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장추천전형

학교장추천전형 01

준른 / 키스리스트 AU

01. prologue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남구 XX로 71-9, 서울남자고등학교 (이하 서게고) 의 위치이다. 교가는 학교여 굳세어라, 교훈은 안전하게 졸업하자, 교화는 라벤더. 정원은 600명으로 1학년 120명, 2학년 138명, 3학년 242명의 역피라미드 인구 구조를 띄고 있다. 1년에 학비 삼천만 원, 웬만한 특목고 뺨치는 가격을 매년 학부모들 통장에서 빨아간다. (그런 주제에 그 개구린 이름값조차 하지 못하니, 어쩌면 신입생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학생 관리? 출석 체크를 한 달에 한 번씩, 교장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거나 교육청에서 감사가 오는 날에 한다 (따라서 한 달에 한 번씩 방치해두었던 출석부를 찾기 위해 교사들이 온 교실을 뒤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수업 분위기? 자는 애들 안 깨우고 폰하는 애들 안 말린다. 그저 자기보다 데시벨이 큰 학생이 있으면 나가서 떠들라고 빈 교실까지 배정해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입? 학교에서 준비해줄 것이 뭐가 있는가. 어차피 다니는 애들 개개인의 인맥이며 본인 명의의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며 부모님 직위며 빽이며 평생 먹고살 정도로 빵빵한데. 하여튼, 이름부터 누가 봐도 대충 만든 학교이며 그보다 더 대충 운영되고 있는 주제에 학생들의 대부분이 고위급 관료나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2세의 자식들로 이루어진 이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서게고라는 명칭부터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남자, 고등학교. 서울에 있으니까 서울. 남고니까 남자고등학교. 사이에 희망 소망 용기 따위 좋은 말도 끼어있는 것도 아니고 강남 서초 송파 세부적인 지역명이 끼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체인점처럼 서울여자고등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산남자고등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생각보다 이러한 좆구린 학교명에 태클을 거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왜? 이름이 학교의 설립 목적 그 자체를 대표할 정도로 직관적이니까. 서울남자고등학교, 암묵적으로 서울게이고등학교, 다시 말하지만 이하 서게고, 는 전국의 모든 게이 고등학생을 위한 서울시에 위치한 고등학교이니 말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게이'를 모아놓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날라리에 구제 불능인 진작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난 돈 많은 녀석들을 어디 격리하고 싶은 사회의 욕망이 선행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마침 그들이 게이이기까지 한 것일 뿐. 날라리를 위한 학교보다는 게이를 위한 학교라는 것이 덜 반사회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 사실을 알고 보면 이름에 딱히 태클을 걸기가 애매해진다. 물론 대충 지은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하지만 이러한 이름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고 나면 기필코 새로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물음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서게고의 표면적인 설립 목표는 이러하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성소수자들끼리 모아 한 학교를 다니게 함으로써 (고등학생의) 특유의 밝고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유지... [중략] 사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학교 공동체의 차원에서) 타파하는 동시에... [중략]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으로부터 보호하여 긍정적인 자아를 형성케... [중략] 성적 지향성과는 별개로 밝고 총명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는 어쩌고..."

근데... 아니 씨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게이인 것을 아는데도 일부러 모아놓는다고? 그것도 성욕 식욕 성욕 수면욕 성욕 만렙일 남고생 게이들끼리? 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은 다 뇌세포가 소멸한 사람들임이 틀림없었다. 이건 학교를 다니라는 건지, 아싸 짝짓기를 하라는 건지...

...라는 의아함을 성준수는 전학 온 전날, 등록을 마치기 위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 담임선생님과 마지막 상담을 마치면서까지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럼 그렇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성준수는 이 의문에 대한 당연하리만치 시니컬한 대답을 의지와는 다르게 알아버리고 만다.

씨발, 얌전하게 만들고 싶다는 물고기들에게 물을 부어놨네. 그것도 댐 단위로.


급식 지도를 나온 어른이 하나 없는 넓디넓은 급식실은 마치 정글과도 같았는데,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흔한 남고의 약육강식 법칙의 지배를 받는 정글이 아니라, 그게, 뭐랄까. 정글의 왕국 성인판, 음. 밤의 시간, 번식의 시대, 이런 느낌에 가까웠다. 주위를 삥 둘러보기만 해도 그랬다. 한곳에서는 아침드라마 뺨치는 치정극이 벌어지고 있었고 (사랑한대매, 나보고 사랑한다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너 믿었단 말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사방에서 평생 보고도, 듣고도 싶지 않았던 남학생들끼리의 소름 돋는 데이트 현장이 펼쳐졌으며 (자기야, 우리 오늘 저녁에는 뭐할까? 뭐긴. 콘돔은 사놨어? 어후, 당연하지. 우리 자기, 오늘 이렇게 예쁜데.) 상당수의 커플들이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움쪽쪽쭈왑짝챱쪼옥촵). 빡쳤으면 빡쳤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싶었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성준수는 귀가 빠진 이후 처음으로 아주 격렬하고 강렬하게 느낀다.

