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세문대] 첫 고백
큰세의 첫 고백을, 응원합니다.
* AU입니다. 테스타 멤버 이세진, 박문대가 아닌, 그냥 이세진, 박문대로 봐주세요.
동창회라는 명목하에 모인 이들은 모두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뭐가 재밌는지 매년 빠지지도 않고 나오는 주제였음에도, 다들 지겹지도 않은지 처음 듣는 것 마냥 웃어댔다. 연말 특유의 분위기가 주는 마법 덕일까, 동창회의 분위기는 한없이 붕 떠올랐다.
이때, 어떤 얘기를 꺼내더라도 항상 같은 서두로 시작했다. 가령, 이런 것이었다. '그거 기억나냐?', '그거 아냐?' 혹은,
"아, 야! 그거 진짜냐?"
이 서두에 모두 뭔데? 하는 눈빛으로 보면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야기는, 항상 뻔했다. 앞서 말했듯, 매년 빠지지도 않고 같은 얘기를 떠들어댔으니까. 이번에도 같을 것이었다.
"문대 연애한다던데."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주제에 술집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 모두가 웅성거렸다. '누구지?', '아 그, 누구냐, 걔 아니야?', '듣기로는 우리 고딩 때부터 사귀었다던데?' 하는 말들을 내뱉으며 모두 그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 웅웅 울리던 소리가 점차 짙어지다
"세진아. 네가 문대랑 제일 친하잖아. 알아?"
이세진의 귓가에 굳혀졌다. 이세진은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하하. 글쎄?"
***
학기가 시작된 지 2주를 갓 넘긴 때였다. 조례를 마친 후, 이세진은, 담임 선생님의 부름에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 문을 연 순간, 까만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까만 머리통은 부딪힐 뻔한 이세진에 꾸벅 인사하고, 비켜 선 이세진의 옆을 지나 교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누구지. ...전학생인가.'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루두루 친한 이세진이었던 탓일까. 그 까만 머리통이 계속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교복도 안 입은 사복 차림이어서 눈에 띈 것인지, 우락부락한 남자애들만 보다 제법 곱상하고 귀여운 얼굴의 남자애라 눈에 띈 것인지, 이세진은 한참을 그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도 몇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니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지긴 했지만. 그저, 지독히도 새까만 머리통이 선사한 일종의 잔상이었구나 싶었다. 그랬는데,
"우리 반에 새로운 친구가 왔다. 음, 인사할까?"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전학생 소식에 반 아이들은 금세 소음을 만들어냈다. '학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전학을 와?', '뭐 사고 쳐서 강전 온 거 아님?' 따위의 말들이 오갔을 때, 그 아이가 입을 열었다.
"박문대입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잘 부탁한다거나 잘 지내보자는 흔한 인사도 없었다. 오히려 뭐랄까, 잘 지내고 싶은 마음 없으니 신경꺼도 된다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신경꺼줬으면 한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음, 큼. 다들 문대 잘 대해주고. 문대는, 어디 보자- 아. 세진이가 당분간 문대 짝 좀 할까?"
담임 선생님의 말에 '아 귀찮은데-' 하며 이세진의 짝이 자리를 옮기자, 박문대가 천천히 걸어와 이세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든 동작에 불필요한 소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보통 이런 때, 다른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고 박문대가 만들어내는 소리만 들릴 법도 한데 정반대였다. 그 모습이 이세진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긴 했다만.
"음, 문대라고 불러도 되지? 난 이세진이야. 반장. 필요한 거나 모르는 거 있으면-"
"됐어. 알아서 해."
'허.'
이세진은 헛웃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고등학교 1학년 쌀쌀하던 봄의 아침, 서로를 탐탁지 않아 하던 첫 만남이었다.
나 싫은 티 내는 놈한테 나도 노력하고 싶은 마음 없다 생각한 이세진은, 박문대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마저도 실패한 듯했지만.
이세진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박문대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졸지도 않고 수업에 집중하는 거야 자기도 하는 거니까 그닥 눈이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눈이 간 건, 내려간 안경을 고쳐올리는 하얗고 제법 가늘게 긴 손가락과 안경테 사이로 얼핏 보이는 까맣고 짙은 속눈썹 때문이었다. 별거 아닌 모습이었음에도 박문대를 이루고 있는 선 하나하나가 이세진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힐끔거리며 보던 이세진의 시선이 한곳에 박힌 채 돌아가지 않았다. 그 시선을 느끼는 것인지 끙 소리를 내던 박문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돌리자 박문대의 시선이 이세진의 시선과 공중에서 맞닿았다. 박문대가 눈을 한 번 깜빡하자 이세진은 침을 한 번 꿀꺽했다. 이 순간이 슬로우 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박문대는 다시 고개를 돌려 펜을 들었다. 무언가 끄적인 종이가 이세진의 교과서 위로 톡 올려졌다.
