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자전진

1.메리 배드 졸업식

w. MYU

 

겨울의 끝물. 곧 봄이 온다며 들뜬 거리와 달리 공기는 여전히 차가운 2월이었다.

아직도 숨을 뱉으면 하얗게 입김이 서렸다.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이라 그만큼 더 추워진 걸까. 답을 낼 수 없는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로 발을 옮겼다.

떠들썩한 정문에서 벗어나, 아무도 없을 쓰레기 소각장으로.

한 걸음씩 이동할 때마다 소란스러움과 멀어짐이 느껴졌다.

쓰레기 소각장, 참 멋없는 장소지만 더없이 잘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예쁘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마음을 태워 버리는 장소.

 

있는 거라곤 헐벗은 나무들과 엉망으로 쌓인 쓰레기들뿐인 그 황량한 장소에 준수가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기다랗고 새하얀, 잘생긴….

 

내가 좋아하는 사람.

 

교복 위에 평범한 검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있는데도 준수는 멋있었다. 가방을 포함해 짐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부모님 차에 이미 짐을 다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졸업식 끝나고 5분만 시간 내 도. 할 얘기가 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준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는 언제나 나한테 관대했다. 그래서 더더욱 힘들었다. 이 마음을 얘기하기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준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곤 손을 흔들었다.

 

“재유.”

 

커다랗고 새하얀 손은 흔들리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준수가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졸업 축하해.”

“…. 니도.”

 

마음의 준비는 이미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저 미소를 잃을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겁이 난다.

하지만 더 미룰 순 없다. 지금이 최적이니까. 이게 마지막이니까.

연락이 끊어져도 자연스러운 최적의 시기.

 

징그러운 짝사랑을 끝낼 시간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준수 첫인상은, 그냥… 기철이만큼 하얀 애 처음 본다, 정도였다.

이력을 듣고는 꽤 놀랐다. 기내초, 기내중과 원중고라는, 누구나 아는 엘리트 코스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지상고로 온 남자애.

왜 원중고에서 지상고로 온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상고에 있는 이유와 같을 것이라, 부러 상처를 헤집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묻지 않으니 준수도 굳이 얘기하지 않았고.

그냥, 모두가 짐작하는 그런 이유겠거니, 하고 조용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건 나와 준수만의 이야기였고, 어떤 눈치 없는 선배가 ‘뭐 땜에 원중고에서 여기 왔노’라고 묻는 바람에 준수는 그 말에 대답을 해야 하긴 했지만.

 

내가 3학년이었으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나랑 준수가 조금만 일찍 먼저 만났었더라도, 코치님, 아니면 기철이한테라도 부탁해서 선배들 입단속이라도 시켰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에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정작 그 질문을 들은 준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지만.

 

‘주전 경쟁에 밀려서 왔어요.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나 뭐, 될 대로 돼라 해서 온 것은 아니고요, 다 찾아보고 왔습니다. 이번에 장도고와의 경기를 봤어요. 그래서, 여기가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생각해서 온 겁니다.’

 

목소리도 담담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겉을 담담하게 꾸민다 해서 속 역시 그럴 수는 없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안다.

 

준수는 어딜 어떻게 봐도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저 농구하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이랑 가까운 곳도 아니고, 제주도를 제외하면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부산으로 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겁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랬지만, 농구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여유로운 상황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몇 점 차로 지고 있든, 이기고 있든 상관없이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패널티로 인해 연습 경기밖에 나가지 못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연습 경기를 실전보다도 더 진지하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했다면서, 운동부 특유의 상명하복 분위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선배라도, 심지어 코치님이라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말은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준수는.

 

나는 준수의 그런 점이 좋았다. 다행히 지상고 농구부는 상하 관계가 빡빡한 곳이 아니어서, 준수의 이런 태도가 문제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성격은 언제나 적을 만들기 마련이다.

 

쟤는 스펙이 좋으니까, 어딜 봐도 잘난 인간이니까 저렇게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거라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그런 조건이면 저렇게 살았을 텐데, 라면서.

쟤는 알아서 잘 하니까 전학생이라고 신경 써 줄 필요 없겠다, 라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인간인들 이 모든 일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명문고에서 쫓겨나고, 친구는 물론 가족이랑도 떨어지고, 1년 동안은 경기도 못 나가게 된 애.

고생 한 번 안 해 보고 자란 것 같은 도련님이 하필 열악한 지상고에 와서, 아마 중학교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을 갖은 상황에 처해야 하는. 이런 게 아무렇지 않은 인간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괜히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었던 것 같다.