오우 쉣 씨바거 도망가고 싶다...

그도 그런 것이, 오늘만 해서 번호를 따인 횟수는 무한대로 발산했으며, 분명 오늘 전학 왔음에도 고백을 받은 횟수로 열 손가락 열 발가락 꽉 채웠다. 음악실 앞에서 처음 보는 (당연하다) 샛노란 1학년 명찰을 단 자기보다 덩치 큰 새끼가 첫눈에 반했다고 결혼하자고 했을 때는 정말 이게 현실인가 싶었다. 열심히 로그아웃 강제 종료 계정 삭제 및 탈퇴 버튼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길래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와, 이런 곳이 정말 존재하는구나... 그리고 원통하게도 이것은 다름 아닌 성준수의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수긍하는 것과 적응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아무리 성준수가 자기 대입과 관련한 일 빼고는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해 왔기에 일지비티큐쁠라스에 아무런 생각이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모르는 동성의 인간들에게 엄청난 양의 노골적인 관심을 받는 것은 소름 끼칠 만치 불편했다.

아니, 게이한테는 여기가 현세에서 만날 수 있는 천국의 가장 근접한 장소가 아닌가. 왜 새삼스레 소름 끼쳐 하는 것인가, 라는 반문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서게고에 이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도, 소름 끼칠 것까지는 없을 법도 했다 - 그런데 그것은 언제까지나 성준수가 게이었음을 가정했을 때 하는 말이고.

그렇다. 성준수는 게이가 아니었다. 그냥 미친 남고딩 1일 뿐이었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남고딩들과는 다르게, 이 새끼는 입시에 미쳤다는 것이 특이점이겠지만.

엄마가 처음으로 아들 걱정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존잘최상급쿨뷰티미모, 188cm의 길쭉한 키, 만들어진 슬림근육으로는 1 티어의 몸, 거친 입과 불같은 성질머리의 아들. 덕분에 성준수 모는 아들이 새벽까지 집에 안 들어와도, 군대에 가도 (물론 아직 가지는 않았다), 혼자 해외를 갔다 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며 그의 생존 능력을 믿을 위인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서게고로 전학을 가 학교장추천전형 한 자리 어떻게 차지해서 내년에는 반드시 한국대학교 2X 학번이 되리라 하니, 밑도 끝도 없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존잘최상급쿨뷰티미모, 188cm의 길쭉한 키, 만들어진 슬림근육으로는 1티어의 몸, 거친 입과 불같은 성질머리의 가짜 게이라니, 재난 레시피의 정석이다) 고민 끝에 걱정을 표해도 정작 아들놈의 새끼는 입시에 미쳐 자신의 미래에 훤히 보이는 재앙에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준수 너는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엄마는 등록금, 월세, 친구 없는 새로운 환경 등등 다른 건 다 몰라도 네가 동성이 보내오는 진득한 욕망의 눈길을 버텨낼 수 있을지가 정말 걱정이다. 저 그때 미국 골목길에서 칼로 협박도 받아봤어요, 어머니. 무심함의 극치를 달리는 아들을 앞에 두고 성준수 모는 차마 다음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너는 칼로 협박받는 게 동성에게 고백 공격 받는 것보다 더 적성에 맞단다 아가야...

엄마 말은 틀린 거 하나 없다고, 같이 앉자는 제의를 싹 다 거절하고 급식실에서 그나마 가장 조용한 구석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최대한 큰 키 구겨가며 존재감을 지우려고 노력하며 밥을 먹는 성준수는 재차 생각한다. 호모포비아는 죽어도 아니지만 밥 먹는 데까지 남(남)의 연애 보는 것은 조금 속이 뒤집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살인 충동을 누르고 대입만 생각하니 또 그렇게 못 버틸 것은 아니었다. 무조건 한국대 가고 만다 씨바거... 와중에 등록금이 존나게 비싸서 그런지 밥맛은 기가 막혔다. 워낙 높으신 분들 아들들이 다니는 날라리 학교여서 다들 점심시간엔 나가서 한우나 드시고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다수가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 있어 처음에는 의외였다. 하지만 성준수가 연어알 아보카도 캘리포니아 롤을 입안에 집어넣으면서 생각한다, 이런 급식이라면 먹어주는 게 상도덕이지. 애초에 배식대 뒤쪽으로 보이는 넓은 주방에서 전문 셰프처럼 보이는 이 서너명이 바로바로 요리를 제조해 식판 위에 올려주는 것부터가 클라스가 달랐다.

