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님네 스칼렛가

[베인사쿠] 재회

베인이 다난으로 돌아옵니다.


오랜만에 티르네코일로 돌아와 던컨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촌장의 집으로 향하던 사쿠야 스칼렛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처음보는 누군가가 던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일레흐 왕국에 속하지 않는 자치구인 티르코네일은 폐쇄적이라면 폐쇄적인 곳이라, 마을 구성원이 변하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은 차치하고, 처음보는 자의 얼굴,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그 청년의 얼굴은 사쿠야 스칼렛이 잘 알고 있는 이와 지나치게 닮아있었다.

"사쿠야 스칼렛 아닌가! 오랜만이군. 그간 별일 없었나? 풍문으로는 이번에도 제법 고생했다고 전해들었네만."
"아, 네. 그렇게까지 별일은...그런데 촌장님, 이쪽은?"

던컨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대꾸하며 사쿠야 스칼렛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금한 것을 물었다. 던컨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래, 자네가 돌아온 것도 오랜만이니 처음보는 얼굴이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청년을 소개했다.

" 원래 벨바스트 출신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로 이주해온 지는 꽤 되었다네. 베인이라고 한다네, 케이틴의 가게 아랫쪽에서 살아. 베인, 이쪽은 사쿠야 스칼렛이라네. 워낙 유명하니 자네도 이름은 들어봤을 것 같군."
" 소문의 밀레시안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베인이라고 합니다."
"...사쿠야 스칼렛이라고 해."

사쿠야 스칼렛은 목구멍 너머로 차오르는 비명이 터져나오지 않도록 간신히 짧게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청년은 분명히 '그'였다.  어떠한 예감이 분명히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순박한 웃음이라든가, 당연한 듯 입에 올리는 경어같은 것, 멀쩡하게 빛을 내며 이쪽을 바라보는 두 개의 잿빛 눈동자 따위가 분명히 그와 다르다는 걸 말하고 있었지만 사쿠야 스칼렛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발로르 베임네크였다.

"사쿠야 스칼렛, 표정이 안 좋네. 여정이 많이 고되었나?"
"네...그랬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촌장님. 저는 좀 쉬어야할 것 같아요..."
"그래, 들어가서 얼른 쉬게나. 딜리스에게 들리지 않아도 괜찮겠나?"
"네, 조금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천진하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청년의 모습에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다시 만나길 바랐지만, 이런 걸 바라지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라니. 사쿠야 스칼렛에게 쉴새 없이 상처를 주었지만, 무뎌져 익숙해진 문장이 사랑하는 이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낯설고 괴로운 것이 되었다. 사쿠야 스칼렛은 당장 어디론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에 처박히고 싶어져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뒤에서 사쿠야 스칼렛님-하고 불러왔지만 무시하며 어디로 가야하지, 어디로 가야 혼자 있을 수 있지, 어디로 가야...고민하다가 결계 너머 시드스넷타에 당도했을 때에서야 무너져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인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도 괴로운 문장이었던가. 하지만, 같은 영혼이라도 그 모든 것을, 함께 했던 순간들을 잊어버린 그는 그가 아니지 않나? 사쿠야 스칼렛이 사랑했던 그는 영영 그때 사라져버리고 만 것일까?

차라리 그때, 함께 사라질 수 있었다면.

"그대."

그러니까, 그 부름도 환청같은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울지 말아, 그대."

언젠가 닿았던 갑주의 차가움이 아니라, 평범한 다난의 따뜻한 손등이었지만 뺨에 닿은 온기는 현실임을 자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괴로워할 줄은 몰랐어...하지만 기껍기도 해. 한 번쯤은 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대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 같아."

순박한 웃음이 나른한 웃음으로, 자연스러운 경어가 익숙한 말투로, 낯설었던 호칭이 그리워했던 호칭으로.

그 일순의 변화에, 눈물에 젖은 얼굴의 사쿠야 스칼렛은 날 것의 심정을 곧이곧대로 내뱉었다.

"나는 너 때문에 늘 괴로웠어, 이 개자식아."
"내가 없어도 늘 내 생각을 했나? 영광이군. 그래."

베인이 엄지손가락으로 사쿠야 스칼렛의 눈가를 훔쳤다.

"너 뭐야?"
"종족을 묻는다면 투 아하 데 다난이려나."
"그게 가능해?"
"가능했으니 내가 그대 앞에 이리 서 있는 거 아니겠나."

베인이 미미하게 웃으며 사쿠야 스칼렛을 일으켜세웠다.

"그분의 자비인지, 또 다른 굴레인지는 알 수가 없어...하지만 적어도, 그대와 꿈결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누가, 누가 너랑 같이 있어준데?"
"사랑하는 나의 그대."

마음이 없어졌다면, 그리 서글픈 표정을 짓지 말았어야지. 그대를 상처입히는 말을 했을 때, 숨이 막히는 듯한 얼굴을 하지 말았어야지.

"나는 식료품점 아래에 있는 집에서 살고 있어. 제법 넓고, 창으로 볕도 잘 들어와. 그대가 가진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 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함께 살아주게."

어째서인지 투아하 데 다난의 몸으로 눈을 떴을 때, 베인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눈부시게 빛나고, 함께 있기를 갈망했으면서도 너무나 지치고 바래왔던 일이라, 공멸조차 할 수 없었던 그의 밀레시안을 생각했다. 기억이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 보통 다난들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잊지도 않는다. 이 어그러진 낙원에서 치명상을 입지 않는 한, 낙원의 끝까지 그는 생이 끊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끝이 사쿠야 스칼렛의 끝이기도 할테니,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꿈결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함께 공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상냥한 그의 밀레시안이 선택했던 답변대로.

"...거미줄....나 대신 거미줄 하루에 삼백개씩 주워주면 생각해볼게."
"나는 양털채집도 제법 잘한다네. 쓸만하지 않나?"

베인이 미소를 지으며 사쿠야 스칼렛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사쿠야 스칼렛이 그 손을 잡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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