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교환
화산귀환 백천 드림 / 로맨틱 타로 비밀 연애 / 3,264자
일 년에 한 번, 사매가 자리를 비울 때가 있다.
그게 일 년 중 어떤 날을 기점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은 시점의 일이었다. 별다른 이유나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백천은 백자 배의 대제자였고, 검이라곤 한 번 쥐어 본 적도 없을 것처럼 보드라운 손을 해놓고 화산을 올라온 백자 배 막내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 애가 소이현이기 때문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기보다는, 유달리 신경을 쓰고 보니 소이현이었던 적이 여럿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진금룡의 명성이 화산까지 밀려 들어온 날이었다. 매화 꽃잎 대신 날아온 종남 최고의 후지기수의 소문은 그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최선에 대해 단 한 번도 자만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확신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진금룡을 이기지 못했으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고 싶은 패배는 자괴감을 낳았고 자괴감은 잠들 수 없는 밤을 낳았으며 그날은, 특히나 잠이 오지 않았다. 칼로 깎아내려진 듯한 절벽 위에서 하염없이 달빛만을 올려다본 날이었다.
소이현은 그곳에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백천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사매가 아직 잠들지 않았구나. 왜 저기에 있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까. 타당한 의문들보다 먼저, 아, 작년에도 사매가 이렇게 서 있었지. 이맘때쯤이던가.
그날 백천은 자신이 소이현에 대해 한 가지를 알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소이현은 몇분가량 눈을 감고 가만히 그 상태로 있다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백천은 막내 사매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가 이유를 묻는 대신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소이현은 백천이 그를 보았다는 사실을 모른 듯했고, 백천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
기도는 매년 이어졌다. 날짜는 대체로 정확했지만, 시간은 자주 달라졌다. 일정이 있는 날이면 하루 이틀 정도 빨리하거나 미루는 날도 있는 것 같았다. 자리를 비우는 건 아주 잠시였고 공식적인 일정을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게을리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개인 수련과 의술 공부까지 마친 뒤에야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백천이 아닌 누구도 소이현에게 그런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이현아.”
새벽빛이 서늘하게 뺨 위로 굴러떨어지는 밤이었다. 의약당 안쪽은 아직도 환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괜히 주위를 어슬렁대며 사형제들에게 너희는 또 뭐 한다고 그 꼴이 돼서 의약당 사람들을 귀찮게 만드느냐, 수련도 적당히 해야지 맨날 몸을 깨부숴, 턱도 없는 잔소리를 하다가 위아래 없는 화산에서 그거 사숙이 하실 말씀 아니지 않습니까? 옳소! 청명이한테 대가리 깨진 횟수는 사형이 제일 많습니다! 말로 돌려받아 역정까지 낸 백천이 슬금슬금 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등불 아래 앉아 붕대를 정리하고 있던 소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사형.”
“밤이 늦었는데 자질 않고. 내일 곤할 텐데.”
“오늘 의약당에 손이 부족하다고 해서요. 이 붕대만 다 정리하고 저도 이만 자러 갈 거예요.”
“소소는?”
“소소는 저보다 일찍 나왔어서…… 더 있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이설 사고에게 끌려갔어요.”
“알 만하구나.”
혀를 차는 백천에게 웃어 보인 이현이 다시 붕대에 집중했다. 백천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그 옆에 붙어 앉았다. 소이현이 움찔했으나 그는 옆에 놓인 붕대에 묵묵히 손을 뻗어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사형?”
“같이 하자. 같이 하면 일찍 끝나겠지.”
“제가 혼자 해도 괜찮아요.”
“내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다.”
백천은 하얀 소이현의 뺨이 약간 짙어진 걸 확인했다. 붕대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한 번 헛손질을 했다. 그건 제법 기분이 고양되는 일이라, 백천은 모른 척 말을 늘어놓았다.
“어딜 가나 망둥이 같은 놈들이 있어서 말이다. 한 곳에 박혀 있을 것이지, 뭐 이리 제각각으로 퍼져 있는지. 하여튼 이놈의 사형제들은 도움이 된 적이 없다.”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소이현이 작게 웃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함께 있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정인 사이가 된 걸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대화 한마디 하는 것조차 신경 쓰였다. 단둘만 붙어 있어도 모자랄 시기에 매번 사형제들 틈바구니에 섞여야 하니, 눈짓으로 인사 나누며 한 번 웃고 그마저도 눈치 보며 아무것도 안 한 척 고개를 돌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청명이 같은 놈만 없더라면 좀 편할 것을. 한숨을 내쉬면서 붕대를 정리하던 백천이 흘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은 어둠에 파묻혀 희미한 빛만 내고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이런 시간이 더 소중하잖아요.”
황금빛이 어른어른 갈색 눈동자를 물들였다.
“저는 이것도 좋아요.”
이현이 다정하게 말했다. 약간 기울어진 고개 위로 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천은 숨을 뱉었다.
“……이것만 끝나면 바로 잔다고 했지?”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무것도 안 하고?”
“음, 뭘 해야 하나요?”
깜박이는 눈동자가 정말 의아해 보였다. 백천은 잠깐 고민했으나, 결국 다른 말로 얼버무리지 않고 대답했다.
“매번 하는 게 있었잖느냐.”
“네?”
“기도.”
이현의 얼굴에 약간의 당황이 차올랐다.
백천은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근래 일이 바빴으니까.”
백천은 소이현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소이현이 백천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듯이.
달빛 아래에서 무엇을 위해 기도했는지, 누구의 평온을 빌었는지도 알 수 없다. 캐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의 삶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듯이 그가 연모하는 사람의 삶에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터였다.
다만 그가 하고 싶은 것은,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순간 하고 싶었던 것은, 정인이 매년 거르지 않고 떠올렸던 무언가에 대해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현이에게 그 정도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면 백천에게도 충분히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일 테니.
“기도는 여럿이서 하는 것도 좋다고 하더라. 대상을 모르면서 하는 기도도 나쁘지 않지 않느냐?”
한참 침묵하던 이현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어렴풋한 달빛을 닮은 미소였다.
“도사가 그래도 될까요?”
“도사도 기도할 수 있지.”
“자연스러운 현상에 반하는 행위에 대한 기도인데도요?”
“장자께서도 처가 돌아가신 뒤 처음에는 슬펐다는데 우리는 뭐 어떻겠느냐. 장자께서도 이해하실 거다.”
“그럴까요?”
“그럴 거다.”
그러면 좋을 텐데.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백천은 눈을 감았다. 옆에서 머뭇거리던 기척이 조심스럽게 손을 모으는 게 느껴졌다. 달빛이 굴러떨어질 때마다 생각했다. 별, 달, 꽃, 순환, 자연, 이름 붙일 수 없는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평온하길.
그의 정인은 그가 평안히 만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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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 해석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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