손에 든 영어단어가 눈에 잘 안 들어온다. 하도 귀에 외설스러운 소리가 꽂혀서 그런가. 문란행위를 공공장소에서 펼치는 새끼들을 조지고 싶은 욕구와 속을 게워내고 싶은 욕구와 미슐랭 뺨치는 급식을 다 먹고 싶은 욕구가 충돌한다. 하, 내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정말 인생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슬픈 현실에 처해 있으면 비교적 덜 슬펐던 과거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문득 부산에서 다니던 고등학교와 함께 다녔던 친구 생각이 난다. 전학까지 와서 그 꼴통 학교랑 그 자식 면상이 떠오르다니 조금 인생이 억울해진다. 입시 때문에 서게고로 전학 가겠다고 알려준 날 박기철은 존나게도 쪼갰다. 준수 니 미칫나, 쌍또라이네 진짜, 누가 대학 쪼매 잘 가보겠다 게이 흉내를 낸단 말이가? 박기철아, 한국대가 쪼매 잘 가는 거냐, 생각을 해봐라. 내 진짜 니 때매 살믄서 별꼴을 다 본다. 애초에 지상고도 내신을 따기 위해 고1 때 서울에서 내려가 전학 갔던 학교다. 거기도 학교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 꽤 있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내가 그리워할 게 없어서 거지상고라고 불렀던 지상고 따위 그리워해야 하나 인생 씨발 진짜.

...그리고 약 10분 후, 성준수는 이 생각을 번복하게 된다. 억울하기는 무슨, 아니다. 이런 미친 개또라이 개지랄 꼴통 학교에 와 지상고등학교가 존나, 무지, 간절하게, 씨발, 그리워지는 것은 상황에 위기감을 느껴 당장에라도 다시 전학 신청서를 내고 부산으로 튀어가라는 신의 마지막 보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성준수는 이러한 보은을 너무나 늦게 눈치채고 만다.

사건의 발단: 건너편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성준수의 시야가 누군가의 몸뚱아리로 가득 찬다.

사건의 전개:

"준수 안녕? 오랜만이네."

들리는 말투부터 좆같아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들었더니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남학생이 앉아 있다. 안 보이는 척 무시하기에는 어깨가 무슨 태평양이어서 눈앞을 가득 채운다. 식판 따위는 없는 게, 목적은 명확하다. 대화 혹은 시비 (혹은 고백? 성준수는 이 선택지를 고려하는 자신에 있어서 굉장한 자괴감을 느낀다). 서게고의 학생 평균 미모는 성형, 메이크업, 피부관리, 샵 이용 등의 요소로 인해 높은 편인 듯하였으나, 성준수의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은 서게고 학생 치고도 굉장히 준수했다. 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성준수가 게이라는 전제하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지, 애석하게도 성준수는 게이가 아니었다.

사건의 위기:

"누구...?"

눈을 곱게 접어 웃던 남학생의 얼굴이 슬쩍 일그러진다. 미간은 곧 펴졌으나 올라간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한다.

"누...구...냐고?"

사건의 절정:

"뭔데. ...너 나 알아?"

"......."

"아니 말을 하라고,"

"와, 준수... 내신 하나 따보겠다고 왜 이 꼴통 학교까지 찾아왔는지 알겠네. 너 기억력 좆구리구나? 지능에 하자가 있네, 확실히."

"씨바거,"

"어휘력 후달달 딸려서 할 말 있으면 욕부터 나오는 것도 그대로네. 준수야, 나 기억 안 나? 진짜?"

"났으면 이러고 있겠냐고, 씨발놈아."

"나 전영중이야, 너랑 같이 기내초중-"

성준수의 눈이 쟁반만 해진다.

"너? 가. 전연중??? 이라고? 니가? 니가 왜 여기에 있냐? 씨발? 너 게이였어?"

"후..."

내쉬는 한숨이 심상치 않다. 와씨, 얘 어렸을 때도 이런 캐릭터였나? 이 새끼의 성격에 있어서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게이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다. 네 새끼 우리 중에서 가장 많이 연애하고 다닌 전적 어디 안 간다... 그것도 여자 문제 때문에 맨날 시끄러웠으면서. 중학생 때에 비해서 생긴 건 확실히, 멀끔해졌고 키도 큰 건 알아보겠는데 그렇게까지 친하던 사이는 아니어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거리낌 없이 아는 척 하는 것 보면 좀 쾌활하고 시원한 성격 같았던 것 같으면서도 못 알아보는 거 하나에 눈깔 도는 것 보니 까다롭고 섬세한 성격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뭐가 됐든, 전영중의 아우라에 잘못 걸렸다는 느낌을 받은 성준수였다. 무슨 전학 첫날부터 이렇게 사람 성가시게 하는 일들이 생기는지. 우선은 회유책을 써본다.

