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

ZB

지크 헌터는 사랑을 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당기는 인력을 이해하고 또 휘두를 줄 아는 사람이다. 머리카락, 걸음걸이, 손목과 또 발목의 두께. 피부색과 아이홀, 웃을 때의 보조개와 목소리, 햇빛에 조금 더 탄 부분과 덜 탄 부분의 경계, 또렷히 직면하는 눈동자, 시니컬한 농담, 여지를 남기는 말 끝. 여러 가지 구실도 다양하게 무수한 사람에게 그는 이끌렸고, 돌이 던져진 호수처럼 동했다. 대개는 유쾌함과 함께 몸을 덥히고 지나갔지만 아주 가끔은 깊이 요동했다. 지진처럼 그를 들추고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어 놓았다. 그는 결코 필요해서 결혼하지 않았다. 사랑해서 했다. 비록 평생을 헌신케 될 줄 알았던 처음의 맹세와는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지만, 그래도 가장 깊이 사랑한 여자에게 자신을 투신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에겐 아무것도 헷갈리는 게 없었다. 그는 제 사랑에 대한 확신 가운데 청혼했다.

비스는 자신이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까?

어깨에 기대 잠든 그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오해에 대해서 곱씹는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아주 외로워보였다. 자신은 그게 뉴욕의 대안지능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주던 키드 팀원들과 미션 후 또 다시 헤어지게 되었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래서 호프나 대니가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걸 꽤 놀랍게 여겼다. 비스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사람들의 목록을 적으면 자신은 한참 밑단에 겨우 적히면 다행인 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크는 비스가 조금 운이 없었거나 아니면 그날따라 변덕스러웠던 모양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머리를 내리친 것 같은 충격은 비스가 하고 있는 게 사랑인 줄 알아차렸기 때문에 온 것이다. 네가 있으면 지옥 같은 그곳도 괜찮았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말간 낯에 사랑 말고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겠어. 지크 헌터 본인이 바로 그런 사랑을 경험한 적 있었으므로 달리 변명하거나 둘러댈 수도 없이 항복처럼 인정하고 만다. 그러니까 헷갈리는 건 그쪽이 아니다.

폴이 동정만으로는 구해줄 수 없는 일이 아니라고 할 때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비스를 향한 감정 가운데 가장 선명하고 뚜렷한 게 동정이었다. 지크 헌터는 자아를 지녔으면서 그 인식의 첫걸음을 인간과 닮았으나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는 비스를 딱하게 여긴다. 인간을 학습함으로써 자신을 구성하지만 인간은 될 수 없는 모순을, 그리고 거기서 스스로 외로움을 발견하는 지점을 가장 불쌍하게 느꼈다. 그러니까 옆에 있어주고 싶은 건데 그게 그렇게 말이 안 되나. 그러나 이제와서는 동의한다. 비스가 하는 게 사랑인데, 거기에 동정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참으로 오랜만에 지크는 자신의 감정에 붙일 이름을 손으로 헤아리듯 고른다.

쓰다듬는 손가락에 걸리지 않는 검은 직모와 어째 좀 불안불안한 걸음걸이, 한 손아귀 안에 들어올 얄팍한 손목이나 발목, 창백한 피부, 검은 눈, 갈라지거나 잠긴 목소리. 전부 기억하고 있고 또 좋아하지만 너에 대해 말할 때는 이런 것들이 아무래도 본질이 될 수는 없다. 그보다 결국은 무엇을 소원하는가의 문제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닌데 네게 주고 싶다. 넉넉한 사람이 아닌데 너를 채우고 싶다. 네가 나로 인해 외롭지 않을 수 있다면 모든 우선순위 다음에는 기꺼이 투신하고 싶다. 이미 한번 굳은 생각을 두드려 깨친 네가 어디까지 날 데려가고 뒤바꿀지 목격하고 싶다.

예감한다. 잠든 그가 깰 때 쯤에는 알맞은 익숙한 이름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