절은 여름이었다. 그러나 정우성은 다른 말로 수습을 시도하거나, 뒤늦게라도 아는 것을 털어놓는 대신에 먼저 겉옷을 챙겨 들고 공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어둠 속에서 제 뒤를 쫓아왔을 그는 혼자서도 돌아갈 길을 아는 것 같았다. 노골적인 뒷모습에 크게 한숨을 내쉰 이명헌이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바닥에 던져놨던 겉옷을 챙기는 손길에는 어쩔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나왔다.
산왕까지 돌아가는 그 시간은 또다시 적막만이 맴돌았으나 공터를 찾아갈 때와는 달랐다. 이명헌은 어렴풋하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남자가 도망쳐봤자 결국은 제 기숙사실 안이었다. 그때 가서도 말을 돌리거나 침묵한다면 그의 속을 갈라서라도 자신의 물음에 대해 그가 아는 모든 것을 꺼내놓게 할 생각이었다.
넘었던 담은 후문이었으나 큰길대로 걸어서 도착한 곳은 산왕의 정문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에 보는 눈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으므로 나왔던 때와 똑같은 순서로 먼저 이명헌이 농구공을 집어던진 뒤에 담을 넘었다. 후문보다 창살의 넓이가 좁은 정문은 발을 걸치기 쉬웠다. 두고두고 후회할 선택이었다. 먼저 농구공을 던져놓은 이상 그게 땅에 튕기는 소리라도 듣고 넘었어야 했는데.
가볍게 뛰어넘은 정문 너머에는 한 손으로 농구공을 받은 신현철이 서 있었다. 뭐야, 뭐지? 뭔데? 아무리 크게 놀라도 어깨가 조금 떨리는 정도로 그치는 천성이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것보다도 더 다행인 건 따라서 이상함을 감지하고 뒤따라서 담을 넘지 않은 정우성의 기민함이었다.
“산책 갔다 왔냐?”
애들이 너 피곤하다던데. 신현철이 집요하게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소문의 근원지를 어렵지 않게 유추한 이명헌이 자연스레 그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머리 복잡해서. 겸사겸사, 뿅.”
“그래?”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로,”
심드렁한 대답에 그를 속이는 것은 무리라고 빠르게 판단한 이명헌이 백기를 들어 올리다 멈췄다.
“특히 정우성한테는 비밀이다, 뿅.”
백기를 다시 올리는 건 패자의 요구사항을 적은 뒤였다. 그때까지도 한 손에는 농구공을 들고 있던 신현철이 돌연 눈을 크게 깜빡였다. 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신현철이 이명헌의 이상을 눈치채듯이 신현철의 이상을 눈치챈 이명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면 그의 고개가 대놓고 부자연스럽게 돌아간다.
“어…, 그렇댄다.”
신현철은 농구공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설마 하는 불안한 예감은 기어코 현실이 된다. 신현철의 등 뒤로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정우성이 걸어 나왔다. 월담을 들킨 부분부터 콕 집어서 그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말까지 다 들은 얼굴이었다. 신현철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게 꼭 발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아무것도 안 물었는데, 너 혼자 찔려서 다 말한 거라는 식의 남 탓. 엄밀히 따질 것도 없이 혼자서 실수한 게 맞았으므로 그가 하는 건 발뺌도, 남 탓도 아니긴 했다.
“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이 뭔데요?”
마주 보고 선 정우성이 물었다. 떠넘기지 못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곤란함으로 돌아온다.
“알았으면 따라올 게 뻔하니까, 뿅.”
담도 못 넘으면서. 평소를 가장한 이명헌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서 혼자 농구하고 온 거예요?”
“이명헌이 무슨 농구? 난 잘 모르겠는데?”
정우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운동장 저 멀리 어딘가로 던진 신현철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야, 너 이 시간에 농구 하다 왔다? 한 살 어린 후배가 아슬하게 줄타기 전에 끊어내려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주장 눈치 보는 척, 늦게나마 제 편을 들어주는 모습에 진정한 친구의 의리를 느낀 이명헌은 마찬가지로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우성이 잘못 본 거다, 뿅.
“정리됐으면 기숙사로 돌아가. 이러다 걸리면 다 같이 벌점, 뿅.”
이보다 좋은 타이밍은 오지 않을 것을 직감한 이명헌이 빠르게 상황을 마무리시켰다. 말을 마친 뒤에는 보란 듯이 걸음을 옮겼다. 정우성의 말이 길어질수록 정문 너머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남자가 신경 쓰인 탓이었다.
“같이 가요. 주장실 앞까지 데려다줄게요.”
“어, 그래. 너네끼리 가라.”
무언갈 참아낸 정우성이 척척 걸어오더니 마찬가지로 보란 듯이 옆에 섰다. 이명헌은 그의 눈에 신현철이 보이지 않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결론이 나오는 것보다도 먼저 신현철이 자리를 피했다. 불편한 상황에 더 끼어있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른 때라면 운 좋게 둘이 남은 기회에 몰래 들떴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를 가장한 이상 떠나는 친구를 붙잡을 수도 없었던 이명헌은 그저 정우성과 단둘이 걸을 때면 유달리 짧게 느껴지던 복도가 오늘도 그러길 바랄 뿐이었다.
“아까 낮에, 형 상태 안 좋아 보여서. 할 일 끝내고 보러 갔는데 조용하길래 자는 줄 알았어요.”
단둘이 남으면 정우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왔다.
“아까도 말했잖아. 그냥 생각 정리가 좀 필요했다, 뿅.”
“그럼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그래, 뿅.”
“그건 다행이다…….”
정우성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바보 같은 대답이었다. 다른 부원들이 형 요즘 시간만 비면 방에 간다고 그래서, 계속 걱정했어요. 정우성이 말을 이었다. 바닥만 보고 걷는 그로부터 필사적으로 눈을 돌린 이명헌은 건물로 들어서면서 정우성과 정우성의 물리적 거리라도 멀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밖으로 농구 하러 간 거 맞죠. 밖에서 다른 사람 만나거나, 그런 거 아니죠?”
“뿅.”
그가 느끼는 불안함을 눈치챈 이명헌이 이번에는 직접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내가 누굴 만나. 습관적으로 내뱉은 간단한 답변이 스스로 생각해도 거슬려서, 모르는 척 덧붙였다. 정우성이 조용해진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인데요, 내가 뭔가 잘못한 거 있거나 실수한 게 있으면 꼭 말해줘요.”
그가 다시 입을 여는 건 주장실 문 앞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시선은 여전히 땅을 향해 있었다.
“날 많이 못 미더워하는 거 알아요.”
“딱히, 뿅.”
잠자코 듣고 있으려 해도 정우성은 입 밖으로 말해야만 하는 것들만 내뱉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고백할 때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현철이 형이 그랬어요. 이명헌은 내가 농구 하는 걸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신현철한테 말했다고?”
