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in BG3

노틸로이드에 떨어진 씨에이

“씨시, … 오. 갓. 정말 다행이야.”

눈을 떴을 때 기억 나는 건 거의 없었다. 이름조차 그랬다. 아마도 포획낭을 열고 자신을 꺼냈을 남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씨시라고 불러서 알았다. 내가 그의 ‘씨시’구나. 눈썹에 엉겨붙은 피 때문에 들러붙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빡인 다음 초점을 눈 앞의 남자에게 두고 생각한다. 그럼 그는 나에게 뭐였을까? 의문은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잠긴 목소리가 까끌거렸다.

“넌 뭐야?”

되묻자 남자는 목 메이는 얼굴을 했다가 대답한다.

“애런”

그는 나에게 애런이다. 불현듯 달린 것도 없는 날개뼈가 간지러웠다.

*

그 다음에는 정신 없는 탈출의 과정이었다. 잠깐 감상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던 애런은 선체가 쿠르릉 우는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리자마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이럴 때가 아냐. 우리 여기서 탈출해야 돼.”

말과는 달리 그는 정말 탈출에만 집중하진 않았다. 대뜸 먼저 검을 겨눴던 위험한 녹색 여자와 동행을 결정하지 않나, 안에서 사람이 울부짖던 포획낭을 하나 더 침착하게 열질 않나. ㅡ나도 저런 식으로 포획낭에서 꺼낸 걸까?ㅡ 이 상황에 대해 조또 아는 거 없긴 마찬가지인 일행은 자꾸 불어났다. 여기 전부를 구할 생각은 아니겠지. 불퉁한 얼굴로 이야기 나누고 있는 뒤통수를 잠깐 노려보다가 할 일 없이 의자에 묶인 개두 수술 중인 사람들이나 돌아봤다. 뇌를 고스란히 드러내고도 아직 놀랍게도 죽지 않은 사람들의 동공은 탁 풀려 있었다. 지금은 손을 갖다대도 아무 반응이 없다지만.

“씨시! 뭐 하는 거야?”

“확인 사살.”

언제라도 일어나 덤비면 귀찮아지겠지. 서걱 살을 써는 소리에 기함한 애런이 말문을 잃은 표정으로 돌아봤다. 뭐라고 꾸짖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 앞에서 더 설명하는 대신에 어깨나 으쓱했다. 이어질 일련의 과정을 벌써부터 예감할 수 있었다. 구태의연한 도덕적 비난들과 혐오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들. 바란 적도 없는 기대가 무너지는 과정이란 하나같이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어서 ……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더라?

“…일단 탈출부터 하자.”

다행히 선체가 한번 더 요동하면서 언쟁은 생략됐다. 잘된 일이다. 이후에는 자신 있는 분야만 이어졌다. 각양각색 뿔과 꼬리를 단 악마들은 처음 보지만 어디를 쏘고 베고 찔러야 죽일 수 있는지는 누구의 설명 없이도 알 것 같았다. 그건 본능의 영역이다. 등에 처음부터 매고 있던 대검과 석궁은 기대보다 낯익지 않았지만 죽인다는 의도에 따라 충실히 움직였다. 대장처럼 보였던 악마를 죽이고 그의 검을 뺏는 사이에 촉수 달린 괴물이 몸을 틀고 겨냥한 타겟을 바꿨다. 이제 넌 필요 없다. 씨시는 조종간에 다다른 일행을 곁눈질로 한 번 보고 마주 웃어주었다. 누가 할 말씀을.

추락은 모두를 공평하게 만들었다. 질량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게 뇌이든, 허접한 날개를 단-하여간 이 새끼들은 창의성이 없어- 악마들이든, 미끌거리는 촉수 괴물이든, 혹은 그냥 사람이든 무관하게 다 한바탕 웍에 볶아지는 야채처럼 붕 뜨고 튕기고 뒹굴고 처박혔다. 씨시는 동물의 속살처럼 물렁한 벽과 바닥에 검을 꽂아넣고 이를 악문 채 버텼다. 쩍 벌린 아가리처럼 조종실 앞쪽이 뜯겨져 날아가는 바람에 정면은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리고 있는 이 함선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뻔히 보였다. 얼마나, 어디에 떨어지면 그나마 살 가능성이 높을까. 차라리 호수에 처박히는 게 나을까. 김 나도록 대가리 핑핑 굴리고 있는데 문득 생각을 뚝 자르며 짤막한 비명이 끼어들었다.

“아!”

애런이었다. 격한 흔들림을 못 견디고 주륵 미끄러진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광경이 지나치게 느리고 선명하게 보였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지상도 아직 한참 멀고 발 밑엔 온통 숲인 지금 시점에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다. 그렇게 결론짓는 머리를 몸이 다음 순간 배신했다. 씨시는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반사 행동에 가깝게 붙잡고 있던 검날에 발을 올려 디디고 박차면서 민다. 훅 거리가 좁혀졌으나 아직 멀었다.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놓쳐서는 안 된다. 누가 머릿속에서 고함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허우적 내젓는 손길에 간신히 걸리는 옷깃을 확 끌어당겨 놀란 얼굴을 한 그를 끌어안는다. 숨 막히게 가까워지는 지면을 눈 앞에 두고있으면서도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그는 나에게 대체 뭐였을까? 별 수 없이 다시 궁금해하고 만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BL
커플링
#씨에이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