"야, 몰라봐서 미안하다. 많이 달라져서."

흥미를 못 이겼는지 전영중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어떻게?"

"...뭐?"

"어떻게 달라졌냐고."

"......."

그게 왜 궁금한데, 라고 해버리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전영중의 광기 서린 듯한 초롱초롱한 눈이 어째 조금 위험해 보여서 우선은 그냥,

"키 많이 컸네."

"하, 키 좀 컸다고 그럼 못 알아본 거야?"

성준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원래 게이들은 다 이렇게 조금씩? 피곤한가? 하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게이가 전영중이어서 성준수는 한 사회 집단에 대한 아주 위험한 고정관념이 생길 뻔했다.

"미안하다고 씨발아. 할 말 없으면 꺼져."

중학교 동창이겠다 아는 체를 먼저 해왔으며 시비까지 걸고 있으니 이 정도 참았으면 보살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전영중은 당연히 할 말이 남아 있었다.

"하하, 준수 입 여전히 거치네... 하긴 입 거친 애들이 또 수요가 있기도 하지. 박력 있다고 좋아하는 놈들도 있고, 또 그런 애들 밑에 까는 맛이 있다고 좋아하는 새끼들도-"

"전영준아,"

"전영... 내 이름 뭐라고?"

"너가 나보다 기내초 기내중 시절 기억 잘하는 것 같은데 내 성격 파악이 안 됐네? 나 사람 때려."

"왜, 수요 있다는 게 어때서. 준수도 그러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잘생기고 돈 많은 게이 친구들이랑 어깨 비비고 몸 비비면서 남은 고삼 생활 즐기,"

"이 새끼 원래 이런 새낀가? 보자 보자 하니까 선 넘네. 싸물고 꺼-"

"성준수, 너 게이 아니지."

순간 당황해 적절하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아...닌데? 슬쩍 올려다본 전영중의 얼굴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네가 무슨 게이야, 준수야."

"......맞거든."

"이것 봐, 역겨워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씨바 그건 갑자기 니 새끼가 성희롱을,"

"나 말하고 있잖아. 너 여기 왜 온 거야? 보니까 사고 쳐서 부모님 손에 이끌려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준수 집안이 솔직히 막 우리처럼 돈이 썩어 돌지는 않잖아. 그럼 하나겠네 뭐. 너 부산... 지상고랬나? 거기서 성적 잘 안 나왔지?"

...이 새끼를 때리면 안 된다. 우선 얘네 아버지가 국회에서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며, 무엇보다도 지금 대학 하나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 새끼 하나 인내 못하여 생기부에 빨간 줄 그어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대학을 못 가게 된다면 이 새끼를 때리는 것을 넘어서 죽이는 것까지 가능해진다는 소리다.

"어디 가서 말하면 죽여. 진짜야.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정연중."

서게고 일 원칙이자 입학생들이 공식적으로 만족할 조건은 한 가지이다. 게이일 것. 게이이기 위해선 만족해야 할 게 남자일 것, 동성을 좋아할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를 만족 못한다? 이 학교에 있을 이유나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성준수의 성 정체성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지만 자기보다 돈도 권력도 입김도 게이력도 압도적으로 우월한 전영중이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면 성준수도 손 쓸 도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영중이라고. 전영중."

"죽는다고. 알아들었어?"

"따라 해봐, 준수야. 나 많이 서운해. 옛날에 거의 6년을 붙어 다녔는데 이름 하나 제대로 모르는 건 뭐야. 전, 영, 중. 영중이. 영중아."

"씨발, 알아듣냐고. 묻잖아."

"전, 영, 중."

"그르... 즌응증 스끄으...."

전영중이 즐겁다는 듯 처웃는다.

"솔직히 발음은 볼품없긴 한데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됐어. 근데, 준수 여기 오면 팔자가 좀 필 거라고 생각했나 봐. 확률 좆빠지게 계산해서 나온 결과가 고작 서게고여서 어떡하냐. 아무리 네 머리로라도 지상고에서는 내신 괜찮았을 텐데 여기까지 왜 왔을까..."

"야, 미안흐드느끄. 그냥 좋게 넘어가면 안 되냐?"

"아,"

전영중의 미소가 불안할 만치 사악하다.