이명헌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그 형이 먼저 눈치챈 거예요. 근데 형이 들키기 싫어하는 거 아니까, 그냥 모른 척해달라고 했는데, 요즘 따라 형을 잘 모르겠어서, 나는 상담할 친구도 없으니까…….”
정우성의 말이 급격하게 빨라진다. 횡설수설한 해명에 이명헌이 눈을 질끈 감았다. 평범한 주장과 에이스의 사이치고는 묘했을 기류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신현철의 행동이 그제야 다르게 이해됐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파져 온다. 그러나 당장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눈앞에서 보기 안쓰러울 만큼 주눅 든 그를 달래는 일이었다.
“화 안 났다, 뿅.”
어차피 언젠간 말해야 했던 거니까, 조금 이르게 말한 셈 치고 넘기면 그만이지. 큰 한숨과 섞여서 이어지는 말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이기도 했다. 불안은 무엇보다 빠르게 옮는 전염병이다. 그럼에도 당장 내뱉은 말에 거짓은 없었다. 이명헌은 정말로, 정우성을 만나는 이상 언젠가는 신현철을 포함한 산왕 주전들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에 가깝도록 오래 만날 텐데 언제까지고 그들에게 숨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진심으로 믿어왔음에도 아득한 기분을 느낀 건 전부 정우성 때문이었다. 헤어지는 걸 몰랐더라면, 만난다는 사실을 손쉽게 인정해버린 그의 행동조차도 기꺼이 사랑했을 텐데.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미래를 알아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순간을 겪어야 하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이명헌이 다시금 선 밖으로 밀려난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농구에는 지장 안 가게 할게요. 아니, 그냥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을 안 만들 거예요. 약속할게요. 그러니까,”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이명헌이 정우성의 손을 잡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약속이라는 단어에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미래를 알아서 아득하고, 불안한 와중에도 정우성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애틋해진다.
“…뭘 생각하든 그런 거 아니야.”
이명헌이 현재에 살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이었다.
“그냥 나중에, 생각이 좀 정리되면 말해줄게, 뿅.”
잡은 손에 힘을 주면 정우성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툭 치면 쏟아질 것처럼 눈망울이 그렁했다. 낮에 삼켰던 속상함까지 전부 역류한 것 같았다. 빤히 바라보면 그가 뒤늦게 손등으로 눈 밑을 벅벅 문질렀다. 애처럼 보이는 것에 유독 민감하게 구는 모습에 덩달아 긴장 풀린 이명헌이 살짝 웃었다. 정우성이 얽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먼저 잡은 순서가 희미해져 간다. 한참을 말없이 그러고 서 있었다. 손을 놓는 건 헤어질 때가 가까워진 다음이었다.
“먼저 들어가요. 형 들어가는 것만 보고 갈게요”
같은 건물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에 유치한 멘트였다. 한 번씩 정우성은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모를 구시대적인 말들을 써먹었다. 그게 연인끼리 하는 행위라면 뭐가 됐든 일단 해보는 그의 호기심, 혹은 고집이라는 걸 아는 이명헌은 그럴 때마다 꼴이 우스워지는 걸 알면서도 따랐다. 함께 느끼는 낯간지러운 기분은 때로 용기가 된다. 내친김에 정우성이 손을 뻗어 주장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평화가 깨지는 순간은 그렇게 언제나 갑작스럽다. 에스코트를 위해 문이 열리는 찰나에 이명헌이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열리려다 다시 닫히는 문의 파열음이 쾅 하고 복도에 크게 울렸다.
“…형?”
방 너머에는 정우성을 위해 깔아둔 침구가 남아있었다.
“갑자기 왜…,”
그리고 그건 정우성을 위한 게 아니다. 철제로 되어있는 문의 냉기가 등을 타고 넘어온다.
“형 지금 나한테, 뭘 숨기는 거예요?”
한 번을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정우성이 물었다.
“점호 시간 지났다, 뿅. 이제 돌아가.”
“그때까지 나가서 농구 한 게 누군데요.”
“생각 정리되면 말해주겠다고 했잖아, 뿅.”
“안에 뭐가 있는지 보여주면 갈게요.”
걸리는 게 있어도 한 걸음씩 먼저 물러났던 그는 이번만큼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잔뜩 표정을 구긴 채,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명헌은 정당한 요청에 응하고 싶었으나 문 뒤에 있는 것은 설명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명헌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뭘 생각하든 그런 거 아니라면서요.”
정우성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화보다도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였다.
“…농구, 혼자 한 거 아니죠.”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하필이면 이럴 때 적중률이 높았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적중률이 높은 걸지도 몰랐다. 그때까지도 문을 가로막고 선 채 땅만 보고 있던 이명헌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가라, 뿅.”
“그럼 숨기는 게 뭔지 지금 말해요.”
“……”
“명헌이 형.”
답답함으로 몸을 들썩이던 정우성이 끝내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진정하려는 듯 크게 내쉬는 숨소리가 가다듬어지기는커녕 점점 잘게 떨렸다. 대체 뭐길래 그러는 건데요. 몇 번이고 되물을수록 낮아지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가까스로 잠재운 화산은 이제까지 모인 용암과 함께 터지려 하고 있었다. 뭘 숨기고 있길래 형이 나한테 이래요. 얼핏 들으면 혼잣말 같기도 했던 그의 격앙된 자조가 결국 이명헌의 입술을 떨어지게 했다.
“대체 뭔데 형이 나를!”
“정우성!!”
터져 나온 감정을 찍어누르는 건 그보다 더 큰 불안감이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
그쯤엔 거의 쓰러질 것처럼 벽에 기대서 있던 이명헌이 말했다.
“다음에,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처음 듣는 말에 정우성이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안을 깨물었다. 손을 잡고 서 있던 직전보다도 더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먼저 몸을 돌리는 건 정우성이었다. 그게 오늘의 마지막 인사였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벽에 기대있던 이명헌은 주르륵 내려앉았다.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온전히 헤아리는 건 혼자 남겨진 뒤에도 버거운 일이어서, 한참을 찬 바닥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여름을 망친 주범은 남자라고 생각했음에도, 망쳐진 일상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의 결백을 믿어왔던 이명헌은 끔찍한 기분이었다. 도망치고 싶어도 기숙사실 안에 갇힌 건 누구였는지.
이명헌이 방 안으로 돌아가는 건 그러고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저 침대에 눕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었다. 책임 없는 도피라고 욕해도 상관없었다. 당장은 지치고 피곤한 몸을 뉘이고 싶었다. 더 이상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더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거세게 닫혔던 문고리를 힘없이 열었다.
“형!”
그 안에는 정우성이 있었다.
“되게 늦게 왔네요.”
형용할 수 없는 무력함과 함께 제 앞에서 떠났던 정우성의 얼굴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이했다. 정우성을 떠나보냈는데 눈앞에는 또 정우성이 있었다. 그에게 상처를 줬는데, 상처받지 않은 정우성이 자신을 반겼다. 한때는 제가 오기 전까지 방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정우성이다.
