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불꽃

상실의 계절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만난 적이 있다.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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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컾 공식 서사 외전

(C)떨리고설레다 2023


-제국, 동부 대공 로딘 카미로사가 황제의 관을 쓴 지 한 달째.

이사도라 세스가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했고, 기존의 부패와 탐욕에 찌들은 대귀족들은 모조리 숙청당했다. 그러나 철옹성에도 쥐새끼 드나들 구멍은 있다. 엄격하게 집행되는 제국의 법에도 하나의 빠져나갈 수단이 존재했으니, 임신한 여자와 그 남편의 처벌은 출산 때까지 보류한다는 규정이 그것이었다.

바로 이 규정 탓에 나이젤 엘티아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자택에 억류된 동안 무슨 수를 썼는지 달아난 것이다. 그의 외국인 아내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캐스티아에 있는 셀리에의 친정은 두 사람에게 훌륭한 피난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류피나 공작가는 서둘러, 그러나 자연스럽게 혼인 무효를 통보했다. 나이젤은 캐스티아에서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움직여야만 했다. 갓 태어난 어린 딸자식도 마찬가지였다. 셀리에는 딱 엘티아의 권력을 사랑했던 만큼만 두 사람을 사랑했다. 류피나는 어떻게든 딸의 수치의 흔적을 치우고 싶어했다.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존재하기 위해 엘티아는 엘티어스가 되었다. 그래서 아이의 성은 엘티어스였고, 이름은 지젤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궁금해하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은 이사도라가 딸을 낳거든 붙이고 싶어했던 이름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이젤 엘티아는 전 혼약자와 그런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을 이미 잊어버렸다. 단지 애엄마가 아기 이름을 붙이기 싫어했고,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 하필 지젤이었을 뿐이었다.

각설하고, 류피나에게 외면받은 나이젤과 지젤 엘티어스가 정착한 곳은 결국 카르타헤나의 뒷골목이었다. 국가도 법도 없이, 오직 돈과 무력만이 전부인 세계. 태양빛 한 점 들지 않는다는 암흑가에서도 가장 깊은 곳. 심연의 끝자락에 두 사람 들어갈 자리 정도는 다행히도,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일종의 길드에서 아비는 회계를 하고 딸은 잔심부름을 맡았다. 그러고 살았다.


상실의 계절

Good Old Days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그녀의 남편을 죽였지, 말하면서 아버지는 폭소했다. 내 인생을 망가뜨린 죗값으로 그 여자의 삶에도 벌주었지. 이것은 아버지의 술버릇이었다. 수십 번도 더, 아버지가 술에 취할 때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 기델타에서 만든 인맥을 끌어모아 이루어낸, 아버지의 무용담은 늘 같은 문장으로 끝났다. 개인적인 복수는 고귀하지 않다지만은, 더는 귀족도 아니게 된 가문에 어떤 영광이 남았겠느냐!

아버지의 복수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직 스무 해도 못 살았다지만 나는 내 삶을 좋아했고,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은 안중 밖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여자를 만난 목적은 복수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원수, 아버지의 가문을 망하게 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아버지의 전 혼약자, 그러니까 어쩌면 내 어머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이기도 했다. 그저 그 얼굴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남부 캐스티아, 항구 도시 팔레스타. 유명한 휴양지라 귀족을 대상으로 한 호텔 따위가 많았다. 아무래도 호텔이다 보니 귀족의 저택보다는 경비가 덜 삼엄했고 그래서 몰래 들어오거나 경비병을 매수하기도 비교적 수월했다.

"훌륭한 암살자구나."

온실에서 마주친 여자는 그닥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황한 쪽은 오히려 나였다. 내가 대꾸했다.

"암살자 아닌데."

이사도라 세스는 목과 소매의 레이스를 제외하면 장식이랄 게 없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높게 틀어올린 머리카락에는 보석 하나 없었지만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우아한 미인이었다. 얌전히 의자에 앉아, 우수에 젖은 눈동자가 처연하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와, 장난 아니다. 절로 튀어나오는 감탄사를 삼키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아버지보다 두어 살 어리다 했으니 마흔 언저리일 테고, 조금만 있으면 손주를 볼 수도 있는 나이다. 확실히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눈가와 목의 주름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나 그것마저 포함해서 아름다웠다. 시간의 풍화가 오히려 그녀의 예술성을 완성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본 기델타의 아줌마들은 하나도 저렇지 않던데. 역시 돈의 힘인가, 까지 갔다가 그만두었다. 굳이 주변에서 찾지 않더라도 공작 같은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의 남편을 죽였다는 아버지의 주장을 기억했다. 이사도라 세스는 죽은 남편 이외에 다른 사내를 부군으로 맞지 않았다 했다. 그러면 저 검은색 옷차림은 상복일까. 문득 저 아름다운 여자가 평생을 바쳐 그리워하는 남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넌…."

