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장추천전형

학교장추천전형 02

준른 / 키스리스트 AU

02. 얼빠 (였던 것)

박기철이 진지하게 입을 연다.

"그니까 점마가 하는 말이, 준수 니가 남자 새끼들이랑 혀 안 섞으면 대학 못 간다 이 말이제?"

"미친 새끼."

"왜, 제대로 알아들었는데."

이초원이 치킨 다리를 뜯으며 태평하게 반박하는 말에, 박기철이 웃는다. 어찌나 세게 처웃는지, 줌 화면 밖으로 사라져버린다. 목소리의 주인이 다시 시야에 들어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지 않다.

"와하학, 미친서울남자야, 내 니 사고 칠 줄 알았다, 아씨, 와하학핡하핰,"

성준수가 발끈해서,

"아니 씨바거! 이게 왜 내가 사고 친 건데?! 전영중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 존나 평온하게 학교 다니고 있었을 거라고!"

하니, 박기철이,

"니 얼굴 보고 미친놈들이 꼬여서 저 지랄 난 거 아이가. 낸 이럴 줄 알았다."

라고 한다. 억울함이 뻗쳐서 옆을 쳐다보는데, 이초원은 치킨을 물어뜯으며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다인 것을 보아하니 도움을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 진짜 환장하겠네, 내가 대체 뭘 기대하고 이 새끼한테 이걸 털어놓은 거지... 몇 분째 들고만 있고 한 입도 물어보지 못한 대한민국 1등 고급 프랜차이즈 치킨마스터의 대표메뉴 트리플트러플콤보의 날개를 왼손에 쥔 성준수가 하늘을 쳐다본다. 시야에 이초원네 집의 몇 천만 원 짜리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와 자연스레 기분이 더 잡치고 만다. 결국,

"야, 그럴 거면 꺼져. 한가하게 내 얘기나 듣고 있을 시간이 있네? 니는 공부 안 하냐?"

"하이고 내 공부가 무슨 대수냐, 지금 성준수 새끼 남자 11명 꼬시려는 거 도와주려고 머리 쓰는 게 먼저 아이가."

"말 똑바로 해 씨바거, 꼬시는 게 목적 같잖아."

"그래 이 대학에미친놈아. 꼭 성공하셔서 대학 가세요."

"그럴 생각이다 씨발놈아."

이초원이 치킨을 머스타드 소스에 푹 담그며 한마디 던진다. 유치하게 잘들 노네.

"됐고, 도와준대서 알려줬으니까 작전이나 짜봐."

"니는 부탁하는 태도가 쫌 그렇다, 안 그래?"

"아씨발 도와주지 마, 걍, 됐어 씨발."

"아아아니, 와 그라노 내 도와준다꼬. 삐치지 말고, 니 속 그래 좁아 쓰겄나?"

"뭐, 씨발?"

잔뜩 구겨진 성준수의 미간 앞에 노릇노릇하게 잘 튀겨진 닭봉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둘 대화 진짜 못 들어주겠네, 치킨 식겠다, 먹어 일단."

성준수가 화면 너머로 박기철을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오른손으로 야무지게 이초원이 내민 닭봉을 잡아든다. 그리고선, 박기철과 눈싸움을 이어간 채로 그대로 사납고 과격하게 치킨 살을 물어뜯는다. 와씨 방금 그거 백퍼 내 꼬추라 상상하고 물어뜯은 기다... 살벌함을 느낀 박기철이다.

그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면.

하나, 지금 성준수와 이초원이 있는 곳은 이초원의 고급 빌라의 꼭대기 층이다. (이초원은 분명 이것을 자신의 '방'이라 소개했지만 아무리 봐도 한 층 전체를 일컫는 것 같았다) 방과 후까지 기상호 공략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성준수가 자존심 삼키고 이초원 소매를 붙잡아 조금만 더 도와달라고 부탁한 결과였다. 할 것도 없었으며 재미있는 사건을 좋아하고, 오지랖은 넓었지만 마음 또한 넓은 이초원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해주었다. 치킨마스터의 치킨은 원래 성준수가 답례로 사주겠다고 한 것이었으나, 치킨마스터? 그거 우리 아빠 건데. 뭐 좋아해? 내가 그냥 픽업해 갈게, 라고 함으로써 이초원이 쏘게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신세만 지는 것이 심기 불편하던 성준수도 이초원이 금으로 도배된 아파트 로비에 들어서, 허리를 구십도로 꺾는 연세 지긋한 관리 아저씨와 친근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고, 마지막 남은 양심의 가책을 내려놓았다.