지칠 대로 지쳤던 숨이 점점 가빠진다.
*
“창문 안 닫고 나가길 잘했다, 그쵸?”
방 안에 있던 정우성은 해맑게 말했다.
“역시 기숙사는 후문 담이 가까워요.”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말투로, 전부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남자의 들뜬 목소리에 침대로 들어가려는 발걸음이 꼬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벽을 짚었다. 정우성은 다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정우성은 다 알고 있어서, 그래서 한밤중에 창문을 열어두고. 이미 다 겪어서, 자신은 듣지 못했던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3학년 여름에 내가 갑자기 이상해진 이유마저도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나와 헤어졌으면서,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명헌이 형?”
대화 중에 조용해지는 버릇을 감안하더라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제야 정우성이 상대를 살폈다.
“네가 필요하다던 도움은 방 빌려주는 게 다야?”
“네?”
“필요한 거 갖다주고, 남들 눈에 안 들키게 해주면 다냐고.”
방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지도 못하고, 신발장의 입구 경계 어딘가에 서 있던 이명헌이 물었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잖아.”
“…….”
“다시 돌아갈 마음이 있긴 해?”
어조는 날카로웠으나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고, 그래서 화를 내도 위태로워 보였다. 이명헌과 위태로움. 위태로운 이명헌.
“네가 정말 미래에서 온 정우성은 맞아?”
전혀 어울리지 않은 단어끼리 맞붙으니 모든 게 휘청이고 무너져 내렸다.
“형 지금 많이 흥분했어요. 일단 좀 진정하고,”
제대로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그를 지탱하기 위해서 정우성이 다가서는 그때였다. 그대로 쓰러져 주저앉을 것만 같았던 이명헌이 정우성의 멱살을 붙잡고 벽에 밀쳤다. 지친 사람으로 보였던 게 믿기지 않는 힘이었다. 철제문을 억지로 닫을 때만큼이나 큰소리가 좁은 주장실을 메운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던 사이가 맞냐고.”
이명헌이 씹어 삼키듯 물었다. 신현철의 뒤에 서도 숨겨지지 않을 체격의 남자는 순순히 벽에 등을 들이받고, 목을 조여오는 상대의 억센 손길을 받아들였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예요. 지금 나랑 만나고 있는 건 형이 더 잘 알면서,”
이명헌은 기어코 그가 자신을 미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날 붙잡지 않는 건데.”
“…….”
“왜 내가 널 의심하게 두는 거냐고.”
네가 정말 날 사랑했다면, 한때나마 사랑한 적이 있었다면.
“미래를 말해줄 순 없어도 불안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냐?”
신사에서 그를 만난 뒤로 자신은 한 번도 무언가를 온전히 알아본 적이 없었다. 살아온 시간은 무색해져 갔고, 믿어왔던 건 연약해졌으며, 당장 손안에 잡혀있는 것마저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는 순간에 몸을 묶어도 의미를 잃은 현재에서 아는 것은 무용했다. 목적과 방향을 잃으니 남은 건 일상을 방황하는 부유감뿐이었다.
멱살을 붙잡은 손이 볼품없이 떨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치욕적으로 느끼면서도 끝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정우성이다. 이제 와서 그것을 부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도, 여전히 그의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를 붙잡은 손아귀에서 차츰 힘이 빠졌다. 그 반작용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 밑이 미칠 듯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형은 내가, 형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정우성이 조용하게 물었다. 이명헌은 대답 대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그런 걸 되묻는 시점에서, 어떤 말도 그에게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고백하고 거절당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여름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면, 사랑한다는 대답을 돌려받았기에 현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이명헌을 버겁게 만들었다.
“형은 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진짜 모르는구나.”
정우성이 이어서 말했다. 이명헌은 말에 담긴 뜻을 헤아리는 대신에 몰아세웠던 그를 놓아주었다. 궤변은 더 필요 없었다.
“우리가 얼마나 만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제 와서 그딴 거,”
“우리가 그동안 뭘 했는데.”
그를 끊어내려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한다. 가만히 벽에 붙어있던 남자의 손이 제 목을 타고 올라온 탓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던 첫 만남과 비슷했으나 달랐다. 목덜미를 쥐는 듯 타고 올라와서 턱 날과 뺨 어딘가를 어루만지는 엄지 손끝이 조심스럽다. 그런 한편으로는 자신만큼이나 위태로웠으며, 세월이 배겨진 게 늘 그렇듯 억셌다. 한 번도 타인에게 만져진 적 없는 곳에서 열기가 불길처럼 번졌다. 이미 지친 몸이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잡아먹힐 것만 같다. 관념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명헌은 정말 이대로, 눈앞에 남자에게 집어삼켜질 것 같아서.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데…….”
이명헌에게 익숙한 높이보다도 한참 위에 있는 정우성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그 숨결이 점차 아래로 닿아온다. 정우성은 자신의 낮은 키를 익숙해했다.
“만지지 마!!”
소름 끼치는 위화감에 다급하게 그를 밀쳐냈다. 손으로 안 된다면 발을 써서, 발로도 안 된다면 온몸을 비틀어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남자는 이번에도 순순히 놓아주었다. 몸의 자유를 되찾은 이명헌이 다급히 거리를 벌리며 그가 손댔던 목덜미 근처 어딘가를 짚었다. 침착함을 제일의 무기로 삼고 살아왔음에도 몰아쉬는 숨이 거칠었다. 이번에야말로 닿았던 곳이 전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내 앞에서 뿅 안 쓸 거면, 차라리 삐뇽은 어때요?”
정우성이 덤덤하게 말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말꼬리의 출처가 어딘지는 뻔했다. 혼란스러움을 다잡으려고 해도 들이켜는 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각이 생생하다. 대화가 치달을 때마다 감정적으로 구는 건 언제나 정우성이었는데, 지금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정우성이었다.
“…미련 남았으면 이럴 시간에 돌아가서 다시 만나면 되잖아.”
“형이 찼으면서 너무하네.”
탓하는 목소리에는 감정이라고 할 게 전부 메말라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엉망이었던 이명헌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너 설마, 미국 가서 바람,”
“그런 거 안 했어요.”
“그럼 나한테 사기 쳤냐?”
“아니에요.”
대답은 묻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돌아왔다. 떠올릴 수 있는 정우성과의 이별 사유는 그게 전부였던 이명헌이 입을 다무는 것도 잠깐이었다.
“…난 권태기라고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야.”
“겪어보지도 않고 그런 말 하는 거 아닌데.”
이번에도 대답은 말이 끝나자마자 나온다. 가까스로 열렸던 이명헌의 입술이 붙었다. 그것까지도 가만히 지켜보던 정우성은 속에 있는 것을 털어내듯 큰 숨을 내쉬며 보란 듯이 어깨를 움직였다.
