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 이빨선생한테 선택받으면 구원받는다 (2023.07.07)
[이빨선생한테 친절당하면 저주받는다]와 내용이 이어집니다. 완결은 아닌데 다음편은 없습니다. 드랍.
박무현은 처음 들린 오피온에서 왜 이런 고문과 심문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해량은 "10초만 더 버티십시오."라고 말하면서 플랭크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박무현의 단말마를 쥐어짜 내고 있었고, 그 옆에서 서지혁은 박무현의 일거수일투족을 물어보면서 안 그래도 힘들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십, 십…"
"예? 저희 팀장님 십X끼요?"
"십, 헉, 초 안 지났어요?"
처음 멀쩡했던 자세는 많이 흐트러져 무릎이 바닥에 닿으려고 했다. 이미 플랭크 자세라고도 부를 수 없는 절망적인 떨림을 보고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 같다"며 자기 집 안방처럼 누워있는 김재희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신해량의 한마디에 박무현은 저항 없이 철퍼덕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토해냈다. 목이 따가운지 연신 기침하는 모습을 보며 서지혁이 "치과선생님, 왕년에 운동 좀 했다는 거 거짓말이죠?"라고 놀려댔다. 박무현은 한참 동안 서지혁의 놀림에도 대꾸하지 못하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신, 헉, 팀장님."
"네, 박무현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혹시, 저한테, 허억, 서운한 거 있습니까?"
"없습니다."
신해량은 단정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박무현은 믿지 않고 자신의 죄를 돌아보았다.
"전에 있었던 엔지니어 가팀 회식 때 제가 혹시 실수 했나요?"
원래는 신해량과 서지혁의 퇴사 때문에 잡은 회식이 재계약으로 인해 퇴사 취소 기념 회식으로 이름이 바뀌어 박무현과 김가영, 유금이도 초대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겸사겸사 서지혁 덕분에 박무현을 향한 괴상한 소문이 마침표를 찍은 기념이기도 했다. 서지혁은 내기에서 진 것보다 "두 번씩이나 이 거지 같은 해저기지에 버려지다니이"하고 울부짖었더랬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이유는 엔지니어들은 교대근무이고, 박무현은 평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근무이니 엔지니어 가팀 전원과 시간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 그렇다고 신해량과 단둘이 만날 정도로 친하냐고 묻는다면 박무현은 대답하지 못할 것이므로 자연스레 다 함께 모였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신해량이 아니라면 팀원에게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딥블루에 강제로 찾아오는 환자들이 신해량 캐새키를 수없이 외친다지만 박무현은 신해량이라는 인간이 자기 팀원들을 아끼는 책임감 있는 상사라는 정도의 인식은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실수하신 일은 없습니다."
"근데...왜...왜..."
박무현이 누워서 신해량을 올려다보며 거짓말에 속아 보호자 손에 치과로 끌려온 아이처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데도 여전히 신해량의 하관이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드디어 뇌로 산소가 조금씩 공급되는 기분이 들었다.
"일반 성인 남성 기준으로 기초 수준의 운동이었지만." 박무현이 울컥한 표정을 짓자 재빨리 덧붙였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따라오셨습니다." 그러고는 조금 따라 하는가 싶더니 힘들다며 금방 포기해 버린 김재희를 보며 눈을 흘겼다.
쉬고 있던 김재희는 신해량과 눈도 안 마주치고 박무현에게 물병을 건네주며 근처에 자리 잡았다. 박무현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다음 운동은 조금 더 조절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마시던 물을 기침과 함께 조금 뱉어냈다.
"다음이요? 다음이 또 있습니까? 저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 슬금슬금 네발로 기어가더라도 여기를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렸으나 서지혁에게 붙잡히자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참참, 선생님. 그래서 아까 저희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사토색…아니 나팀 팀장이 뭐라고 말했다고요?"
"예? 제가 그런 말을 했나요?"
"팀장님. 우리 치과선생님 스쿼트 추가하신답니다. 우리 선생님은 운동할 때만 이야기가 술술 잘 풀리지 말입니다."
"아니, 지혁씨... 아무리 내기에서 지셨다지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혁씨가 퇴사 못 한 건 제 탓이 아니에요."
"에이, 알고말고요. 다 저희 팀장님 탓이죠. 저는 저주보다 저희 팀장님이 더 무섭습니다. 아니면 설마 제가 그렇게 쪼잔한 남자로 보이셨습니까?" 박무현이 잠시 망설였다. "대답이 늦으시네요. 저기 유금이 연구원이 하는 러닝머신 추가." 그러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이고, 아닙니다. 아니에요."