이사도라는 제 잔을 내려놓고 장갑의 검은 레이스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차림에서 새하얀 피부만 홀로 눈에 띄었다. 

"너와 닮은 사람을 알고 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조금 치켜들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색소 옅은 금발과 노란 눈이 불빛 아래 잘 드러나도록. 나이젤 엘티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넌 나이젤의 딸이구나.

"지젤이야."

내가 대꾸했다. 지젤 엘티아. 이사도라가 되읊었다. 엘티아가 아니라 엘티어스었으나, 성씨를 고쳐 말하는 실수는 물론 저지르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굴러먹은 16년짜리 짬밥은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다.

"지젤…."

그게 그녀가 좋아하는 이름임을 알게 된 일은 조금 나중 이야기다. 내 이름을 듣고 그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버지와 나눈 추억 속 대화를 상기했을까, 옛 연인의 작명에 담긴 의도를 추측하며 묘한 향취에 젖었을까. 하지만 별로 인생에 중요한 정보는 아니라, 깊이 생각하려 들지는 않았다.

"확실히 네 부모를 닮았군. 특히 그 콧대…."

나는 무의식적으로 코를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내 코는 좀 예뻤다. 작고, 매끄럽고, 오똑하고…. 어머니 같다며 내 얼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도, 이것만큼은 잘 물려받았다 인정하곤 했다. 이사도라가 덧붙였다. 셀리에는 자기 코를 마음에 들어 했지.

"우리 어머니도 알아?"

"셀리에 류피나와는 아카데미 동기였다."

"그렇구나."

왠지 부러웠다. 내가 모르는 내 부모의 모습을 본 여자. 특히 내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어머니의 과거를 이사도라 세스는 알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얘기, 더 해 줄 수 있어?"

"셀리에가 캐스티아로 돌아간 이후는 모른다."

"그래…."

"그 전이라도 괜찮다면."

"진짜?"

"하지만 나는 네 엄마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괜찮아."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갓 태어난 나까지 버린 여자, 뭔가 기대하는 바는 당연히 없다. 이사도라는 찻잔을 가볍게 쥐었다가 도로 놓았다. 건포도 쿠키를 집어들다 말고 나를 보며 권했다.

"그전에 좀 앉지 그러니?"

"경비가 오면 빨리 도망쳐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거야."

"정말?"

"부르려면 진작에 그랬겠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맞은편 의자를 빼어 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순식간에 내 앞에 잔이 차려지고 차가 담겼다. 이사도라 세스는 시녀도 없이 직접 테이블을 세팅했다. 남에게 나를 보일 순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쩐지 놀라웠다. 귀족들도 자기 손으로 뭔가를 할 줄 아는구나.

"이럼 두 명이 있었단 게 티가 나잖아."

"하나를 깨뜨리면 된다."

무심한 대답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치였다. 거기에 더 말을 얹을 순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정체 모를 불그스름한 찻물은 조금 씁쓸했다. 싸구려 홍차에도 각설탕을 다섯 개씩 넣어 먹는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설탕은 없는지 물어보려다가 불청객 주제에 바라는 게 많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대신 과자 접시로 눈을 돌렸다. 크랜베리와 건포도 쿠키에는 손댄 흔적이 있는데 초코칩이 박힌 것만 그대로였다. 이사도라 세스는 초콜릿을 싫어하는 걸까? 접시로 팔을 뻗었지만 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느껴져 머쓱했다. 나는 슬쩍 손을 거두었다.

"먹어도 돼?"

이사도라 세스는 대답 대신 접시를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양심껏 가장 작은 과자를 집어들었다. 너 다 먹어라, 이사도라가 고갯짓했다. 정말 괜찮아? 난 단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셀리에 류피나는, 하도 귀하게 커서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제게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지고 싶어했어. 나를 질투했다. 특히 나이젤 엘티아를 원했지. 아버지를? 내가 물었다. 이사도라가 웃었다.네 아버지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소년이었거든.