"너 학교장추천전형 한 자리 노리는구나?"

세상에는 왜 뜻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을까. 큰마음 먹고 전학 와서 누구한테 욕하지도 시비 걸지도 않고 조용히 게이인 척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었는데 지금 이 속 모르겠는 새끼한테 완벽하게 간파당해서 불안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이 몹시 구라 같았다. 슬금슬금 등을 타고 올라오는 긴장감에 성준수가 한 수 굽혀본다.

"야, 나 진짜 이 학교 조용히 잘 다니다가 졸업하고 싶다. 그냥 넘어가 주고 우리 서로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내면 안 되냐. 부탁한다, 씨발."

전영중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무척 가식적이고 패고 싶게 생긴 표정이다.

"준수야, 준수야, 준수야. 누가 부탁을 그딴 식으로 해. 그리고 싫은데."

"어쩔 수 없다. 오늘 세상과 작별 인사 해라."

"왜 모르고 지내야 하는데... 나 오랜만에 너 봐서 되~게 반가운데 넌 아닌가 보다? 아, 하긴 넌 나 알아보지도 못했지. 기억이라도 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 진지하다. 너 묻을 생각이야. 오늘. 밥만 먹고 바로."

"근데 너 게이 아니라는 사실은 넘어가 줄게. 그렇다고 전국에 게이들만 모아두는 고등학교에 헤테로 새끼가 무서운 줄 모르고 고개 꼿꼿이 들고 걸어들어온 게 안 꼬운 건 아니야. 존나 꼬와. 이게 여장해서 몰래 여고 잠입한 남학생이랑 뭐가 달라."

"씨발, 그거랑 이게 같냐? ...그래도 니가 니 목숨을 안 아끼는 건 아닌 것 같으니 한번 봐준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건 아니고."

"다시 보니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새끼였네."

"응. 근데 준수야, 나는 게이 학교에 등록금 헌납하면서 쳐들어왔으면 게이 행세라도 하는 게 맞다고 봐. 아니면 너 들키는 거 시간문제다? 너 당장 누가 탑이냐 바텀이냐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래."

"......위...랑 아래."

"그래, 우리 준수 영어 참 잘한다."

"......그래서 그게 뭔데."

"...넌 참, 용기가 있는 건지, 멍청한 건지. 참고로 난 후자라고 봐."

3개월 후, 성준수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때... 그래, 이때 그냥 자퇴를 했었어야 하는데. 대학이고 뭐고 전부 포기하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대자연을 좇으며 절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적어도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급식실을 걸어 나왔어야 하는데. 아니, 전영중의 면상을 한 대 후려갈겨 말 못하는 벙어리를 만들고 국회의원 아들 폭행 죄로 그 새끼랑 평생 격리됐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의 성준수가 무얼 알 도리가 있는가. 그냥 삶이 까라는 대로 까는 거지.

성준수가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한 소리 해주려고 했지만 전영중이 품속에서 깔끔하게 두 번 접힌 종이를 성준수 얼굴을 향해 날리는 것이 먼저였다. 진작 입맛 떨어져 젓가락을 놓은 지는 오래였으므로 성준수는 쌍욕을 날리면서도 어렵지 않게 종이를 허공에서 낚아챘다. 씨발, 이게 뭔데. 열어봐, 준수야.

망설임 없이 열어젖힌 종이에는 출석부 첫 페이지처럼 나누어진 4x5로 배치된 네모난 칸들 안에 학생들의 사진이 있었다. 밑의 여백에는 5월 edition. 이라는 킹받게 한글과 영어를 묘하게 혼재해놓은 말이 필기체로 쓰여 있다. 증명사진처럼 정면을 보고 찍은 사진이 있는 반면, 인생네컷이나 롯데월드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단체 사진 중 한 사람만 크롭한 것도 있었고, 카카오톡 프사나 인스타그램 피드를 가져온 것처럼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의 사진도 있었다. 심지어 몇몇 사진은 피사체가 렌즈도 안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마치 꼭 도촬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배경이나 인물의 동작이 어찌 되었든 모든 사진에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 모두가 다 서게고의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 둘, 인물 대다수가 잘생긴 편에 속했다는 것. 딱 보기만 해도 얼굴 괜찮은 놈들만 추려 낸 사진 목록이라는 것을 날마다 거울 보고 사는 성준수마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게 뭔데."

"우리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애들이야."

성준수가 다시 목록을 쳐다본다.

"씨발, 니 사진도 있는데?"

"나도 잘생겼으니까."

"......."

"...나 상처 받아. 왜 혹시 너 없어서 아쉬워? 이건 올해 5월 버전이어서 그래. 전학만 안 갈 수 있으면 너도 하반기 버전엔 추가되겠다."

