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글 4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지루함에 우열을 두기란 쉽지 않다. 특색없고 밋밋하여 아무런 가치도 매길 수 없기에 지루하다고 평하게 되는 거라면, 이 세상 시시한 것들은 하나같이 몰개성할 수밖에 없을 터. 어느 쪽이 더 시답잖고 무의미한지를 판별하는 건 공기를 저울에 달아보는 행위만큼이나 쓰잘데없다. 허망함에 제멋대로 값어치를 매긴다고 누가 그걸 사주기라도 할까. 그러니 어제와 오늘 중 어느 쪽이 더 지루하고 의미없는 하루인지 굳이 판단을 내릴 이유가 없다는 게 아사히나 마후유의 결론이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오늘이 좀 더 짜증난다고 생각한다. 그럴만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사히나 씨, 이렇게 말하면 갑작스럽겠지만, 좋아해! 예전부터 쭉 좋아해왔어.”

지루함에 우열을 두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불쾌함에는 나름 우열을 매길 수 있다. 이름도 모르는 상대가 흘끗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길로 쳐다보면서 지나가는 일은 상당히 불쾌한 일이다. 이름도 모르는 상대가 난데없이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고백을 하는 일은, 그보다도 불쾌한 일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도통 이해할 수가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불쾌함이라는 무게추가 하나 올려진 이상, 어제보다 오늘이 좀 더 끔찍한 하루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애였다. 평범한 정도가 지나쳐서 같은 예비교에 다닌다면서도 인상 하나 남지 않은 상대이기도 했다. 서로 간에 지금껏 어떤 접점이 있었는지 떠올릴 수도 없었으나, 그럼에도 이처럼 고백을 받은 게 우스운 일이었다. 뭐, 처음은 아니다. 대화 한 마디 나눈 적 없는 사이에 고백부터 하면서 마치 대단한 용기를 냈다며 스스로를 순정만화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상대를, 마후유는 이미 몇 차례 겪은 바 있었으니.

고백하는 방식도 조잡하고 불쾌했다. 쪽지로 불러내는 방식은 너무 구식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그렇게 해서는 무시당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예비교를 마치고 건물을 나가던 길에, 마후유는 난데없이 손목을 덥썩 붙들렸다. 잠시만, 시간 좀. 그렇게 말을 던지고서는, 자신의 행동이 무례하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는지 남자는 마후유를 건드렸던 손을 슬그머니 뒤로 물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니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눈치를 살피며 좋을대로 지껄이는 상대에게, 단답으로 ‘싫어’ 라고 끊어내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마땅히 해야할 말도 하지 못하는 채로 주변에 끌려다녀야만 한다는 게 아사히나 마후유의 비극이었다.

하여, 인근의 공원으로 장소를 옮긴 다음에 지리멸렬한 고백의 연장선이 이어진다. 혼자 열이 올라 벌겋게 변한 얼굴로 상대는 언제부터 마후유를 봐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필사적인 결심으로 오늘의 고백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늘어놓았다. 절박한 심경이란 점을 어필하면 상대가 감명이라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다소 어려워하는 듯 애매한 표정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마후유는 곤란하다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확실히 갑작스럽네. 그 이전에, 나는 그쪽의 이름도 모르는걸.”

“아, 그, 그게......”

그제서야 고백에 앞서 자기소개를 빼먹었다는 걸 깨닫고는, 남자애는 눈에 보이게 허둥대었다. 뒤늦게 이름을 밝히지만, 마후유는 굳이 그를 기억에 남기지는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워야만 하는 게 지나치게 많은 세상이었다. 지금도 버거운 뇌의 기억 영역에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이름을 새겨놓을 여유 따위 없었다.

“가, 갑자기 이렇게 말해서 당황스럽다는 거 알아. 나, 나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할 거고. 그치만, 그런 부분은 차차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해. 일단은, 내가 아사히나 씨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줬으면 좋겠어.”

“......”

