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Coram Deo! 2
사랑 받는 자의 눈
그는 오래 기다렸다.
빛에 꿰여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곱씹었다. 오늘은 올까. 내일은 올까. 모레는, 그 다음은. 처음엔 오지 않기를 바랐고 몇 년이 지났을 쯤엔 차라리 빨리 와 예언을 이루어내길 기다렸다. 그렇게 한 달, 반 년, 3년…. 모든 바람이 다 썩어 문드러져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 생존 욕구만 남은 것은, 겨울을 헤아리길 포기한 어느 밤이었다.
별이 쏟아질 듯한 밤, 태어난 죄로 구속된 이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뺨이 젖어들어도 아랑곳 않은 채 그가 소리쳤다.
내가 너의 딸아들을 죽여주마. 너의 총아는 네 사랑을 받은 죄로 죽을 것이다!
*
쓰러진 이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떨어져 죽었나? 차이안은 잠시 주춤하다가 그것에게로 다가갔다. 먼지투성이 바닥에 엎어진 그것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빛이 꿰뚫었던 손으로 깨진 타일을 짚고 마치 짐승처럼 상체를 구부려 느리게 들어올렸다. 까각, 까드득. 그것의 몸뚱이 아래서 뭉개진 흙 부스러기가 타일에 긁혀 신음했다. 유리잔에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불쾌감을 일으키는 소음에 차이안의 미간이 움찔 찌푸려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천천히 상체를 세운 그것이 무심한 눈으로 차이안을 훑었다. 먼지 속을 굴렀음에도 깨끗한 몸이 성당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그것의 거대한 몸이 성당에 깔리기 시작한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가만히 서서 차이안을 응시하던 그림자가 성큼 다가왔다. 고작 한 걸음이었을 뿐인데 차이안은 가까이서 깨진 유리가 밟히는 소리를 들었다. 자그락. 그림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바로 머리 위에서, 가까이서. 나직한 숨소리가 안개처럼 흐무러졌다. 차이안은 암적응을 기다리며 그림자에게 귀를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스치는 소리, 숨소리, 옷 스치는 소리, 그리고 정적. 차이안은 들리지 않는 이를 파악하는 방법을 몰랐다. 부러 자극하지 않으려 그가 침묵을 유지하자, 그림자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답을 못 들었는데."
그림자가 느리게 문장을 뱉었다. 차이안이 어둠 속에서 시선을 올렸다. 어둠에 완전히 덮인 얼굴 너머 목소리가 울렸다. 낮고, 짐승 같다. 그림자가 다시 물었다.
"네가 총아인가?"
그 순간, 무언가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성당이 밝아졌다. 저 멀리 단상에서부터 벽에 걸린 등이 켜지는 게 보였다. 탁, 탁, 탁, 연한 푸른빛―차이안은 이것이 신성의 빛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이 순식간에 성당 내부를 밝혔다. 그림자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의 강렬한 감정은 온데간데 없이, 그것은 무관심에 가까운 시선으로 차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흔적을 찾는 것처럼 차이안의 몸을 훑던 잿빛 눈동자는 결국 그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거듭해서 마주치는 시선을 똑바로 받아치며 차이안이 답했다.
"신실한 신도를 찾는 거라면 잘못 봤어. 나는 신에게 기도하는 짓은 안 하거든."
"그래? 그럼 여긴 왜 왔지?"
보통 사람은 여길 올 생각을 안 하는데. 마치 비밀을 건네듯 그것이 느릿느릿 속삭였다. 무심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온 이유를 정확히 말해주기 전까진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한 눈이었다. 차이안은 혀를 차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왼팔을 들어올렸다. 더 이상 붕대를 감지는 않지만, 여전히 제 기능을 못하는 왼팔이 성당의 불빛 아래 푸르스름하게 드러났다. 그것의 시선이 왼팔로 스르르 옮겨갔다가 다시 이안과 시선을 맞추었다. 더 정확히. 단어가 그것의 입에서 반쯤 짓이겨져 나왔다. 들짐승의 목울음이 어렴풋이 들리는 가운데, 차이안이 왼팔의 소매를 걷어붙였다.