둘, 박기철의 도움을 받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먼저, 기상호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는 이초원이 제공해 주었으나, 성준수는 연애 대상으로 자기 객관화가 더럽게도 안 되어 있었다. (예: 네가 생각했을 때는 너가 어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남자로서. 얼, 얼굴 말고. .... .... .... ...이거 안 되겠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 대상을 앞에 두고 대상에 대한 더 정확한 정보를 확인받기 위해 나름 고등학교 2년 반을 동고동락한 박기철에게 연락을 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사실, 하소연할 상대가 필요했던 성준수의 억울함이 박기철을 일에 끌어들이는데 한몫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판도 이런 오판이 없었기 때문에 성준수는 자신의 바보 같은 선택을 개같이 후회하는 중이다. 울화통이 터질 것 같이 억울하고 가슴이 답답했지만 어디 가서 제가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게이들만 다니는 학교로 고3 때 전학을 갔는데요 초중 같이 나온 잘 기억 안 나는 또라이 새끼가 저보고 3개월 반 만에 학교에서 가장 잘생긴 아이들 11명과 키스를 하지 않으면 제가 원서 넣으려고 한 학교장추천전형을 대신 넣어버리겠대요 (참고로 글쓴이는 게이가 아닙니다) 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전영중의 규칙 중에 제삼자에게 발설 금지가 있었긴 했지만 지도 멋대로 이초원 끌어들인 주제에 성준수라고 박기철 못 끌어들일까 싶었다. 무엇보다 박기철과 전영중은 대한민국이 재채기를 해 부산과 서울이 맞닿지 않는 이상 원서접수 기간까지는 만날 일이 없다. 따라서 이 모든 일을 비교적 친한 박기철한테 분출하게 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까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와중에 치킨마스터의 치킨 맛은 평소보다도 좋았다. 역시 체인점 주인 아들이 직접 사 먹는 것은 맛이 달랐다. 기름옷은 얇고 바삭한 데에다가 식감까지 좋아, 이가 살을 한번 가를 때마다 곱게 양념 된 백여 개의 고급 한지를 아그작 베어 먹는 기분이다. 질 좋은 음식이 꿀꿀한 기분의 유일한 위안이 된다.

"아따 맛있게도 묵는다."

"응 맛있다 씨발아."

"니 일케 치킨 맛있게 처묵는 거 오랜마이네."

"아오 거지 새끼 알았어, 서울 올라오면 내가 사줄게."

"고맙디, 준수. 내 꼭 올라간다 무르면 뒤져."

"공부 안 해?"

"내 성적이면 부산에 젤 좋은 데 과 골라 간다. 니처럼 한국대 한국대 거리며 살지만 않아도 인생이 편하다이가."

"그래 씨발놈아. 너 잘났다."

이초원이 정말 질린 눈빛으로 성준수와 화면 속 박기철을 번갈아 바라본다.

"둘이 사이 좋은 거 맞아?"

"어, 어. 대충. 그럼 기상호 이 새끼 어떻게 공략할 지 좀 도와줘라."

"와메, 살면서 성준수가 사람 꼬시는 법 묻는 것도 다 듣네. 그것도 남자. 근데 그보다 남자는 어케 꼬시는 지 물보는 기 먼저 아이가. 여자애들이랑 확실히 꼴리는 포인뜨가 다를 기 같은디." 

"닥쳐, 씨발아!"

이초원이 치킨 배달을 해준 형이랑 수다를 떨고 (플러팅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박기철한테 이야기할 때는 당연히 게이 흉내를 낼 필요가 없었지만, 제삼자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성준수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초원의 눈치를 본다. 충분히 말발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자기는 그런 말발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심장 박동이 슬슬 빨라진다. 다행히도 이초원은 닭 다리 살을 발라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별로 예민한 성격이 아닌지 박기철의 말에서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성준수가 이초원이 눈이 팔린 잠깐의 사이에 흰자위를 희번뜩하게 뜨고 목 앞으로 손을 살벌하게 여러 번 그어 보아 박기철한테 쌉치고 주제 바꾸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짜증 나지만 눈치 있는 박기철 개새끼는 다행히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아... 내 말은 그게 아이라. 성준수 점마가 그... 경험이 쫌 없다이가. 여자든 남자든 하하, 근데 남자도 처음인 것은 맞으니까..."

"음... 키스리스트로 모쏠 탈출이야? 그럼 이게 첫 키스?"

이초원이 눈썹을 올린 채로 예리하게 질문하길래 괜히 조마조마했는데 이번에도 헛다리를 짚는다. 성준수가 기회를 놓칠세라 고개를 재빠르게 주억거린다. 은근히 최측근은 눈치가 없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며.

"그런 거 신경 쓴다면 조금 짜증 나긴 하겠네. 그래도 잘생긴 애들이니까... 정신 승리 해야지 뭐. 흠... 공략이라면. 알다시피 기상호 얘는 얼빠로 알고 있거든. 그래서 네가 처음으로 도전하기 나쁘지 않은 상대라 생각해."

폰을 책상에 대충 배치해 두어 아무리 구린 화질이라고 해도 화면 넘어 박기철 눈썹이 펄쩍 오르내리는 게 보인다. 곧이어 단정적 어조의 말이 들린다.

"하모 그럼 난 왜 부른기가? 얼굴이믄 이미 된 거 아이가. 준수 걍 걔 앞에 얼굴 노출 몇 번 시키면 넘어오는 거 시간문제다."

"그치. 이 정도 얼굴이면 사실 취향 타기 힘들지."

아무리 하나가 게이라고 해도 동갑의 두 남성에게 외모 칭찬을 받자 살짝 소름이 돋은 성준수였다. 어, 어어. 고맙... 다.

"준수 닌 아직도 외모 칭찬만 들으면 어색해하네. 인제 익숙해지라 쫌. 베베 꼬는 거 짜증 난다."

"아씨, 짜증 나? 존나 짜증 나냐고. 니가 두부처럼 밍숭맹숭 맹하게 태어나질 말든가,"

"와..."

이초원이 초월한 건지 박기철과 성준수의 짧은 쌍방 디스를 없는 취급하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그게 문제 맞지."

"뭐가?"