살아가며 문제가 생겼을 경우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일련의 모범 답안을 마후유는 미리 생각해두는 편이었다. 자신이 멋대로 품고 있는 감정에 지나치게 극적인 가치를 매기려고 드는 인간을 상대할 때에는 정중하면서도 확실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게 적합한 해법이었다. 혹여나 앙심 품는 일이 없게, 적당히 다른 이유를 덧붙이는 걸 잊어서는 안되겠지. 학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집안이 엄격해서, 지금은 도저히 그럴 여유를 낼 수가 없어서. 자신이 못나서 거절당했다고 생각하지 않게끔 변명 삼을 거리를 하나 두고 빠져나오는 과정은, 무엇보다 간결해야만 했다. 대화가 질질 끌려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따라 깔끔한 해법을 선택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평소 이상으로 불쾌하기 때문에. 그렇게 마후유는 생각했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사귀게 된다면 뭐 어떤 걸 하고 싶은 거야? 연애라는 게 어떤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

“그건, 그거야, 일단 데이트겠지. 같이 영화를 보러 간다거나, 놀이공원에 함께 갈 수도 있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도 하고. 축제나 행사 같은 게 열릴 때 제대로 청춘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이런저런 추억들도 남기고, 그러다가 손도 잡고......”

“......후훗, 재밌네.”

“그, 그래. 이래 봬도 내가 제법 분위기를 잘 만드는 편이라......”

“그게 아니라, 차차 알아가는 게 전제라면 서로 대화를 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보다는, 즐거운 일들이 먼저인 모양이야.”

“그, 그건, 데이트를 하면서 대화는 당연히 하게 되는 거고......”

항변하듯 말을 하지만 남자는 이미 기가 꺾인 모습이었다. 일단은 웃는 얼굴을 내보이고는 있지만 소녀가 일방적인 고백에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지금쯤이면 눈치채는 게 정상이었다. 안될 거라는 걸 알면 포기하고 돌아서는 현명함이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남자는 과장되게 이를 악물더니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쉽게 꺾이지 않는 근성남’ 이란 자아에 취할 차례인 걸까.

“그게, 너무 부담 가지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만나보자고 말하려고 했던 거야.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시작하잖아.”

“다들 그렇게, 구나. 미안. 이런 쪽으로는 아는 바가 없어서. 단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 속내가 어떤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위험하지 않을지......”

“위험할 게 뭐가 있다고.”

“그래? 그럼 있잖아,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다고, 어제도 오늘도 아마도 내일도, 날마다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래?”

코를 건드리고 스쳐가는 가을 저녁의 바람이 서늘하다. 남자가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마후유가 별다르게 행동한 건 없었다. 그저 평소 의식적으로 초점을 유지하려고 신경 쓰던 눈에서 힘을 풀었을 뿐. 눈가의 근육이 나른해지며 보이게 되는 표정이, 그렇게도 무서운 걸까. 서늘한 눈길로 무표정해진 아사히나 마후유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거북할 정도로 생소한 모양이었다. 이조차도 잘 모르는 타인을 상대하는 중이니 최소한의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상태인 건데.

“......농담이야. 어쨌든, 이렇게 고백해준 마음은 고맙지만 지금은 누군가랑 교제할 생각이 없어. 하루하루가 바쁘기도 하고, 부모님이 그런 쪽에서 엄하시거든. 받아들이지 못해서, 미안해.”

“......”

“그럼, 먼저 가볼게. 조심해서 들어가.”

몸을 돌리는 순간 마후유는 예민하게 등 뒤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예전에는 거절의 말을 꺼냈음에도 갑자기 손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이 상대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다소 과격한 행동조차 순정이라는 이름 아래 용인될 거라고 착각하는 부류는 분명히 존재하고,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다. 정말로, 귀찮아. 미간을 옅게 찌푸리면서 아가씨는 걷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공원을 나설 때까지 뒤에 누군가가 따라붙는 기척은 없었다. 고백을 거절한 후폭풍은, 해봤자 예비교에서 자신을 노려보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하나 더 늘어나는 정도에서 그칠 듯 싶었다.

