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버림
혈마의 교주가 보란듯이 목덜미에 남겨진 붉은 문양은 지워지지 않는다. 목을 계속 가릴 수 없고 어쩌나, 서배희는 혼자서 옷을 입으면서 생각에 빠졌다. 어쩌다가 저런 재수 없는 자식 눈에 들여서 이 모양이 된건지 알 수가 없다. 이걸 천마한테 들키면 목이 날라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 같기도 하고 불쾌하기 그지 없어서 저도 모르게 그 부분을 긁고 있었다. 차라리 상처를 내서 지우는 것이 낫겠다.
“할아범, 목에 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어?”
“어이고, 련이 왔어?”
“또 훼까닥 했어?”
“그건 아니야. 누가 훼까닥이래? 나 아직 정정하거든.”
옆에서 뭐라고 쫑알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담아주면서 지구에 남은 동생을 떠올렸다. 그 녀석이랑 이름이 같아서 그런지 신경 쓰이는 아이라 옆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받아주게 된다.
“붕대에 피 묻어나오는데? 제대로 지혈도 안 하고 돌아다니는거야? 칠칠 맞게 굴지마.”
“걱정해줘서 고마워~.”
“누가 걱정을 했다는거야?”
머리를 쓰담아주는 와중에도 목덜미가 욱씬거린다. 그가 제 목을 조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주술적으로 새긴거면 교주님이 눈치챌까? 계속 붕대를 감고 있으면 혜성이가 걱정할 것이다. 서한이도 한마디 하겠지. 어른이 되어서 애들한테 이런 짐이나 줘야한다니 최악이다. 나는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닌가?
아이들은 모두 좋은 아이들이다. 근데 나는? 생각이 시작되자 목덜미의 욱씬거림이 더 심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서 붕대 위를 긁는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이렇게 잡혀서, 짐이 되다니 이 얼마나 최악의 어른인가.
“배희야, 그 붕대 되게 오래 감고 있는 거 같은데 많이 다친거야?”
“아니~, 패션이야~. 어때? 붕대에 그림도 넣어 봤는데 스카프 같은 느낌으로 말이야. 어울려?”
“다친 건 아니라는거지? 다행이다.”
“에이, 아냐, 아냐. 아, 여기에 보석이라도 하나 달아볼까?”
너는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누군가를 구하겠지. 그건 좋은 일이야. 멋진 일이야. 도움이 되고 싶었어. 그치만 내가 도움이 된 적이 있었나? 너를 다치게 한 일이 더 많은 거 같은데, 너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봐도 괜찮다고 하겠지. 차라리 생각 같은 걸 그만 둘 수 있다면 좋을텐데.
“제 발로 나올거라고 생각했단다.”
“하, 예지 능력이라도 있나보지?”
“예지까지 갈 필요도 없지. 너랑 꽤 많은 대화를 했고, 너처럼 부담감에 도망치려는 이들도 많이 봤지. 그리고 그 중에는 부르면 달려오는 이들도 있지.”
“나는 내 목에 있는 걸 지우려고 온거야.”
“볼수록 특이한 영혼이야. 하나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고, 둘이라고 하기에는 적군.”
“진짜 변태 같네. 교주라는 놈들은 하나 같이 엉망이야.”
“속내를 좀 더 드러내보거라.”
생각해보면 제 발로 그를 만나러 오는 행동 자체가 미친짓이 아닌가 싶은데 아, 말은 하고 올 걸. 충동적인 자신의 성질을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이겠지. 그가 자신에게 선사한 것은 어둠이었다. 주술로 만들어서 움직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공간.
오로지 생각만이 이어지고 나라는 존재마저 희미해지는 공간에서 죽지도, 정신을 잃지도 못 한다. 궁지까지 몰린 생각의 결론이 엉망인 걸 알면서도, 공간을 가르고 손을 내미는 이를 붙잡는다.
혜성이 너는 짊어지고 있는 게 너무 많아.
너는 모두를 구하겠지.
너의 짐을 같이 들어주는 것도, 대신 들어주는 것도 못 한다면
내가 그 짐을 전부 태울게. 더 이상 짐을 늘지 않게.
“머리카락 잘랐네.”
“동생 같은 아이에게 줘버렸는데요.”
“짧은것도 나쁘지 않군. 인사는 제대로 하고 온거니?”
“다 죽어가는 장로면 충분히 인사는 되겠죠.”
너희들에게 짐이 될바에
너희들이 쉽게 버릴 수 있는 쓰레기가 될게.
모든 짐이 없어진다면 너도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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