“뭐, 권태기 와서 헤어진 건 아니지만요.”
“그럼 뭔데.”
목소리에는 미약한 짜증이 섞였다. 설마 이런 분위기에 저를 놀리는 건가 싶어서였다.
“…저희가 신사에서 만났을 때, 무슨 소원 빌고 있었어요?”
문 너머 어딘가를 보던 정우성이 뜬금없이 물었다.
“못 빌었다. 네가 와서.”
“그럼 뭐 빌려고 했는데요?”
“세후 계산 끝낸 로또 당첨금 55억.”
“형답네요.”
정우성이 작게 웃었다. 내가 미국 가서는 절대 안 알려주길래, 난 또 엄청 부끄러운 거 빈 줄 알았더니. 그의 말끝을 흐려진다. 그 한순간, 이명헌은 처음으로 정우성이 그려내는 미래의 자신과 맞닿은 기분이었다. 평생을 놀고먹어도 되는 돈이야 물론 탐났지만, 은근슬쩍 돌리는 주제를 빨리 끊어버리기 위한 간단한 대답에 불과했다. 만약 정우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빌 소원은 돈보다도 좀 더 길고, 뻔한 것들이었다. 부모님의 건강. 친구들의 대학. 선발 대회의 성적. 세계 기후 위기 극복 및 세계 평화. 겸사겸사 너의 안정적인 미국 진출. 내친 김에 이 여름이 영원하기를 유치하게도 빌어보기도 하면서……. 이명헌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인다.
“만약에요. 내가 바람을 폈든, 사기를 쳤든, 권태기에서 질리게 굴었든, 아무튼 간에 형이 상상하는 무언가가 전부 사실이라면요.”
그대로 침묵할 줄 알았던 정우성이 입을 열었다.
“날 사랑한 걸 후회할 것 같아요?”
건조한 목소리로 건네진 질문은 미국으로 떠날 사람에게 고백한 순간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안 해.”
“겪어보지도 않고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니까…….”
“근데 널 만난 건 후회 돼.”
이명헌이 곧이어 말했다. 미묘하게 웃음 짓던 정우성의 입가가 그대로 멈췄다.
“이건 내가 겪은 거 맞지?”
일부러 확인을 구하듯 물었다. 함께 이기적인 선택을 한 여름에, 혼자서 답을 바꾸고, 그걸 심지어 정답으로 정해두고, 더 이기적이게도 질문해온 남자를 후벼파기 위한 말이었다. 현재의 이명헌이 최초로 먹인 유효타였다. 그 하나가 승패를 결정지었음을 안 이명헌은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얼어붙은 남자를 무시하고 방에 들어갔다. 곧바로 침대를 향하는 대신에 간단한 세면도구 따위를 챙겼다.
“돌아가기 전까지 마음대로 있든가 해. 그때까지 난 다른 곳에서 잔다.”
다시 그를 지나쳐서 방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그때까지도 제게 멱살을 잡혔던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던 정우성이 손목을 붙잡았다. 뒤늦은 그의 후회에 완전히 질려버린 이명헌이 더는 너와 같이 있기 싫다고, 자신의 감정을 좀 더 직접적으로 피력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침에는, 돌아와요.”
정우성이 먼저 말했다. 별로 길지도 않은 문장을 이어 말하기 위해 한 번 숨을 끊은 목소리는 태연했다. 화장실 한 개잖아요. 셋이 쓰면 불편하니까, 준비는 여기서 하고 나가요. 남자는 제 쪽을 바라보지도 못하고서 말했다. 언성을 높이며 싸워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때에 건네진 건 어른의 배려였다. 대답 대신 손을 뿌리치는 것으로 뜻을 전한 이명헌은 정우성은 도망치지 못하는 방으로부터 빠져나왔다.
새벽이 다가와도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
쳐들어간 건 정성구와 최동오의 방이었다.
보기보다 마음이 여린 놈과 그냥 대놓고 여린 놈은 갑작스레 찾아온 주장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면 입을 꾹 다무는 이명헌의 모습에도 두 사람은 그저 상대가 들어오기에 편하도록 문을 더 활짝 열 뿐이었다. 고등학생 친구가 평생 가는 진짜 친구라던 어른들의 상투적인 말은 걸러 듣는 이명헌이었으나, 산왕에서 만난 그들은 붙잡아서라도 오래 보고 싶은 친구가 맞았다.
방에 들이고도 이명헌이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을 직감한 정성구는 새벽의 상담소를 여는 대신에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오늘 하루가 피곤한 건 저뿐만이 아니었는지 눈을 붙인 그는 금방 코를 골았다. 이명헌은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아예 자신의 2층 침대까지 내주려는 최동오의 걱정 섞인 배려를 거절한 뒤에 이불 깐 바닥에 누웠다. 방안에 고요함이 내려앉는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최동오의 숨소리가 들렸다.
손쉽게 잠에 빠진 둘과 달리 이명헌은 경계선을 잃고 자꾸만 겹치듯 엇갈리는 두 명의 정우성 때문에 눈도 쉽게 감지 못 했다. 잠으로 회피하기 위해 머리를 비우려 할수록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이 밀려들었다. 정우성은 뭘 생각하든 그런 게 아니라는 자신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가, 상상하는 무언가가 전부 사실이면 어쩔 거냐고 물어왔다. 펑펑 우는 것보다도 더 서러워 보이는 꼴로 제 앞에서 떠나갔다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열병을 앓듯이 끙끙거리던 이명헌은 결국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가까운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다 아예 뒤통수까지 벽에다 갖다 박았다.
이번에 억지로 눈을 감아서 떠오르는 건 만나온 시간에 대해 언급하던 정우성이었다. 과거로 돌아와서, 팔자에도 없는 인내심을 새겨가면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남자가 우습다가도, 일부러 상처 준 제게 돌아오라 말하던 어른의 정우성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그를 단단하게 만든 건 단순히 흘러간 세월, 그거 하나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다. 주장실보다 좀 더 동쪽에 있는 기숙사실 창가로 새벽빛이 어슴푸레 들어온다. 제 방에서 나왔을 때 봤던 하늘과는 전혀 다른 빛깔이었다. 나오기 직전에 그가 붙잡았던 손목이 옅은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남자가 남긴 흔적은 저 너머에 속해 있는 정우성 역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것을 감싸듯 자신의 손목을 쥐었다. 신장에 비하면 손이 큰 편이었음에도 손목에 남은 붉은색은 가려지지 않았다.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그저 알기 싫다는 마음만 가득했던 미래가 처음으로 궁금했다.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했다. 미래의 자신에게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겼길래 그를 떠났는지 알고 싶었다. 그걸 알아내서, 이명헌은, 남자의 미래에 남아있고 싶었다.