"흑흑, 저 너무 억울합니다. 이게 다 선생님을 생각해서 이러는 건데 제 마음도 모르고."
서지혁은 없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스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짜식아. 박무현의 표정을 읽으며 서지혁이 웃었다. 이야, 우리 팀장님 말이 진짜네.
"요즘 사람들이 선생님께 과도하게 친절하지 않습니까? 아까 이민 권유도 받으셨다고 그랬고요."
"예? 제가 그것도 얘기했어요? 언제요?"
박무현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쩐지 사람이 힘들어 죽겠는데 옆에서 혼을 쏙 빼놓고 이것저것 말을 걸더라니! 처음에는 가벼운 질문들만 했고 체력에 여유가 있던 터라 어느 정도 기억이 나지만 (박무현이 주장하기로는) 하드코어 트레이닝으로 인해 기억의 일부가 날아가 버렸다. 그냥 솔직하게 묻지 왜 사람을 괴롭히냐는 말이 턱 끝에서 겨우 멈추었다.
"선생님. 해와 바람과 나그네라는 동화 아시죠?"
"해와 바람이 내기를 해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이야기요?"
"강력한 외압이 아닌 따뜻한 마음씨가 이긴다는 교훈이었죠?"
운동이 끝난 유금이가 한국인들이 모여있는 게 신경 쓰였는지 근처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신해량이 있기 때문인지 주변에 있는 운동기구들이 비어있었다.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바로 그 나그네입니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요. 이번 내기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무현의 등이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좀 더 길게 설명해 주세요!"
* * *
시간을 거슬러보자. 얼마나? 박무현이 "신해량 팀장님.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라는 말로 붉은 산호로 엔지니어 가팀 팀장을 호출했던 어느 날의 점심시간으로.
박무현에게 신해량이란 시내 한복판에 앉아서 얼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돈 받아먹을 정도로 잘생긴 한국인 남성이지만 동시에 치과에서 고용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먹으로 불법 발치를 강행하는 바람에 각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의 발음으로 씬해량 캐새키를 딥블루에서 듣게 만드는 원흉이자, 자신에게 강제로 환자를 늘려 월급쟁이 치과의사의 업무를 과중시키는 이빨 강도였다.
그의 자자한 소문이나 명성과 달리 자신에게는 제법 유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폭력적인 행태를 묵인하기에는 고작 1인으로 운영되고 있는 심해 3000m 아래의 해저기지의 유일한 치과의사 박무현의 노동강도와 피로는 인내심의 끝자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박무현이 다짜고짜 누군가의 멱살을 잡을 위인은 아니었다. 박무현은 붉은 산호에서 커피까지 내주며 테이블에 신해량을 앉히고 신해량 팀장님, 이라는 서두로 당신이 강냉이 추수를 그만해야지 환자들도 살고 박무현 자신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정중하게 전했다. 신해량 팀장이 듣는 둥 마는 둥 하면 어쩌지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그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았고, 중간에 말을 끊고 끼어들지도 않은 선량하고 모범적인 자세로 경청하였으나 끝끝내 불법 발치를 그만두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고 말을 돌려가며 대한도로 보내는 방법으로 그의 업무량을 줄여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발언으로 박무현을 경악시키고 얌전히 돌아갔다.
그게 설마 붉은 산호에 있던 사람들의 입을 타고 해저기지 익명 사이트에 [엔지니어 가팀 팀장이 이빨선생한테 약점 잡혔대!]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시작으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박무현이 반박했다.
"제가 신해량씨에게 커피를 사주고, 제가 곧 업무 과중으로 쓰러지겠다고 하소연한 게 어떻게 약점을 잡은 게 되죠?!"
박무현은 억울했다. 엔지니어 가팀의 회식에 참여하면서 그가 소문만큼 무서운 사람도 아니고 제법 상식도 있으며 자기 팀원들과 한국인에게는 유하다는 사실을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업무 과다로 인해 눈이 돌아간 박무현도 당시의 신해량은 무서웠다. 혹시라도 자가 치료가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치과의사의 치아도 노리고 있을까 봐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그를 불러 조곤조곤 하소연한 일이 그런 식으로 와전되었단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희 팀장님이 얌전하게 치과선생님한테 불려 가서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고 조용히 돌아갔는데 그런 소문쯤이야 날 수도 있죠."