"게이...들은... 다 이러고 노냐?"

"준수야, 나 하나가 집단의 대표성을 지닌다는 터무니없는 일반화의 오류를 가지고 게이를 싸잡아서 욕하지 말아줄래?"

전영중의 알 수 없는 자학 덕분에 그나마 성준수는 게이들에 대한 편견을 멀끔하게 씻을 수 있게 된다. 그럼 그렇지, 이 새끼가 이상한 것이다. 게이들은 잘못 없다. 다시 손에 쥔 종이를 살펴본다. 가나다 순서인가. 그것도 중간에 한 번씩 끊기는 것 봐서는 학년별로 따로 구분을 해놓은 듯싶다. 기상호, 정희찬, 고상언, 공태성, 김다은, 조재석, 주찬양, 허창현 - 얘는 왜 혼자서 사람 사진이 아니고 길거리에 버려진 초록색 공룡 인형인 것일까 - 강인석, 박병찬, 이규, 이휘성, 임승대, 전영중 - 함정이다, 완전. 활짝 웃는 얼굴이 짜증 나는 사진이었다 - 조신우, 지국민, 진재유, 최종수, 황보석, 조형.... 잠시만, 교복이 조금 다르게 생겼는데. 졸업생 아닌가.

한번 훑어보았음에도 대체 무엇을 위한 리스트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성준수가 느릿하게 입을 뗀다.

"...그럼 넌 왜 이러고 노냐."

"심심해. 그리고 재밌잖아. 다 살펴봤으면 내가 이제부터 룰을 설명해줄게. 저 스무 명 중 과반수, 즉 열한 명이랑 키스를 하면 네가 이기는 게임이야."

"응, 안 해. 이제 진짜 죽이기 전에 눈앞에서 꺼져 변태 새끼야."

"에이,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네가 이기면 너 소원대로 준수 눈앞에서 꺼질게. 졸업할 때까지 말도 안 걸고 귀찮게도 안 할게. 교장한테도 안 꼰지를게. 편하게 학교생활 하다가 졸업해."

거지같은 내기 제안에 더하여 원래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를 특권처럼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종이를 쥔 성준수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참자, 폭력만은 안 된다...

"이딴 거 안 해도 그럴 생각이다 씨발아."

"그럼 이건 어때."

전영중이 비밀을 고하듯,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인다.

"한국대 학교장추천전형 우리 학교에서 기껏 해봤자 두 명인 거 알지. 유감스럽게도 올해는 한 자리 이미 찼어. 우리 학교 전교 1등이 아쉽게도 대학 진학을 희망해서 내신을 좀 만들어 놨거든. 준수 1.0이야? 그랬으면 전학을 올 필요가 없었겠지. 그럼 남은 한 자리에 네가 들어가야 하는데, 준수야. 운 좋게도 아직은 전교 2등이 한국대학교를 쓸 생각이 없대. 아직까지는."

서게고의 전교 1등과 2등의 상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자리가 있음을 확신하고 전학을 왔지. 애초에 서게고의 대다수는 부모님 백으로 대학을 가며, 학업에 관심이 없는 것이 정상이었다. 성적으로 한국대학교 원서를 쓰겠다는 학생은 노수민 하나밖에 없다고 확인에 확인을 걸친 뒤 전학 온 건데...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성준수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린다.

"씨발새끼야... 전교 2등 협박해서 수시 원서 넣게 시킬 생각이기라도 하냐? 미친 거냐, 정말..."

"협박? 와하하, 준수 상상력이 좋네~ 나 전교 2등이랑 아주 잘 아는 사이야! 협박까지 갈 필요도 없지."

"씨발 어떤 또라이 새끼가 친구 부탁으로 대학을 고른다고,"

"음, 이를테면,"

전영중이 방긋 웃으며 엄지로 자기 가슴팍을 가리킨다.

"나?"

"...씨바거."

와하하하! 전영중이 크게 웃는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 둘은 학생회장(물론 성준수는 아직 모른다)+미모의철벽전학생의 콤비로 힐끔힐끔 관심을 끌고 있었으나 전영중이 그렇게 크게 웃으니 대놓고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덩치만 겁나게 큰 새끼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어대니 궁금증을 참지 못해 아주 대놓고 대화를 엿듣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비현실보다 더 비현실 같은 현실을 마주한 성준수의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약간 창백한 낯으로 성준수가 묻는다.

"니 내신이... 얼마 나오는데."

"진짜 궁금해? 아, 그럼 알려줘야지, 아무렴."

