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아베 베룸 코르푸스

그럼 저 여자는 신의 세계에서 온 걸까.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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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 전체 공개(초성 처리) | 3000자 | 《세포신곡》 드림

(C)떨리고설레다 2024


새벽 내내 고양이가 울었다. 집고양이의 상냥한 야옹거림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거칠고 과격한, 짜증이 가득 담긴 야생적인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구나.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리고, 검은색 수면 안대 아래에서 생각했다. 지금이 번식기인가, 고양이도 번식기에 싸움을 하던가.

혼자서 궁리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다. 길고양이의 생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뭐, 애초에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 괜찮은가. 당장 나는 잠을 자고 싶고, 아파트 앞에서 울어대는 짐승들은 숙면에 도움이 안 된단 점만 중요했다.

야옹! 고양이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다. 아, 시끄럽다. 신경질적으로 안대를 걷어 올리며 일어났다. 창문을 꼼꼼히 닫고 커튼까지 쳤지만 한번 예민해진 신경은 느슨해질 줄 몰랐다.

휴대전화를 더듬어 화면을 확인했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내일은 주말이었으므로 늦게 일어나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나는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망치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는 진짜로 자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가서 따뜻한 물이나 마실까. 아니, 그러기에는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았다. 그냥 잔잔한 노래를 틀어 놓는 것으로 타협 봤다. 첼로로 연주한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 묵직한 멜로디가 천천히 흘러나와 방 안을 메웠다. 안대를 쓰고 선율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얼굴을 찡그렸다.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인데 오늘따라 듣기에 거슬렸다.

밖에서 고양이가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그냥 팔을 뻗어 음악을 꺼 버렸다.

.

.

.

잠옷 차림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초인종을 누른 여자는 묘하게 들떠 있었다. 휴식을 방해받은 집주인은 짜증이 나 죽겠는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로. 눈이 마주치자마자 볼을 빨갛게 붉혔다. 나는 여자의 잔뜩 신이 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감정의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기분이 나빴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정신이 나간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구르다가 온 건지 주황색 머리카락 군데군데 마른 나뭇잎이 끼어 있었다. 거기에 옷은 녹색 민소매와 체육복 반바지의 후줄근한 조합.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도대체가 이 날씨에 나시가 뭐람. 아직 9월이라고는 해도 일교차가 커서 아침저녁으로는 몹시 쌀쌀했다. 카디건을 걸친 나에게도 지금의 공기는 조금 차게 느껴지는데. 여자가 팔을 문질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용건이 없다면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움찔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려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D, D 씨.”

낯선 여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를, 압니까?”

머릿속에 있는 모든 얼굴을 빠르게 복기했다. 역시 이런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기억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이 정도면 정말 만난 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혹시 출판사 관계자인가, 하고, 다른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평일에 방문하면 될 것이지, 주말, 그것도 이른 시간부터 이렇게 찾아올 필요가.

발목이 시려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여자도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래, 정상인의 상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사람 같았지. 나는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현관에 굴러다니던 명함을 대충 집어 건넸다.

“출판사 일은 평일에, 이쪽으로 연락 바랍니다.”

“아니, 아니에요.”

“그럼?”

여자가 망설였다. 시선은 계속 내 얼굴에 고정한 채였다. 나는 눈을 굴렸다. 도대체 무슨 거창한 얘기를 꺼내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와중에 눈빛은 연예인이라도 보는 듯 반짝거려 기분이 몹시 거슬렸다.

“말씀드렸지만, 별다른 용건이 없다면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뇨, 중요한 일이에요. 꼭 들으셔야만 해요!”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뭐길래 이럽니까.”

“전,”

여자가 주장했다.

“이 세계의 밖에서 왔는데요.”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여자가 슬쩍 눈을 굴려 눈치를 살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기가 무섭게 문턱에 발이 올라왔다. 주제에 눈치는 빠르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발 치워요. 문을 닫겠습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정말이에요. 전 게임 속에 들어왔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돌아가십시오.”

“아니, 잠시만. D 씨. 야, D!”

힘을 주어 여자의 어깨를 밀었다. 여자는 밀려나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아무래도 완력 차이란 게 있었다. 거의 문을 닫는 데에 성공했을 즈음,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여자가 냅다 큰 소리로 외쳤다.

“시, 신의 사랑! 나는 신의 사랑 때문에 여기 온 것 같아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땀도 나지 않았는데 문손잡이를 잡은 손이 미끄러졌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 여자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몸을 쭉 편 채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T 씨를 만나게 해 주세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나는 바깥 세계에서 왔다니까요.”

여전히 반짝거리는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믿을 수 없게도, 뭔가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쩐지 고양이가 밤새 지독히도 울더라니. 나는 고개를 저어 여자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그냥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진짜, 정말, 제대로 미친 여자였다….

“…T 씨는 자리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기로 결정한 나도, 여자의 절반쯤은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그러니 일단 나한테 얘기해 봐요.”

.

.

.

미친 사람을 하나 만났다. 자기가 우리 세계의 밖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여자였다. 여자가 살던 곳에서 여기는 누군가의 창작물이랬다. 그리고 D라는 남자는 한 명의 엑스트라였다고, 그저 준비된 시나리오대로만 움직이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고, 여자는 그런 말이나 지껄였다.

당장 정신병원에 끌려가도 할 말이 없을 헛소리였다. 만난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혹은 내가 조금만 인내심이 부족했다면 여자는 진작에 폐쇄 병동에나 갇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인내심이 넘쳐나는 나였다. 저 여자는 자기가 얼마나 큰 행운에 맞닥뜨렸는지 알까. 하필 내 집의 문을 두드림으로써 자기가 어떤 불행을 피해 갔는지도.

“만난 사람이 나라서 다행인 줄 아십시오.”

“우연이 아니에요. 일부러 당신을 찾아왔는걸요.”

그랬더니 대답하는 건 저 꼬라지다. 날이 꼬였군.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귀찮은 일에 제대로 휘말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조금 막막해졌다. 그래도 여자의 주절거림을 귀 기울여 듣기는 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난잡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하지만 믿으시잖아요?”

여자가 생글거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맞았다…. 정말 우습게도 나는 여자의 설명을 믿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얘기가 아니라서였다. 비슷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았다. 나만 겪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미쳤다고 여길 수도 없었다. LDL의 조직원, 이 집의 모든 거주자를 한곳에 모은 매개체. 내용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하나같이 불가사의하다는 점에서는 결이 같은, 이 빌어먹을 기적을 우리는 신의 사랑이라고 불렀다.

“추워요. 이만 들여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나 안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여자의 얼굴을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우리의 목적을 눈치챈 연구소 측에서 거짓 정보를 흘리려고, 혹은 비밀을 캐내려고 보낸 첩자가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나를 속이려는 의도는 안 보였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에서부터 조금의 흔들림 없이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까지 전부 당당했다. 그 어느 것도 사람을 속이는 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거짓말 같은 것 안 해요. 내가 말한 건 다 진실이에요. 아시잖아요.”

“…네.”

여자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카디건의 소매 부분을 붙잡았다.

“어쨌든 나는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내가 당신을 만났잖아요?”

게다가, 어떤 조직이 스파이에게 저딴 헛소리를 시키지.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여자는 정말 외부에서 왔고 나는 게임 속을 떠도는 몇 개의 픽셀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를 창작한 자는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신일까.

저 여자는 신의 세계에서 온 걸까.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그래, 나는 그 여자를 실내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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