"내 팔을 치료할 치유신관을 찾고 있어. 황도에서는 못 찾았지."
"아, 황도의 귀족이셨군. 황도에서도 못 찾은 치유신관을, 여기서 왜?"
"여기가 마지막이었어. 여기서도 치료할 힌트를 찾아내지 못하면 황도로 돌아갈 생각이야."
"아. 그래…."
문장의 끝음이 훅 낮아졌다. 가깝게 붙은 숨결이 느적느적 웃었다. 등불의 푸른 그림자가 달라붙은 그것의 얼굴에서 기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림처럼 매끄럽게 미소 지은 그것이 상냥한 어조로 속삭였다. 기이한 섬뜩함에 물러서려던 차이안을, 붙잡아 당기는 말을.
"잘 됐네. 그 팔, 내가 고칠 수 있을 것 같거든."
*
그것이 스스로를 소개하길, 서도윤이라 했다. 이건 아명이야. 진명이 따로 있긴 하지만… 네가 알 필요는 없지. 부서질 것 같은 성당 의자에 걸터 앉아 서도윤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림 같던 미소가 싹 사라진 얼굴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뭉툭히 깎여나간 듯 보였다. 차이안은 그런 서도윤을 훑어보았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정보를 요구하는 되물음에 서도윤이 몇 가지 정보를 더 늘어놓았다. 네게 물었듯, 나는 '신의 총아'를 기다리고 있다. 신관들에게 붙잡혀 이곳에 구속 된 지 8년이 넘었으며, 네가 총아가 아니어도 좋으니 내 구속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가벼운 설명이었으나 몇 가지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차이안이 눈가를 움찔 하더니 한 단어를 콕 집었다.
"구속?"
"황도의 치유신관도 두 손 든 걸 고칠 수 있다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지."
서도윤이 발 끝을 까딱였다. 그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렁이더니 불길한 소음을 냈다. 쇠가 부딪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긁히는 것 같기도 했다. 얼핏 비명처럼 들렸으며, 짐승의 헐떡임으로도 들렸다. 본능을 일깨우는 소리에 차이안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불길한 것이다. 신성하지 못한 것이다. 삿된 것이다. 사교도들의 주인 되는 자이며 동시에 어떤 노예보다 더 아래에 있는 자다. 종교재판의 대상, 척결해야 하는 악마, 풀려나선 안 되는 것.
"나는 탄생의 죄를 입어 이곳에 매달렸어. 나의 아버지는 신관들에 의해 죽었고, 나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해 나를 낳았다는 죄로 재판 받아 불탔지. 나의 진명은 이단자의 명단에 새겨졌고…, 그들은 나를 타락한 자의 아들이라 부르던데. 혹은……."
"반마半魔."
"그래, 반마."
반마라니.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눈 앞까지 어른거리던 희망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불을 삼킨 듯 속이 뜨거워져 되는 대로 소리치고 싶었다. 나를 이런 일에 엮지 마. 반마라니. 연관되기만 해도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살아있는 죄악이다. 차이안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과 별개로 제국에서 신의 이름은 곧 선善 그 자체이므로, 제국에서 살아가려면 감히 삿된 것과 얽혀서는 안 되었다. 팔을 치료하더라도 반마의 도움을 받아 나았다는 게 밝혀지면 아예 팔을 내어주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그러면 차라리 운이 좋은 것이다. 사교도로 몰린 이는 화형대에 서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차이안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자 반마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차이안의 생각이 뻔하다는 양 상체를 뒤로 기울이더니 자세를 느슨하게 고쳤다.
"이제 와서 반마와 엮이는 게 무서워? 미안하지만, 이안, 네가 이 성당에 발 디딘 순간부터 넌 나와 엮인 거나 다름 없어."