"박기철 네가 방금 말했잖아. 시간문제."

이초원이 깔끔하게 발라진 치킨 뼈로 허공을 찌르며 설명한다. 여기,

"지금이 5월 29일."

마치 가상의 달력을 넘기듯 치킨 뼈를 오른쪽으로 휘휘 내젓는다.

"수시 원서 접수일은 주로 9월 셋째 주. 아까 네가 지원하겠다고 했던 전형..."

"...."

"...."

"아, 학교장추천전형. 학추."

"그래. 학추. 그건 더 일찍 결정 난다고 그랬지?"

"어. 9월 첫째 주 즘에서는 학교 차원에서 보통 상담이 끝날 걸."

"그럼 길게 잡아봤자 9월 6일이네."

치킨 뼈가 성준수의 코끝까지 도달한다. 성준수가 눈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살 한 점 남지 않은 회색빛 뼈다귀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럼 5, 9월 없는 셈 친다고 하면 6, 7, 8 3개월, 90일. 그렇다고 수시 성적은 유지해야 하니까 기말고사 공부 기간 2주 시험 기간 1주 빼면 69일,"

"씨이발 성준수 니 인생 쫌 폈다? 기말고사가 2주 안에 되는 기 말이가?"

"그럼 3개월 동안 남자 11명이랑 키스하는 것은 말이고?"

"내 미안하다. 공부랑 존엄성을 맞바꿨네. 친구야 계속해봐라."

"어, 69일 간 11명이면 한 명당 많아봤자 육 일에서 일주일이야. 일주일 동안 그냥 안면 트이고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키스를 해야 한다고. 천천히 접근하고 호감 쌓을 시간 없어. 빡세게 공략하고 입술 들이박고 나와야 해. 그렇다고 상대의 동의도 없는데 키스할 수도 없고."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랑 키스를 거부하는 남학생에게 부러 입술을 들이대는 것은 하늘이 두쪽 나도 없어야 할 일이었다. 우선, 성준수의 자존감과 자존심에 너무 타격이 클 것 같았다. 두 번째로, 성준수도 사실 원해서 하는 입맞춤이 아니니 둘 중 아무도 원치 않는 루즈루즈 개노답 키스가 될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의 원리로 따지자면 효율이 최악을 달리는 행위이다. 아 물론 추후 성추행이니 뭐니 하는 문제와 주먹이 날아올 수도 있다는 문제가 뒤따랐다.

"그럼 방법은 두 가지."

이초원의 눈이 비장하게 빛난다.

"서게고 최고의 연애 전문가, 그리고 키스리스트 유일한 레퍼리로서 내가 말하는데, 이 리스트를 클리어할 방법은 단 두 가지야. 네가 상대한테 뻑간 척해 진도가 맛이 간 불도저 노빠꾸 단기 연애를 하거나, 상대를 완전히 홀려서 성준수 너 한정 쾌락 추구형 인간으로 만드는 거지. 그러면 키스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야."

"...."

"마, 살살해라, 지금 준수 저거 완전 벙쪘다이가."

"물론 키스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아."

"하이고, 살살하라캤지 내가, 지금 점마 고장 났다, 난 모른다 친구 니가 수리해라."

눈에 초점이 사라지고 동공이 거세게 좌우로 흔들리며 뇌가 잠깐 멈춘 듯한 성준수는 충격을 넘어, 말 그대로 고장 난 얼굴로 이초원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했나. 아닌데. 이초원의 혼잣말을 들으며 박기철은 이미 과장되게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다.

이윽고, 성준수의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슬쩍 열린다.

"...조-온나. 씨발, 인생 좆같네."

 


DAY 2

타겟: 기상호 (난이도: ★☆☆☆☆)

PLAN A: 잘난 얼굴을 존나 노출시킨다

비고: 아니씨발 누가 얼굴하나 마음에 든다고 입술 부대끼고 싶어하냐고 썅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나쁜 소식만 두 가지였다.

좋은 소식은 (그러니까 좋은 소식으로 위장한 나쁜 소식 1은), 성준수의 염려와는 달리 성준수의 얼굴 하나 마음에 든다고 입술을 부대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존나 많았다는 것이다. 서게고 전학 이틀 차, 성준수 뒤태를 겨냥한 캣콜은 범인을 잡을 새도 없이 사방에서 들려왔으며, 사물함이며 교과서 사이는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잠입했는지 모르는 쪽지 투성이었다. 저를 보며 더러운 추파를 보내거나 은근슬쩍 엉덩이나 허벅지를 매만지려고 하는 손을 몇 번이나 검거했는지 모른다. (물론 검거당한 새끼들은 아무리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대단하다고 해도 제 몸은 제가 지키는 성준수 앞에서 손목이 말 그대로 아스라지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그날 서게고의 보건실은 역대급으로 차고 넘쳤으나 모인 놈들이 죄다 하나같이 제정신이 박혀 있지 않은 놈들이라 그런지 여담이지만 성준수를 까기는 커녕 오히려 나쁜 남자가 매력 있다며 어떻게 하면 꼬실 수 있을지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댔다고 한다.