아무런 의지도 엿보이지 않는 정우성과 달리 이명헌은 미래를 바꿀 가능성이 남은 지금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비록 미래의 자신은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지언정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숨 쉬는 이명헌은 남자가 있어야 할 미래에서, 당연하게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있어야 할 곳을 거스르고 지금을 살아가는 남자를 어떤 순간에도 사랑하고 싶었다. 뒤죽박죽 혼란하게 뒤섞이던 감정을 식히고 남은 진심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그 하나가 이명헌이 사는 현재의 의미가 되었다. 다시 눈을 뜨면 볼품없이 바닥에 깔린 하얀 침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로 저가 오기 전까진 낮이고 밤이고 그곳에 누워있던 정우성이 보였다.
깊은 한숨이 입 밖으로 샌다. 그런 뒤에는 잠든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이불을 갰다. 감정이 치달아 결정한 도망이었으나 결국은 이렇게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우성을 지나치는 게 가능했다면 신사에서부터 여기까지 일을 끌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밤이었음에도 춥거나 쌀쌀하지 않은 복도를 지나 다시금 제 방으로 향했다. 다른 곳에 있겠다 말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는 꼴이 조금은 우습게도 느껴졌다. 복도로 나 있는 창밖으로는 슬슬 옅어지는 하늘이 보였다. 여름이어서인지 유독 밤이 짧았다. 덩달아 끝나가는 취침 시간에도 미련은 없었다. 어디에 누웠어도 오늘은 잠이 들지 못할 것을 알아서였다.
굳게 닫힌 주장실 문 앞에서 두어 번 정도 심호흡했다. 박차고 나왔던 문을 몇 시간, 혹은 몇십 분 만에 다시 열고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노크를 할까 싶다가, 제 방에 그러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해서 그냥 예고 없이 문을 열었다. 그렇게 남자가 있는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명헌의 발이 멈췄다.
불이 꺼진 방은 다른 곳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커튼이 처져있다고 한들 이 방만 여전히 밤의 시간에 머무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공백에 죽은 듯이 누워있을 줄 알았던 정우성은 방문이 가장 잘 보이는 벽에 기대앉아있었다. 다른 숙소로 떠나있었던 자신 또한 벽에 기대있다가 왔지만, 정우성은 달랐다. 무릎을 세우고 그곳에 얹은 팔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쉽게 우는 에이스에게 몸을 구기는 재주가 있다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뭔가 달랐다. 또 정우성만이 달랐다. 언젠가부터 잠잠하던 경고등에 차츰 불이 들어온다.
“정우성…?”
이명헌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처음으로 부르는 그의 이름이었다.
“…형?”
열린 문으로 들어간 빛이 그의 발끝에 닿는다.
“형, 명헌이 형!!”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찾아온 이를 확인한 정우성이 다급하게 저가 서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자리를 박차고 뛰어오는 와중에 몇 번이고 발이 미끄러졌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넘어질 것 같이 휘청거리면 그냥 넘어진 뒤에 제 앞으로 달려왔다. 그 몸짓은 흡사 기어 오는 것도 같았다. 빛에 가까워짐에 따라 제대로 보게 된 남자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이명헌이 급하게 문을 닫는 것과 동시에 우악스러운 손길이 균형을 망가트렸다. 여기, 여기 있, 여기 있는 거죠. 나 두고 가면 안 돼요. 형, 나만 남기고, 가지 마요. 가지 마요, 명헌이 형. 말을 더듬으면서까지 힘겹게 문장을 완성한 정우성은 숨조차 겨우 쉬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을 매만지는 손길은 입에 담지 못할 의도가 담겨있던 지금까지와 틀렸다. 그건 틀리다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 자신을 만져오는 손길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어느 때보다 절박했고, 간절했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것처럼 벅차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떠날 때까지만 해도 분명 괜찮았던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들만 반복했다.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요. 그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전부 다,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시는 나…….”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의해 쏟아져 나왔어야 할 애원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자신의 어깨에 매달렸던 정우성이 점점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런 처절한 말조차 울음에 집어삼켜질 즈음에는 아예 무릎을 꿇었다. 이명헌은 자신의 허벅지 근처 매달려서 목 메어 우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마 손을 뻗을 수조차 없었다.
“너, 대체 나한테 무슨 잘못을 했길래 헤어진 거냐.”
가까스로 입을 연 이명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처참함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형이 내 뭐가 미워서 날 그렇게 남겨놓고 갔지?”
정우성이 자조했다. 그것조차 미친 사람의 중얼거림 같았다.
“…일단 일어나. 무릎 상한다.”
그래서 이명헌은 최대한 눈에 보이는 사실부터 수습하려 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보호대도 없이 바닥에 넘어진 것과 다름없는 그의 무릎이었다.
“이깟 무릎 좀 상하면 어때요.”
어차피 꿇어도 안 돌아오는데. 나 반성 많이 했거든요. 정말, 정말 엄청 많이 했는데. 두서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에 결국 이명헌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명헌은, 미친 사람같이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도, 최대한 눈에 보이는 사실부터 수습하기 위해서.
“약속 지킨다며.”
“나한테 몇 년이 지났는데요.”
과거로부터 회피하려는 듯한 발언이었다. 원할 때만 미래를 끌어오는 편리함은 분명히 편법의 영역이었다. 미래에 대한 반사적인 괘씸함이 자기도 모르게 느끼고 있던 혼란함을 다잡는다. 돌아가야 할 미래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할 때부터 미간을 구기고 있던 이명헌이 입을 벌리던 그때였다. 정우성이 손목을 붙잡았다.
“되게 웃기죠? 이제 와서 옛날 일이라고 타령하는 게.”
그것을 끌어가거나, 멋대로 휘두르는 대신에 손이 원래 있어야 할 허리 옆으로 되돌린 정우성은 여전히 고개를 땅에 처박은 채로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게 참 그렇게 매정하더라고요. 형이 내 농구를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도 농구에는 영향 끼치지 않겠다고 한 게 내가 한 약속이었죠. 지키려고 했어요. 근데 그렇게 떠나는 건 아니잖아. 그건 반칙이잖아. 그렇게 날 떠나놓고 내 농구가 멀쩡하길 바라는 게 어딨어. 그건 아닌 거잖아요.”
“무슨,”
“우리가 왜 헤어진 건지 계속 궁금해했죠.”
그가 붙잡은 손목이 미친 듯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형이 먼저 날 버리고 갔잖아요.”
“…….”
“내가 붙잡을 수도 없는 곳으로.”
3년 동안 못 지내서 찾아갔다던 신사에서, 사랑해서 빌었다던 소원. 과거로 돌아온 꿈같은 경험을 한 번도 꿈이라 부정하지 않았던 정우성. NBA까지 들어가 놓고서 그곳으로 돌아가는 데 필사적이지 않았던 정우성. 내가 방에 없을 때면 항상 죽은 듯이 누워있던 정우성. 반대로 방에 있을 때는 절대 잠들지 않았던 정우성. 그 모든 순간에 서려 있던 아픔으로 초대받은 이명헌은 비로소 남자의 전부를 이해한다.
