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장추천전형

학교장추천전형 03

준른 / 키스리스트 AU

학교장추천전형

03. 그 자식이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애석하게도 4교시는 음악이다. 더욱 애석하게도 오늘은 리코더 실습이 있을 예정이라 교실에서 수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음악실. 가장 애석하게도 음악실은 성준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었다. 왜 두렵냐, 하면은 -

"와아아아아아아아악!!!! 성준수! 준수선배 떴다아으으으아아아아아아악!!!"

"와씨발 어디!!!"

"와아아아아악 씨바아알 조오오오오온나 잘생겼어어으아아아악!"

"씨발어떻게해야사람이저렇게태어나는데????"

"오 ffffffff어어어어억킹쉐에에에에에에엣!!!!"

상당한 것을 내려놓은 성준수는,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국에는 반에서 유일하게 저보다 키가 큰 놈의 뒤로 슬금슬금 가 숨는 것을 택한다. 성준수 인생의 처음이지만 마지막은 아닐, 인간으로부터의 명백하고 숨김없는 도피가 될 것이었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 죄라면 죄인, 죄인 성 준 수 는, 양옆에 1학년 교실을 끼고 있는 5층 복도를, 마치 양옆에 철창에 붙어 득실거리는 수감자들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직각으로 숙이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성준수 앞에 서 있는 키 큰 놈도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그 관심이 성준수한테 간다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감사하게도 걷는 속도를 높인다. 하필 음악실의 위치도 복도 끝이어서, 마지막 1학년 교실까지 전부 다 지나야지만 다다를 수 있었다.

음악실에 가는 길은 정말이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살아온 성준수의 상식선에서는 제게 관심을 보이는 남고딩들의 심정을 두 가지의 부류로 전부 나눌 수 있었다. 일, 동경. 이, 질투. 두 가지의 단순한 감정이 다였다. 전자인 놈들은 적당히 관심을 주면 저를 귀찮게 하지 않았고, 후자 새끼들은 건들지 말라는 눈빛 한 번, 목소리 잔뜩 깔아서 꺼지라는 말 한마디에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다. 지상고로 전학 갔을 때도 그랬다. 난데없이 부산에 나타난 웬 하얀 서울 머스마에게 뒤틀린 관심을 보인 새끼들 사이에서도, 단 하루 만에 서열 정리를 완료했던 성준수 아닌가.

하지만 여기는, 무슨,

"준수 선배! 성준수 선배!!!"

"야, 야 씨발, 좀 더 빨리 걸어봐, 야."

"와 씨, 욕한다. 존나 섹시해, 봤어?"

"더 크게 욕해주세요 선배!"

"선배애애애애애!!"

이 미친놈들 때문에 슬슬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성준수였다.

"야 니 이름 뭐라 그랬지? 좀 빨리 걸으라니까."

"싯팔 알았다고. 성질 그만 부리라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성준수 앞을 막아주고 있던 남자애 또한 제 뒤에 꽂힌 먹이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1학년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꼬웠는지, 걸음을 더 빨리한다. 덩치 큰 놈 하나가 (덩치 약간 덜 큰 놈 하나를 뒤에 달고) 기를 쓰고 앞으로 나아가니 같이 이동하던 반 아이들도 함께 속도를 높이거나 도태되는 것 중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3학년 8반 아이들은 마치 하나의 전투적인 물고기 떼처럼 복도 끝 머나먼 음악실을 향해 경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

"3학년 8반 성준수 형!!!!!"

"씨바거..."

"씨바거래 씨바! 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 과 함께 다다다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둔하지만 나름 빠르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물체의 돌진 목표 지점은 성준수 같아 보인다. 성준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린다. 제발 꺼져 임마, 와 같은 말을 하기에는 서게고에는 너무 특이한 취향의 미친놈들이 많아서 제 언행의 결과가 어떨지에 대한 두려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동성의 또래에게 겁이라는 것을 먹어본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며 식은땀이 난다.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다...

분명 성준수를 사모하는 1학년은 낭군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며 달려오는데, 우렁찬 외침이 성준수 귀에는 내 다리 내놔로 들리는지 성준수는 앞의 고기방패에 힘을 실어주며 점점 더 걸음을 빨리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다 왔다.

"하 씨발 죽는 줄 알았네..."

음악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구) 일짱 성준수였다. 지금 이 꼬라지를 박기철이 봤다면 얼마나 놀려댈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하다못해 성지수가 봤어도 경악에 물든 표정과 함께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손을 떨었을 것이다. [세상 무서울 것 없던] 우리 오빠가... [나 괴롭히는 애들 줘패던] 우리 오빠가... 오빠 어떡해... 안 봐도 뻔했다.

"아니! 장난하냐고. 성준수, 나중에 밥 사라."

어쩐지 조금 끈적거리는 책상과 볼을 맞대어 놀란 심장 가라앉히고 헉헉대고 있으면 위에서 거들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보나 마나 아까 그 고개방패 새끼겠지. 키 큰 거 하나로 고기방패 간택된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았다. 성준수가 와중에도 착실하게 주변의 가장 가성비 좋은 고깃집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저 덩치면 얼마나 처먹을까. 양심이 없어도 줘터졌다. 돈도 자기보다 많을 새끼가.

다행히도, 대답할 새도 없이 거창한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포스가 넘치는 선생님이 10센치 힐을 따각따각 교실 바닥에 두들기며 들어온다. 성준수의 지갑은 이 일을 기억할 것이었다.

"어이, 게이들아. 앉아라."

"이성애자 스승님께서도 어서 오시지요?"

"까분다. 교가 세 키 높여 노래시키기 전에 앉아."

애초에 교가 자체가 여자 키였다. 무시무시한 경고를 받은 3학년 8반 게이들은 한다면 하는 음악의 말에 조용히 (까지는 아니지만) 자리에 앉는다. 서게고의 교직원들은 전부 여자였으니, 그 이유는 말 안 해도 모를 수 없었다. 난선넌학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랄까. 많은 학생들은 따먹기 딱 좋게 생긴 미중년의 남선생이 없다는 사실을 입맛까지 다시며 아쉬워했지만 (성준수는 이 대사를 그대로 듣고 온몸을 바르르 떨었던 기억이 있다) 성교 도중 남자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보기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아쉬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오늘도 역시나,

"쌤 펠라치오하는 법 알려주세요."

"뒤로 가서 애국가 완창하고 들어와."

"쌤 남자는 어떻게 유혹해요?"

"노래 잘 부르면 돼. 뒤로 가서 애국가 부르고 와."

"쌤,"

"뻘소리 할 거면 애국가 부르고 와. 4-2-3-1절 순서로."

