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진주 귀걸이를 한 여자

달이 뜨면 내 생각을 하시게.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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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 전체 공개(대명사 처리) | 4000(+300)자 | HL 드림 동양 AU

(C)떨리고설레다 2024


바람에는 찬 기운이 슬슬 묻어나는 계절. 나무는 붉게 옷을 바꿔 입고, 사람들의 복색도 따라서 화려해졌다. 모시에서 비단으로. 색도 보다 선명하고 알록달록하게. 남자는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길거리를 오래도록 쳐다봤다. 아들, 장사하는 사람은 사소한 변화에도 예민해야 해. 천이 두꺼워진다는 것은 걸칠 수 있는 패물의 무게도 늘어난다는 뜻이란다. 아버지의 조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가는 여인네들의 차림은 하나같이 무거워 보였다. 비녀부터 목걸이, 팔찌에 이르기까지, 봄 여름에는 볼 수 없었던 요란한 장신구를 각자 뽐내며 걸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작년에 한 차례 유행이 돌았던 모양새였다. 남자는 소매에서 필첩을 꺼내어 가볍게 기록했다. 이번엔 이것, 이것, 이것을 들여오면 잘 팔리겠군.

시대가 평화롭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장사치야 혼란 속에서 이득을 챙긴다지마는, 얼마 전까지 전쟁 중인 나라에 머물다 온 남자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잘 알았다. 정신력을 팔아 버는 돈이라면 이제는 질색이었다. 손에 떨어지는 재물은 적을지언정 마음이 편한 것이 훨씬 낫지. 남자는 습관적으로 손을 올려 귀걸이에 달린 호박석을 쓸어내렸다. 큼지막한 보석의 흔들림이 귓불을 타고 묵직하게 전해졌다. 갑자기 속이 불편해져서 남자는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오늘은 여기까지, 큰 문제가 없는지만 마저 살피고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길을 비키시오!”

한 무리의 말이 관복을 입은 사내들을 태우고 달려왔다. 우왕좌왕 길가로 물러선 행인들 탓에 남자의 가게 가판대에서도 물건 몇 개가 떨어졌다.

“아이고, 이게….”

사환이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후다닥 주워들어 먼지를 털었다. 남자는 부스스 길바닥에 내려앉는 흙모래를 잠시 쳐다보았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면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지나는 이들은 저마다의 가던 길로 돌아가고, 상인도 가판대를 두드리며 다시 호객 행위를 시작한다. 직전과 다른 것은 오직 제 마음뿐인 것 같아 남자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아들,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쥐어도 좋은 것과 감히 그러면 안될 것을 빠르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해. 그래야 사람이 제 명에 살 수 있는 게다…. 포기해야만 했던 선택지가 자꾸만 떠올라 머리가 복잡했다. 나라가 평화롭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가.

남자는 등을 돌려 실내로 들어갔다.

“상단주님, 안에.”

지난주에 일을 시작했다는 막내 사환이 쪼르르 달려와 귀엣말했다. 남자는 작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가장 부유한 손님을 모시는 안쪽 방에 수정 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상단주가 직접 맞아야 할 정도로 큰손이 오셨다는 뜻이었다. 줄에 꿰인 구슬 틈새로 흐릿한 인영이 엿보였다. 좌우로 살짝씩 흔들리는 모양이 조금 지루해 보였다.

“…왜 그걸 이제 알립니까?”

“그게, 아씨가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셔서….”

이거 큰일이다, 싶어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손님을 부르는 데에 무슨 호칭이 사용되었는지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마음이 급해졌다. 저기 들어갈 만큼 귀한 신분에다 재력까지 두루 갖춘 고객이, 한번 불만을 품으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이 나라에서 남자보다 잘 알 이도 몇 없을 터였다.

“다과는 내어드렸습니까?”

“그건, 네.”

흐릿한 대답을 뒤로한 채 남자는 급하게 발을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

놀라지 않게 부러 크게 인기척을 내고 조심스레 발을 걷었다가, 순간 할 말을 잊어 눈만 깜박였다.

“아니네. 그대는 바쁠 테니 내가 기다리겠다고 했어.”

