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you

[도윤이안] Coram Deo! 3

약속만 지켜준다면,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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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의 수확에 대해 말해보자면, 서도윤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구속을 풀지도 못했고 빌어먹을 예언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수 년 만에 성당의 문을 연 이는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 신기루 같은 희망을 좇아 온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심지어 신에게 기도하는 짓거리도 하지 않는단다. 꿈에서나 그리던 상황에 간신히 도달했는데 무엇 하나 서도윤의 생각대로 흘러간 것이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서도윤은 실패했다. 아주 단단히 망했다. 신성력에 구속된 상황에서 있는 힘껏 능력을 쥐어짜 팔을 호전시켜주었더니 정작 바이올리니스트는 구속을 푸는 법을 몰라 허공이나 휘젓지 않았던가. 그 은색 눈동자에 드러나던 당혹감이 아직도 선명했다. 성당에 맴도는 푸른 신성력을 반사해 새파랗게 빛나던 은빛 눈동자. 성당에 발을 디딜 때만 해도 악바리로 버티는 기색이 선연하던, 그러나 한순간에 개화하는 꽃처럼 또렷이 피어나던…….


"……."


홀로 남아 성당의 단상에 걸터 앉은 서도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깨진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별빛이 그의 팔다리를 타고 얽혀왔다. 해가 떠 있을 때만큼의 속박은 아니었으나 그를 성당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빛이었다. 역겹도록 징그럽고, 지긋지긋하도록 아름다웠다. 그는 늘어지는 구속의 빛을 보았다가 충동적으로 팔을 긁었다. 보통의 인간을 상회하는 힘이 살갗을 찢어냈다. 손톱자국을 따라 피가 터져 나왔으나 별빛은 유유히 그의 팔뚝을 기어다녔다. 여태까지의 수 년과 마찬가지였다. 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무엇도. 그는 여전히 구속된 채였다. 이 성당과 신성력에,

그리고 빛에,
이 소름 돋게 찬란한 빛에.

조바심이 불러온 살욕이 목구멍 너머에서 들끓었다. 사나운 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구속을 먼저 풀게 했어야 했어. 그 뒤에 팔을 치료했어야 했어. 강렬한 후회와 초조함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었다. 왜 난 그러지 않았지? 만약 이대로 그것이 성당에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이대로 난 버려지나? 다시 총아가 찾아올 때까지 빛에 매달려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야 하나?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시체처럼?

우두둑, 팔이 부러졌다. 서도윤은 무덤덤한 눈동자로 팔을 고쳤다. 뼈가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원래의 형태로 돌아온 팔은 서도윤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였다. 손을 쥐었다 펴는 것도, 손가락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움직이는 것도 수월했다. 반마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부러졌었던 팔을 다시 점검해보더니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몇 시간 전의 풍경이 떠올랐다. 서도윤의 힘을 거쳤음에도 총아의 팔은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총아의 팔을 망가뜨린 '그것'은 구속된 반마의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타락한 자 그 자체인 아버지라면 모를까, 반쪽짜리인 서도윤으로서는 그게 한계였다. 서도윤도 그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고려해도 생각보다 회복이 더뎠다. 움직임은 여전히 형편없었고 의식하지 않으면 바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래서 혹여 실망한 총아가 마음을 거두고 황도로 향할까 조마조마 했었는데. 총아는 마치 기적이라도 목도한 것처럼 기뻐했다. 마치 제 스스로 빛내는 듯한 눈을 하고서, 몇 번이나 팔을 움직였다.

그때의 기분을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한순간이나마 저를 옥죈 구속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뿜어내는 순수한 기쁨에 동요했다. 빛에 수 년 동안 구속된 주제에 총아의 눈에서 반짝이는 생기를 홀린 듯 쳐다보았다. 할 말도 잊어버리고 바보 같이 동조해서는 해야 할 협박도 저만치 밀어버린 채 마치 간청하듯 구속에 대해 입에 올렸다. '내가 구속되었다는 거 기억하지?'는 무슨. 서도윤이 한숨을 토해내며 단상에 드러누웠다.

성당의 천장은 질릴 만치 똑같았다. 서도윤은 이미 수 천 번 더듬은 천장의 무늬를 따라 눈을 굴렸다가 어느 새 제가 다시 바이올리니스트의 인영을 덧그리고 있음을 깨닫고 그냥 눈을 감았다.