“거기서 내가 죽었구나.”
이명헌이 자신의 죽음을 읊었다.
“언제…? 어떻게?”
넋 나간 목소리로 물었다. 연인의 죽음으로부터 3년을 방황하며 부유감마저도 희미해진 남자의 울음이 거세진다. 이명헌은 살아오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흐느낌이었다. 그때까지도 추상적이었던 자신의 죽음이 몸 위로 끼얹어진다. 어둠으로 물들어있던 자신의 방 속에는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게 죽음에 대한 공포인지, 남겨진 사람의 비참함인지, 일어날 비극에 대한 예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미지로부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래야 한다는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쩌면 생존 본능일지도 몰랐다. 이미 오래전에 그것으로부터 집어삼켜진 정우성이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그게 꼭 도망친다면 지금뿐이라는 신호 같아서, 이명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곳으로부터 도망쳤다.
앞으로 나아가는 뜀박질이 위태롭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의 걸음에는 혼란함뿐이다. 잔뜩 흐트러진 숨을 부여잡던 이명헌이 얼마 가지 않아 온전히 땅을 딛고 섰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속에 허리가 굽어지고, 손은 소화되지 않는 것으로 들어찬 가슴을 짚었다. 온몸에 흐르는 식은땀이 끔찍하다. 찬 공기가 들어찬 폐가 불타는 듯 뜨겁고 입안에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맴돌았음에도 이명헌은 다시 달렸다. 학교를 빠져나간 지는 한참이나 지났으나 여전히 그 방에 있는 것 같아서였다.
아스팔트 도로 위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신사에서 만난 정우성의 행동들이 떠올랐고, 이미 죽은 연인의 과거를 마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정우성의 진의가 다가왔다.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어. 옷깃을 붙잡았을 때 돌아보지 말아야 했다. 비겁하게나마 솔직했기에 정우성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그 빌어먹을 사실이 이명헌을 미치도록 괴롭게 만들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달려도 떨어지질 않는다. 그 위에 형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정우성의 앳된 목소리가 겹치면 이제는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우성이 내뱉은 말들이 환각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몸이 안 좋아요? 열 있나? 날 많이 못 미더워하는 거 알아요. 바쁜데 그냥 핑계 대고 한 번 들렀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농구에는 지장 안 가게 할게요. 그렇게 쳐다보다 들켜도 몰라요. 대체 뭘 숨기길래 형이 나한테 이래요. 명헌이 형. 꼭이에요! 시간 많아도 형은 보고 싶거든요.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는 다음 순간에는 균형을 잃은 몸이 땅바닥에 굴렀다.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피부가 쓸린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건지, 넋 놓고 뛰다가 풀어진 신발 끈을 밟은 건지, 기어코 발이 꼬인 건지 알 길 없었으나 중요하지도 않았다. 땅에 온몸이 처박히고 나서야 멈춘 이명헌이 한계까지 내몰린 숨을 골랐다. 살아있기에 느껴지는 피로감의 끝에서 눈을 감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타고난 천성 탓에 열의 넘치게 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일찍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출국을 기다리는 매 순간 남겨지기 싫었다고 한들, 그를 남겨놓고 싶지는 않았다. 간절한 소망까지는 없어도 소소하게나마 하고 싶은 건 있었다. 일단은, 농구가 하고 싶었다. 농구가 하고 싶었고, 정우성과 더 많이 유치해지고 싶었다. 주전들에게 그와 사귄다고 말하고 싶었고, 남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손잡고 싶었다. 예고된 비극 앞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삶에 대한 깊은 갈망을 느꼈다.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냐던 그의 물음이 비로소 가시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럼에도 후회되지 않는 딱 하나가 그를 사랑한 일이었다. 고백은 후회스러웠는데 그를 사랑한 것만큼은 후회되지 않았다. 농구를 좋아해서. 그리고 잘해서. 포인트 가드가 되어서. 그렇게 산왕에 와서. 주전이 되어서. 주장이 되어서. 산왕에 온 정우성을 만난 것만큼은 후회되지 않아서. 그래서 이명헌은, 아무것도 후회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천히 눈을 뜬 이명헌이 바닥에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에는 돌조각이 박혀있었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온 아스팔트 근처에는 산이 울창했다. 한없이 어두웠던 녹음 속에서 자신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던 정우성이 스쳐 지나간다. 이미 모든 것을 겪은 남자는 돌아갈 방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터에서 돌아갈 길을 알고 있었듯 말이다. 남자에 대한 이명헌의 어렴풋한 확신은 틀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방황한 끝에 길을 잃고 여기까지 와버린 이유가, 정말 자신을 사랑해서라면 이명헌은 반드시 그에게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잠도 자지 못해 엉망인 몸으로 달려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뜀박질이 가볍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사람은 더는 걸음을 망설이지 않았다.
*
해가 떴으나 산왕이 일어나기는 아직 이른 시간. 일찍 눈을 뜬 부원들은 복도나 기숙사 입구에서 마주친 주장을 알아보고 인사해온다. 개중에는 방을 빌려준 최동오도 있었지만, 이명헌은 언제 나갔냐는 친구의 다정한 물음조차 무시하고 자신의 방을 향해 뛰었다. 그때쯤엔 입고 있던 티셔츠는 왕복으로 달리면서 흘린 땀으로 축축했다.
도착한 주장실 앞에서 망설임 없이 문을 열면 안은 깨끗했다. 바닥에 깔린 침구 따위도 없었고, 신발장이 흐트러져있지도 않았다. 걷어진 커튼으로는 따뜻한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누군가 묵은 흔적은커녕, 처음부터 어둠 같은 건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방의 모습에도 이명헌은 당황하지 않았다. 잊혀야 하는 꿈이 사라지는 길은 마찬가지로 이미 알고 있었다.
땀에 젖어 무거운 티셔츠를 갈아입고 곧바로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평소와는 다른 주장의 모습에 부원들이 하나둘씩 주장실로 모여들었다. 점차 커지는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기숙사를, 복도를 빠져나갔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다리 근육이 땅을 딛을 때마다 한계를 호소했다. 그러나 아직은 멈추어 설 수 없었던 이명헌은 최대한 뛰는 힘을 아끼며 걸음을 재촉했다. 기숙사는 후문과 가까웠으나 신사까지 가는 길은 정문이 더 빨랐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숙소 건물의 모퉁이를 돌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있던 이명헌이 그대로 넘어질 뻔한 그 순간에, 상대가 팔을 붙잡아 세웠다.
“…형.”
이명헌이 알고, 사랑하는, 현재의 정우성이었다.
“저 형한테 할 말 있어요.”
애써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는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의 새벽이 또 얼마나 심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작 한 살 어릴 뿐인데도, 너무나 솔직하다. 그리고 강렬하다. 그러면서도 애틋하고 소중했다. 정우성은 그런 사람이다. 단단히 각오를 마치고 이곳까지 왔을 정우성은 마치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상대의 시선에 얼마 가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우성아.”
