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유승대ts]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24.04.11. 재승데이 기념글
가로등 켜진 어느 골목길, 택시 한 대가 멈추어 선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뒤에 탄 남성이 카드를 내밀고 계산하는 동안 먼저 뒷문을 열고 내린다. 그러나 곧장 다시 허리를 숙여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팔을 쭉 뻗어서 뒷좌석에 널브러진 여성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데, 계산을 마친 택시 기사가 카드를 돌려주며 말한다.
"아이고, 아가씨가 많이 취했네!"
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남자는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멋쩍게 웃는다. 그리곤 능숙하게 술에 떡이 된 여자친구를 등에 짊어진다. 사람을 함부로 짐짝 취급하면 안 된다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면 그건 업는다기 보단 짊는다는 표현이 맞았다. 여자는 키가 어찌나 큰지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였고,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와 함께 긴 팔다리가 바닥에 닿을 것처럼 늘어졌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영차, 한 번 하더니 여자를 등에 업은 채로 일어선다. 택시 문을 닫으며 기사님께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남기고는 뒤돌아서 어두운 밤거리를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남자의 이름은 진재유. 이래 봬도 촉망받는 대학 농구 선수다. 등에 업힌 여자의 이름은 임승대. 마찬 가지로 같은 대학 농구 선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진재유는 남자 선수 중 가장 키가 작고 임승대는 여자 선수 중 가장 키가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같은 중,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대학에 들어와서 교제하기 시작한 지 이제 100일 정도 되었다.
어느덧 자취방 문 앞에 다다른 진재유가 잠시 멈춰서더니 숨을 한 번 고르고 등에 임승대를 업은 채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심호흡과 함께 재빨리 한 팔을 풀어서 도어락을 누르기 시작한다. 제아무리 운동 깨나 했다는 진재유여도 한 팔로만 2미터가 넘는 여자 친구의 무게를 지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등 뒤로 돌려 주먹 쥔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도어락을 열고 문이 열리자마자 잽싸게 한쪽 발을 문틈 사이로 끼워 넣는다. 자유로워진 팔을 다시 뒤로 돌려서 안정감 있게 등에서 늘어진 여자친구를 받쳐 들었다. 문이 닫히지 않게 막고 있던 발을 더 벌려서 문을 크게 열고 안으로 서둘러 들어간다. 바람 탓인지 등 뒤에서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혹시라도 큰 소리에 승대가 깼을까 고개를 돌려봤지만 완전히 뻗었는지 임승대는 미동조차 없다. 이걸 안심해야 하는 건지, 걱정해야 하는 건지. 복잡한 마음으로 진재유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지방을 넘을 때엔 저도 모르게 하이고,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리 날씬하다지만 키가 2미터가 넘고 운동선수인 임승대는 웬만한 남자들 못지않게 무게가 나갔다. 거기다 몸을 제대로 못 가누니 곱절은 더 무거웠다. 그래서 침대로 가자마자 거의 쓰러지듯 눕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옆에서 철퍼덕 소리를 내며 따라 엎어진 인사불성 상태의 여자친구를 보던 진재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가스나야, 인나 봐라. 씻고 자야지."
진짜로 일어날 거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깨어날 기미가 요만큼도 보이질 않는다. 한숨과 함께 진재유는 홀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임승대의 발을 보고 현관에서 미처 벗기지 못 한 신발을 벗기기 시작한다. 다 벗긴 신발을 한 손에 겹쳐 들고 임승대의 발을 하나씩 가지런히 이불 속으로 넣어주고 나서야 그는 다시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진재유는 영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침실 밖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임승대. 20살, 꽃다운 여대생. 현재 상황은? 오랜 친구에서 이제는 남자친구가 된 진재유의 자취방 침실 입성에 마침내 성공하다!
허나 아직 축배를 들기엔 이르다. 이제 막 1차 목표를 달성했을 뿐.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바깥 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니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다. 승대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귀까지 걸렸다. 오-케이. 오늘 내 진잼민이 잡아 묵는다!