내일 그게 돌아오기나 하면 다행이지.

그러나 서도윤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차이안은 다음 날 오후쯤이 되어서 성당으로 돌아왔다. 약속을 모르는 척 하는 철면피는 아니라서. 그리 말한 이안은 다시 벽에 매달린 서도윤을 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구속을 푸는 데 신성력이 필요해? 제 존재 자체가 구속을 푸는 열쇠임을 모르는 총아의 질문에 서도윤은 목구멍까지 치민 한숨을 참아냈다. 그것이 안도인지 막막함인지 서도윤 본인도 알 수 없었다.


*


총아와 만난 지 2주째, 서도윤은 심각했다. 사실 차이안, 총아가 아닌 거 아냐? 내가 착각했나? 신관이 성당에 친 신성마법이 오래 된 것이라 기능을 잃었다거나, 알고 보니 차이안이 어마어마한 신관의 싹이라 신성마법을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거나. 생각이 빙빙 돌았으나 결국 '차이안은 신의 총아가 맞다'로 귀결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신성마법이 기능을 잃었다면 애진작 마을 사람들이 여기로 올라와 낡아빠진 성당을 밀어버렸을 테고, 차이안에게 대단한 신관의 자질이 있었다면 치유신관의 힘을 쐬었을 때 각성했을 테니까. 그러니 차이안은 신의 총아가 맞았다. 맞는데….


"대체 왜 아무것도 못하는 거지?"


차이안은 정말로 '아무것도' 못했다. 구속을 해지하기는커녕 서도윤의 팔다리를 꿰뚫은 빛줄기를 만지지도 못했다. 서도윤은 구속을 잡아보라는 제 말에 차이안이 지었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양 떨떠름해지던 낯. …이게 잡을 수 있는 거라고? 그리 말하며 허공을 만지듯 휘적이던 그 손을 보았을 땐, 정말이지 구속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구속을 해지하지 못한 죄를 물어 차이안을 꿀꺽 잡아먹지 않은 게 서도윤의 이성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차이안도 답답해 보이긴 마찬가지였으나 아무렴 저보다 답답하진 않겠지. 인간의 음식을 먹은 지 오래 되었는데 구황작물이라도 한 가득 씹어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진짜 잡아먹을까. 총아의 피로 목구멍을 적시면 구속이 자연스레 풀리게 될까. 서도윤이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외려 차이안이 실패하는 날이 쌓일수록 총아를 향한 살욕이 점차 덩치를 키웠다. 요즘엔 그것이 특히나 더 심해져, 총아가 성당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살의를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어차피 죽일 건데.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자며 의견을 늘어놓는 차이안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제 구속이 풀리면 누구보다 먼저 총아를 죽여 감히 저를 구속한 신관과 신에 대한 복수를 하자고, 총아를 만나기 전부터 다짐했던 나날이 아른거렸다. 팔만 한 번 휘두르면 끝이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다. 어차피 죽일 거, 총아의 피로 구속 해지를 시도해 보자.

진전 없는 나날이 장작으로 화해 반마의 충동을 불태웠다. 우르릉, 우르르―. 때마침 천둥이 울부짖어, 오전부터 흐리던 하늘을 구름으로 덮었다. 빛이 약해지며 그가 성당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디선가 물냄새가 났다. 비가 올 것이다. 하늘이 쏟아내는 것이니 구속되어 힘을 잃은 반마에겐 성수나 다를 바 없었다. 서도윤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사람을 죽이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이기도 했다. 그래, 죽이자. 죽여버리자! 만약 이것으로 구속이 풀린다면 자유의 몸이 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다시 몇 년을 기다려서…….

끼이익. 성당의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돌아본 서도윤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이 저 죽을 날인 줄 모르는 총아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짊어진 채 성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비가 올 것 같네. 총아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비 오는 날은 바이올린 소리가 조금 다르거든.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가져왔어. 거래긴 했지만 덕분에 팔이 꽤 호전됐으니까. 덜컹, 바이올린 케이스가 성당 의자 위에 놓였다. 용케 부서지지 않고 바이올린의 무게를 떠받드는 의자 덕분에 총아는 여유로이 바이올린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총아가 은빛 눈동자를 길게 접어 웃으며 반마를 보았다.


