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door Inside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은 의외로 쉬울지도 몰랐다
BGM/ 이나바 쿠모리『로스트 엄브렐라』 Vo.카아이 유키
안녕. 고마웠어.
그 말을 남기고 모란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그의 기숙사 방이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정돈되지 않은 방의 한가운데에 눕자 마음은 잔인할 정도로 고요했다. 끓어오를 듯한 뜨거운 무언가도, 가슴 시리게 아픈 무언가도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이거면 된 거야. 이대로 일단은 끝인 거야.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팔로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팔을 치워도 시야에 제대로 들어오는 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이제는 볼 수도 없는 친구들의 얼굴만이 천장을 비추는 통에 모란은 애써 팔을 휘저어 그 잔상을 떨쳐냈다.
분명 말할 수 있는 상대는 더 이상 없다는 걸 그도 잘 알았음에도 모란은 지금 이 정적이 소름끼칠 정도로 싫어서 자그마하게 음악을 틀어놓았다. 그는 음악을 듣자마자 그것이 얼마 전에 피나와의 통화에서 그가 자신과 잘 어울린다며 추천해준 음악임을 깨달았다. 모란은 순간 괴로웠지만, 일부러 음악을 끄지는 않았다. 억지로 모든 걸 멀리하느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모든 걸 흘려보내는 게 낫다는 걸 그 자신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화는 받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과 직접 목소리를 들으며 이야기하는 것의 무게는 엄연히 달랐다.
친구들과의 통화가 끝나고 나면 항상 있는 익숙한 정적. 그러나 오늘 방 전체에 습하게 가라앉은 정적은 전혀 이전같지 않았다. 고요함이 계속 그의 시야를 흐리고, 목을 짓눌렀으며 정신을 멍하게 했다. 지금 방 안에서 아무리 크게 소리를 친다 한들 이제 원하는 곳에는 닿지 않는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잠이 오기는커녕 눈을 떠도 감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괴로워지기만 해 모란은 다시 이불을 걷어내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음악과 고요 사이를 파고드는 옅은 소리에 모란이 몸을 반쯤 일으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빗줄기가 세차지는 않지만 비가 오고 있었다. 모란은 그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져 있음에 당황했다. 짧은 새에 이렇게 순식간에 변해버리다니, 마치 방금 전에 자신이 친구들에게 한 짓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에 모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친구들은… 지금쯤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슨 기분일까. 분명 원망하고 있을 거야…. 무엇이 어떨지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었지만 생각에 점점 구름이 끼는 걸 모란은 멈출 수 없었다.
팔데아에서는 종종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비가 내리곤 했다. 모란은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기에 그게 좋은지 어떤지에 대한 감상 따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오늘의 감상만큼은 나쁨이 확실했다. 백색 소음 같은 잔잔한 빗줄기도 지금은 그저 그의 마음을 때리는 가늘면서 날카로운 비수와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모란은 문득 언젠가 한 추명과의 통화에서 그에게 어떤 애니메이션의 감상을 듣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애니메이션에서 비가 오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장면을 너무 자주 봐서 이제는 어느 부분이든 비만 내려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근데 지금 이건 뭐야, 아직 비도 오기 전인데 안 좋은 일이 먼저 일어나게 만들어버렸네. 내가….’
모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친구들을 위해 한 일이면서도 그들을 볼 낯이 없었다. 잠깐이지만 자신 없이 친구들끼리 행복하고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는 상상을 하다 모란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그걸 바라고 있는데, 어째서…. 친구들의 행복한 모습을 그리면서 자신은 불행해지고 있다는 게 싫어 모란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내었다. 이제는 원하나 원치 않으나 그들을 조금 덜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행동의 전부가 아니라 행동의 일부로 만들어야만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무섭도록 일정한 세기로. 비가 그칠 기미도 더 세게 내려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는 창밖을 바라보며 모란은 자신의 앞날도 그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으로 인사를 건네고 친구들 앞에서 도망쳐 나온 자신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게 강한 처벌일지, 처벌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미약한 무언가일지도 몰랐지만 어떤 벌이 내려지든 친구들과 떨어진 지금 이 상황보다 무겁게 느껴질 것 같지 않았다. 스스로 친구들 곁에서 떠나왔다고는 하지만 지은 죄뿐만 아니라 책임에 따른 결과까지 짊어진다는 건 그에게 예상보다 훨씬 버겁게 다가왔다. 그래도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버겁대도 그 무게를 나누고 싶진 않았다. 그냥 자신이 조금 더 단단해진다면 그걸로 될 일이었다.