이기적일 정도로 일방적인 고백을 마후유는 여태껏 몇 차례나 경험했다. 꽃다발을 가지고 온 남자애도 있었고, 손으로 쓴 편지를 외교용 친서마냥 내미는 남자애도 있었다. 자기가 도대체 뭐가 부족하냐고 윽박지르는 남자애도 있었으며, 더 멋진 모습으로 다시 고백하겠다며 혼자 비장해지는 남자애도 있었다. 약간이나마 인상적이었던 건, 학교에서 궁도부 후배에게 고백을 받은 일이었다. 고백 자체는 그리 인상적인 구석은 없었다. 같은 여자애가 고백을 했다는 점과, 거절과 동시에 그 후배가 부활동을 그만두고 말았다는 이후의 전개가 인상적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자신과 사귀면 매일이 즐겁게끔 매번 색다른 이벤트를 열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들 중 누군가는 연인 사이여야만 남길 수 있을 추억으로 학창 시절을 꾸며주겠다고 하였다. 그들 중 누군가는 남부럽지 않은 한 쌍이란 이미지로 어디서든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들 중 누구도 아사히나 마후유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서 사랑을 선언하며 그 대가로 사랑을 원하다니 그보다 기이한 일도 없었다. 그들은 단지, 아사히나 마후유를 ‘필요’ 로 하였다. 자신들이 몽상하는 연애의 시나리오에 배역을 맡아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었다. 배우 후보 명단에서 상위권에 자리매김한 아사히나 마후유를 두고, 그런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멋대로 착각하는 인간들.

그런 식으로 시연되는 사랑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맡은 바 배역을 연기할 거라고 기대하고 캐스팅 된 배우는 주어진 대본을 따르도록 강요당한다. 예쁘고 상냥한 이상적인 연인으로 존재하기를- 데이트 때는 보기좋게 꾸미고 나오고, 항상 듣기 좋은 칭찬으로 대화를 장식하고, 어쩌다 조금 야한 일도 싫어하는 기색 없이 해주는, 그런 상대가 되기를. 그러다가 배우가 점차 역할과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한다고 생각이 들면 싫증내고 화내기 시작하는 거다. 종국에는 예정된 파국을 맞이하려나. 정말로 좋아했었는데, 따위의 가당찮은 문장이나 메신저의 상태 메세지로 걸어두고는.

사전에 쓰여있는 ‘사랑’ 이란 단어의 의미는, 그보다는 숭고한 걸로 묘사되고는 하지 않았던가. 그 대단하다는 사랑이 실은 이렇게나 초라한 개념인 건지, 아니면 주변 모두가 어설프게 사랑을 하는 척 시늉만을 하며 살아가는 건지. 굳이 동년배들의 연인 놀음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일방적으로 욕망하는 그대로 상대가 형편좋게 행동해주길 바라는 망집은 어디에든 존재하고, 하나같이 애정이란 이름으로 겉면을 치장한다. 그건 마주하고 있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인형을 아끼는 심정에 가깝겠지만.

“......”

내딛던 걸음을 멈춘다. 길 건너 의류 매장에서 틀어둔 시끄러운 유행가가 귓가에 닿는다. 그대는 그야말로 꿈 속의 그녀, 평생의 이상형이니 부디 연락처를 따내고 싶다는 가사가 요란스런 리듬을 타고 흘렀다. 운명이니 약속이니 하는 단어들이 최저가로 떨이하는 상품마냥 반복되어 튀어나왔다. 인기 절호조인 남성 아이돌 그룹의 신곡은 미야마스자카 여학원의 소녀들 사이에서도 언급되고는 했다.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상대가 첫눈에 반했다며 자기 앞에서 유난을 떨어대는 내용을 들으며, 그와 같은 상황을 몽상하며 황홀해하는 애들은 제법 되었다. 마후유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예비교를 마치고 나오는 길, 집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지도 없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선 다음 마중 나온 어머니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하는 흐름을, 마후유는 상상했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애에게 갑자기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면, 어머니는 입으로는 작게 웃으며 이마는 살짝 찌푸릴 게 분명했다. 또래 남자애들의 이목을 모을 수밖에 없게끔 어여쁜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감히 주제도 모르고 집적거린 놈의 존재는 불쾌하게 여기겠지. 뒤에 이어질 말은 뻔하다. 지금은 굳이 연애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단다. 나중에 충분히 조건을 갖춘 뒤에, 마후유에게 어울리는 멋진 상대를 만나면 되는 거야.