수정 구슬이 부딪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여자는 또박또박 흠잡을 데 없는 발음으로 말하더니 웃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약간의 안도감과 그것보다는 조금 큰 짜증이 섞여 들어갔다.

고객은 맞았다. 아니 고객은 분명 고객이었는데. 영 반갑지만은 않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한숨 그렇게 쉬면 빨리 늙는다던데.”

“아씨가 걱정하실 바가 아닙니다.”

“왜지?”

한숨 한 번 더. 말꼬리를 잡은 질문에는 대답할 가치를 찾지 못해 말을 돌렸다.

“…어째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혼자 쓸쓸히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될 위치였다. 여염집 처녀가 아니었으므로 집에서 딸려 보낸 시비도 한둘쯤은 있어야 하는데. 남자는 하나 남아도는 잔을 자연스레 챙기며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여자가 반쯤 몸을 일으켜 주전자를 앞으로 쭉 밀어 놓았다.

“따를 손이 필요한가?”

“괜찮습니다.”

던져지는 여지는 자연스럽게 차단하며 잔을 채웠다. 사람이 귀찮은 건 둘째치고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잘못됐다. 아랫것들이 오늘 여러모로 문제였다. 한번 날을 잡아서 제대로 다시 교육해야겠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다 물렸는데. 그대와 단둘이 보고 싶어서.”

그러면서 한쪽 눈을 깜박여 추파를 던지는 게, 영 양갓집 규수답지 못한 말과 행동이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나름 사랑스러웠으나 남자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남자는 한 번 더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았다. 이대로 갔다간 정말 몇 개월 내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말 테다. 대신 관자놀이에 손을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보는 시선을 신경 쓰셔야죠. 아랫것들도 저마다 눈이 있고 입이 있습니다.”

“에이. 나, 그 정도로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네.”

그 정도로 생각 없어 보이는데요. 다행스럽게도 남자는 여자와 달라서,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분별력은 갖추었다.

“…그나저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쯤?”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오래되진 않았어.”

그러나 찻물은 다 식어 원래의 온도를 잃은 지 오래였다. 남자는 미지근하다 못해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백차를 한 모금 마셨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종을 울려, 세심하지 못한 사환을 야단하고 물을 갈아 오라고 시켰다. 여자가 머쓱하게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뭘 이런 걸 가지고 사람을 그리 나무라는가.”

“아씨가 마시실 게 못 됩니다.”

“난 괜찮은데.”

금세 식은 주전자와 다 비운 접시가 치워지고, 적당한 온도의 찻물과 다과가 새로 놓였다. 남자가 잔 두 개에 차를 따르는 동안 여자는 간식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여기 오면 신기한 과자를 맛볼 수 있어서 좋아.”

“입맛에는 맞으시는지요. 이번에 들어온 것인데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럼 고맙겠어.”

“알겠습니다.”

이것, 이것, 이것이라고 종류까지 직접 정해 준다. 남자는 아직 방을 나서지 않은 사환을 보았다. 이번에는 실수 않겠다는 듯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 구슬이 한 번 더 딸랑거렸다. 여자는 먹은 흔적을 얼굴에 고스란히 남기고 고개를 들었다.

“장신구를 좀 보려고 왔는데.”

“장신구 말입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시선은 줄곧 얼굴에 두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다. 속이 너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 역시, 남자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남자는 손을 올려 제 입가를 터는 시늉을 했다. 여자가 얼른 눈치채고 따라 했다. 분홍색 부스러기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응, 이제 철도 바뀌었고, 새로운 것을 장만해야겠다 싶어서.”

“글쎄요, 슬슬 새로운 유행이 시작될 시기인지라 오래 사용하지는 못하실 듯한데.”

남자는 십 년 가까이 바꾸지 않은 제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기다렸다가 마련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괜찮네. 유행을 크게 타지 않는 것으로 볼 생각이라.”

여자가 주전자 쪽으로 팔을 뻗었다. 차를 따를 때 조심하지 않은 모양인지 소맷자락이 진하게 젖어 있었다. 남자는 다시 시비를 불러 마른 수건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여자가 머쓱하게 젖은 부분을 잡았다.