그러나 서지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바람에 박무현은 자신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해저기지와 그놈의 익명게시판을 속으로 저주해야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서지혁의 이야기에 장작은 자신이 준비한 게 아니었으나 불을 지핀 것은 자신의 무지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에는 신해량이 박무현에게 약점이 잡혔다는 소문이 조금 사그라들 때쯤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번 장소는 딥블루가 되시겠다.
박무현은 이제 익숙한 시간에 백호동에서 출발해 딥블루로 출근했다. 그리고 보았다. 분명 자신이 어제 퇴근할 때는 없었던 종이가방이 딥블루 휴게실 테이블에 존재감을 뽐내며 놓여있었다. 분명 제대로 문을 잠근 것까지 확인했는데 대체 누가 어느 틈에 이런 걸 가져다 놓은 거지? 확인을 위해 종이가방에서 내용물을 꺼냈더니 손바닥만 한 벨벳 상자가 들어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새하얀 카드가 먼저 보였다. 그러나 카드에는 한국어로 박무현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쓰여있고, 짧은 문장이 외국어로 쓰여있었으나 영어가 아니라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테두리는 금박에 사과 모양을 하고 있는 주황색 보석을 품은 목걸이를 발견했다.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보석에 박무현은 카드를 다시 집어넣고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종이가방에 그대로 넣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보안팀 사람을 찾아가 누군가 문이 닫혀있는 딥블루에 몰래 고가의 보석으로 추정되는 것을 두고 갔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보안팀 직원은 당신의 이름이 쓰여있고, 선물인 거 같다며 귀찮다는 듯이 박무현에게 분실물로 등록해 줄 수 없다는 말을 전하며 그대로 돌려보냈다.
"흑흑 그때 선생님이 그런 행동을 하시기 전에 저희한테 이야기만 하셨어도…"
서지혁이 또다시 대놓고 우는 척을 하며 박무현의 속을 긁었다. 지혁아, 형 서운해지려고 그래. 그러나 박무현은 지은 죄가 있어서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보석이 든 가방을 다시 딥블루로 가지고 온 박무현은 김가영에게 배웠던 기억을 토대로 익명 게시판에 게시글을 썼다. 어느 정도 해저기지에 익숙해진 우리의 치과의사는 괜히 고가의 보석 이야기를 했다가 제가 보석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잔뜩 찾아올까 봐 간단하게 딥블루에 분실물을 가지고 가라는 짧은 메시지와 영어가 아닌 자신이 모르는 외국어로 쓰인 카드의 문구를 패드로 찍어 함께 게시물을 올렸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추어서 예약 환자를 확인하고 호출하고 치료하는 동안 그 보석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두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딥블루로 찾아온 신해량과 서지혁 그리고 백애영은 익명 게시판에 올린 분실물이 무엇인지 확인하더니 자신들이 조사하겠다며 가지고 가버렸다. 물론 자신의 패드를 강탈하듯 가지고 가 게시물을 삭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박무현은 내심 고가의 물건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게 많이 불편했던 터라 엔지니어 가팀이 가지고 간다고 했을 때 좋아한 것도 잠시, 딥블루 휴게실에서 신해량 팀장에게 붙잡혀 혼이 났다.
박무현 선생님. 문이 잠긴 딥블루에 괴한이 침입하여 수상한 물건을 두고 갔을 때는 함부로 열어보지 마시고 곧바로 저나 지혁이 혹은 애영이한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보석에 무슨 장치를 해두었을 수도 있고, 보석은 미끼이고 딥블루 내에 위험한 짓을 했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보석이 아니라 상자 자체에 위험한 게 있을 수도 있고 선생님의 지문을 이용하려는 누군가의 수작일 수도 있고 그 외에도 해저기지 내에 위험한 물건을 반입하여 인체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등등 위험한 이야기로 박무현에게 겁을 주기도 하고 살살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해저기지 익명 게시판에 이런 게시물을 올리는 것도 상대에게 위험을 노출할 수도 있고 괜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다른 일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경고를 했다. 박무현은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 다음번에 같은 일이 생기면 열어보지도 않고 바로 알리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그리고 잊어버릴 때쯤 백애영이 찾아와 보석이 든 가방을 다시 돌려주었다. 백애영의 말로는 정상현을 시켜 CCTV를 털어보았지만 용의주도한 범인이 미리 손을 쓴 거 같다고 말했다. 수상한 지문도 나오지 않았고 딥블루를 포함한 보석과 상자까지 함께 조사했지만 도청기라던가 수상한 장치는 없었다고 전했다. 박무현은 그때 신해량의 조언을 잊지 않고 딥블루 내 없어진 물건이 없는지 열심히 찾다가 오히려 벽 내에 숨겨진 비밀 서랍만 몇 개 더 발견한 게 전부였다.