[ 뚫리겠다. ]
이세진은 팔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홧홧한 열감에, 혈액순환이 빠르게 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와이셔츠 카라에 미처 가려지지 못한 목덜미가 빨간 것도 모른 채.
이세진은 인정해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완벽한 반장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들께 좋은 이미지로 각인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만 하던 -이것도 고민할 것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고 있는 아주 쉬운 문제였으니까.- 이세진에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문대랑 친해질 수 있을까.'
이세진은, 박문대와 친해지고 싶었다. 단순히 좋은 인맥과 좋은 이미지를 위한 것이 아닌, 진심으로. 박문대와 틈틈이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다 단답에 단문의 대화였기에 더 답답했다. 어떻게든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이왕이면, 박문대가 흥미로워할 만한 그런 대화를. 오늘도 어김없이 손가락만 탁탁 두들기던 그의 눈에 책을 읽는 박문대의 모습이 보였다.
박문대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그늘진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햇빛이 그를 비추고, 은은히 반짝이는 머리칼과 안경테, 사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그런 진부한 것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 눈이 아픈 것인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사락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말 고요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이세진은 조용히 박문대의 옆으로 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문대, 그 책 좋아해?"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추고, 고개를 들어 이세진을 바라봤다. 박문대와 눈이 마주치자 이세진은 그 책이 좋은 이유와 가장 좋았던 부분을 떠들어댔다. 박문대는 묻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입 밖으로 내뱉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세진은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저도 모르게 떠든 것이었으니까.
말을 마친 이세진을 보며, 박문대가 천천히 눈을 깜빡 깜빡 하다 입을 열었다. 이세진은 그 모습에 어떤 말을 할까 싶어 숨죽여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 반절 읽었는데 이제."
"...하하! 미안~ 세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스포를 해버렸네? 좋아하는 책이라 들떠서 그만~"
이세진은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았다.
'와씨... 쪽팔려.'
"푸흐-"
"?"
이세진은 옆에서 들려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미세한 웃음소리에 옆을 바라봤다. 입을 가린 채 작게 웃고 있는 박문대가 보였다.
"다 읽으면, 다시 얘기해. 그래야 대화가 될 거 아니야."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박문대에 이세진은, 몸이 더워졌다. 아직 여름이 올 때가 아니었음에도.
그 뒤, 두 사람의 대화는 단답과 단문을 벗어나 제법 길게 이어졌다. 박문대가 먼저 이세진을 부르고, 이세진에게 말을 거는 횟수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 다 읽었는데."
박문대가 의자를 빼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종이 치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한참을 얘기했다. 그게 며칠이 되고, 그 며칠이 반복되고, 그 반복되던 날들이 일상이 되었다. 일상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다른 시답잖은 주제로도 대화를 나눴다. 이세진의 바람대로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묘하게 쓰렸다. 분명 자신이 바라던 대로 박문대의 벽을 허물고 친구가 되었다. 박문대와 나누는 대화가 즐겁고, 박문대와 함께하는 일상이 행복했다. 그 속에 씁쓸한 마음이 일렁였다. 그 씁쓸한 마음은 간질거리기도 했다. 자꾸만 제 속에서 일렁거리는 게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간질이는 것 같기도 했다.
계절이 두어 번 바뀌고,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뀌고, 또 계절이 한 번 바뀌었다. 그 시간 동안 이세진과 박문대를 '친한 친구'로 귀결시켰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친구란 말이 싫었다.
전에는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이젠 친구이기 싫었다. 이세진은 인정했다. 박문대와 특별해지고 싶었다. 친구라는 특별함보다 더 특별한 그런 관계를 원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게 맞는 건지 헷갈렸다. 풋내기 같은 마음을 섣불리 드러냈다가 박문대의 친구조차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세진."
그를 부르는 박문대의 눈빛이 제법 진지했다.
"...잠깐, 잠깐만 문대야...!"
이세진이 박문대의 입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 뒷말을 알 것만 같아서. 방금 전까지 분명 박문대와 그런 말을 했었는데 하며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친구, ...하기 싫은데..."
"...나도. 나도, 친구 하기 싫어."
어떻게든 박문대의 다음 말을 막아야 했다. 이게 정말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박문대가 마음을 내뱉을 타이밍인 것이라면, 그 처음은 자신이 먼저 말하고 싶었다. 받는 것보단, 주고 싶었다.
박문대는 잠시 이세진을 끔뻑거리며 바라보다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렸다. 작은 한숨 같이도 들리는 웃음을 뱉어내고 입을 열었다.