그래서 이명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갔다 올게, 뿅.”
제 팔을 붙잡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한순간,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남겨진 사람의 기다림이 엿보인다. …어딜요?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다잡은 정우성이 곧바로 물었으나 이명헌에게는 더 이상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정우성의 손을 뗀 이명헌은 눈앞에 보이는 정문을 향해서, 신사를 향해서 뛰었다.
“어딜 가는 건데요. 명헌이 형! 어디 가는 거냐고요!”
뒤에서 다급하게 자신을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멈춰서는 일은 없었다. 돌아와서 정우성을 만나도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다음에도, 혹은 나중에도. 정우성이 오늘에 대해서 들을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명헌은 이미 한계를 넘은 다리를 움직였다. 정우성에게 말해줄 수 없어도, 정우성에게는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한참을 달리면 여름의 햇볕에도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보였다. 어디에 숨겨도 머리 하나는 툭 튀어나올 덩치는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묵묵히 걷고 있었다. 달리고 또 달려서 마침내 닿은 뒷모습에 이명헌이 한껏 크게 소리쳤다.
“정우성!!”
부족한 사이를 메꾸기에는 충분한 울림이었다. 3년이 지나도 이명헌을 지나치지 못하는 남자의 걸음이 멈췄다.
“…잠깐 걷자.”
별다른 주어나 목적어는 없었으나 도착할 곳은 뻔했다. 그럼에도 정우성은 말없이 상대가 옆에 서기를 기다렸다. 이명헌은 하루는 그냥 몸져누울 각오로 마저 달려서 그의 옆에 섰다. 그즈음에는 완전히 아침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눈부신 햇살이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이명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정우성 또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신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도 두 사람은 조용히 남은 길을 걸었다. 적막을 채우는 건 언젠가 그와 함께 들었던 풀벌레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였다.
“…사실 형이랑 자주 싸웠어요.”
언젠가 영원하기를 바랐던 여름의 적막을 깬 건 정우성이었다. 비슷한 풍경만 반복되던 도로의 사이에는 하얀 석재의 토리이가 있었다.
“네가 미국에 오네, 마네, 일본에 가네, 마네 하면서요. 보고 싶어서, 사랑해서 싸운 거죠. 웃긴 말인 거 아는데, 그러다가, 내가 시즌 때려치우고 가겠다고 하니까 형이 온다고 그랬어요.”
진짜 못났다, 그쵸? 남자가 자조했으나 이명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있잖아요. 세상에 사고로 죽는 사람이 엄청 많대요. 근데 나한테 형은 되게 특별한 사람이라서, 이 세상에 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아도 형은 아닐 줄 알았어요. 그래서 신이 나한테 그랬나. 진짜 나쁜 새끼 아니에요? 인터 하이 그렇게 지고 내가 기도를 얼마나 조심히 하면서 살아왔는데.”
옅게나마 피어올랐던 웃음이 차츰 사라져간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형이 미국으로 온다고 했던 그날에.”
말을 이어가려던 정우성의 입술이 떨렸다. 초조하기에 완전한 끝의 예고에 심장이 쿵쾅거렸으나 이명헌은 더는 불안하지 않았다.
“처음엔 안 믿었어요. 주변에서 계속 일본 좀 오라고 하는데도 안 가고, 그냥 계속 미국에 있었어요. 내가 미국에 있으니까 형을 못 보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죽을 수가 있냐고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형이 안 오네. 형이 나한테 한 마지막 말이 날 보러 오겠다는 거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형이 안 와.”
어느 순간부터 느려지던 그의 걸음이 완전히 멈춘다.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형을 보자마자 알았어요. 근데, 돌아가기 싫었어요.”
토리이의 앞에 도착하기까지는 이제 세 걸음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돌아가기 싫어요.”
멈춰 선 정우성이 상대를 바라보고 섰다. 그를 따라 멈춰 선 이명헌이 똑같이 그를 마주 볼 수 있도록 몸을 돌렸다. 그럭저럭 덤덤하게 말하던 얼굴은 역시나 형편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산왕의 에이스라면 모를까, NBA에서 뛰는 농구 영웅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그리운 것을 찾은 듯 바라보면 이번에도 정우성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떨구면 눈 밑에 매달려 있던 게 툭 하고 땅 위로 떨어진다. 그냥 내가 여기 있고 싶어. 난 이미 농구도 질릴 만큼 해봤어요.
“어차피 이곳의 나는 곧 미국 가잖아요. 남은 건 내가 대신 할게. 내가 형이랑 같이 남을게요.”
닿자마자 지면에 스며들었을 물기가 온갖 곳으로 퍼져 나간다.
“날 사랑할 거라면, 나도 사랑해요.”
정우성이 이명헌의 옷깃 끝자락을 붙잡았다.
“그게 안 된다면, 내가 안 된다면, 나도 사랑하지 마요.”
“우성.”
“내가 아무리 매달리고 빌어도 만나지 마요. 멋대로 형 귀찮게 하고 오해하면 그냥 두고 가요. 헤어지면 죽겠다고 굴면 그냥 그렇게 둬요. 그러니까, 형. 미국에 오지 마요. 죽지 마요, 형. 나만 남겨놓고 가지 마.”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정우성이,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우성이 이곳에 존재하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이명헌은 이미 수많은 모순을 통해 알고 있었다.
“…신사에서 처음 봤을 때, 날 보고 안심했었지.”
이윽고 이명헌이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 여기 남아도 우린 안 될 거야.”
“해보지도 않고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넌 날 보고 안심하고, 반가워해도 기뻐하지 않으니까, 뿅.”
모두에게 익숙한 말꼬리가 끝을 맺는다. 정우성의 눈이 커졌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동그래지니 그 안에 흔들리는 동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슬픔을 토해내는 일조차 익숙해졌을 입술이 벌려진 채로 굳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했는데, 흔한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았다. 여유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모습에 이명헌은 비로소 그가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생각했다.
“너도 알고 있는 거야. 나는 네가 사랑했던 이명헌이 아니라는 걸.”
앞에 서 있는 정우성이 자신에게 너무 크고, 단단하며, 멀었던 것처럼. 자신 역시 정우성에게 너무 작고, 연약하며, 어리고, 멀었던 것이다. 순리의 거리감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점점 가쁘게 숨을 쉬던 정우성이 급하게 눈을 비벼 닦으며 말했다.
“그래도 형은 이명헌이잖아요. 시간 지나면 똑같은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이번엔 내 차례라 생각하고 기다릴게요. 형이라면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기다릴 수 있어요.”
거기엔 형이 아예 없다니까요. 당신이 없다고, 명헌이 형, 이명헌!! 제발, 제발…. 떠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남자는 사실 그때부터 괜찮지 않았듯이.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아도 자기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곳엔 너와 내가 함께 했던 시간이 있잖아.”