혼자 있게 놔두고 싶지 않아서, 농구부에서 사람들과 거리 두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맘 둘 데 하나 없는 상태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서.

준수 본인은 괜찮을지 몰라도 그걸 보는 내 마음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이 다 안 한다면 내가 해야지, 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학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학교를 안내하고, 역시 잘 알지도 못하는 교실 생활에 대한, 도움이 되지도 않을 조언을 건넸다. 숙소에서 눈 떴을 때 준수가 아직 자고 있으면 괜히 깨워 보고, 준수가 먼저 나갔으면 빠르게 따라 나가서 준수를 찾았다.

 

잘 잤나, 라고 인사했을 때 아니, 라고 대답한 건 나한테도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굳이 점심시간에 준수네 반까지 찾아가고, 준수네 반 수업이 먼저 끝나서 준수가 없으면 또 굳이 급식실에서까지 준수를 찾아보곤 했다. 그런 일을 몇 번 했더니, 어느 날부터였는지 준수는 자기 반 수업이 일찍 끝나면 우리 반 앞에서 나를 가만히 기다리곤 했다.

기다리는 준수를 처음 봤을 땐,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던 것 같다.

물론, 준수는 너무 눈에 띄는 존재라서, 앞으로는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너네 교실에서 편하게 앉아서 기다리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러다 보니 소소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됐다. 처음에 준수는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커녕, 그냥 평범한 화제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둘 다 조용히 있을 수는 없으니, 내가 괜히 없는 말주변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가 좋다, 안 좋다부터 시작해서.

 

준수 니 야구에 관심 있나. 이번에 잘한다고 난리도 아니다. 부산 사람들은 야구 진짜 좋아한다. 서울도 그렇나? 농구도 그마이 좋아해 주면 좋으련만.

준수 니는 외동이가? 아, 여동생 있나? 별로 안 친하다고? 그래도 부럽다, 나는 외동이라서 항상 동생 있는 애들이 부러웠거든.

오늘 급식에 버섯 탕수육 나오는 거 봤나. 이거 이름이 이상하지 않나. 탕수육은 고기 육 자인데 버섯을 튀긴 걸 왜 탕수육이라고 하는 거고. 그냥 탕수 버섯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가….

 

그야말로 아무 소리나 지껄였다. 슬슬 할 말이 정말 없어져서, 이제는 우리 증조할아버지 업적 이야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할 즈음, 준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재유 너는 목소리가 듣기 좋네.”

 

 다소 당혹스러운 말이었지만.

 

 “목소리도 크지 않고 말투도 부드러워서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준수는 정말로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아침에 네가 깨워 주는 것도 좋아. 알람 소리에 깨면 아침부터 기분 나쁜데, 너는 항상 조용하게 깨워 줘서. 눈뜰 때도 기분이 나쁘지 않더라.”

 

 준수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새카매서 깨끗해 보이기까지 하는 눈이 나를 올곧게 보고 있는 걸 인식하자, 어쩐지 견딜 수 없어져서….

 

슬쩍 눈을 피했다.

 

 “…. 맞나…. 그, 그럼 내가 계속 깨워 주까?”

 

 말까지 더듬었다. 바보같이.

 

 “응.”

 

 준수는 내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잘생긴 애가 웃기까지 하니까, 정말-

 

세상에 있는 모든 빛이 걔한테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준수가 좀 편해진 것 같다. 준수도 내가 편해졌던 걸까. 그때부터 나 혼자 떠드는 일은 없어졌다.

 

준수는 의외로 말이 많았다. 조잘조잘,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자주 얘기하곤 했다.

오늘 급식 맛없더라, 그래도 빵 같은 거보다는 밥이 낫다, 부터 시작해서. 편의점에서 먹을 거면 뭐 먹는 게 영양성분적으로 낫다든가, 아침에 비둘기를 봤는데 너무 말라서 불쌍할 지경이었다고 말하거나… 뭐 그런 것들.

물론 이건 우리 둘이 있을 때만의 일이었고,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준수는 놀랍게도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준수가 과묵하고 무뚝뚝한 애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닌데, 그렇게 무뚝뚝하지 않고 오히려 여린 것도 같고 어린 것도 같고…….

 

뭐가 어쨌든, 확실한 건 준수도 그간 혼자라도 괜찮았던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내일 나 잘 깨워줘야 해.”

