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01_소설 타입
L님 커미션
─콜록.
선선한 가을이 싸늘한 겨울로 변모해 가는 이 구간에는 특히나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곤 한다. 모두가 엇비슷한 증상을 겪지만, 그 고통의 정도는 사람마다 판이하다. 누군가에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힘든 경험을 안기지만, 누군가에겐 날벌레가 얼굴에 들러붙는 정도의 귀찮음 정도로 그친다. 소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때는 난 이대로 죽나 보다 싶을 정도로 펄펄 끓는 열 기운에 정신을 못 차렸고 어떤 때는 그저 미각과 후각이 둔해져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정도의 불편감만 남았었다. 이 정도는 당시 컨디션에 따라, 내지는 그때마다 유행하는 바이러스의 종류에 따라 증상이 천차만별인데 올해는 질병관리청에서 따로 공지가 올라오지 않는 걸로 보아 관리만 잘 해주면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 정도에 해당하는 듯했다. 소냐는 레인과 좋은 관계를 쌓기 시작한 이후로 자기 관리를 조금씩 실천해 나갔다. 그래서인지 올해 겪은 환절기 때마다 무탈하게 넘겨올 수 있었고 11월 또한 쉬이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콜록, 콜록.
나한테는 사시사철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며 잔소리에 잔소리를 늘어놓더니만, 정작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논한 본인은 현재 독감으로 앓아누워있다.
“…레인, 괜찮아?”
“아니, 죽을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해도 쇳소리 섞인 목소리는 퍽 장난스러웠다. 일부러 가벼운 식으로 말해 제 걱정을 덜어내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러나, 소냐에게 그런 수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레인이 거주하는 집으로 달려가 곁에 있어 주고 싶은 소냐였다. 물론 이 생각을 절대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을 것이다. 레인은 머큐리 재단의 관리를 받는 유일의 후계자이다. 저보다 유능한 전문 간병인이 당연히 그를 돌보고 있겠지. 제가 방문한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간병에 방해만 되겠지. 결국 소냐는 휴대전화를 붙들고 제 방 안을 빙빙 돌며 그의 안부를 꼬치꼬치 캐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은 뭐라셔?”
“흔한 독감. 아니, 괜찮으니까 걱정 하지 마~”
“약은 먹었어? 열은 없고? 입맛이 없어도 밥은 잘 챙겨야….”
“소냐.”
레인은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며 부드럽게 그의 말을 끊어냈다. 그제서야 소냐도 아차 싶었던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너무 간섭이 심했나. 혹 귀찮았으면 어쩌지 싶은 마음에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나 그의 걱정과 다르게 갈라진 목소리는 여전하게도 다정했다.
“너무 보고 싶다.”
“으응…?”
예상치 못한 말에 소냐는 다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에 레인은 푸핫 소리를 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 기뻐.”
“…정말?”
“응, 정말로.”
그 말에 조금은 안도감이 들어 소냐는 빙글빙글 방안을 돌던 걸 멈추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내가 너무 걱정이 많아서 귀찮다고 느낄 줄 알았어.”
“오히려 귀찮다고 느낄 정도로 걱정해 주길 바라는데….”
“거짓말 하지 마…. 그런 걸 누가 좋아해.”
소냐는 레인이 자신을 위해 듣기 좋은 말을 들려주는 거라 여겼다. 그냥 싫으면 싫다고 말해줘도 괜찮은데…. 그래야 네가 싫어할 만한 짓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 하지 않겠는가. 레인은 대체로 자신이 무얼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좋은 식으로 받아줬고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제게 쓴소리 한 번 들려준 적이 없었다. 본래라면 기껍게 받아들여도 좋을 법한 일을 소냐는 감히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불안했다. 너무 오냐오냐 다 받아주니까. 그 때문에 제 버릇이 나빠질지도 모른단 사실은 차치하고 이따금 그의 괜찮다는 말이 정말 괜찮아서 나오는 말이 맞는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많았다. 이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하게 감언이설일 것을 확신하던 중, 레인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아픈 나를 이 정도로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상념에 잠겨가던 소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한 번도 없었다고?”
“응. 어릴 때부터 쭉….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 내 능력에는 관심을 보일지언정, 레인 그 자체에 애정을 가진 사람은 못 본 것 같아.”
꼭 그 말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로 느껴져 소냐는 쓰린 감을 느꼈다. 그 머큐리 재단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후계자로서 걸맞은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 그는 걱정 하나 없는 윤택한 삶뿐일 거라고 누군들 그리 여겼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그는 머큐리 재단의 후계자로서가 아닌 ‘레인’ 그 자체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바랐다. 어릴 적부터 쭉 갈망하던 애정을 넘치도록 맛보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또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 레인도 저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이는 세상에 태어나며 자연스럽게 새겨지는 본능과도 같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무미건조한지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결국 차오른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소냐는 훌쩍거렸다. 레인은 저도 모르게 소냐를 울려 버렸단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다. 당황한 레인은 핑 도는 현기증을 불사하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소냐. 왜 그래~ 난 괜찮아. 응? 그러니까 울지 마~”
지금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 말뿐이었다. 젠장…. 독감만 아니었어도 단숨에 달려가 나 정말 괜찮다며 그를 세게 끌어안아 줬을 것이다. 괜한 말을 내뱉고 말았단 생각에 자책감이 든 그는 제 이마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러던 중,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소냐가 답했다.
“레인,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으, 응?”
이번엔 레인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마음 같아선 당장에 달려가 끌어안고 입맞춰주고 싶어.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엉엉 우는 와중에도 자기 할 말 다 하는 소냐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것도 평소라면 부끄럽단 이유로 들려주지 않았을 말들을 이렇게 서슴없이 내뱉어주니, 기쁜 동시에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져 멋쩍은 얼굴이 됐다. 제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감기로 인한 열 때문인지 네 고백 때문인지 알 수가 없게 됐다. 그래도 말야…. 울지는 말자, 소냐. 난 네가 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보다 나로 인해 웃어주는 쪽이 더 좋아. 더없이 사랑스럽단 기분에 푹 잠긴 레인은 다시 제 자리에 누웠다.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오고 감기로 골이 왕왕 울리는 데도 기분이 좋다고 느꼈다.
“그럼, 다 나으면 실컷 해줄래?”
“응, 그렇게 할래….”
“하하, 기대된다. 열심히 노력해서 오늘 안에 나아야지.”
“바보…. 아픈 건 노력으로 어떻게 안 돼….”
“그건 해봐야 알지.”
실없는 소리를 내뱉던 레인은 곧 느리게 입을 다물었다. 짧은 간극. 레인은 아까부터 쭉 끓어올라 가슴을 간지럽히는 이 마음을 소냐에게 전하기로 했다.
“…좋아해, 소냐.”
레인의 말 속에 애정이 가득 담겨있단 것을 모르지 않는 소냐였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소냐 또한 눈물 젖은 얼굴로 웃으며 사랑스러운 그 말에 작게 답하였다.
“…나도 많이 좋아해, 레인.”
어느 겨울의 밤보다도 길게,
사무치는 그리움을 삼켜내며,
두 사람의 속삭임은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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