"뭐?"
"내가 매달린 뒤 이 성당은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넌 들어왔잖아, 그것도 네 발로."
반마의 손끝이 제 발을 가리키자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강하게 요동쳤다. 왈칵 토해내고 싶기도 했고 전부 삼켜버리고 싶기도 했다. 희망인가, 절망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서 차이안은 제 왼팔을 내려다봤다. 황도의 치유신관조차 포기한 팔이다. 제국의 제대로 된 신전 혹은 성당은 이곳이 마지막이었으며 황도로 돌아간다 한들 나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팔을, 눈앞의 반마가 고쳐주겠다 속삭였다. 넌 이미 저와 엮였으니 순순히 팔을 치료하라고. 내가 네 희망이 되어주겠다고. 차이안은 자문했다.
내가 바이올린을 포기할 수 있나?
서도윤이 손을 뻗었다. 이안이 손 뻗으면 닿을 위치에 멈춘 손가락이 성당의 빛으로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팔을 고쳐줄게. 내 구속을 풀어줘."
그 손끝을 보며 차이안은 이미 마음이 기울었음을 인정했다. 망설임은 짧았다. 팔을 잃은 바이올리니스트가 왼손을 뻗어 마지막 희망을 붙잡았다. 마주 잡은 손은 생각보다 뜨거웠고 '사람' 같이 느껴졌다. 그 온기를 느끼며 차이안이 자조했다.
내가 바이올린을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맞잡은 손에서 빛이 터졌다. 종교 서약의 한 장면처럼 차이안의 왼팔을 타고 올라간 빛은 당연하다는 듯 그의 팔에 스몄다. 동시에, 이안은 왼팔이 전보다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반응이 곧장 돌아왔다. 반마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는데도 팔꿈치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목을 돌려봐도 걸리는 느낌이 없었으며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말도 안 돼. 이안이 주춤거리며 한 발 물러섰다. 맞닿았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강하게 번뜩이던 빛은 사라졌지만 차이안의 눈은 왼팔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사고 이후 빛이 들 줄 모르던 은빛 눈동자가 생기로 반짝였다. 그 찬란한 눈동자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반마가 입을 다물었다.
"다 나은 거야?"
"…아니. 다 나았으면 좋았겠지만 이 이상은 무리야, 이안. 내가 구속되었다는 거 기억하지?"
"아."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속을 풀어줘야지.
*
다음 날 새벽, 여관으로 돌아온 차이안은 언제고 다시 켜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집어들었다. 여관 주인을 깨우지 않게 밖으로 나선 그는 수 개월 만에 활을 기울였다. 수 개월을 쉬었음에도 바이올린을 켜는 자세가 버릇처럼 몸에 붙었다. 익숙한 자세로 서서 그는 기억 속 마지막 곡을 연주했다.
연주는 엉망이었다. 비브라토가 약했고 섬세하던 음 컨트롤은 다 흐트러졌다. 그의 장기나 다름없던 화려한 기교도 디테일한 감정표현도 삐죽삐죽 날 선 채 튀어나왔다. 모든 것이 예전만 못했다. 전성기였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엉망진창인 연주가 한 악장을 채우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쏟아지는 음 속에서 차이안은 스스로의 연주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이것은 이류도 못 된다. 확신할 수 있다. 자신의 귀는, 자신의 재능은 스스로의 음악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듣는 것에 뛰어났으니까. 다른 이들이 들었다면 천재의 몰락이라며 비웃을지도 모르는 연주였다.
그러나 모든 악장이 끝난 뒤, 활을 내린 차이안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오른손이 활을 떨어뜨렸다. 심장이 쿵쿵 뛰고 숨이 터져나왔다. 참지 못하고 헐떡인 차이안이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네 개의 긴 악장이 끝났음에도 그의 왼손은 단단히 바이올린을 쥐고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 정말로, 이거면 되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가 몰아쳐 그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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