 

 자기 전 준수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준수의 휴대폰 알람은 꺼진 지 오래였다. 그 말을 하고 준수는 귀에 귀마개를 틀어막았다.

 

 “잘 자래이, 준수.”

 

 자기 전 마지막 인사는 언제나 이랬다.


 

평화로운 나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임승대가 그렇게 떠난 이후, 지상고 농구부는 분위기부터 망가졌으니까.

애써 ‘남은 사람끼리 잘하면 된다.’ 라고 말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었다. 안 그래도 지상고 농구부는 약한 곳이었다. 그나마 임승대 있어서 숨통이 좀 트이는 정도였는데, 제일 중요한 사람이 다른 데로 가 버렸으니.

중학교 때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들었다 한들, 고등학교조차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한, 키 180도 안 되는 진재유가 혼자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는 건… 엄밀히 따지자면 아니긴 했지만.

 

 “임승대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재유 너만 잘하면 되지.”

 

준수는 정말로 나를 믿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믿었다. 걔가 있든 없든, 너랑 내가 있으면 잘 할 수 있다고. 자기가 합류하기 전에는 좀 답답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재유 너 혼자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그 말은 정말 고마웠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내 한계는 내가 제일 잘 안다. 혼자서 뭘 할 수 없는 선수, 보조는 잘하지만 단독으로는 쓸모없는 선수. 그래서 항상 득점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그나마 활약할 수 있는 선수인데….

 

눈앞이 캄캄했다. 분명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데, 늪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좌절할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여기서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내 농구도, 준수의 농구도.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 혼자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결국 무리하다 부상을 입고 경기 중 퇴장하고 말았다.

 

 

꼴사납다.

 

다치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어차피 안 될 거,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뛰었는지.

그 공격 하나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지상고의 패배는 확정이었는데.

 

아니, 그냥 준수한테 너무 못난 꼴을 보여 주기 싫었을 뿐이다. 지상고로 전학 오는 바람에 경기에도 못 나오고, 이제 다른 학교로 가기에도 너무 늦어 버린, 그나마 믿고 있던 유일한 카드가 사라져 버린 준수한테 이 이상의 좌절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아서.

임승대 없이도 잘 할 수 있다고, 내가 열심히 할 테니까 너도 나 보고 열심히 훈련하라고, 그래서 네가 출전 정지가 풀리는 날만 되면 우리는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준수가 선수 대표로 병문안을 왔다. 붕대에 칭칭 감긴 내 발목을 보고 준수는 꽤 놀랐는지,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가 새파랗게 보일 정도가 되어서는 성큼성큼,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많이 아파?”

 

자리에 앉지도 않고 용건부터 말하는 애를 일단 자리에 앉혔다. 준수는 내 권유에 따라 엉거주춤 자리에 앉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 많이 아프냐고.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됐다.

 

 “안 아프다. 다칠 때야 아팠는데, 지금은 치료 다 했는데 뭐.”

“그건 다행이네…. …. 농구하는 데 지장은 없지?”

“어, 무리 안 하고 푹 쉬면 일주일 뒤엔 붕대 풀어도 되고, 2주 정도만 조심하다가 운동 다시 해도 된다고 하더라.”

“진짜 다행이다….”

 

준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조용했다.

 

병실 안에 침묵이 가득했다. 준수가 답지 않게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침묵을 깨야 하는지,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게 틀리지 않았는지, 준수는 한참이 지난 후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너까지 없으면 난….”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말을 꺼낸 보람도 없이, 거기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안, 다친 사람 앞에서 이런 말 하는 거 아닌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 준수를 내가 붙잡았다.

 

 “걱정 마라, 준수야.”

 

 돌아보는 준수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액땜이라고 생각하자. 지금 다쳤으니까, 앞으로 2년간 다칠 일 없을 거다. 오히려 잘 된 거지. 지금은 어차피 준수 니가 경기 못 나온다 아이가. 이번에 다친 거로 2년은 안 다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렇게 말하면서도 준수는 조금 웃었다.

그거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준수와 나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준수가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더하자면 다른 부원들이 없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준수에게 맘을 놓게 한 것도 같았다.

아무도 준수 말을 엿듣지 않는 병실에서, 준수는 그제야 마음껏 말을 쏟아내었다.

 

사실은 원중고에서 떠날 때 너무 불안했다거나, 지상고 처음 왔을 때 생각보다도 농구부 대우가 안 좋아서 좀 당황했다거나 같은 것.