"...우리, 종쳐서 들어가야 하는데."
벙찐 표정으로 보고 있는 이세진을 뒤로하고, 박문대는 툭툭 털고 일어나 교실로 향했다. 그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던 이세진은 곧 해사하게 웃었다.
타이밍은 다시 올 것이고, 그건 자신이 잡으면 됐다. 잠시 어긋나버린 타이밍에 조급해할 필요도, 속상해할 필요도 없었다.
분명 그랬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 타이밍이란 건 쉽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세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 타이밍이 조금 늦춰진다고 해서 박문대가 어디 가버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계절이 다시 두어 번 바뀌고, 두 사람은 다른 반이 되었다. 그것도 상관없었다. 늘 그랬듯 서로를 찾으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문대문대~"
그날도 다를 바 없는 날이었다. 늘 그랬듯 박문대의 교실로 찾아갔고, 그를 불렀다.
"......"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복도에서 같은 중 나온 애 만났다던 거. 같은 반이더라. 나 보고 너 왜 여기 있냐 그러더라."
또 그 애와 함께였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보다 더 유하고 풀어진 모습의 박문대가 그 애와 함께 있었다. 그의 말에 환하게 웃기도 하고, 따스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세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조급해할수록 일을 망치는 법이었으니까.
불편한 마음들이 쌓여가던 어느 날이었다.
"야, 6반에 커플 탄생했다던데?"
'6반이면...'
행동이 머리를 거치지도 않고 바로 출력됐다. 다른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문을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단숨에 층을 올라 도착한 곳엔 이미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나름 인기도 많고, 유명하기도 했던 터라 소문을 듣고 몰려온 듯했다. 그 중심에서 난처하단 듯이 웃으며 그 애가 보이지도 않는 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문대가 보였다.
"야 상대가 누구냐니까?"
"아, 글쎄! 대체 어디서 이상한 소문 듣고 온 거냐고."
아니라는 말이 맞다고 들리고, 누구냐는 물음에 박문대라는 이름이 들리는 듯했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도 이세진의 귓가엔 자꾸만 그렇게 들렸다.
'...내가 아니었던 거야.'
바보 같았다. 친구 하기 싫다는 말이 당연히 자기를 말하는 건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누구라는 말도 안 했는데. 이세진은 그 뒤로 박문대의 교실로 찾아가지 않았다. 갈 때마다 박문대의 주변에 보이는 그 애 때문에. 박문대에겐 애써 웃어 보이며 조금씩 멀리했다. 그렇게 박문대와 조금씩 멀어져갔다.
'나만 이 관계에 진심이었나 싶네.'
이세진이 한 발 물러나자, 박문대는 이미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
'답지 않게, 여유를 부렸지.'
이세진은 다시 한번 술을 따라 입에 털어넣었다. 그렇게 졸업하고 연락까지 끊겨 알 수 없었던 소식을 이렇게 듣게 되니 새삼 입이 썼다. 듣고 싶지 않았던 소식인데도 박문대의 소식이라니 괜히 반가웠다.
'줏대 없는 새끼...'
한 번 쓴 숨을 내뱉은 이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뭐야? 이세진 벌써 가?"
이세진은 씩 웃고 술집 문을 열었다. 여전히 뒤에선 소리가 웅웅 울렸다.
겨우 문 하나 나선 것뿐인데, 술집을 나온 이세진의 귀는 어두운 적막에 잠겼다. 시끄럽고 밝은 곳에 익숙해져 있던 감각이 점차 이세진을 외딴 섬에 고립시키는 것만 같았다. 귀가 멀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말 내가 차원을 이동해 혼자 동떨어진 세상 속에 온 건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 적막 속을 헤매듯 걷던 이세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으흑..."
바보 같게도 눈물이 자꾸만 비집고 나왔다. 이세진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조용히 그 울음을 삼켰다.
술집 문을 열자, 그 앞엔 박문대가 서 있었다. 놀랐는지 눈이 살짝 커진 그의 뒤로 그 애가 보였다. 이세진은 그 둘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이세진."
"그, 내가. ...그땐 말 못 했는데. ...정말 잘 어울려. 축하해, 박문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박문대가 다시 입을 꾹 눌러 닫았다. 이세진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고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병신 같아.'
이세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울음으로 보아 귀가 먼 것은 아닌 듯했다. 이세진은 그렇게 웅크린 채, 혼자 한 이별에 혼자 아파했다. 몇 년이 지나도록 그 혼자 이별 중이었다.
'문대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그 누구든... 다 잘 되기를 바랄게. 하지만, 널 나처럼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평생.'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처절한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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