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러 왔습니다
어서오세요, 살짝 고개를 들고 웅얼거린 김각별이 책에 고개를 더 깊게 파묻었다. 이 시간에, 젊은 남자 혼자, 가방도 뭣도 없이 왔으니. 삼십 분 정도는 집중할 수 있으려나, 혼자 생각한 그가 조금 뻣뻣한 목을 뚜두둑, 소리 나게 꺾었다.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헌책방엔 포스기도 아닌 돈통 하나 덜렁 놓여 있는 계산대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김각별, 그리고 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들어온 젊은 남자 뿐이었다. 오 분에 한 번꼴로 들려 오는 사락, 책 넘기는 소리-김각별은 책을 아주 오래오래, 천천히 씹고 음미하며 읽는 편이었다-, 규칙적이고 고요하게 내쉬는 김각별의 집중한 숨소리, 헌책방의 따뜻한 빛깔에는 어울리지 않게 축축한 빗소리. 그 작은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의 전부였다. 살짝 흔들린 집중을 다시 종이 위 활자 하나하나에 쏟아붓던 김각별의 얼굴이 다른 얼굴의 그림자에 드리워졌다. 하아, 작은 한숨을 내쉰 김각별이 눈을 종이에서 떼었다.
찾으시는 책 있으세요, 인위적인 목소리로 내뱉던 김각별의 눈이 젊은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도-김각별은 책방 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으니, 작은 헌책방에 찾아오는 단골들 빼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기시감에 김각별의 동공이 살짝 작아졌다. 지금 자신과 눈을 약 십 초간 맞추고 있는 남자의 외형은 소름 돋을 정도로 평범했다. 책장의 나무 색 같은 머리카락, 머리색과 같지만 훨씬, 훨씬 깊어서 감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 그리고 책방 간판 색과 흡사한 초록색의 후드.
"혹시 원하시는 책 종류가 어떻게 되나요, 시사는 제 왼쪽, 경제는 저 위,"
"동화는 당신 오른쪽, 만화는 계산대 바로 밑, 시집은 저기 구석에 묶여 있고. 잡지는 위층에 있을 텐데? 뭐, 몇 년 지난 잡지라 먼지만 잔뜩 쌓여 있겠지만. 사전이나 교과서는 이 책방에서는 취급 안 하고."
남자의 입꼬리가 슥 말려 올라갔다. 김각별은 남자의 표정이 대체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 분명 이 책방에 대한 정보들은-
"당신밖에 모르는 걸 텐데. 당신이 삼 년 전 이 책방을 열고 나서 당신은 한 번도 직원을 쓴 적이 없으니까. 단골이래 봐야 곧 건너편 새로 생긴 서점에 넘어갔을 테니, 고객도 아닐 거고. 뭐,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서 이 책방을 못 떠났던 거겠지만?"
정확했다.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김각별이 생각하던 모든 글자들은 머릿속에서 채 정리 되기도 전에 저 낯선듯 익숙한 남자의 입에서 줄줄 나오고 있었다. 툭, 그가 들고 있던 책장이 습기 가득한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쪽, 대체..."
"아직 안 끝났어요, 김각별씨. 누군가 짜 놓은 것처럼 비극으로만 가득했던 인생, 주변에 남은 사람 남은 것들 전부 다 없어지자 인생 마지막 5년 아주 어릴 적 꿈이었던 책방 사장으로 조용히 평화롭게 살다 내 손으로 직접 내 마지막을 봐야겠다, 생각했죠? 버림받고 흥행하지 못한 책들 모아다 안될 장사 하면서, 가끔 들어오는 어린 아이들 마치 당신 어릴 적 거울로 보는 것 같아 그 삼개월 번 푼돈 몽땅 모아 아이들 오백원 내고 사는 책 사이에 끼워 주고. 가만, 지금이 20XX년이니까 얼마 전엔 당신 동생이-"
"너 누구야. 너 누군데, 아니 네가 뭔데 남의 인생 갖다 무슨 소설 한 자락마냥 쉽게 말해? 네가 뭔데!"
"하하, 성격 마음에 드네요? 실제로 보니까 생각보다 더 재밌네. 일단 멱살부터 놓고 말합시다. 아직 해야 할 말이 더 남았거든."
그리고, 나 멱살 하나 잡는다고 당신이 나 죽일 수도 없고, 절대. 잔뜩 구겨진 옷자락 탁탁 털어내며 중얼거리던 남자가 머리를 한번 쓸었다.
"나 책 하나 사러 왔습니다. 다른 책들은 다 있는데, 소설이 없네 책방에?"
무언가 말하려던 김각별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다 알면서 묻는 것을 김각별은 소름 돋게 잘 알고 있었다.
"당신..."
"그렇겠죠? 이 책방엔 소설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 밑에 떨어진 것 같은데, 좀 주워 줄래요? 책은 소중히 다뤄야 하거든."
김각별의 몸이 얼어붙었다. 난 무슨 책을 읽고 있던 거지? 난 대체 몇 시간을, 며칠을, 아니 몇 년을 이 책방에 있던 거지? 똑같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아니 나는 대체,-
어느새 책을 한 손에 가볍게 쥐고 있던 남자가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책, 어때요, 김각별씨한텐 재밌던가요? 나름 인기가 있던 책인데. 내용도 감명 깊은데, 난 이 책 캐릭터가 참 좋더라고. 모든 것을 잃은 주인공이 마지막 희망이었던 책방에서 자신의 생을 불태워 다른 사람들의 어두운 생을 비춰준다. 이거 전국 베스트셀러였는데, 많이들 이 책 보고 위로받았대요. 아직 미완인 상태에서 작가가 출판을 해 버려서 욕도 좀 먹었고. 요즘 사람들은 열린 결말을 싫어하더라고요? 아, 책 결말도 봤나요? 난 아직 못 봐서. 아직 미완이라 김각별씨도 못 봤으려나?"
조용히,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비극은 겉으로 보기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우니.
예술 작품을 그리듯 아름답게 쏟아져 나오는 문장들이 김각별을 어지럽혔다. 터벅터벅 탁한 발소리를 내며 김각별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책 저자 정형준입니다, 주인공 김각별씨."
이제 이 아름답고 따뜻한 비극의 결말을 써 내려가 주시겠어요, 나의 주인공씨?
와잠만너무쪽팔려서못보겟다시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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