(두 번째) 나쁜 소식은, 안타깝게도 성준수의 첫 번째 타겟인 기상호가 얼굴 하나 마음에 든다고 입술을 부대끼고 싶어 하는 그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학년과 3학년은 만날 일이 별로 없다. (물론 그건 언제까지나 학사 일정 상 하는 말이지만 - 서게고의 인터제너레이션 커플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그들은 잘도만 서로를 만나고 다닌다) 따라서 계획대로 성준수가 기상호에게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기상호의 생활패턴을 파악하고 먼저 나서 찾아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도 생활패턴에 대한 정보까지는 이초원이 제공해 주었다 (우리 학교 최고의 정보원으로서 말하는데, 이건 기상호의 시간표임이 틀림없, 어 그래 고맙다). 운이 좋게도, 기상호는 본인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시간에는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덕분에 나름 편하게 얼굴을 비출 수 있을 것 같아 일이 순탄히 흘러가는 것으로 보였다.

성준수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시차를 두고 조용히 타겟의 뒤를 밟아 넓디넓은 도서관을 들어간 뒤, 책장 사이에 일사불란하게 난 길을 수색해, 사람 하나 없는 저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첫 타겟을 발견했을 때다. 물론 키스리스트에 실린 사진의 표정은 개구졌지만... 교복도 나름 단정하게 차려입었었고, 이초원이 전해준 1학년 시간표 주제에 떡하니 박힌 이과 투과목들과 도서관을 즐겨 가는 습관 때문에 당연히 범생이 쪽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성준수는 이틀 동안 몇 번째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손에 저거... 표지가 뭔...

표지의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체가 아기자기하고 예쁘장하긴 했지만, 성준수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저것은 가슴이 컵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두 여자가 요술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일러스트이다. 제목은 일본어여서 해석이 불가능했지만, 오타쿠의 세계를 1도 모르는 갓반인 성준수 눈에는 그게 건전하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새끼 게이 아니었나.

순간 저 씨바거와 (마음 속 호칭의 변화가 있었다) 입술을 맞댈 생각을 하니 온갖 편견으로 목뒤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든다.

어질어질한 가운데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이성이 몸을 움직인다. 우선은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봐야 하지 않겠냐는 심정으로 성준수가 책장 뒤에서 몸을 드러낸다. 별다른 인기척이 없으니 기상호 저 새끼가 안 채도 안 한다. 어쩌면 정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성준수의 등장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고, 하는데 현타도 만만찮게 오지만, 일부러 크흠, 목이 컬컬한 듯 헛기침을 한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에 드디어 기상호가 잠깐 책에서 눈을 뗀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듯이 위를 향한 눈은 곧바로 책을 향한다. 정적. 책을 넘기려던 손이 움찔, 떨린다. 일시정지. 기상호가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다시 위를 올려다보는 눈이 휘둥그렇다.

성준수 얼굴 곳곳을 놀라움과 충격이 담긴 눈으로 샅샅이 훑는 기상호를 애써 모른 척하며 근처 책장을 뒤지는 시늉을 한다. 이게 뭐라고 등에서 식은땀이 찔끔 흐를 셈이다. 눈 둘 데를 몰라 애매하게 위쪽 책장을 살펴보고 있자니 이초원이 염불을 왼 턱선이 도드라지는 각도가 완성되었는지도 모르는 성준수였다. 정말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싶었을 때는 한참 후에서나 기상호의 책 페이지가 넘기는 소리가 들렸을 때다.

하 씨발... 정말 개패고 싶다. 나도, 쟤도, 전영중도... 속으로 읊조리며 성준수가 그나마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집어 든다. 다행히도 눈앞의 책들은 일본어이지도, 반나체의 여자아이들이 숏 스커트를 입은 표지를 지니지도 않았다. 학교가 돈이 많으니 도서관이 크고 좋은 건 당연한 건데, 이런 불건전한 오타쿠 서적까지 정말 장르 불문한 온갖 책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까 받았던 문화충격을 고스란히 챙겨 성준수가 기상호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근데 아마 얼굴은 보일 정도의 거리일 듯하다. 아마) 빈백을 끌고 와 마주 앉는다.

아니다 다를까, 독서를 하는 내내 얼굴 우편에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저 새끼는 무슨 사람을 저렇게 대놓고 뻔뻔스럽고 부담스럽게 뜯어볼까. 몇 번 괜히 짜증이 나 고개를 치들어 눈을 마주쳤을 때에, 숨길 생각 없는 듯이 쳐다봤을 때는 언제고 안절부절못하며 쫄아서 고개를 돌린다. 심지어 수치심에 볼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한다. 아 씨발, 기왕 쳐다볼 거면 쳐다보지만 말고 고백을 하든지 번호를 주든지 데이트를 잡든지 입술을 들이밀든지 하라고, 답답한 새끼.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는 일부러 기회를 주며 더 오래 시선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기상호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정말 볼수록 특이하고 개빡치는 씨바거라는 생각을 뒤로 하고 성준수는 책을 꿋꿋하게 넘긴다.

넘기다보니 언젠가부터 시선이 느껴지지 않기에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 올린다. 마침 책 속에서 강인하고 멋지고 섹시한 여주 누나가 찌질하고 능력 없지만 귀엽기라도 한 연하남의 고백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있던 차였다. 클리셰하고 드라마틱한 내용 치고는 나름 짜임새가 있는 (라기보다는 존나 어디까지 하나 보게 되는) 소설이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너무 몰입했는지 기상호가 떠난 것도 몰랐다.

탕!

성준수가 성질을 내며 하드커버 양장피 책을 냅다 덮어버리는 소리다. 아 씨이발.