박무현은 내심 이게 누군가의 고생스러운 질 나쁜 장난이길 바라며 보석은 가짜냐고 물었으나 백애영은 진짜라고 말했다. 심지어 겉에 사과 모양마저 진짜 금이라고. 정확한 금액은 감정을 맡겨야겠으나 상당한 고가로 보인다고. 박무현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이걸 백호동에 있는 자신의 숙소에 놔두기 싫었던 박무현은 새로 발견한 벽 내에 숨겨진 비밀 서랍에 숨겨두었다. 제발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재주도 좋은 범인이 다시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후 서지혁에게 들은 말로는 카드에 적힌 문구는 그리스어로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 선택받으면 구원받는다'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박무현이 찾아간 보안팀이 게시판에 입을 털었는지 치과의사가 황금사과 모양의 보석을 손에 쥐었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물론 서지혁이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해서 게시물은 삭제시켰다고 말했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보았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제 마음대로 익명 게시판에 올린 게 왜 위험한지 저번에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는데요. 그거랑 제 소문이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서지혁이 끌끌 혀를 차며 질문했다.
"선생님! 트로이 전쟁이 왜 일어난 줄 아시죠?"
"어어? 네?"
박무현이 머릿속으로 어릴 적에 보았던 만화책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유금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세 여신들이 황금사과를 가지고 경쟁을 했고, 그 선택을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가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레네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비였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오, 정답입니다. 유금이 학생한테 가산점 10점."
서로 티키타카하고 있는 서지혁과 유금이를 보면서 박무현은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옆에서 실실 웃고 있던 재희가 돌연 박무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박무현의 가까이에 몸을 숙이고 말했다.
"저를 선택하세요, 구원자님."
"네에?"
박무현이 기겁하며 손을 빼려고 하자 박무현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히듯 쥐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저를 선택하시면…음 드릴 건 없지만, 제 방에 있는 거 아무거나 다 드셔도 돼요."
"무슨…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 구원자라는 호칭은 그만하라고 저번에도 분명…"
"그렇지만 무현씨한테 선택받으면 구원받는다고 벌써 소문이 자자한걸요. 게다가 무현씨 옆에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어요. 이 재미없는 해저기지에 있으면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무현씨가 온 뒤로는 늘 재미있는 일투성이에요. 그러니 저를 선택해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남한테 구원받는 삶이 좋아요. 그러면서 옆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가득해서 지루할 틈이 없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무현씨가 제 구원자시죠."
박무현이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낼수록 김재희도 점점 다가왔지만, 다행히 신해량이 김재희의 목덜미를 쥐고 잡아당기자 힘없이 떨어졌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쉼과 동시에 서지혁이 불쌍한 눈빛으로 박무현을 바라보았다.
"뭐 대충 이런 상황입니다."
"좀 더 길게 설명해 주세요!"
이전에 이미 [이빨선생한테 친절당하면 저주받는다]는 소문을 겪은 박무현은 해저기지 내에 또다시 [이빨선생한테 선택받으면 구원받는다]는 소문이 그놈의 해저기지 익명 게시판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믿기 힘든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빨선생…아니 치과선생님께 선택받으면 구원받는다는 소문이요. 아마 황금사과 모양의 목걸이나 카드에 적힌 문구로 누가 장난을 친 거 같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그냥 장난으로 넘길 수준이었죠. 그런데요, 선생님. 만약 내기의 판을 키우고 싶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 거 같습니까?"
"음…내기에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니까… 돈?"
박무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지혁은 손가락을 딱 소리 나도록 부딪히며 정답을 말했다. 정답을 맞혔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액수가 어느 정도인가요?"
"그게 산정이 안 됩니다. 어떤 미친놈'들'이 여러 보석을 내기에 판돈으로 올린 겁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박무현에게 황금사과 보석을 쥐여준 것처럼 내기를 끌어내기 위해 고가의 보석들을 걸었단다.