역시나 뻘소리를 할 예정이었는지 손을 들었던 새끼는 별로 억울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드르륵 의자를 끌고 일어난다. 교실 뒤편으로 가 매국노 버금가는 끔찍한 한 소절을 뽑은 녀석은 교실 전체의 행복과 귀 건강을 위해 도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대여섯 명이 나갔다 들어오니 드디어 수업이 진행될 만한 분위기가 된다. 이래 놓고서는 지능이 없는 아이들은 다음 주만 되면 다시 전주의 잘못을 반복하여 똑같이 실없는 짓을 하고, 똑같이 애국가를 부른 뒤, 다시 자리로 들어와 수업 시간 50분 중 30분을 말아먹을 것이었다. 음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는지 애초에 수업 시간을 10분으로 계산하고 진도를 계획한 눈치다. 10분 만에 끝난 간단하고 형식적인 이론과 리코더 수업은 질렸다는 표정의 음악의 지금부터 자습이라는 선언과 함께 끝이 난다. 음악은 미련도 애정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떠난다. 성준수가 그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 씨발 나였어도 당장 여길 벗어난다...

하지만 아무리 교실 안 미친놈들이 끔찍하다고 하여도 교실 밖 새끼들에 비하면 훨씬 만만한 것은 사실이었다. 성준수는 피가 말라가는 심정으로, 남은 수업 10분을 함께 들고 온 국어 수능 특강 지문을 독해하며 보낸다. 다행히도 공부하는 표정이 어지간히 진지해 보였는지 (사실 정철을 유배보낸 새끼이며 정철이며를 통으로 제거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에게 크게 관심을 보이는 새끼들은 없었다. 아무래도 음악실은 음악실이었는지, 어느 집안 회장님께서 우리 아들 제발 사고만 안 치게 잘 부탁드린다고 기증한 (학교 특성상 하등 쓸모 없는) 몇억 하는 그랜드 피아노를 어디서 뭣하다 온 지 모르는 손으로 땅땅거리는 것에 더 재미가 든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장비빨은 장비빨인가. 괴랄한 피아노 소리가 악몽과도 같았던 아까의 애국가 제창보다는 훨씬 준수했기에 성준수는 마음의 평화를 점차 찾아간다.

1시간 같았던 10분이 지난 뒤, 종이 울린다.

따라다라단, 따라다라단. 딴. 도레미파솔, 솔파미레도. 도. 열한 개의 음이 울림과 동시에 학교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성욕에 눈먼 남자애들 성욕 이기는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식욕이었다. 8반 이쁜이 성준수 음악실에 뻔히 있는데 앞에서 서성이며 고백할 (괴롭힐) 생각하던 새끼들도 점심 고르곤졸라 피자에 루꼴라 파스타는 못 참았다. 썸남 앞에서 잘 보이고 싶고 신사적인 척하고 싶은 이딴 것 없이 본능이 요구하는 대로, 코가 이끄는 냄새를 향해 돌진하고 처 튀어간다.

십 초 만에 5층에 남은 유일한 남학생이 된 성준수는, 누군가가 달려가는 바람에 일어난 바람을 타고 허공 높이 떠올랐다가, 천천히 땅을 향해 좌우로 흔들리며 떨어지는 불쌍한 수학 학습지를 교실 창문을 통해 멍하니 지켜본다.

"씨바거..."

벌써 2주 째 보는 풍경이었지만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지상고라고 점심시간에 모두가 요조숙녀였던 건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지상고에는 실제 생물학적 숙녀들이 있기라도 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성준수도 짐을 챙긴다. 지상고에서는 그의 달리기를 이길 자가 운동부밖에 없어 거의 항상 첫 타임에 급식을 먹었었는데, 이 학교에서는 조금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것이 4교시와 점심 사이의 짧은 5분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느릿하게 필통에 필기구를 하나씩 집어넣는다.

작년 수능 샤프, 재작년 수능 샤프, 삼 년 전 수능 샤프까지 세 개, 여기다 컴퓨터 사인펜까지 집어넣으면 대충 주변에 얼쩡거리며 은근슬쩍 스킨쉽을 시도해보려는 새끼들 찌를 무기 회수가 어느 정도 끝난다. 이후, 공부할 때 쓰라고 선물 받았던 고가의 명품 샤프와 지우개를 집어 넣는다. 지지직, 명쾌한 소리와 함께 지퍼를 잠그고 슬슬 저도 밥을 먹으러 나가보는데,

"어."

눈에 들어온 것은 창틀에 떡하니 놓인 누군가의...

이게 뭐지?

성준수가 낯선 물체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다. 물체에 꽂힌 줄 이어폰이 대롱대롱 따라온다. 휴대전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가벼웠으며, 전화번호를 칠 수 있는 숫자는 커녕 좌우 위아래 오케이 다섯 개의 버튼밖에 없었다. 게임기인가 싶었는데 화면 또한 쪼그마한 것이 그럴 리가 없었다. 사회문화 교과서에서 보던 삐삐는 이렇게 안 생겼던데. 성준수는 그나마 다른 남고딩보다 조금 더 답이 있었을 뿐이지 어쩔 수 없이 남고딩은 남고딩일 뿐이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만다. 오케이 버튼을 눌렀더니 화면이 밝아지고, 어떤 리스트가 눈앞에 쫘르륵 뜬다.

AC/DC, 퀸, 메탈리카. 노래 목록이 끝없이 이어진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MP3구나. 아니 이 시대에 누가 MP3를 써? 그것도 돈 많을 누구네 도련님이? 이름이라도 적혀있을까, 성준수가 작은 기기를 뒤집었을 때였다. 몸이 크게 흔들리더니 옆으로 당겨진다. 놀라서 휘청거리며 헛발질을 하는 것을 멱살을 단단히 움켜쥔 손이 바로잡는다. 잔뜩 흔들린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코앞에 들이밀어진 주근깨 가득한 한 얼굴이다. 성준수가 미간을 구긴다.

"씨발, 뭔데?"

"도둑놈의 새끼가."

"도둑... 뭐?"

"니 뭐고. 그거 와 들고 있는데."

성준수가 조용한 분노를 마구 내뿜고 있는 제 앞의 인물을 내려다본다. 차갑게 식은 동그란 눈이, 어디서 본 듯한 것도 같다. 멱살에서 손을 뜯어내려고 하지만, 성준수보다 작은 키와 귀여운 얼굴이 무색하게 팔 힘이 어마어마했다. 그러고 보니 이백명 중 하나꼴로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서게고 정원은 600명이다,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소리다) 입고 있는 정복의 교복 차림의 팔 부분이 아주 근육에 못 이겨 터지려고 했다. 운동하는 새낀가. 성준수는 하는 수 없이 그놈의 손가락 부분이라도 세게 움켜쥔다. 스멀스멀 빡침이 기어오른다.