전영중 성적을 전해 들은 성준수의 낯이 조금 더 하얘진다. 머리를 터보로 돌렸다. 씨바알 저건 하나 남은 내신인 1학기 기말고사로도 역전 못한다, 라는 결론이 조금 후에 나온다.

"너 진짜 왜 나한테 지랄이냐... 얼마나 처할 게 없으면 남의 인생 말아먹으려고 안달이냐고 씨발아...."

전영중이 태평한 표정으로 답한다. 여유롭게 어깨까지 한번 으쓱해 보인다.

"말했잖아. 심심하다고."

"싸이코 새끼 아니야, 이거? 죽이고 싶네 정말로."

"그래서 준수 할 거야? 말 거야. 너 이기면 나 학추 절대 안 넣을게. 약속해."

성준수가 손안에 꾸깃꾸깃해진 종이를 바라본다. 스무 명의 남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사람 중 열하나랑 키스를 하라, 그러면 한국대학교 학교장추천전형 한 자리는 보장된다고...

"키스의 기준은?"

"와, 역시, 성준수. 너 그럴 줄 알았다. 고민 더 안 해? 정말 겁대가리가 없구나?"

극딜을 처맞은 건 성준순데 괜히 심기 불편해 보이는 전영중이 존나게 어이없었다. 결국 성준수는 숟가락으로 전영중의 이마를 내리치고 만다. 악! 이 정도는 맞아도 싸다 씨발놈아... 양심이 있으면... 알았어, 준수야. 한 번만 봐줄게. 봐주기는 개뿔... 내가 봐주고 있는 거라고 병신아. 

"그래서, 기준은?"

"혀."

"윽."

"나 참, 준수 방금,"

"됐고, 보고는 어떻게 해. 그냥 너 찾아가서 누구랑 입술 비볐다고 말해?"

"나라면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그렇지."

"싫어. 니 면상 꼴받아. 번호나 내놔."

전영중은 면상이 꼴받는다는 발언에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성준수 키패드에 번호 11자리를 입력하고는 조금 기분이 풀려 보였다. 그럼 너 내 번호 따간 거야? 쌉쳐라 아직도 그냥 죽이는 수가 있다.

"아, 그리고 이 내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한테 말하는 거 금지. 키스 구걸하고 다니는 건 너무 재미 없잖아. 또, 나 속일 생각하지 마. 사람 붙여놓을 거야."

"씨발, 뭔 제삼자 따까리를 끌어들여, 걍 둘이서 쇼부 봐."

"야, 이초원!"

퇴식구를 향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영중의 외침에 고개를 돌린다. 그 중 푸른 후드티를 입고 유난히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학생 하나가 손을 들어 빠큐를 날린다. 전영중이 멀끔한 얼굴로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준다.

"쟤가 이초원이야,"

"야, 씨발, 내가 한 말은 뭐로 듣고,"

"쟤가 나한테 빚진 게 조금 있어서."

"야, 야, 부르지 마라니까?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야!"

"얘한테는 유일하게 내기 관해서 말해도 되는 걸로 해."

"씨발놈아, 진짜 대가리에 뭐가 들었나, 씨발,"

"뭔데."

멀리서 봤던 파란 후드티가 어느샌가 전영중 옆에 서 있다. 옆에 서 있기 더럽게 싫은 표정이다. 가까이서 보니까 눈꼬리며 눈썹 끝이 올라간 것이 약간 예민해 보이는 얼굴상이다. 전영중이 단정한 얼굴로 말한다.

"나 얘랑 키스리스트 내기하기로 했어."

"미친..."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 단순했지만 단 두 음절에 압축되어 담겨있는 경악과 질색이 뼈를 때린다. 성준수가 그 심정에 격하게 동감하며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이다...

"너가 심판 좀 봐줘."

"하아... 내가 왜."

"이걸로 그 빚 갚는 걸로."

"콜."

"이초원! 우리 먼저 간다!"

일행이 급식실 뒷문에서 소리치는 소리에 이초원이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만들어 보여준다. 그가 잠깐 눈이 팔린 사이에 전영중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우리 준수 잘 부탁해~"

"야, 씨바거, 그러고 간다고?!"

"응? 부탁하긴 뭘 부탁해?"

"씨발 너 새끼 뭐냐고!"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전영중이 덕분에 푸른 4인용 급식실 책상에는 어느새 성준수와 이름도 벌써 가물가물한, 환장하겠는 표정의 남학생 하나만 남고 만다. 전영중의 퇴장과 함께 그 테이블에 쏠리는 관심도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성준수의 관심 밖이었다. 이초원이라는 자식이 얇은 눈썹을 헤어라인까지 들어 올리며 성준수를 쳐다본다.