대답 또한 정해져 있다. 네, 어머니.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잠깐의 망설임 끝에 다시금 내딛은 걸음은, 집으로 향하는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뭐라고 거짓말하는 게 좋을지 마후유는 무덤덤하게 생각하였다.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귀가가 잠깐 늦어지는 점에 대해 변명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뜻밖에 고백을 받아서 당황하는 와중에 곁에 있던 친구가 도와줘서, 보답의 의미로 그 애와 잠깐 디저트 가게에 다녀왔어요- 정도면 될까. 상당한 거짓말 속에 약간의 진실을. 들키지는 않겠지.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대였다. 요이사키 가의 현관 앞 전등은 상태가 좋지 않은지 한두 차례 명멸하다가 반응이 없어졌다. 어둑하게 잠겨드는 그늘 속에서 마후유는 초인종을 눌렀다. 벽에 기대어 서서 붉은 기 하나 남지 않은 황혼 끝자락을 쳐다본다. 혹여나 어두워졌으니 데리러 가겠다는 연락이 올까 싶어 생각해뒀던 거짓말은 문자로 발송해뒀던 터였다. 답신은 진즉에 도착한 상태였다. 너무 늦지 않게 조심하라는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누구세요?”

“카나데, 나야.”

“마후유?”

현관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인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마후유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요이사키 카나데는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들어오라는 무언의 환영 속에 마후유는 요이사키 가로 발을 들였다. 안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고 굳이 묻지 않는 점이 카나데답다고 마후유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이렇게 경계심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그렇지는 않겠지. 조심스럽고 겁많은 소동물 같은 아이니까. 어쩌면, 자신만이 받는 특별 대접일지도.

“늦은 시간에 왔네. 통금은 괜찮아?”

“적당히 둘러댄 상태야. 그래도, 곧 돌아가긴 해야해.”

“그렇구나. 차를 끓일 시간은 없으려나. 일단 들......”

거실로 들어가자고 작게 손짓하는 그녀의 손목을 붙든다. 살며시 올려다보는 시선은, 그다지 놀란 기색 없이 차분하다. 그렇게, 잠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게 된 센서등이 조명을 끄고 주변에 어둠이 깔린다. 단절된 시야 속에서 조금 전보다 많은 걸 느낀다. 신발장을 두고 있는 현관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텁텁한 먼지 내음과 가죽 재질 특유의 마감질된 냄새. 광원이 없어졌음에도 어째서인지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듯한 길고 긴 은빛의 머리카락. 침묵 속에서 점차 또렷하게 들리는 서로의 숨소리. 나지막하게 내쉬고, 살며시 들이쉬고, 다시금 내쉬고.

이 순간 호흡하고 있음을 생경하게 깨닫는다. 평소에는 그 당연한 사실을 체감할 여유조차 없었다. 어째서 이토록 초조하게 서두르며 살아야만 하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누군가가 원하는 바에 따라 일상을 보냈으니. 소녀는 이해하였다. 자신은 호흡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거라고.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숨을 가다듬을 최소한의 틈새를 절실하게 원하여 그녀를 만나러 온 거라고.

“......카나데.”

“응.”