"나 이거 훔칠 생각 아니었으니까 우선 이것 좀 놓아줄래?"

"인마 뻔뻔하기까지 하네. 들고 훔칠까 말까 고민하는 거 다 봤는데 고마해라."

성준수가 이를 악문다. 싸우면... 안 된다. 우선 이런 사사로운 논쟁을 할 시간이 없었으며, 학폭 내역을 만드는 것은 죽음이었고, 무엇보다 이 새끼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 대학 총장이기라도 해봐라. 좆되는 거지. 서게고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무조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미안한데, 누구냐,"

"진재유다."

"그래 진재유야. 난 너의 엠피쓰리에 일도 관심이 없어. 내 휴대폰에는 멜론 월정액이 깔려있거든. 그리고 설사 내가 엠피쓰리가 필요하다고 했으면 샀겠지. 남의 것을 왜 훔쳐."

진재유 표정이 일그러진다.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분을 삭히는데, 대충 제 MP3는 시중에서 파는 흔한 게 아니라 누구네 밴드 무슨 투어 한정판 전 세계에 5대밖에 남지 않은, 하여튼 되게 귀한 거라고 하는 것 같았다. 성준수는 진재유 손아귀가 약해진 틈을 타 주름진 옷을 빼내고 MP3를 후딱 건네준다. 후, 숨과 함께 화를 고른 성준수가 최대한 차분한 어조로 말한다 -

"...여튼 의심한 거 사과 받고 싶지도 않은데, 멱살부터 잡는 습관은 고치는 게 좋을 것 같다? 씨발? 네가 뭔데 갑자기 내 멱살을 잡냐? 진짜 씹, 기분 좆같네. 야,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어 봐라, 죽여버린다 진짜."

-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입시고 뭐고 그러데이션으로 상황에 빡쳐 아가리를 털어버린 성준수였다. 눈에는 형형한 살기가 내비친다. 하지만 진재유라는 자식은 눈 하나 끔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얘가 성준수보다 더 태평해 보일 정도다.

"뭐라노, 니가 안 했을지는 내가 모르지. 야 진가도 모르는 새낀데, 그래 무식해서 도둑질 하나라고 못할 리가 있나. 이거나 대답해봐라. 그럼 니 점심시간에 밥 무으러 안 뛰어가고 수상하게 뭐 했는데?"

씨발 그니까! 진가를 모르는데 왜 훔치냐고? 무식한데 뭘 믿고 도둑질을 하냐고. 그리고 밥은, 밥은... 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부분은 조금 수상할 수는 있었겠다. 진재유는 커다란 눈과 차분한 낯빛으로 개소리를 믿음직하게도 지껄였다. 성준수는 논리정연하게 반박을 펼치고 싶었으나 공부를 잘하는 것 치고는 제 생각을 즉석에서 입 밖으로 내뱉는 데에는 젬병이었기 때문에 그냥 엿을 만들어 진재유 얼굴에 들이미는 것밖에는 하지 못한다.

"됐고, 다시는 보지 말자. 제발. 꺼질 테니 니 엠피쓰리 간수 잘해라 앞으로는."

짜증을 내며 휙 돌아 음악실 밖으로 나가서 사내새끼 하나 기어 다니지 않는 드넓은 복도를 마주한다. 그러자마자 딱 진재유를 기억해낸 성준수였다. 씨발, 저 새끼도 키스리스트에 있던 놈이었지...


"고작 그런 이유로 진재유를 포기하겠다는 거야? 잘 생각해봐, 쟤가 이 중에서는 그나마 성격이 양반이야. 사람들이 엔젤재유, 엔젤재유하는 이유가 있다고."

"엔젤재유는 개뿔 존나 락스피릿충만락앤롤락오어다이재유님이셨는데."

"하오 준수 닌 뭐 저기까지에서도 천사게이새끼를 적으로 만드노. 니가 입 부대껴야 하는 새끼들이랑은 맞다이 뜨고, 니랑 하등 상관없는 새끼들은 싸그리 꼬셔놓고. 병시가 진짜."

"아 씨발 내가 언제!"

성준수가 급발진하며 당장이라도 이초원의 최신 삼성 노트북 줌 화면 너머의 박기철에게 주먹을 들고 돌진할 기세길래 이초원이 급하게 말린다.

"아휴 성준수 좀 앉아! 박기철 너도 사람 좀 그만 긁어!"

"내가 은쟈 긁었나."

"아니 저 새끼가 자꾸 나 이상한 새끼 만들잖아!"

"그래서 뭐, 내 노트북 치면 박기철이 아프냐?"

"...아오씹."

"그래, 준수. 승질 쫌 죽이라. 그래가 우예 남자를 꼬시-"

"씨바거. 야, 니. 아주 나랑 물리적으로 떨어지니까 살 만 하지? 어? 너 일로 와 봐 이 씨발새끼야."

다시 살기를 불태우는 성준수에 이초원이 결국 박기철을 뮤트시킨다. 화면 너머로 얇은 눈썹 팔자로 늘어뜨리고 소리 없이 열변을 토하는 박기철의 모습이 퍽 가련해 보인다.

오늘자 성준수 키스리스트 팀 회의의 백드롭은 이초원의 고급 오피스텔이 아닌 성준수 자취방이다. 서게고 다니는 새끼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잘 사는 집 새끼인 성준수는 강남에 꽤 살 만한 원룸을 구해 살고 있었다. 물론, 살 만한 곳이라 해서 덩치 큰 남고딩 셋이 넉넉하게 들어갈 정도의 방 크기는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 왜 둘이 아니라 셋인가 하면은, 글쎄 -

화를 식히고 로마 황제 자세로 침대 위에 도로 널브러진 성준수가 무례하게 방문 쪽을 가리키며 날카롭게 말한다.

"근데 그래서, 저 새끼는 왜 있는 건데."

이초원이 눈 하나 깜짝 않고 설명한다.

"쟤 은근히 사람 꼬시는 데 도가 터서 옆에 두면 좋을걸."

성준수도 기죽지 않고 도로 따진다.

"아니 그러니까 씨발, 쟤가 왜 나를 도와주게 됐는데."

이초원 또한 두 눈을 마주 동그랗게 뜨고 대답해준다.

"아, 나한테 찾아와서 자기도 키스 리스트 도우미 역할하고 싶다던데."

성준수 눈이 뒤집힌다. 자세히 보면, 머리 위에서 김이 희미하게 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니! 근데 씨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아니, 이초원닥쳐보고, 니가. 니 입으로. 말해, 씨발."

불을 내뿜는 성준수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다 보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작은 틈에 큰 몸을 잔뜩 구기고 앉아 진땀을 흘리며 애써 웃고 있는 기상호가 있었다. 기상호가 혀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하하, 제가 눈치가 쫌 빨라가..."