"원하는 곡 있어?"


은색 홍채가 거울처럼 반마를 비추었다. 멍청하고 바보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어리석은 이. 구속된 자. 봉인된 자. 자유를 되찾길 하염없이 기다리다 증오와 원망, 간절함만을 움켜쥔 우자愚者.

원하는 곡 있냐고? 뭐 그딴 걸 묻지? 너는 곧 죽을 거야. 내가 널 죽일 거야. 네가 구속을 풀기까지 기다리기 지쳤어. 난 네 피로 구속을 풀길 시도할 거다. 실패하면 널 원망하면서 다음 총아를 기다릴 거야. 이 지긋지긋한 성당에서, 또 다시 홀로 기나긴 시간을 곱씹으면서, 먼지 냄새와 네 피냄새와 어쩌면 네 시체와 함께.

후회에 몸을 떨며.

반마가 삐걱이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나는 바이올린에 조예가 없는데."
"아. 그럼 내가 들려주고 싶은 걸로 연주할게. 팔이 온전치 않아서 소리가 좀 튀겠지만, 너와 만난 날부터 이 곡을 연습했거든."


총아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활을 올렸다. 활이 현 위에 서고 곧이어 맑은 소리가 울렸다. 예고 없이 흘러나온 소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성당을 꽉 채우다 못해 깨진 창 밖으로 흘러나갔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바이올린 소리를 깊게 공명시켜 어마어마한 밀도감을 만들었다. 공기가 떨렸다. 떨리는 것 같았다. 강렬한 음이 살갗을 두드려 서도윤을 휩쓸었다.

파도를 목도한 느낌이었다. 거대한 파도가 서도윤의 좁아터진 마음을 흠뻑 적셨다. 음이 바뀔 때마다 서도윤의 손끝이 움찔움찔 떨렸다. 반마는 이것이 어떤 기분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기묘했다. 몹시 울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웃고 싶었다. 여전히 부상이 남아있는 왼팔로 인해 소리가 어긋나는 순간도 있었으나 그것 또한 연주의 일부분이었다. 이 순간의 차이안이기에 할 수 있는 연주였다.

한 악장의 마지막 순간, 가늘게 이어지는 음을 끝으로 차이안이 활을 내렸다. 그 소리의 공백을 빗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대체 언제부터 비가 내렸지? 서도윤이 멍한 표정으로 창 밖을 보자 차이안도 그쪽으로 짧게 시선을 주었다. 비 오네. 고작 세 음절의 말이었다. 그러나 서도윤은 마치 홀린 것처럼 대답했다. 그러게. 그 대답에 차이안이 자신 있게 씩 웃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네 구속을 풀고 팔이 완전히 나으면 다시 연주해줄게. 황실의 제1바이올리니스트가 이 정도 실력이라 생각하면 곤란해서 말이야."


그러더니 불시에 두 번째 악장이 시작되었다. 자유롭게 현 위를 노니는 활을 보며 서도윤은 제 속에 들끓던 살심이 모조리 지워진 것을 느꼈다. 어떤 증오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갈증을 불러 일으키던 분노도, 원망도, 초조함도 모든 게 씻겨나갔다. 텅 비어버린 마음에 남은 것은 완전하지 않은 빗속의 바이올린 소리와 팔이 나으면 다시 연주해주겠다는 차이안의 약속뿐이었다. 전에 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들임에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서도윤의 안에 자리 잡았다. 평온했다. 구속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언제 풀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서도윤은 자기자신이 이미 완전해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서도윤은 차이안을 죽이길 포기했다. 그래, 그것은 포기였다. 어쩌면 차이안은 구속을 푸는 데 실패할지도 모르고 서도윤은 결국 수 년의 세월을 다시 곱씹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것은 서도윤에게 있어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으나 제 안을 새로이 채운 것들을 버리는 게 더 두려웠다. 기나긴 기다림과 고통 끝에 겨우 얻은 평온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설령 마지막 순간이 도래해 서도윤에게 선택을 종용할지라도, 이 약속만 지켜진다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이안."
"왜?"
"다시 들려주겠다는 약속, 끝까지 지켜."


나직한 목소리에 이안이 맑게 웃었다. 그래! 확답을 들은 서도윤이 눈을 내리감았다.

이거면 되었다, 정말로.
이것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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