때문에 현재를 사는 이명헌은 과거를 지나, 미래에서 돌아왔기에 현재에 있는 정우성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이 있는 곳은 그쪽이야.”
옷깃에 매달려 있던 정우성의 손이 아래로 떨어진다.
“돌아가, 우성. 그곳의 날 더 외롭게 만들지 말고.”
말했잖아. 너를 만난 걸 후회해도, 널 사랑했던 건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을 놓은 손길에도 이명헌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면, 형을 힘들게 할 거예요. 떠나온 주제도 잊고서 보고 싶다고 징징거릴 거고, 시차는 좀만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형은 못 믿을 거라고요. 확신을 줘도 의심할 거고 불안해할 거예요. 형이 형 자신을 장애물처럼 느끼게 만들 거예요. 벌써 형 이해 못 하고 힘들게 하는 게 나라는 인간인데, 그러면 형은 또, 나를 위해서 오다가,”
“괜찮다, 뿅.”
“…….”
“그 시간을 또 사랑하게 될 테니까.”
그래서 이명헌은 미래에 어떤 순간이 닥쳐도 자신이 후회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렇게 마침내 현재에 선 정우성은 이마저도 그를 사랑하는 시간임을 깨닫는다.
“이제 가, 우성아. 네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사랑할 거라면 평생 나만을 사랑했으면 했음에도, 죽음마저 날 사랑하는 순간에 맞이한 당신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눈물이 차오르면 차오르는 대로 흘려보내던 정우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이명헌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만 닿아도 뒷걸음질 쳤던 이명헌은 더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 절대 작지 않은 손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기억 속에서는 너무나 작아진 그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대었다.
“사랑해요.”
“알고 있어.”
“형을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해요.”
눈을 감은 뒤에는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연약하고, 부드러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말을 이을수록 목이 메었다. 다시는 전할 수 없는 말보다도, 당신의 손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걸 내가 너무 오래 잊고 있어서.
“너무 늦게 오지도, 빨리 오지도 말아요.”
“…그래.”
이명헌의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크게 숨을 쉬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우성이 눈을 떴다. 마지막 인사였다. 세 걸음은 남았다고 생각한 토리이까지 그는 두 걸음 만에 다다른다. 이명헌은 그 앞까지 따라가는 대신에 하얀 석재의 관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는 정우성을 바라보았다.
NBA의 에이스가 녹음 속에서 피어난 아침 안개 너머로 사라진다. 마침내 깨어난 꿈이 흩어진다. 희미해지는 현실감각 속에서 이명헌은 덩달아 자신까지도 이대로 붕 떠버리는 것 같은 부유감을 느꼈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의 모든 게 아득해진다.
그러나,
“이명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가 자신을 붙잡을 것을 알기에. 멍하니 석재 너머의 광경을 바라보던 이명헌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떠나간 정우성이 서 있었다. 열 걸음도 넘게 벌려진 거리에 멈춰 선 그가 무릎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소 그의 체력을 생각해봤을 때 이 정도 거리에 지칠 리는 없었고, 그저 침착하지 못하게 뛴 것 같았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 물으려다 말았다. 산왕에서 신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정우성과 자신뿐이었다. 정문 너머로 사라졌던 그때부터, 정우성은 자신을 쫓아 달려온 것이다.
“내가 뭐 잘못한 거죠. 그래서 형이 이러는 거죠.”
이명헌은 이제 토리이부터 등을 돌렸다.
“뭔진 몰라도 내가 다 잘못했어요. 뭔지 모르는 것도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형, 미워하지 마요. 나 혼자 떠나게 두지 말라고요. 미국도, 형도 포기 못 해서 미안해요. 진짜 정말 미안한데요. 그래도 형…….”
이명헌은 괴기한 신사와 녹음이 우거지는 산속을 자신을 기다리는 소원을 등지고, 볕이 드는 곳을 향해 마지막으로 내달렸다.
“나는 형을 정말, 정말 많이…….”
비로소 온전하게 겹쳐진 산왕과 미국의 에이스를 품 안에 가득 차도록 끌어안았다. 달려온 만큼 정직하게 부딪치는 무게가 그를 주춤거리게 했으나 정우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명헌이 형?”
직전까지 서글펐던 것도 잊고서,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한 정우성이 얼빠진 목소리로 자신을 부른다. 그 뒤로 그를 사랑하며 아파하고, 그리워하며 또 사랑하면서, 언젠가 맞이할 마지막이 스쳐 지나간다.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일본에 완전히 돌아오기 전까지 미국에 보러 안 갈 거야. 그러니까 보고 싶어도 부르지 마라, 뿅”
“왜요?”
갑작스레 쏟아진 애정 표현과 함께 선언된 연인의 이기적인 결정에 정우성이 불퉁하게 물었다.
“저는 형이, 너무 보고 싶을 텐데. 너무너무 보고 싶을 텐데…….”
“나도 널 사랑하니까.”
그럼에도 자신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 정우성의 손길을 느낀 이명헌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지금까지 달려왔던 몸의 피로가 서서히 밀려든다. 이명헌은 그것으로부터 억지로 저항하거나 더 반항하는 대신에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그에게 완전히 기댔다.
“너와의 미래를 좀 더 소중하게 지키고 싶거든.”
“형, 진짜 무슨 말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관계가 의심되고, 못 버티겠다 싶으면 말해, 뿅.”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린 이명헌은 정우성의 뒤로 보이는 산과 풀의 녹색을 바라보았다. 기울어져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짧아진다.
“비행기는 내가 탈게. 너는 무조건 열심히 농구 해라, 뿅.”
만약 우리가 서로를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헤어질 수 있을까?
“…부르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여태까지 네가 농구 했던 것처럼.”
끌어안고 있기에 표정 같은 건 보이지 않음에도, 이명헌은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끔찍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매미가 울기 시작한다.
“됐어요, 형이 그렇게 말하면 버텨볼게요.”
정우성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대신에 전화 잘해줘야 해요. 편지도요. 내가 답장 빼먹어도 형은 꼭 쓰는 거예요. 치사하다고 해도 할 수 없어요. 안 오겠다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각오해요. 한 번 시동 걸린 그의 욕심은 집요하고도 고집스럽게, 그러나 서투르고도 다정하게 이어진다.
마침내 질문의 답을 알게 된 이명헌은 정우성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어떤 이별이 와도 그를 사랑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녹음이 우거진다. 여름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점점 먹먹하게 들렸다. 현재에 살아있는 이명헌이 눈을 감았다. 그 너머로 언젠가 열렬하게도 사랑할 NBA의 에이스가 온전히 사라진다. 예정된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후회하지 않을 이명헌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모든 정우성에게 건네는 인사였다.
모든 여정을 알면서, 그 끝을 알면서도 난 모든 걸 받아들여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기쁘게 맞이하지
- Arrival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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