성준수가 손에 잡히는 것을 (하필 이것은 어제 씻고 몸을 말릴 때 사용한 수건 빨래가 되겠다) 냅다 기상호한테 던진다. 수건이 아름다운 궤도를 그리며 날아가 펄럭, 기상호 얼굴 위로 찬찬히 내리 앉는다.

"아, 햄...잉잉."

"저 새끼가 사람을 얼마나 잘 꼬신다고 그래?"

이초원이 어깨를 으쓱한다.

"글쎄. 겪어봐도 모르겠어?"

"지랄 말고, 그리고 그건 내가 꼬신 거지 어떻게 봐서 -"

"첫 번째 키스리트스 통과자야."

성준수가 잠깐, 정지한다. 입술이 두 차례 뻐끔거리더니, 눈이 또르르 굴러 올라갔다, 또르르 굴러 내려간다. 이초원, 뮤트된 박기철, 그리고 수건에 얼굴이 전부 덮여 가려진 기상호가 동시에 생각한다. 고민하네...

숨 막히는 5초 이후, 성준수가 판결을 한다.

"...그래 씨발 그건 됐고, 그럼. 니 나한테 헛짓거리하면 존나 죽일 줄 알아."

"거 대답하기 전에 이 수건 쫌 치워도 됩니까 행님."

"그래, 치워."

송구하옵나이다... 기상호가 수건을 벗어 옆에다 저 멀리 치운다. 그리고선 마음이 바뀌었는지 성준수가 안 볼 때 슬쩍 제 쪽으로 다시 가지고 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준수는 다시 털썩, 침대에 얼굴을 박는다. 어쩌다 며칠 전에 잡아먹힐 뻔해 안전상의 이유로라도 다시는 보지 말자 다짐했던 새끼를 집에 들이게 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큼큼, 그래가."

정적을 깨고 어그로를 끈 기상호가 곧바로 본격적으로 분위기를 잡고 양손을 가져다 붙여 문지른다. 나름 악당처럼 비비기 위해 노력한 것 같지만, 성준수에게는 단 한 마리의 파리처럼 보이기만 한다.

"그러면 Ki Sang-ho, the first Kiss List... 어, 음... sung-gong-ja, the... 최초의, person that. 아... moo-li-chin,"

"상호야 듣기 힘든데 차라리 한국어로 해."

"네, 초원 햄. 여튼, 기상호. 키스리스트의 마스터, 키스리스트의 선구자, 키스리스트의 혁명가. 오늘부터 드디어, 왕좌에서 한 스텝 물러서 -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한 템포를 쉰다) - 「조력자」 모드로 돌입합니다. 후후."

"지랄한다..."

오타쿠를 향한 갓반인의 돌직구에 기상호가 구석에서 잉잉 눈물을 흘리고 있을 동안 성준수는 그나마 이 중에 가장 정상인인 듯한 이초원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다시 봐봐, 진재유 꼭 해야 해?"

"음... 보자."

이초원은 예민하게 생긴 주제에 전영중보다도 털털했는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참을 낚시질을 하더니, 결국 꾸깃꾸깃 접힌 종이를 꺼낸다. 종이와 함께 나온 클립이나 영수증 따위는 옆에 멀쩡하게 존재하는 성준수 방 쓰레기통을 놔두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펼친 종이의 정체는 키스리스트다. 이를 확인한 기상호가 순식간에 달려온다. 5월 에디션이죠? 내 아직 5월 건 못 봤다아입니까, 내 잘 나왔나요 햄?

아량 넓은 이초원 덕분에 남에게 제 목소리를 들리게 할 권리를 다시 남용할 수 있게 된 박기철도 화면 너머에서 고래고래 제 입장을 알린다. 내도 보고 싶다! 아! 초원아 내도 쫌 보자 그 키스리스트라는 거! 카메라에 함 비춰봐라!

성준수가 그 한심한 광경을 약 20초 간 참아준다. 야. 1회의 경고는 무시당한다. 아따... 이거 사진이 쪼매... 소시오처럼 나왔다 안 합니까. 왜,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니들끼리만 보지만 말고 아 쫌! 야, 스끄드르... 2회 경고도 아무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결국 성준수가 폭발하고 만다.

"야이 씨-발 잡놈의 호모 새끼들아!"

"헐,"

"진짜 바보한테는 바보라고 하믄 안 되는 거 모르나, 어예 호모한테 호모라고,"

"닥치고 앉아 전부 죽여버리기 전에."

집주인에게서 풍기는 살인의 향기가 예사롭지 않았기에 쫀 기상호가 얌전한 개처럼 침대 밑에 앉는다. 덕분에 이초원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놓을 공간이 사라진다. 하는 수 없이 의자 위에 아빠 다리로 가까스로 걸터앉아 중심을 잡은 이초원이 다시 목을 가다듬는다.

"흠흠, 그러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그래라 좀..."

이초원이 키스리스트를 성준수가 잘 보이도록 돌려놓는다. 위에서부터 하나씩 훑어가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남은 열아홉 명 중 서로랑 연애 중인 사람 둘, 다른 학교 애랑 연애 중인 사람 하나, 너랑 말도 안 통할 사람 둘, 졸업생 하나, 전영중 하나야. 빼면 열둘이지. 여기서 진재유 빼면 남은 놈들은 어떻게든 꼬셔서 입술 비벼야 해. 그리고 내가 장담하건대,"

이초원이 잠깐 고민하는 표정으로 리스트를 되살펴 본다. 임승대, 최종수, 공태성 따위에서 눈이 잠깐씩 멈칫하며 흔들린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목소리 톤이 한층 무겁다.

"진재유가 훨씬 나아."

성준수가 어찌나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는지, 잔뜩 찌부러진 코에 붉은 자국이 남는다. (내라면 저 얼굴 그래 함부로 안 쓴다, 기상호가 경악한다.)

"그럼 어떡해?"

"지금이라도 수습해야지 뭐."

"아니 지금 걘 나 도둑 새끼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어떡하냐고."

"음... 우선 친해져 보는 게 어때.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오해도 풀리고 정도 쌓을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다가 슬쩍 쓰러뜨리는 거죠, 올라타서 팔부터 못 움직이게 누른 다음에,"

"상호야, 너는 말을 말아라 변태 새끼야."

"아아앙."

"그래가, 진재유 금마랑 친해질 일이 뭐가 있는데? 수업이 겹치는 것도 아이고. 아, 동아리라도 들가야 하나."

웬일로 지능이 돋보이는 말을 한 박기철에 이초원이 박수를 쳐준다.

"말 잘했다. 진재유네 동아리 유명하잖아."

성준수가 단정한 교복 차림과 대비되어 진재유 귀에 주렁주렁 걸렸던 피어싱을 떠올린다.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필히 기분 탓이어야지만 했다...