이렇게만 하면 게임 하루 안에 끝난다고 한 이초원 새끼 조지러 가야 했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봐봐."

기상호 공략을 시작한 지 3일, 쉬는 시간에 친히 3학년 7반까지 횡단하여 이초원을 불러낸 결과 들은 소리는 고작 이게 다였다.

"염병, 니가 이렇게만 한다면,"

"사람 꼬신다면서 뭘 그렇게 조급해해,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

성준수는 뒷목을 잡는다. 시간이 없잖아! 조급해! 아니 그것도 그런데 내가 지금 그 새끼 꼬시는 게 목표처럼 보여? 하지만 주변에 사람이 많았으므로 이 모든 말을 삼켜야 했던 성준수는 끙, 한번 앓고 마는 것으로 타협한다.

"저 새끼가... 나랑 밀당하자는 것도 아니고. 존나, 쳐다본다고. 그리고 내가 쳐다보면 일이 초 정도 눈 마주치다가 다시 눈 피한다고. 그렇다고 말을 거는 것도, 뭣도 아니고. 애매한 눈싸움만 몇 분을 했어 지금 씨발..."

"그게 밀당이지. 일종의 플러팅인 거야."

"무슨 플러팅을 그렇게 비효율적이고 개같이 해?"

"고1 아가잖아, 책 좋아해. 누가 봐도 낭만 가득해 보이지 않아?"

"대체 어디가,"

"이제 곧 애한테서 첫 키스도 뺏어갈 텐데, 그래도 마음부터 좀 얻어보지."

누가 누구의 뭣을 뺏어가냐는 건지. 이초원의 말 구석구석에 돌아버리겠는 포인트가 한가득하였지만, 견고하고 부드러운 적갈색 눈동자가 연애 고자를 쳐다보는 듯한 안쓰러움을 가득 담고 있길래 성준수도 결국 백기를 들고 만다. 아오 씨발 알았어, 더 해볼게. 진짜 본인이 봐도 대책 없었다.

2반으로 다시 터덜터덜 걸어가는 걸음에는 힘이 없다. 지금 일주일에 남자 하나씩 입술 물고 빨아도 모자랄 판에 열일곱 애새끼랑 삼일 동안 한 게 눈 조금 마주치기가 다라니. 현타도 이런 현타가 없었다.

"...저기요."

정말 얼굴만 노출한다고 되는 거 맞나? 어쩌면 이초원이 언질 준 것처럼 마음의 문을 여는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긴, 누가 도서관 같은 공간에 몇 번 앉았다고 내적 친밀감이 쌓이고 그러겠는가...

"저기요?"

막상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절망에 빠진 성준수였다. 생각보다 쉬운 일은 존나 하나도 없어 에이 씨발. 그럼 기상호 이 녀석한테도...

"저기요!"

"아?"

"혹시..."

"...나?"

"예, 네. 그 혹시 그 미용실 어디 쓰시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그 머리가 길어서 항상 고민인데 머리 스타일이 그 거의 이상형이어서요 갑작스럽게 아, 그 죄송합니다."

와다다 말을 마친 남자는 성준수보다 약간 작지만 못지않게 허연 피부를 가지고 있는 고양이상의 2학년 학생이었다. 말갛게 올려다보는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진하고 땡그랗다. 언급한 것처럼 남자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그의 두툼한 눈썹을 수북하게 가리고 있었다. 성준수가 상황을 인지하는 동안에만 세 번을 고개를 흔들어 시야를 방해하는 두꺼운 가락들을 넘겨야만 했다.

"부산에서 잘라서 아마 가지는 못할 텐데."

아! 아, 아...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 있는 감탄이 뒤따른다. 머쓱한 듯 고양이상의 남자는 머리를 몇 번 더 쓸어 넘기며 묵례를 가볍게 한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별일이 다 있네. 또 번호나 따일 줄 알았던 성준수는 뒤를 돌아 저벅저벅 사라지는 상당한 덩치의 학생을 조금 더 쳐다본다. 미용실이 뭐 특별하면 얼마나 특별할까. 거기서 거기일 텐데. 혼란스러운 꿈을 털어버리려는 듯 머리를 몇 번 휙휙 내젓고는 다시 교실로 향한다.   


목요일 오후 6시. 키스리스트의 5%도 달성하지 못한 주제에 GG를 치기 일보 직전인 성준수가 비상 회의를 개최한 시간이다.

"아씨발! 이 새끼는 왜 불렀어?!"

"나 너 혼자서 감당할 자신 없어."

"마, 준수 와 그라노? 내 진짜로 서운타."

순서대로 성준수, 이초원, 박기철이었으며, 회의 주제는 나흘 동안 아무 진전이 없는 기상호랑 입술 박치기,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가 되겠다.

"얼빠라 해서 얼굴 존나 보여줬으면 된 거 아니야? 얘가 가만히 있는데?"

"준수 니 진짜로 빙시가. 상대를 기다리기만 하면 뭐하노? 니가 먼저 다가가야지 하오! 원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 미인이 용기 있는 자를... 미인이 오타쿠를... 와하씨 내 몰겠다 진짜루."

"박기철 말도 맞아.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기상호의 이상형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하나 놓쳤어."

"내가? 네가 아니라 내가?"

이초원은 뻔뻔스럽게 성준수의 말대꾸를 무시한다.

"기상호의 이상형은 얼빠, 뿐만이 아니더라고. 더 자세히 파고든 결과 다정한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통계 결과가 있었어."