모란은 그간의 일들을 조금씩 정리할 필요를 느껴 친구들과의 기록을 되짚어보다 언제인지도 모를 날에 오르티가가 보낸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비오는 날 진짜 짜증나지 않아? 습기에 옷도 머리도 엉망이면 마음마저 흐트러질 거 같다고. 천막 안에 들어가있어도 아무튼 싫어! 그냥 짜증나. 아무리 비가 그치고 나면 아지트 주변에 꽃이 활짝 핀다고 해도 비를 맞는 동안의 기분은 누가 책임져주는데?… 메시지는 구구절절 길었지만 결론은 그냥 비오는 날이 싫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그 메시지에 어떻게 답을 보냈는지 모란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러게. 티가. 비오는 날 진짜 싫다. 라고 적어보낼 게 뻔해 모란은 그냥 메시지 창을 꺼버렸다.
컴퓨터를 봐도, 휴대폰을 봐도, 하다못해 돌아누워 아무것도 없는 벽을 들여다봐도 친구들이 있었다. 목소리로, 텍스트로, 또 자신만 아는 잔상으로. 뭐라도 꺼내먹으려고 냉장고를 열면 방에만 있더라도 밥은 잘 먹어야 해! 라며 자신을 걱정하던 비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이 추워 조금만 온도를 올리려고 하면 추운데 귀찮다고 가만히 있지 말고 움직이라고! 라고 자신을 다그치던 멜로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란은 친구들이 와 본 적도 없는 그의 방이 이미 그들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모란의 공간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친구들의 얼굴이 생각난다는 걸 알아버린 모란은 침대에 대자로 누워 실소했다.
‘나는 정말… 이 애들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구나….’
침대 위로 비가 들이칠 법한 걸 모란은 간신히 막아내었다. 물이 떨어지는 건 방 밖이면 충분했다. 지금 친구들이 이 비를 맞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각자의 마음에서 흘러내리는 물만큼은 되돌아와 다시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저 해가 나서 일단 다시 주변이 환해진다면… 그거면 되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주변을 가꿔나갈지는 애석하게도 그 혼자만이 감당할 문제는 아니었다. 모두가 각자의 아지트를 안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그걸 버릴 수 없다는 것 하나만큼은 모두가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모란도 마찬가지었다. 나는… 너희를 떠날지언정 너희를 버릴 수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는 더욱 명확해졌다. 모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때까지는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버거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니어야만 했다.
모란은 너무 서두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나갈 준비를 했다. 옷에 붙은 이브이들의 털을 정리하고,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하던 그였으나 친구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허망해질 정도로 쉬웠다. 내딛기 버거웠던 한 걸음이 친구들을 향해 간다고 생각하면 가벼워졌다. 귀찮은 준비도 친구들을 위해 전할 말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번거롭지 않았다. 모란에게 이미 친구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피나는, 멜로코는, 추명은, 오르티가는, 비파는…. 멈춰있던, 때로는 멈춰있기를 바랐던 그를 항상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모란은 발을 고르고 기숙사 방문을 열었다. 이제는 자신에게 새어들어오는 빛이 눈부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더 큰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빛을 뚫고 나아가야 했다. 친구들을 위하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향하면서. 해야 하는 말을 한번 되뇌이고 모란은 방 밖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한번 내딛은 발자국이 그를 계속 세상 속으로 끌여들었다.
밖으로, 더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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