엄마가 걱정해 주면 좋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냥 짜증이 난다거나, 여동생이랑 맨날 붙어있을 땐 그냥 징징대서 짜증난다 생각했는데 안 보게 되니까 보고 싶다, 같은, 지금껏 속에만 담아두고 못 했던 말 전부를.

 

나는 그걸 잘 들어줬을까?

 

자신은 없다. 하지만 준수에게 있어서 나쁜 청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계속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하긴, 내가 맘에 들지 않아도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을 테지만 말이다.

 

나는 강하게 있어야 한다.

언제나 어디서나, 가장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평상시는 물론, 농구 경기 중에서도 언제나 준수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 아무도 그 역할을 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해야 한다.

그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강한 확신은, 정말로 살면서 처음 느낀 감정이어서.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 한 명만 더 있어 줘.

내가 무너져도 준수한테 영향이 가지 않도록.

내가 심하게 다쳐서 경기를 못 하게 돼도 괜찮을 수 있도록.

제발, 누구 한 명만 더.

 

 

 


 

 

 

 

“재유, 할 말이 뭐야?”

“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후문에도 졸업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내 손에는 엄마와 후배들이 안겨 준 꽃다발과 졸업장이 들려 있다.

 

대학교가 갈렸다.

 

준수는 목표로 하던 준향대로 갔고, 나는 그 근처에 있는 주익대로 가게 됐다.

둘 다 명문이니 감독님도 코치님도 매우 만족했고, 부모님은 물론이고 후배들까지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줬다.

다만 준수는 그 와중에 좀 불만인 얼굴이었다.

 

 ‘나는 재유 너랑 같은 대학 갈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랑 다른 대학교에 진학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대학교까지 같이 갔으면 진짜로 고문받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 준수야.”

 

준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성격도 급한 주제에, 내가 말을 이렇게 질질 끌 때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준다.

저 표정이 정말 좋았다. 가만히 나를 기다리는 표정, 답지 않게 내 속도에 맞춰주려고 애쓰는 모습.

그래서 나는 절대로 내 마음을 얘기할 수 없었지만-.

 

이제 준수는 내가 없어도 괜찮으니까.

 

좋은 대학교에 진학했고, 원래 준수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니까. 그곳에는 가족도 친구도 많이 있을 테니까.

마음 둘 데 하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있던 고등학교 시절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 졸업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나랑 그렇게 붙어 다녔다는 사실도 잊어버릴지도 모르지.

야속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하나 준수 인생에 없어져도 준수한테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까.

 

 “준수야.”

“응.”

“내 니 좋아한다.”

“…. 응?”

 

무슨 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준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너 좋아해.”

“하하….”

 

 너무 예상했던 답이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못 알아들을 줄 알았지.

 

 “그런 뜻이 아니라,”

“응?”

“…. 내가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사귀고 싶다는 말이다.”

“…. 응?”

 

 준수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표정이 확 구겨졌다.

 

나를 향해서는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표정인데.

 

준수의 표정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너무 싫은데, 그나마 상대가 나라서 어떻게든 참고 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너는 끝까지 다정하구나.

그냥 욕을 해 버리거나 때리거나 하면 오히려 포기가 쉬울 텐데.

 

 “…. 미안, 재유. 나는… 그런 쪽으로 너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남자한테 고백 받은 성준수가 이렇게 곱게 거절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거면 됐다 싶었다. 더 바라는 건 과욕이다.

 

  “…. 잘 살아라.”

 

손을 흔들었다. 안녕, 하고 말했다.

나는 표정을 제대로 지었을까?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을까?

 

알 수가 없다.

 

그대로 뒤돌아서 달렸다. 준수 앞에서 엉엉 우는 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한 번 울어 버리면 더한 말도 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고, 그러니까 한 번만 만나 주면 안 되냐고, 심심풀이 땅콩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딱 하루만이라도 너랑 사귀고, 한 번만이라도 네가 내 애인이라고 말해 보고 싶다고…….

 

비참하게 매달리지 않기 위해 죽어라 달렸다.

 

정문에서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수랑 얘기 잘했냐고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아 주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꾹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를 꼭 끌어안고 엉엉 울자, 졸업이 그렇게 아쉽냐면서 엄마가 나를 토닥여 줬다.

 

다시 생각해도, 졸업식에 고백하기로 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졸업식 핑계로 펑펑 울 수 있었으니까.

 

안녕,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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