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밭이 나를 싫어하고 있어.”

“그건 이쪽의 대사겠지만.”

뙤약볕이 내리쬐는 맑은 하늘 아래로 싱그러움을 머금은 푸릇푸릇한 토마토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사이 좋게 밀짚모자를 나눠 쓴 금발의 남자와 은발의 남자가 그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아니, 하나 정정하자면 금발의 남자는 기운이 없는지 축 처진 채 엉거주춤 주저앉아 토마토를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 금발의 남자의 말에 은발의 남자는 그를 힐책하듯 눈을 게슴츠레 떠 쏘아보았다.

“…야만바기리. 나, 머리가 띵해…. 뭔가의 버그인 걸까? 손질 받으면 나을 수 있을까?”

“대체 어제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버그가 아니라 그건 누가 봐도 숙취인 게 당연하잖아. 그걸로 주인의 손을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끄응…. 금발의 남자는 말을 하자 머리가 울리는 모양인지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 모습에 입을 뗀 은발의 남자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착실히 손에 든 호스를 움직이며 토마토에게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 원 참. 다음 날 당번이라는 걸 알면 적당히 자제했어야지. 아, 설마 가짜 군은 술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당연한 것도 잊어버린 걸까나?”

“….”

“어이. 손이 멈췄잖아.”

“사본은, 가짜와는… 달….”

“하아? 뭐라는 거야?”

“….”

갑자기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금발의 남자가 신경쓰인 모양인지 은발의 사내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의 안색을 살폈다. 고개를 숙인 탓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가짜라는 말에 바락바락 대들던 평소의 모습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었다. 설마 숙취에 가려져서 그렇지 정말 아픈 곳이 있기라도 한 걸까? 마치 이 가짜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 마뜩치는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녀석 또한 혼마루의 중요한 전력 중 하나였다. 싸울 수 있는 이 하나하나가 소중한 전세인 만큼 귀중한 전력을 소홀히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은발의 남자는 약간의 초조함을 가지고 웅크리고 앉은 그에게 서서히 다가가서 어깨를 약하게 흔들었다.

“야. 어이, 가짜 군?”

“….”

“뭐야? 왜 그러는 거야? 혹시 열사병이라도 걸린 걸까나?”

“…그렇게 흔들면, 속이 더 안 좋… 우웁….”

슬그머니 고개를 든 그의 안색이 뭔가를 애써 참는 듯이 새파랗다. 속이 안 좋다는 말로 인해 은발의 남자는 반사적으로 질색하며 곁에서 떠나려 했으나 금발의 남자가 팔을 잡은 탓에 뜻 대로 벗어나지 못했다.

“넘어올 것 같으면 빨리 측간으로 가란 말이야! 놔!!”

“괴, 괴로워…. 야만바기, 리…. 도와줘….”

“윽! 나한테 달라붙지 마!!!”

벗어나려는 자와 붙잡으려는 자. 순식간에 한쪽이 다른 쪽을 필사적으로 질질 끄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덩달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은발의 남자는 순간 한 손에 들고 있던 호스를 놓쳐버렸다. 허공에 뜬 호스 줄은 이내 푸르른 하늘 너머로 고개를 번쩍 드나 싶더니, 이윽고 맑고 투명한 물을 흩뿌리며 현란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마치 하늘에서 비라도 내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둘은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다. 긴 호스 줄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춤을 추더니 이내 흙바닥에 안착해 분수대처럼 물을 뿜었다. 그 결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생기있는 토마토 밭을 배경으로 신비롭고 어여쁜 작은 무지개가 생겼다.

“….”

“봐, 야만바기리. 예쁜 무지개다. 뭔가 진정되는 것 같아.”

“…넌 오늘부터 술 금지야.”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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