"아아, 나락 말씀하는 긴가여."

"어, 우리 학교 축제 유명하잖아."

"아... 씨발, 나보고 지금. 설마, 씨바거."

"에에? 뭔 놈의 동아리 이름이 나락이고?"

"나락 말고예. 나, 락. 이라고. 내가 rock 이다. 나, 그리고 락. 아이, 그리고 유 아시잖습니까. 나, 너, 나, 락. 즐거울 락. 낫 나락."

"하이고 야 말 참 기깔나게 하네."

"제발. 제발 다 아가리 싸 물어라 제발."

성준수 말투가 꽤 절절했기에 다들 잠깐 합죽이가 되어준다. 한참을 말이 없던 성준수가 한껏 파리해진 낯을 들어 올린다.

"밴드부 지원하라고? 나보고?"


대학을 무척이나 가고 싶어서 반쯤 미쳐있었던 성준수의 심리는 인질로 잡혀 그 주인을 농락하는데 사용되었다. 강력하게 키스리스트를 성공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 한 명, 그 사람이 키스리스트를 성공시키며 뻘짓하는 것을 구경하고 싶어 했던 흑심 품은 조력자 세 명이 달라붙으니, 설득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는 제가 자칭 서게고 연애 마스터라 하고, 하나는 진재유랑 친분이 있어 그 햄 노래 취향 기가 막히게 안다고 하니, 성준수는 그 말재주에 안 말려들 재능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 )락이라는 밴드에 키스리스트 멤버가 진재유 말고도 셋이나 더 있다는 것이 강력한 동기부여로 작용했다. 기상호 말에 의하면 나락은 (지금부터 성준수는 쉼표를 생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럼 진재유 (어쩐지 팔힘이 심상치 않았다), 메인 보컬 공태성, 키보드 주찬양, 베이스 정희찬, 그리고 모브 기타리스트 한 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가장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가진 공태성의 독재를 막기 위해 서브 보컬 하나를 상시로 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상호의 말에 따르자면 마지막 서브 보컬은 한 달 전에 그만뒀다.

("왜?"

"태성햄이 싸가지 없다고 관두던대예."

"씨발.")

그리하여 결국, 이렇게 되었다. 성준수, 서게고 유일무이 밴드 나락 서브 보컬 오디션 도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글자들의 모임이 하나의 문장을 이루었다. 정말이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틀을 기상호랑 이초원한테 붙잡혀 기초 발성을 연습했다. 그들도 노래라면 잘 모르는 것 같았으나, 각기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선에서 최고의 역할을 해냈다. 이초원이 아빠 친구네 학원이라며 끌고 갔던 보컬학원 선생님은 세계적인 B모 아이돌의 보컬코치였으며 하루 만에 성준수 발성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렇지, 성준수. 그래, 너 상호한테 소리 지를 때처럼, 그렇지! 기상호오오! 복근에 힘 빡 주고! 바이브레이션 넣어서! 기상호오~오~오~오~이 씨이~바아~거어~~~ 그롸췌! 준수야 데뷔하자.) 그날 저녁 밀렸던 문제집을 풀면서 성준수는 인생을 돌아보며 무척 억울해졌다. 내가 예대를 갈 것도 아닌데 씨발...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성준수 얼굴만 구경하던 기상호는 삼 일째부터 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정보를 잔뜩 알아 와서는 성준수한테 알려줬다. 나, 락 오디션은 다음 주 월요일에 있고요 햄, (씨발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 씨발!) 아이 약한 소리 하지 말고요 햄 한다면 하잖아요 (...씹) 재유햄이 보니까 역시나 평상시처럼 총괄하고 합격 유무 정할 것 같은데 선곡은 무조건 그 햄 취향에 맞춰서. 알져?

그리하여 양옆에 이초원 기상호 하나씩 낀 수상한 조합으로 코인 노래방이라는 기묘한 곳을 제 발로 찾아가게 된 성준수였다. 정말 입시를 위해서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져야 할까 잠시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씨발 다음 주 월요일까지 내가 존나 락커가 되고 말아야 했다.

기상호가 겁도 없이 기계에 오만 원 지폐를 집어넣는다. 멍때리고 바라보던 성준수가 현실을 자각하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새로 배운 복식 호흡으로 소리 지른다. 야아악!

"미친 새끼야! 저거 지폐 교환기 아니라고 씨발!"

기상호가 눈을 깜빡인다. 노래방 오만 원 국룰 아이가...

진짜로 당황하는 표정에 성준수가 도로 주춤한다. 겁마저 드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끌려가다시피 간 노래방에서는 항상 만 원 내지 이만 원이면 충분하고 또 충분했는데...

"너 혹시 어떤 새끼들이랑 놀러 다니냐..."

"모르겠습니다... 노래방 들어오면 6시간은 기본적으로 있는 것 같은데..."

"몇 명씩 가는데."

"저 포함 2명?"

"...누군데, 걔가."

"정희찬이요."

정희찬? 그 존나 활발한 E처럼 생긴 성격 좋다는 애? 키스리스트에서 유일하게 셀카를 찍을 줄 아는 것처럼 나온 애? 나, 락 보컬도 아니라 베이스 주제에 노래방을 오만 원을 부른다고? 무슨 가수도 아니고? 강남 노래방 암묵적 물가에 따라 오른쪽 위 구석에는 숫자가 일, 오, 십을 지나 이십, 삼십... 육십... 백까지 다다르는 것을 보며 성준수가 머릿속에 되새긴다. 그 새끼 꼬실 때는 절대 노래방 가자는 말은 삼가야겠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찾아오는 현타는 덤이다.) 백. 노래방에서 두 곡 이상 솔로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는 성준수에게는 가히 놀라운 숫자였다.

"와 씨발... 이거 환불 안 되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마찬가지로 조금 말을 잃을 듯한 이초원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그래, 지금 이 방 안에는 세 명이 있었다. 한 명당 서른세 곡씩만 부르면...

서른세 곡...

성준수 낯빛이 어두워진다.

"자, 그라모. 바로 락부터 부르기는 쪼매 그러니까. 우리 목부터 풀까요?"

자연스레 리모콘을 집어 들고 제 무릎 위에 올린 뒤 토닥토닥 초성을 입력해 검색한다. 성준수는 순간 기상호 이 새끼 자기가 더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뽀롱뽀롱 뽀로로에 이어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과 아기 상어까지 깔끔히 셋이서 조지고 나니까 제 안의 어떤 것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다. 성준수가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 상황에 대한 의의를 제기했지만, 이미 흥이 오른 이초원과 어딘가 비장해 보이는 기상호는 자꾸 그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지 말고 더욱 파괴할 것을 권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못 될 망정 피할 수 없으면 조져라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성준수는 하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저 자신을 내려놓았다...