"우연이 아니군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흥이 오르다 보니 다른 곳에서도 오만가지 상품이 나오면서 수습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당사자인 제 의견은요?"
박무현은 자신은 이런 내기에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어필을 할까 생각했으나…
"만약 이 내기가 무산되면 눈 돌아간 미친놈들한테 헤드록 걸려서 선생님 죽을걸요?"
…빠르게 기각했다.
"그런데 정확하게 제가 '선택'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선생님은 소문 때문인지 아무도 안 건드리려고 하잖아요. 저주받을까 봐."
"아…그 소문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가요?"
슬슬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다고 박무현이 아쉬워했다.
박무현은 모르고 있지만 저주와 관련된 소문에 신해량도 약간의 책임이 있었다. 신해량이 소문을 이용해서 마침 필요한 증거인멸을 시도하기 위해 다른 팀의 물건을 잃어버리게 만들거나 고장 내거나 없애버리면서 소문에 일조했고 그 결과 박무현은 신해량때문에 더러워서 안 건드리는 한국인이 아니라 건드리면 저주받는 불길한 아이템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특히 엔지니어 나팀에 효과가 좋았기에 신해량은 내심 만족했다. 다만 문제는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소문이 퍼지자 오히려 이때의 과장된 소문이 새로운 소문에 힘을 실은 것이다. 물론 신해량이 어쩌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의 경험담이나 조작할 수 없는 꿈 때문이라도 결국 이 소문은 애초에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지만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박무현에게는 계속 모르게 할 생각이지만.
"그러다 보니까 선생님께는 협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게 핵심입니다. 벌써 다른 팀이 선생님께 접근했다면서요? 좋은 선물을 주려고 한다던가, 이민 권유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거요. 지금은 눈치를 보고 있지만 조만간 데이트네 뭐네 선생님을 더 적극적으로 꼬시려고 할 겁니다."
"에이, 저 같은 아저씨를 왜…"
박무현은 힐끔 신해량을 쳐다보았다. 차라리 저런 잘생긴 사람을 꼬시는 거면 몰라도. 신해량이 곧바로 눈을 마주치자 박무현은 제 발 저리듯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단물만 쏙 빼고 도망가세요.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주는 거 다 받아먹으시고 입 싹 닦으시죠."
박무현이 당황했다. 이미 김가영과 유금이 그리고 백애영에게 해저기지 내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러다가 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거 아니에요?"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무현이 배신감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지혁아?
"그리고! 마지막에 저희 팀장님을 선택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우리 팀장님 약점을 잡았다는 소문이 아직도 유효하더라고요. 다들 우리 팀장님이랑 치과선생님이 사이가 나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물 쏙 빼먹고 마지막에 우리 팀장님을 선택해서 다른 녀석들 엿도 먹이고, 우리 팀장님이 선생님을 지켜주고, 저랑 애영이도 내기에서 이겨서 배당금 잔뜩 챙기고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인가? 아무튼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합시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해와 바람 이야기에서 왜 해가 이겼겠습니까? 태양처럼 눈 부신 외모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 줄 황금사과? 당연히 우리 팀장님이죠! 괜히 미의 여신이 내기에서 이긴 게 아니라 이 말입니다!"
박무현은 서지혁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말을 들으며 신해량을 쳐다보았다. 대충 눈빛으로 '이 녀석 빨리 치워라'는 메시지를 담으면서.
"지혁이는 제가 나중에…슬리퍼로 두들겨 놓겠습니다."
"예? 폭력은 안 됩니다. 지혁씨가 때릴 때가 어디 있다고…아니, 사람은 원래 때리면 안 됩니다."
신해량의 근육들을 한번 확인한 박무현이 기겁했다. 저 팔근육으로 맞으면 슬리퍼가 아니라 푹신한 쿠션도 엄청난 무기가 될 게 뻔했기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서지혁이 자신의 상사와 치과선생님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김재희는 또 뭐가 웃긴지 박무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파! 아프다고, 재희야!
"…방금 건 농담이었습니다."
박무현은 믿지 않았지만 '일단 그런 거로 해두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혁이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네?"
"저를 선택하시면…" 신해량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미친. 박무현은 신해량의 미소에 그가 나를 선택하면 후회하지 않게 해준다고 말했는지, 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협박했는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마 트로이의 왕자도 저런 아름다운 미의 신을 보았다면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을까? 그저 짐작해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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