나이가 들면서 좀 변하긴 했어도, 되짚어 보면 젊을 적의 아버지는 제법 미형의 사내였던 듯했다. 거울로 보는 내 얼굴이 꽤나 괜찮은 것도 그렇고, 아버지와 밤을 보내려는 여자들이 집에 자주 찾아왔던 기억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중 하나가 엄마가 되어 줄까 싶었지만, 아버지가 가족을 만들려 들지 않았기에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보는 일은 없었다.

몇 번은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상대를 죽이러 가기도 했다. 주로 하룻밤의 일로 아이를 임신했다 주장하는 경우였다. 여자들은 엉엉 울면서 제발 살려 달라 바닥을 기었다. 일부는 아이를 가진 적 없다, 그저 아버지의 부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고백했다. 그 표정은 살기 위한 변명이라기보다는 진실 같아서. 얌전히 아버지의 말을 따르면서도 기분이 찝찝했다. 

우리 아버지는 한번 가정을 꾸려 벌써 나만한 딸이 있는데. 저 젊고 예쁜 언니들은 왜 이런 사내의 아내가 되고 싶었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뒷골목에서 꽤나 쓸모가 있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에게 빌붙으면 적어도 허기와 범죄 위협에 떨며 살지는 않아도 되었다.

아버지의 행동을 책임지셔야죠.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칼을 닦으며 내가 투덜거리면 아버지는 웃었다. 그래서 책임졌잖니. 그럼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셀리에는 괜히 툭툭 시비를 걸곤 했어."

이사도라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늘 나를 기숙사까지 에스코트했거든.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검은 머리를 학생답게 땋아 늘어뜨린 가냘픈 소녀와 훤칠하게 키가 큰, 찬란한 백금발의 소년. 태양과 달만큼 잘 어울렸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만큼. 낡은 극장 포스터에서 본 대리석 건물을 가져다 풍경을 완성했다. 완벽한 그림이었다. 당장 소설에 삽화로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겠다.

"그때 나는 셀리에를 싫어했어. 셀리에가 먼저 나를 미워했거든.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다 그러려니 싶다."

이사도라가 웃었다.

"거만한 여자들은 때로 그 성격 때문에 사랑스럽지."

셀리에 류피나는 멍청하고 거만해서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몰랐지만 바로 그 이유로 사랑스러웠어. 나는 얼굴을 붉혔다. 우리 엄마라고 그렇게 띄워 줄 필요는 없는데. 이사도라는 고개를 저었다. 진심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고마워. 나는 쿠키를 크게 한 입 베어물었다. 초코칩은 다 먹었고 벌써 세 개째 건포도였다. 빠르게 비워지는 접시를 내려다보다 이사도라는 물었다. 맛있니? 응. 더 줄까? 나는 조금 고민하다 대답했다. 괜찮아. 배부르면 나가기 힘들어.

"그리고, 리텔 언니를 살려 줘서 고마워."

"리텔?"

"아버지 말로는, 제국의 황녀였다는데."

아버지와 내가 오기 직전에 기델타에 맡겨진 아기라 했다. 웬 연주황 머리 여자가 와서는 애 이름은 리텔 로티에요, 하고 두고 갔댔다. 아무도 그녀의 출신을 몰랐지만 아버지만큼은 아니었다. 내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막 깨닫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내뱉은 말을 기억했다. 제국의 황녀야. 망한 왕조의 딸이구나. 그뿐이었다. 아무리 술을 마시고 이사도라 세스의 이야기를 떠들어도 아버지는 리텔 로티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리텔 자신도 제 출생의 비밀을 모를 것이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지 이사도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막힌 우연이군. 비코가 거기에 리아셀을 두었구나. 비코? 아무것도 아니야….

"리텔의 원래 이름이 리아셀이야?"

"잊는 게 좋을걸. 알려지면 그 애가 위험해질 거다."

"그럴게."

이사도라는 언뜻 당황한 눈치여서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하여튼, 리텔 로티를 살려 줘서 고마워. 내가? 아버지는 당신이 힘썼을 거라 했어. 나보다는 황제 폐하가 주장하셨다. 그럼 폐하한테 감사하다고 전해 줘. 내 이름은 밝히지 말고. 이사도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지. 나는 머리를 주억이곤 마지막 쿠키를 집어들었다.