"햄, 목이 아직도 안 풀려선 어예 오디션 보게요. 얼른 목 풀어봐요, 연습곡 집중 공략하게."

성준수가 사장님께서 서비스 15곡을 넣어주시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기상호가 한 말이었다. 그들은 성준수가 모르는 곡이 대다수인 인기 차트를 연속으로 조진 주제에 이래서야 목이 풀리냐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하고 있었다. 성준수는 살의가 돋았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 곡 전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씨바거씨바거를 외치면서도 마이크를 착실히 잡아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코앞 같던 월요일이 이제 너무 멀게도 느껴진다.

"오 햄. 고음 쫌 나오네요. 인제 목 다 풀린 것 같다."

"개소리야..."

기상호가 말한다. 성준수는 솔직히 목이 더 따끔거린다는 사실 빼고 뭐가 목이 풀렸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고음은 조금 더 쉽게 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기상호는 성준수 왼손에 마이크를 꽉 쥐여준다. 손등을 스치고 가는 손가락에 조금 사심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한다. 성준수가 이를 악문다. 기상호가 빡침을 귀신같이 눈치채고 후딱 오른손에는 생수를 쥐여주어 굳게 말린 주먹의 모양을 일그러뜨린다.

"햄, 이 노래 알아요?"

"뭔데."

"몰라도 알게 될 거예요..."

"뭐냐고."

"보시믄 알아요."

이 새끼도 미친 건지 시원하게 대답을 안 하고 리모컨만 만지작거린다. 누가 기상호를 가운데에 앉혔는지, 고개를 쭉 빼 이초원을 쳐다보면 걔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기상호는 얄밉게도 성준수를 최대한 놀릴 셈인지 제목마저 이름으로 안 치고 다섯 자리 숫자를 입력할 뿐이었다. 사, 육, 칠, 삼, 이.

강력한 드럼 소리와 함께 웅장한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미러볼이 온통 빨강으로 변하고 화면 또한 시뻘건 빛만 내뿜는다. 성준수 얼굴 또한 빛이 반사되어 핏빛으로 물든다. 노래의 첫 소절이 부르는 사람 없이 그대로 지나간다 -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이걸 하라고 개새끼야?!"

"이거 하믄 무조건 재유햄 눈에 든다 안 합니까, 햄이 젤루 좋아하는 노래라 안 해요. 할 거믄 제대로 하는 게 기왕이믄 좋지 않습니까 준수햄, 예?"

"이걸 어떻게 부르는데!"

"햄이라믄 5일이믄 충분합니다, 약속, 아니, 남은 50곡 다 이걸로 부르면 마스터 가능,"

"내 목은 어쩌고. 어?"

"그건 우리 아빠 병원 놀러 오면 내 무료로 치료받게 해주께요."

"싸가지..."

그러거나 말거나 병원장 아들 기상호는 이초원 오른손에서 탬버린을 뺏어 들어 아름다운 엇박자로 타악기 합주를 맞추고 있었다. 안 부르고 뭐해요? 돈 아깝구로.

성준수가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댄다. 현실을 꼭꼭 곱씹으며 받아들이자니, 억울함과 서러움이 한 데 사무쳐 노래 가사가 남 이야기 같지 않게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복수의 이빨, 증오의 발톱으로... 성준수의 억까당한 나날들의 캐묵은 감정이 록 스피릿으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진성이 발휘되었다.

5번을 부르니 음정을 모두 익혀지고, 10번을 부르니 박자가 모두 맞았다. 20번을 부르니 고음이 올라오는 듯했으며, 25번을 부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작렬하게 전사한 성준수는 기상호와 이초원에게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물과 코코팜으로 수혈을 하면서 땀에 잔뜩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긴다. 기상호가 괜찮아요? 물었을 때, 육성으로 쌍욕 해주기를 4번이나 실패하자, 정말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기상호가 아버지 명함을 넘겨준다.

마이크는 이초원이 잡는다. 그리 잘 부르지도 못하는 고난도의 같은 곡을 여러 번 들으니 힘들고 지루했을 것이었다. 따라서 몇 번이고 솔로곡을 부르는 것을 잠자코 들어준다. (사실 성준수는 이초원이 이토록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이 틈을 타 재정비를 한다. 아, 아. 목소리 작동하는지 확인해보고 (고장났다), 큼큼, 피나는지 확인해보고 (안 났다), 시간 한번 봐서 오늘 복습을 하고 자려면 몇 시간 잘 수 있는지 계산해보고 (빠르게 할 수 있으면 6시간은 잘 수 있지 않았을까). 자기 점검을 마쳐가던 도중, 성준수가 몸이 생각보다 뜨겁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 놀라 열이라도 나나,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려고 하는데, 그제야 한쪽에 뜨겁게 엉겨 붙은 살덩이가 느껴진다. 아... 셋이서 8인실 빌려서 들어간 주제에. 성준수가 인상을 옅게 쓴다.

"상호야 떨어져라."

"아 햄..."

"떨어지라고."

성준수가 힘 다 빠진 상태라는 걸 확인하자, 이초원이 고른 발라드 곡의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보다는 작지만 성준수에게 충분히 들릴 수 있는 소리로, 기상호가 작게 웅얼거린다. 말하는 새끼 얼굴 위로 보랏빛 빛이 패턴을 그리며 지나간다.

"햄... 그때 보니까 키스 더럽게 못하던데."

"야, 기상호. 미쳤냐?"

기상호가 조금 더 몸을 붙인다. 슬며시 손을 뻗어 성준수 등 뒤로, 척추를 넘어, 허리에 둘러서 안착시킨다. 하는 짓은 영락없는 여운데 표정만큼은 얼빠진 바보다.

"...내가 쫌 도와주까..."

"아니?"

"아, 햄, 누가 키스 몬 하는 남자 새끼가 좋다 그러나, 입술 비비는 것만으로 게이 아닌 것도 티 나는데..."

훅 치고 들어온 탓에 성준수가 얼음이 된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 새끼 관찰력이나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설마 싶어 찔러본 긴데 반응 보니까 진짠가 보네..."

"아 씨발, 기어오른다?"

"괘안타, 내 헤테로 존나 잘 꼬셔요, 해앰."

"필요 없어, 야. 끄지라고."

"그래가 온 세상 사람들 햄 남자한테 안 서는 거 알겠어요, 혀라도 좀 익숙하게라도 굴리면 몰라."

뒷배경에서 들리는 나른한 분위기의 발라드, 적당히 어두컴컴하고 폐쇄적인 분위기. 눈앞에 섬뜩한 말 지껄이면서 키스 조르는 애새끼까지. 완전 지친 몸과 약간 뿌듯한 고양감에 차 있는 마음.