이름을 부르면 대답이 돌아와서 그에 안심하게 된다. 마후유 자신의 체온이 조금 더 높은 탓일까. 손목을 붙들며 닿은 카나데의 몸이 다소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나처럼 따뜻하다. 카나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온기는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모처럼 찾아든 어둠이 지워지길 원치 않아,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마후유는 카나데에게로 다가갔다. 유지되는 적막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내쉬고, 들이쉬고, 잠시 멈췄다가, 길게 내쉬고.

“있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다고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면, 카나데는 어떻게 할 거야?”

알고 있다. 이건 협박도 되지 못하는 칭얼거림일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보다 세련되게 표현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어린애가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막무가내로 울음을 터뜨리는 꼴과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말해버린다. 지금 이 순간 같은 어둠을 공유하고 있는 너라면 억지에 불과한 말에 어울려줄 거라고 멋대로 기대하고 있기에. 그렇게나 유치한 형태로 기대감을 품어도 괜찮을 거라고, 믿고 있기에.

어둠 속에서 올라온 손이 뺨을 어루만진다. 서늘하지만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부러 표독함을 위장하고 있었더라도 이처럼 상냥한 손길 앞에서는 누구라도 유순해질 거라 생각이 들었다. 마후유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시야를 반납하고 나면, 살갗이 맞닿는 감각이 한층 선명해졌다. 매만지는 손길에 맞춰 숨을 내쉰다. 내쉬고, 들이쉬고, 그리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짓고.

“이야기를 들을 거야. 마후유가 어째서 그렇게 느끼게 되었는지, 알아야만 하니까.”

“알게 된다면?”

“할 수 있다면, 더는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분명, 그리 간단하지 않겠지. 미숙한 나로서는 아직은 손이 닿지 않은 일들도 많을 거고. 그러니까, 내가 해낼 수 있을 때까지......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마후유에게 부탁할 거야.”

“......후후, 여전하구나.”

이미 몇 차례나 반복해서 주고받았던 대화였다. 그럼에도 지금의 대화가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금 당장 바뀌는 게 없더라도 전해지는 말들이 위안이 되어준다면, 변함없는 약속이 안심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준다면 그걸로도 의미는 생겨난다.

“......실망스러운 답이지?”

“딱히. 카나데답구나,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구나. 저기, 마후유.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괜찮다면, 들어줄게.”

아하하, 작게 웃는 소리는 마후유 자신의 것이다. 새가 노래하듯 웃으면서 마후유는 카나데를 끌어안았다. 움직임을 읽은 센서가 눈치없게 공간을 밝히지만, 살포시 감은 눈은 그들만의 어둠을 지켜준다. 안온함 속에서 너의 체온을, 존재를 느낀다. 한껏 맡을 수 있는 너의 향기가 애달플 정도로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쉴새없이 입에 올리는 사랑 따위 조금도 관심 없다. 고무줄보다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운명의 붉은 실로 도대체 무엇을 묶을 수 있을까. 주변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사랑을 하게 된다면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면서, 허황된 기대감을 채우기 위해 훗날의 눈물을 대가로 지불하는 건 자해와 다름없겠지. 지루한 삶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대안으로 선택하는 사랑이란, 결국 언제나의 시시함으로 수렴하게 되리라.

필요로 하는 건, 살아가면서 시시하고 재미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토록 지루한 사연을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의 존재인 거다. 하등 의미도 없을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찌꺼기처럼 남겨진 감정을 이해해준다. 그로 인해 굴곡점 없이 밋밋한 생활 속에서 잠시나마 숨을 돌릴 간격을 만들어주는 상대.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 속에 희미한 위안을 얻고, 함께하는 시간 동안 쌓이고 쌓인 다정함의 추억이 등불이 되어 걸어온 인생을 밝힌다.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희망이란 원래 실낱같은 법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궁에서 겁내지 않고 다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그래, 그럼 들어줄래. 오늘, 엄청 시시한 일이 하나 있었어.”

운을 떼고는, 아사히나 마후유는 옅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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