“마음에 두신 것은 있습니까?”

“진주가 달린 물건으로 보고 싶은데.”

“진주요.”

남자가 반복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달을 닮은 매끄러운 진주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번에는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일어났다. 수건을 가지고 들어오던 사환과 부딪히지 않게 잘 피해서 창고로 향했다.

갑자기 웬 진주. 여자와 그 가문은 남자가 이끄는 상단의 오랜 고객이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접 만난 횟수는 적었지만, 남자는 감각 있고 노련한 상인이었다. 그 몇 번의 마주침과 그간의 기록 정도면 취향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주는 영 여자의 취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집안 여자들은 그보다는 반짝이고 색이 있는 보석을 선호했다. 그 점을 고려할 때, 진주를 보겠다는 이번의 요구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 되지는 않았다. 고객이 필요로 하지 않을 만한 것조차도 준비해 놓는 것이 상인의 소양이고. 남자는 상인 중에서도 가장 상인다운 사람이었다. 최상급의 진주 장신구가 들어온 게 몇 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모양 예쁜 것을 몇 개 골라 챙겼다.

“이건 어떠십니까? 금보다는 은을, 세공이 섬세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는 듯하여.”

“응, 괜찮네.”

“이것은 벽언국에서 들어온 것인데,”

“그것도 괜찮은 듯하고.”

다음 상자를 꺼내다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이거 이래서는 설명하는 것에 의미가 사라지지 않나.

남자는 원체 타고난 장사꾼인지라 눈치가 빨랐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놈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여자가 속내를 많이 내비치기도 했다. 목소리에 영 흥미가 있는 기색이 안 보였다. 그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팔린 듯, 이쯤 되면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십시오.”

그제야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우물가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그대도 알지.”

“…알고 있지요.”

“금일 해시(亥時)에 그곳으로 나와 줄 수 있나.”

“예?”

“내가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그러고서는 다음 물건을 꺼내 보라고 손을 까닥인다. 얌전히 상품을 내어 놓는데 속이 다시 답답해졌다.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뻔할 뻔 자다. 하나, 나와 달라는 시간이 아무리 봐도 양갓집 규수가 돌아다니기에 적절치 못하고. 둘, 눈을 내리깔며 말하는 ‘긴히 할 얘기’란 게 무엇일지는 백치더라고 짐작할 수 있을 내용이니.

딴에는 주의한다고 장소를 집 근처로 고른 것 같긴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셈 치겠습니다.”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난 밤새 거기서 기다릴 텐데도?”

그 시간에, 시비도 거느리지 않고 밖에서, 혼자-. 여자가 협박하듯 종알거렸다. 상상만 해도 어지러워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즐겁다는 듯 웃었다.

“이게 가장 마음에 드는군. 이걸로 하지.”

여자는 두 번째 귀걸이를 집어 들어, 도움도 요청하지 않고 혼자 갈아 끼웠다. 원래 착용하고 있던 녹보석은 진주가 들었던 자리에 대충 떨어뜨렸다. 탁자 위로 굴러떨어질 뻔한 것을 남자가 집어 들어 정리했다. 여자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귀걸이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대금은 이번에도 내 이름으로 달아 두게.”

그러더니 찰랑, 발을 걷으며 나간다. 남자는 상자의 뚜껑을 덮어 들고 따라나섰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비에게 물건을 건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자를 배웅했다.

문을 나서기 전, 여자는 까치발을 들고 남자에게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목소리는 한껏 낮췄으나 자리의 모두가 듣기에 충분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꼭 오시게.”

한쪽 눈은 찡긋 감고. 반대편 손은 새 장신구를 툭 건드렸다. 보름달을 닮아 뽀얗고 둥근, 알이 굵은 진주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달이 뜰 때까지는 내 생각을 하시고.”

그러면 당신은 제발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좀 생각하시라고…. 도저히 한숨이 끊기지를 않았다. 이 제멋대로인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자는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마음이 복잡하고 얹힌 듯 속이 답답했다.

남자는 팔랑거리며 멀어지는 뒷모습만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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