기상호가 제 목에 크고 두꺼운 손을 두르는 것을 허용해주고, 입술을 자연스레 베어 무는 것을 허락해준다. 쪼옥, 쫩, 성준수 입술을 두 번 빨아먹은 기상호는 본격적으로 성준수 혀를 구슬린다. 빨아주겠다고, 나와보라는 움직임에 성준수도 봐준다는 심정으로 혀를 내밀려고 하는데 -

쾅.

"이야, 이 조합 뭐야? 나도 노래방 좋아하는데, 좀 불러주지 그랬어."

불청객이다.

활짝 열린 문 앞에는 전영중이 두 눈을 곱게 휘어접고 서 있다.


"와, 준수 이런 애 아니었는데."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씨발."

"아! 이것도 설마!"

과장되게 눈을 키우고 방 안을 쫙 훑어본 전영중이 정확히 맞춘다.

"진재유?"

"아 진짜 씨팔, 그래."

"미치겠네. 성준수 열정 뭐야. 진재유 맘에 좀 들었나 봐. 귀여운 스타일 좋아하는 편?"

성준수가 정말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3초 이상 바라보니 아무리 전영중이라도 버티긴 힘들었는지 멋쩍게 웃으며 사과한다.

"미안, 미안. 아니, 준수 우리 같이 학교 다닐 때는 노래방 별로 안 좋아했잖아. 그래서 그랬지."

"둘이 같이 학교 다녔었어?"

"엥? 언제요?"

"하, 씨발. 중학교 같이 다녔나 보더라."

"보더라?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지?"

자연스럽게 합류한 전영중이 이초원이 일어난 사이에 성준수 반대쪽을 꿰차고 앉았다. 합류한 자의 예의로서 기기에 삼만 원을 더 삽입하려는 놈을 극구 말려 차라리 음료수를 주문하게 한 대가였다. 전영중이 지랄을 시작하는 것 같아 성준수는 기상호의 손에 언젠가부터 들려 있던 리모컨을 빼앗아 머릿속에 벌써 각인 된 숫자 다섯자리를 입력했다. 전영중 기상호 사이에 앉으니 확실히 소리를 질러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기상호가 그뭔씹 오타쿠 노래를 일본어로 부르고 있을 때였다. 이초원은 옆에서 열심히 탬버린을 치고 있었다. 어쩌고 형한테서 직접 배운 스킬이라더니 아주 부장님 사랑을 독차지할 현란한 움직임이다. 그 틈을 타 전영중이 상체를 등받이에서 떼고 성준수 쪽을 향해 돌려 앉는다. 성준수가 굳건히 앞만 바라보자 친절히 시야에 얼굴까지 들이밀어 주는 서비스를 갖춘다.

"요~ 준수."

"..."

"기상호가 좀 마음에 들었나 봐?"

"지랄한다."

"아니 그러면 왜 그 애새끼랑 입술을 비비고 있어. 지금 열 명 남았는데, 중복은 인정 안 되는 거 알지?"

"어, 씨발, 니 알 바 아니니까 그만 물어봐라."

"아니, 준수 지금 좆빠지게 노력하고 있어도 모자란 판에 한가롭게 키스나 하고 있으니 내가 걱정돼서 그렇지."

"야야. 내가 한가롭게... 뭐라 했냐."

방금까지 라젠카 세이브 어스를 약 50회는 부른 것 같은 성준수가 정말로 죽일 듯한 눈을 하니 전영중도 꼬리를 아주 약간 내린다.

"그래, 그럼. 잘해봐. 이 실력으로 나락이나 잘 들어가 보라고."

"이게..."

성준수가 전영중 멱살을 움켜쥔다. 전영중이 웃는다. 때려봐... 내일 신문 일 면에 정치인 아들 폭행으로 나오고 싶으면. 성준수가 눈을 꾹 감는다. 신나게 간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기상호 손에 리모컨을 뺏어 강제 종료를 시킨다. 햄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하는 기상호는 무시하고, 타는 목으로 락 반주에 맞추어 한을 가득 담은 샤우팅을 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씨발."

"뭐라노?"

"아니, 성준수 맞다고."

그러니까. 쟤가 왜 저기 있냐고. 일주일간의 혹독한 훈련 끝에, 월요일 방과 후 시간에 밴드부실에 찾아가 유일한 나락 오디션 참가자가 되었던 성준수였다. 드럼 앞에 끌고 온 책상에 누가 봐도 동아리장처럼 앉아 있는 진재유 뒤로 키보드 뒤에 서 있는, 어디선가 본 것처럼 생긴 주찬양, 베이스 기타를 메고 눈웃음을 짓고 있는 정희찬, 그리고 싸가지 없게 얼굴도 비추지 않은 공태성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희찬 뒤에 되지도 않는 덩치로 숨기 위해 노력하는, 일렉 기타를 메고 있는 저 새끼는 -

그승흐...

- 성준수 주먹에 늦으면 오늘 저녁, 빠르면 오늘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죽을 기상호가 있었다. 성준수가 기상호랑 눈이 마주친다. 땀 한 방울이 기상호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다. 기상호가 최선을 다해서 웃어본다. 입꼬리 한쪽에 혀가 빼꼼 등장한다.

진재유가 인상을 쓴다.

"니 여기 왜 지원하는 긴가."

"락이 좋아서 씨발."

예상 질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예상 대답을 말할 줄은 몰랐다. 사실 락이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성준수는 지금 존나, 소리를 질러야 할 것 같았다. 대답에 진재유 눈이 가늘어진다.

"와 좋은 긴데."

"락이 존나, 내 인생 같아서."

진재유가 한동안 성준수를 빤히 바라본다. 성준수도 지지 않고 똑같이 그 시선을 곧게 받아친다. 마침내 진재유가 움직인다.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다. 기상호가 뒤에서 눈을 크게 뜨고 엄지를 내보인다.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다.

"그라모. 전학생 실력이나 들어보까."

말하는 진재유 입꼬리가 살짝 당겨 올라가 있다. 바닥에 놓인 (이것도 몇백 몇천하는) 스피커에서 MR이 흘러나온다. 반주와 함께 성준수가 뻐큐를 날린다. 뒈져, 씹새끼야.


영혼까지 불태운 성준수는 결국, 주찬양에게 엄청난 크기의 박수를 받았고, 기상호에게 쌍따봉을 얻었으며, 정희찬에게서 휘파람을 받았고, 진재유와 1:1 면담을 따냈다. 정희찬이 말하길,

재유햄, 이건 노래 실력이고 뭐고 인생의 고통이 너무 고스란히 전해지는 무대였습니다, 준수햄이 락을 안 하믄 누가 락을 하는 긴지, 낸 진짜 모르겠다이가.