쨍그랑. 박기철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푸딩을 퍼먹던 숟가락을 430 킬로미터 너머의 거리에서 놓치며 난 소리이다.

"오 준수 니 좆됐네?"

"아오 그걸 왜 인제야 알려주는데?! 내가 얼빠를 골라 달랬지 누가 다정한 사람이 이상형인 인간을 골라달래!"

"근데 나도,"

"그리고 좆되길 뭐가 좆돼, 할 수 있어."

"아니다 준수. 니는 죽었다 깨도 다정의 다자도 못 된다."

보다시피 자기 객관화가 더럽게 되어있지 않은 성준수에게 박기철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한 순간이다. 이초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성준수가 아니라 박기철에게, 젠장) 묻는다.

"네가 보기엔 어때. 준수 다정한 흉내도 못 낼까?"

"으흠..."

"뭘 고민해 새꺄! 할 수 있어! 쓸데없이 존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빠졌네."

"대본 연출 다 준비되어 있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초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는다. 박기철도 부산에서 똑같이 턱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는데,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미는 것 같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특단의 조치를 하는 수밖에."

박기철이 데칼코마니로 고개를 끄덕인다. 각본 박기철 연출 이초원 배역 성준수 let's go.


DAY 5

타겟: 기상호 (난이도: ★⚫☆☆☆)

PLAN A: 잘난 얼굴을 존나 노출시킨다

PLAN B: 다정하고 친절함을 어필한다 아씨발

비고: 아니씨발 누가 얼굴하나 마음에 든다고 입술 부대끼고 싶어하냐고 썅 역시나. 이거 11명 어떻게 함? 어떻게 하냐고 아이씨발 정신차려대학만생각하자성준수할수있다

"6권..."

조용한 도서관 안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린다. 물론 그 목소리의 주인도 자신이 내는 소리라고는 인지하지 못한 상태이다. 5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 기상호가 다음 권을 찾기 위해 손끝으로 떠듬떠듬 주변을 매만진다. 하지만 애초에 5권까지만 꺼내두었으므로 찾는 책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이거 찾아?"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에 기상호가 고개를 번쩍 든다. 친절하기는 커녕 오히려 투박한 목소리에 가깝지만, 워낙 화려하게 포장된 얼굴에서 그런 말투가 흘러나오니 홀린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얼마나 얼굴의 힘의 위대한지, 찾는 게 성준수의 손에 들린 <그녀와 그녀의 그녀가 던전에서 탈출하기 위해 심판해야 하는 서른 한 가지 죄악들> 6권이 아니었어도 맞노리라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기상호의 최애 소설, 최애 소설의 다음 권을 미리 알고 건네주는 친절함과 관심, 초절정도내최상급쿨뷰티미모의 선배. 삼박자 완벽한 조합에 기상호는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만다.

"감사합니다, 우예 알고 이렇게."

홀린 듯이 미소를 짓는 기상호를 보며 성준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박기철과 이초원은 어제 꽤 열띤 토론을 했었다. 친절을 이용하여 사람과 빠르게 가까워지는 방법에서 둘의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정석대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박기철과 여러 심리 실험이 증명하는 것처럼 오히려 호의를 받는 것이 친해지기 더 쉬운 방법이라는 이초원을 사이에 두고 성준수는 둘이 그에게 내준 숙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아이, 답답해 못살겄네 서울자슥아, 니 졸라 거창한 심리학은 알겠는데 성준수 면상으로 요구하면 그건 플러팅이 아이라 갑질이라고 안 하나, 준수 니 입꼬리 파들파들 떨린다 쫌더 자연스럽게는 못 웃겠나? 박기철, 생각을 해봐. 준수가 신세를 진 다음에 보상을 해주겠다고 접근하는 것이 훨씬 쉬운... 설마 그게 상냥한 표정이야? 아니다. 박기철 너 말대로 해야겠다. 결국 숙제인 거울을 보며 친절한 표정 연습하기 중이었던 성준수에게서 이초원 또한 그의 한계를 파악했는지, 박기철의 주도하에 성준수의 대본이 써 내려져 갔다. 그리고 카메라, 라잇츠, 액션. 지금 성준수는 최선을 다해 두 친구 놈이 쓴 각본대로 기상호를 꼬셔보는 중이다.

기상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 부분은 쉽다) 성준수가 가져가라는 듯 책을 내민다. 기상호가 턱, 책의 반대쪽 끝을 두툼한 손가락으로 잡아 쥔다. 하지만 손가락에 힘을 실어 책을 가져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성준수가 눈을 깜빡인다. 둘이 한 책을 쥐고 있는 기류가 어색하다 못해 불편하다. 숨이 답답한 기분이다. 길어지는 침묵에 등 뒤가 따가운 느낌이 든다. 그게 가려워 무엇이라도 한마디 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상호는 여태껏 그래왔듯 빤히 자기와 눈을 마주쳐 오고 있다. 겉으로 쌍꺼풀이 진 눈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정면에서 찍은 사진보다 몇 배는 날티나는 곡선이 부각되어 보인다. 눈 한번 더럽게 쎄하게 생겼네...

꼴깍. 누군가의 목울대가 일렁인다. 일 초, 이 초, 그리고 삼 초 뒤...

"예, 그라모. 잘 읽겠습니다."