"지젤 엘티아."

"…으으응?"

익숙한 성이 아니어서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과자를 쏙 입에 넣고 테이블 아래에 부스러기를 털었다. 이사도라가 텁텁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기묘할 정도로 어둡고 침침한 시선이었다.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음에도 자잘한 반짝거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저기에 안광을 조금만 더하면 완벽할 듯한데.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은근한 아쉬움이 생겼다. 빛나는 생기는 남편의 죽음과 함께 무덤에 묻었나. 그렇게 가정하면, 충분하진 않으나 최악의 복수를 했다는 아버지의 만족이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너는 암살자가 아니라 했지."

"아니, 암살자인데, 가끔 그런 것도 하긴 하는데…."

멍청하게 횡설수설하는 게 내 귀에도 들려 기분이 언짢아졌다. 어찌 되었든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을 듯했다.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일단 오늘 당신을 죽이러 온 건 아니야."

"그럼 무슨 일로 온 거지?"

"그냥…. 당신이 궁금했어. 그뿐이야."

"호기심은 충족했니?"

"응."

"다행이구나."

이사도라가 한 모금 차를 마셨다. 잔을 잡느라 살짝 들어올린 새끼손가락에서마저 품위가 느껴졌다. 나는 슬쩍 따라해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굳은살 때문에 울퉁불퉁해서 더 비교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거 알아?"

다음 순간 튀어나온 말은 결코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다. 맹세컨대 나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차라리 충동을 이기지 못하도록 나약하면 나약했지. 이 방정맞은 입, 하고 아직도 가끔 이불을 찬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내 목을 졸라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고, 어떤 인간도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어느 머저리가 그런 짓도 저질렀지, 하는 우울한 한탄뿐이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 남편을 죽였어."

이사도라 세스의 동공이 순간 확장되었다 좁아졌다.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연신 찻잔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 조금 긴 머뭇거림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딸깍, 장미무늬 찻잔이 받침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이사도라가 중얼거렸다.

"…안다."

"그런데 왜 복수하지 않아?"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에 꺼낸 말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가끔 짜증났고, 그 나이대 남자들이 그렇듯 자주 이해할 수 없게 굴긴 해도 내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애초에 아버지가 순순히 죽어 줄 리도 없지만. 카르타헤나의 뒷골목에서 나이젤 엘티어스는 꽤나 쓸모 있는 인간이었고, 기꺼이 시간과 돈을 소비해 그를 숨겨 줄 이가 좀 많았다. 

하여튼, 나는 그냥 이사도라 세스가 복수를 시도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시도했으나 실패했는지… 따위의 정확한 사실이 궁금했다.

…. 이사도라가 망설였다. 고운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였다. 나는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침묵이 짧았다.

"그러면 내 남편이 살아 돌아오니?"

말라붙은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 나를 향하는데, 그 안에 담긴 건 처절한 비통이요 해묵은 체념이었다.

황폐한 눈가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물기 때문에 반짝임이 생겨 그제서야 사람 같았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만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충분하진 않으나 최악인 복수. 이사도라 세스에게서 아버지가 빼앗은 것은 인간성이다. 이 싸움에서 결국 나이젤 엘티어스는 승리했으나, 썩 아름다운 결말은 아니었다. 그렇지. 죄인의 자식이 되어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맞아….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어둠에 몸을 숨기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대리석 바닥에 도자기가 떨어지는 쨍그랑 소리가 났다. 소리가 꽤 컸으니 아마 산산히 부서졌을 것이다. 뛰어들어가는 사용인의 부산스러움 사이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이는 이사도라 세스 혼자뿐이었다. 그럼 하나는 원래 누구를 위한 잔이었을까.

이사도라 세스는 아버지의 가문을 망하게 한 원수였다. 동시에 아버지의 전 혼약자, 그러니까 어쩌면 내 어머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이기도 했다. 나를 낳을 뻔한 여자. 아버지의 술주정에 등장하는 악녀하고는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우아하고 서늘하며 뼛속까지 얼어붙은 여인. 아버지가 계획대로 이사도라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내가 태어난 미래를 그려 보았다. 어쩌면 우리는 꽤 친한 모녀 사이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쭉 앞만 향해 걷다가, 더는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거리에 다다라서야 호텔 쪽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글렀지만, 언젠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사도라 세스와 그 남편의 딸로 살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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