진재유도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것 같았다. 실력 면에서인지, 전달력 면에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재유 어깨 너머로 결과를 슬쩍 확인하고 제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는 기상호 때문에 한시름 놓는다. 덕분에 저 새끼 족칠 계획은 그냥 귀를 세게 꼬집어서 복수할 계획으로 약간의 변경이 생긴다.

"준수, 잠깐 나 좀 보자."

"아, 이제 도둑놈이 아니라 준수야?"

"하... 일단 쫌 와봐라."

아무도 없는 복도에 진재유를 따라서 나간다. 시야를 조금 낮추면 약간 머쓱해 보이는 놈이 손을 내밀고 있다.

"뭔데."

"흔들어라."

"?"

"미안하다고. 화해하자고."

"아니,"

"내 오해했다."

"아, 그래."

상대가 이렇게 나오니까 더 버팅길 이유가 없었다. 성준수는 진재유 손을 두 번 흔들고 놓아준다. 진재유가 조금 쑥스럽게 말을 잇는다.

"쌍오한테 들었다."

"뭐?"

취소. 기상호 귀는 무슨, 그 새끼 고추를 잡고 당겨야 할 것이었다. 이 새끼, 아무리 눈치 백단 변태라 그래도 상도덕은 있으리라 믿고 있었는데, 지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는가. 기상호 때문에 키스리스트가 무효화 되기라도 한다면 성준수는 정말 거세시킬 것이었다.

"아이... 니가. 나랑 오해 푸려고 얼마 하지도 몬하는 노래 연습했다고. 들었다. 니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일주일을 노래만 했다고."

"...아. 그걸 말했구나."

"그래가... 나도 사과할라꼬. 미안하다, 준수."

처음으로 든 생각은 다행이라는 것이다. 기상호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판을... 깔아준 것이었구나. 그래 고맙다 씹새끼야... 덕분에 기상호는 연명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내가 누굴 위해 뭘 그렇게 연습했다고? 이다. 물론 충격적이게도 이것은 그다지 꾸며낸 말이 아니었기에 성준수는 억울하게 화를 내지도 못한다.

"내 니 록 스피릿이 맘에 든다."

"그래 고맙다..."

"니 밴드 들어오고도 잘 지내보자."

"나 합격이야?"

진재유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모. 니 실력이믄 지원한 딴 새끼들 비해서 좋은 편이고 - 물론 객관적으로는 모르겠지만 - 니처럼 락에 진심인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라... 진재유 말끝이 흐려진다. 시선을 살짝 비껴가며 볼을 아주 약간, 붉힌다. 성준수 눈이 커진다. 지금 쟤 나한테 조금 반한? 건가? 갑자기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그래가 말인데, 준수."

"어..."

"나 하나만 부탁해봐도 되나."

"...뭔데."

"나 니한테 키스... 함만 해보고 싶다."

이게 웬 떡이야, 싶어야 되는 걸 안다. 알면서도, 성준수는 마음속 깊이 우러나는 경악을 짓누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 애들 왜 이렇게 다 까진 거지 진짜. 대한민국의 미래가 심히...

"당황스러운 거 안다. 사귀자는 게 절대 아이고."

진재유가 선하고 순박한 눈으로 성준수를 올려다본다.

"니 노래 부를 때 진짜... 분위긴가. 열정이, 쫌 섹시해가..."

"..."

"함만 맛보고 싶다..."

"...아."

"거절할 기믄 거절해라, 낸 이런 걸로 상처 안 받는다."

이렇게 말하는 진재유는 정말 이런 걸로 상처 안 받을 사람처럼 생겼다. 어쩌면 그게 성준수가 그의 솔직한 부탁을 들어주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을 지도 모른다. 앞으로 밴드부에서 수행할 미션이 많았는데 감정이 섞이면 곤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재유의 말이 마음에 조금 든 것도 있었다. 내 얼굴이나 몸이 아니라, 열정에 끌려서 키스를 원한다네, 얘가... 성준수가 작게 말한다.

"그래. 해봐."

"고맙디."

빠꾸 없이 진재유가 돌진한다. 성준수 마음의 준비할 시간 따위 주지도 않고 MP3 훔쳤다고 착각한 그날처럼 멱살을 잡아 세게 내린다. 입술이 아프게 충돌하기 직전, 기가 막힌 힘 조절과 함께 성준수 가슴팍이 쏠리는 것을 막는다. 맛본다는 표현에 충실하게, 진재유는 아까의 오디션에서 입안에 남았을 노래의 열기, 그 잔재를 조금이라도 빠르고 꼼꼼하게 곱씹고 싶은지 혀를 사용해 볼 듯 입안을 휩쓸고 지나간다. 성준수 뒤통수를 드럼으로 다져진 단단한 손으로 고정하더니, 입을 크게 벌리게 하여 그 안을 혀로 게걸스럽게 핥는다.

소심하고 조신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질척거리고 지저분한 키스가 이어진다. 복도에 츄압, 쪽, 축축한 소리가 낯간지럽게 울리는데, 몇 번이고 호흡을 놓쳐 허우적대는 성준수가 그걸 제대로 알 새가 없었다. 흐읍, 진, 하악, 재유, 힉, 하아... 하면, 진재유는 잠긴 목소리로 준수, 니 혀 되게 달다이가, 와 같은 소리나 해댄다.

진재유가 성준수를 놓아주면, 입술이 잔뜩 침범벅이 되어있었다. 성준수가 눈가에 힘을 주려고 애쓰며 불평한다.

"맛만 보겠다며 씨발... 왜 잡아먹을 것처럼 굴어."

"미안타."

"...그래."

깔끔한 사과에 성준수도 마지못해 깔끔한 대답을 줄 수밖에는 없었다. 사람 혼 빨아먹는 키스 때문에 아직도 혼란한 정신을 불러오고 있을 때면, 약올리게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진재유가 성준수를 향하여 웃어 보인다.

"그럼 내가 연습 날짜 보내고 단톡에 초대해놓을 기다. 담에 보자, 준수."

"어..."

집에 가고 [나, 락] 단톡방에 초대되었다는 알림을 받고 나서야 성준수는 전영중이 불러온 재앙을 뼛속까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내가 졸지에... 고등학교 밴드부에 들어갔어 씨발... 그것도 보컬로. 그날 저녁, 성준수의 현타 노트에는 새로운 한 줄이 추가가 된다.

DAY 9

타겟: 진재유 (난이도: ★★★☆☆)

PLAN A: 밴드부 들가기????? <ㅅㅂ ((놀랍게도 이게 되네 <<<씨발???

비고: 이러다 이거 끝날 때쯤에는 나 자격증 20개 생기는 거 아니냐고 ㅗ 다 필요없다고대학가고싶다고나는그거하나면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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