한순간에 기상호가 실실 웃으며 그 애매한 정적을 깨부순다. 순간 제가 이딴 애새끼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사실에 의문이 들 정도로 한껏 풀린 분위기가 반전으로 다가온다. 본능적인 불안함을 느끼면서 성준수가 재빠르게 뒷걸음 친다. 쎄하다. 어 그래 안녕.

고작 고1 주제에 묘하게 사람 쫄게 만드네. 씨바거가.


"준수 실망이야."

"아씨발깜짝이야씨발."

전영중이 턱, 소리를 내며 성준수 옆에 주저앉는다. 소리가 상당했던 것치고는 엉덩이가 전혀 아프지 않은 모양이다. 이마저도 얄밉게 느껴저 성준수가 속으로 욕을 삼킨다.

"여기 도서관이야. 조용히 좀 해."

"사람 놀래키지를 말든가! 아오."

성준수가 역정을 내거나 말거나 전영중은 태평하게 혀를 끌끌 차며 성준수가 앉아 있는 섹션의 책들을 둘러본다. 음, 준수 취향 특이하네.

뼈 있는 혼잣말에 성준수가 전영중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마침 저만 빈백 위에 앉았거니 약간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며 열과 성을 다해 노려본다.

"내 취향이겠냐, 씨발?"

"아~ 너 그거 중이었지, 맞다."

"속 긁지 말고 꺼져. 오늘 안에 내가 한놈 클리어할 거니까."

전영중의 얼굴이 순식간에 뚱해진다. 그건 싫은데.

"싫긴 뭐가 싫어 씨발 나도 존나 싫어 근데 해야 대학을 갈 거 아니야 안 그래 생각을 해봐라 또라이 새끼야."

"준수야, 그냥 대학 때려치고 쇼미 나가자."

"너야말로 사는 걸 때려쳐보는 게 어때."

유치한 멘트들과 함께 서로에게 손가락 엿을 두 개씩 먹여준다.

"흠, 여튼 도서관, 라이트노벨. 기상호?"

"어. 곧 올 것 같으니까 훼방 놓지 말고 좋게 말할 때 꺼져."

"알지 알지. 안 그래도 6일 차인데 연락이 없어서 준수 어디 가서 포기하고 엉엉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돼서 찾아왔잖아. 난 너 응원하고 있다고. 불쌍하니까 제발 열심히 노력해서 꼭 이겨줘야 해."

한계에 다다른 성준수가 기어코 손을 들어 전영중의 뒷머리를 잡아챈다. 말 다했냐...

전영중이 눈웃음을 활짝 짓는다. 그럼 그럼. 이제 놔줘. 나 너 보러 오려고 머리 세팅하고 온 거라고.

다소 거칠게 전영중의 머리채를 손에서 놓은 성준수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쉰다.

"세팅은 지랄..."

"진짜인데."

"진짜 지랄... 지랄-한다. 가지가지. 지랄. 인생 씨발."

"...."

"...."

전영중이 빈백에 깊게 파묻혀 초점 없는 눈알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성준수를 초조하게 쳐다본다. 몇 초간 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간을 때워 봐도 애가 한동안 가만히 쳐저있으니 고민이 되기는 한다. 결국 전영중의 시선은 다시 얼빠진 성준수를 향한다. 하, 마른 입술을 적시며 전영중이 내키지 않는 듯 뒤를 돌아 책장을 가볍게 눈으로 스캔하더니, 책 한 권을 꺼낸다. 그리고 성준수의 손에 강제적으로 쥐여준다. 악력이 심상치 않다.

"이걸로 해."

"뭐?"

"할 거면 이걸로 하라고. 멘탈 잡고."

"뭔, 아니 씨발 야, 야!"

"그럼 나중에 봐! 오늘 성공하면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진짜 너 뭐가 문제야 씨이발!"

성준수의 외침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멀어져가는 전영중의 발소리뿐만이다.

"하씨... 또라이, 상또라이 새끼..."

"어, 성준수... 선배. 맞죠. 명찰에 써있어가. 자주 뵙네요... 안녕하세요."

고개를 홱 뒤로 젖혔더니 차분함으로 무장한 기상호가 뒤에 서 있다. 헤벌쭉 웃을 때는 광대, 돌쇠, 푼수, 안 어울리는 단어가 없는 인상이지만 또 무표정할 때는 차갑다 못해 시린 차분함에 저까지 압도되는 기분이어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얼떨결에 손에는 전영중이 골라준 책을 들고 기상호를 마주하게 된 성준수가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는다. 그러게... 안녕.

"햄은 역시 오늘도..."

기상호는 성준수의 답변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벌써 성준수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다. 시선이 느껴진다는 표현이 딱 기상호를 두고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상호의 눈동자 끝에 닿는 헤어라인이며, 눈썹이며, 콧잔등이며 누가 손끝으로 진득하게 훑고 지나간 기분이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다음 주자는 턱, 길게 뻗은 목선, 풀린 단추 사이로 보이는 빗장뼈, 어깨, 그리고 이윽고 마디마디 하얗고 뼈가 튀어나온 예쁜 손.

시선이 손끝에서 멈춘다.

"오."

"?"

"선배 글케 안 봤는데,"

뭐. 뭐라고? 내가 뭐. 성준수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자기 손에 들린 소설 표지를 내려다본다. 제목, 브로맨스? No! 로맨스! 표지, 누가 봐도 섹스 1분 전의 옷차림으로 섹스 1초 전의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진득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성 둘.