"넌 미쳤다고 쟤랑 그 내기를 해?"

"씨발 몰라, 그 새끼가 협박을 정도껏 해야지."

"하긴. 애가 멀쩡하게 생겨서는..."

한숨을 푹 내쉰 이초원이 할 수 없는지 성준수 건너편에 앉는다.

"리스트 봐봐."

"이거? 왜."

"도와줄게."

"그러면 걔한테 내가 열한 명 클리어했다고나 일러주든가."

"그건 안 돼. 나도 갚아야 할 게 있어서, 깔끔하게 심판 볼 거야."

"에라이 씨바거."

"그래도 넌 얼굴이라도 잘생겨서 다행이다... 맘만 먹으면 클리어 가능하겠네. 줘봐. 나 올해 3월 버전까지밖에 못 봤어."

어떻게 이런 리스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전제할 수 있는 것일까? 서게고란 과연 뭘 하는 곳인가... 꾸깃꾸깃해진 문서를 넘기며 성준수는 혹시 이 종이가 전영중이 월간지처럼 찍어 배포하는 서게고 얼굴 톱 20이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두려워서 정체를 물어보지도 못한다.

"음..."

이초원이 목록을 살펴보는 동안 생각이 다른 길로 샌다. 그런데 이게 도덕적으로 옳긴 한 건가? 원서 접수 기간인 9월 전까지 열한 명의 서로 다른 사람과 키스를 하는 것이. 하지만 성준수는 지난 일주일간 일어났던 일을 쭉 머릿속으로 되뇌어보고 그 생각을 버린다. 씨바거, 지금 그게 중요하냐.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남자가 칼을 꺼냈으면서 무는 무슨, 칼을 꺼냈으면 사람 하나라도 썰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전학을 갔으면 대학이라도 가야지. 게이 흉내를 낼 바에는 일시적 게이를 하고. 성준수는 더 이상의 현타를 거부했다. 이제부터 나에게는 인권도 체면도 그 무엇도 없으며 나를 이루는 것을 학교장추천전형을 얻어내기 위한 의지 그 하나밖에 없다.

"와, 조형석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있네. 병찬형... 와, 이 형도 절대 안 내려가네. 오, 이번에 공태성 새끼 추가됐네. 그 싸가지가 왜? 에반데. 음, 그나저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어?"

이초원의 코멘트를 대충 흘려듣고 있었던 터라 돌발질문에 성준수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린다. 어.......... 딱...히?

"의외네. 여기 잘생긴 애들만 다 모아놔서 취향이 하나쯤은 있을 만 한데."

이초원이 슬쩍 성준수를 쳐다본다. 눈빛이 예리하다. 성준수가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다. 전영중의 목소리가 순간 뇌리에 스친다. 너 들키는 거 시간문제다? 

"...공부하느라 연애는 많이 못해본 타입?"

"아, ......어어."

"훗.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우리 학교 최고의 연애 고수이기는 하거든. 그래서 그런지 다들 상담도 많이 받으러 오더라고."

잘못 짚긴 했지만 여전히 뿌듯해 보이는 이초원을 앞에 두고 성준수가 머리를 굴려본다. 적당히 오지랖 넓어 보이고, 눈치가 빠르지는 않으며, 전영중 싫어하고, 정보력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이 새끼... 어쩌면 도움이 좀 되겠는데.

"그럼 선호하는 스타일 같은 건 있어? 쾌활하다든가 조용하다든가 상냥하다든가 이두근이 발달하였다거나 키 190 이상..."

성준수가 눈매를 찌푸린다. 주여, 로또 당첨 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대학 하나 가겠다고 마음먹은 저에게 왜 이리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 건가요. 지금까지 공부하느라 연애를 한 번도 못해본 것도 맞을 뿐에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냅다 열한 명의 사람을 꼬셔서 입을 처박아야 한다니. 세상이 존나 나를 억까해...

갑자기 머릿속에 번쩍이는 생각이 든다.

"얼굴."

"어?"

"얼빠. 이상형 물어볼 때 성격 키 몸매 등등 다 둘째치고 얼굴 하나 화려하면 넘어갈 만한 애. 이 중에 없냐?"

이초원도 성준수의 사고가 어떻게 흐르는 지 이해하는 것 같았다. 오, 쉽게 쉽게 가겠다 이거지. 일리 있어. 작게 감탄하며 종이 속 얼굴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아, 있긴 있네.

"얘."

이초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남학생은 쎄한 듯 의기소침한 듯 애매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고 있다. 그리고 아래, 맑은 고딕으로 쓰여 있는 글씨는,

기 상 호

키스리스트 내에서 성준수의 첫 타겟이 될 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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