몸에 있는 온 힘을 다해 이 책을 도서관 창문 밖으로 던지지 않기 위해 성준수는 젖 그만 먹던 자제력까지 끌어들인다.

"그니까 이게,"

"...변명 안 해도 됩니다, 아 솔직히 조금 의외긴 한데... 그래도 싫은 건 아이라..."

느릿느릿 말하며 기상호가 서서히 성준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어정쩡한 자세지만 성준수를 내려다보기에는 유리한 눈높이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땐 긴가민가, 했는데."

"...."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단 말이제."

"...와아..."

"햄 이래 해도 되는 것 맞죠?"

"...."

"싫음 밀어내든가."

얼어붙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있는 성준수를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기상호가 손을 뻗는다. 스르륵, 성준수의 손아귀에서 브로맨스노로맨스가 빠져나간다. 툭. 무심하게 빈백 옆으로 누군가에게는 소중했을 하드커버 웹소설 소장본이 아무렇게나 버려진다. 그리고 고작 얇은 페이지 몇 장을 기상호와 저 가운데 두어 마음의 평정으로 삼고 있었던 성준수를 비웃듯, 책이 빠져나간 자리를 기상호가 채운다.

어차피 키스가 이 온갖 광대 짓의 목표였거니와 (아니다, 대학이 목표였다 성준수는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기상호가 드디어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은 필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으나 성준수는 아까부터 강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성 정체성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은 언급할 것도 못 됐다. 지금의 이 위협은 조금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기상호와 한 공간에 있을 때마다 느꼈던,

존나 발랑 까진 일학년의 사람 뜯어보는 세한 눈이 감긴다. 언젠가부터 성준수의 턱을 고정해 잡고 있던 왼손이 자연스레 목을 삥 둘러 타고 목덜미에 안착한다. 성준수가 오 씨발 타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를 내뱉기는 커녕 인지하기도 전에 첫 번째 입술이 맞닿는다.

기상호의 입술과 그의 혀는 주인의 시선처럼 질척하고, 예리했으며, 그냥 말하자면 무엇보다 변태 같았다. 성준수는 두 손을 내밀어 놀이기구의 안전바마냥 기상호의 이두를 꽉 붙잡고 머릿속으로 잠깐만, 잠깐만을 연발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상호에게 혀를 내주었고, 그다음으로는 고른 치열, 거센 입천장, 여린입천장, 심지어 목구멍으로 가는 위험한 길의 일부마저 전부 내준다. 그리고 나서야 성준수에게 호흡이 주어진다. 흐억, 하며 본인이 생각해도 자존심 상하는 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다시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입술이 쪽쪽 빨리고, 혀가 씹히며, 치아가 훑어지고...

입술이 떨어졌지만 정신은 돌아오지 않아 도서관의 높은 천장이 시야에서 삥삥 돌고 있을 때 성준수는 미약하게나 자기 다리가 활짝 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아까의 생존 본능이 아직도 곤두서 있어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였으나, 제 다리 사이에 대담히 벌려놓은 기상호 새끼의 양무릎이 그 행위를 막아선다. 이 황당함이야말로 성준수가 정신을 차리는 데 한몫한다.

"와... 하아, 허억, 씹파알..."

"햄, 욕도 하시네요."

기상호가 자기 입가에 흐른 침을 아무렇게나 손바닥으로 텁텁 닦아내면서 숨을 고른다. 혼이 빠진 상태에서도 대답 꼬라지에 충분히 어이가 없어진 성준수가 실소를 짓는다.

"싫으냐?"

"아뇨, 존나, 섹시한데예."

그래? 성준수가 빈백에 눕혀진 몸을 느리게 일으킨다. 원래는 1초면 코어에 힘 빡 주고 올라왔을 거리를 어떤 씨바거가 힘 다 빼놓아 팔 무릎 다 써가면서 흐물흐물 일어난다. 그럼, 씨발, 이 개새끼야. 성준수가 아직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기상호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퍽퍽 친다. 앞으로 니 얼굴 볼 때마다 입에 모타 단 것처럼 존나 씨발스럽게 욕해줄 테니까, 꺼져. 씨바거. 당장.

"아아앙~ 햄, 솔직히 싫은 것 같지는 않아,"

"꺼, 지라. 고. 당장."

"큭큭, 그럼 달밤에 로맨스에 미친 폭주 기상호, 오늘은 이만 절전 모드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아..."

역시나 이 새끼도 지가 방금까지 저지른 짓이 있는데 멀겋게 빤딱빤딱한 얼굴을 하고 뒷걸음치며 사라지는 것 봐서는, 이 학교에는 제정신인 게이가 한 명도 없는 듯했다- 성준수가 전영중이 손에 쥐여줬던, 지금은 바닥에 떨어진 비엘 소설을 벌레 집듯 두 손가락 끝으로 집어 올리면서 생각한다. 


오올 축하해~

고맙다?

그래서, 다음은 누구 해볼 생각이야? 자신감 좀 붙고 그러면 얼빠 말고도 좀 더 까다로운 애들 도전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정 안 되면 또 다른 얼빠,

얼빠는 씨발 좆까라 그래 절대 싫어 절대 안 해. 1학년도 싫어. 오타쿠 싫어. 변태 싫어. 쫌 어디 경험 없는 애 없냐 좀 멀쩡한 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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