그렇다. 술에 취하긴 개뿔. 지금까지 다 연기였다. 아니, 벌써 사귄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진재유 점마가 먼저 라면 먹고 가잔 소리 한 번을 안 하는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새침하기론 대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자 임승대가 술에 떡이 된 연기까지 했겠는가. 그간 당한 굴욕을 떠올리자 절로 힘이 들어가 손에 쥔 이불이 잔뜩 구겨졌다.
남자친구가 자취를 하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에 초대한 적이 없다면 믿겠는가? 참고 참다가 먼저 자취방 구경 한 번 안 시켜주냐고 툴툴거리며 물었더니 별로 볼 것도 없댄다. 그러면서 항상 승대는 기숙사 통금 시간 전에 꼬박꼬박 문 앞까지 데려다주는 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씨바, 내가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차라리 신데렐라면 통금이 12시기나 하지. 이건 뭐 처지가 동화 속 공주보다도 못 했다. 오죽하면 저 새끼 저거 고자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로.
고자인지 아닌진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일단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그새 다 씻고 나온 진재유가 다시 침실로 돌아오는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임승대는 재빨리 취한 척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물론 긴 머리를 신경 써서 한쪽으로 넘기고 포즈까지 이쁘게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철컥. 문이 열리고 진재유의 익숙한 발소리가 침대 앞으로 오고 있었다. 아씨, 떨려. 심장아 나대지 마, 제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는지 매트리스가 살짝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사이로 진재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승대, 인나봐라. 승대야. 그러면서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눈이 움찔거렸다. 이제 슬슬 가볼까? 눈을 몇 번 끔뻑거리다가 부스스 일어나 술에서 막 깨어난 척 연기를 하는데.
"우웅, 진잼민...?"
"응. 이제 정신이 좀 드나?"
"...."
...이거 꿈이지? 아니, 차라리 술이 덜 깬 거라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눈앞에 있는 제 남자친구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진재유는, 목이 다 늘어난 하얀 난닝구에 무슨 아저씨들이나 입을 법한 퍼런 줄무늬가 들어간 트렁크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가 목에는 얼마나 오래됐는지 군데군데 색이 다 빠진 수건까지 두르고! 심지어 수건엔 '제몇회 쌍용기 우승 기념' 이딴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시발, 대체 어떤 남자가 자취방 침대에 여자친구가 누워있는데 저 꼬라지를 하고 나오는데! 승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하는데도, 진재유는 눈치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인났으면 퍼뜩 씻거나 아님 양치라도 좀 하라는 잔소리나 지껄이고 있었다. 더는 참지 못 하고 승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진잼민-!!!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당황해서 되묻는다.
"뭐, 뭐고? 와 난린데?"
"니는 진짜…."
이때까지만 해도 진재유는 사태 파악을 하지 못 하고, '저 가스나,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같은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까지 씩씩거리던 승대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급기야 어린애처럼 으앙-, 하고 울어버리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화를 냈다가 울었다가 하는지, 통 영문을 모르겠으나 재유는 일단 우는 승대부터 달래줘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러나 승대는 저를 달래려 내민 재유의 손을 탁 쳐내버렸다. 그러더니 잔뜩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니한테 내가 그래 매력이 읎나!"
"...먼 소리고?"
"내한테 관심이 있으면 니가 그 꼴을 하고 나오겠나!!!"
그 꼴? 내 꼴?
그제서야 진재유는 제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이 남자의 상식선에선 도대체 뭐가 문제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내 원래 집에서 이래 있는데…."
"그게 문제란 기다!!!! 내는 오늘 혹시 몰라가 속옷도 이쁜 걸로 입고 왔는데…."
아무리 눈치 팔아먹은 진재유여도 저 말의 의미를 모를 수는 없었다. 급속도로 어색해진 공기와 함께 진재유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갈피를 못 잡고 허공에서 우왕좌왕하는 손을 쥐었다 폈다가 하면서 승대 쪽을 힐끔 쳐다보는데, 어느새 승대는 침대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무릎을 세워 끌어안은 자세로 훌쩍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입을 삐죽 내밀더니, 저 들으라는 듯이 '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벽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 아, 쟈 또 삐짓네.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던 진재유가 침대 위로 올라가 임승대의 왼편에 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그, 저기, 승대야...."
"...."
"승대야, 내 미안타. 내가 너무 무심했다. 맞제?"
"...."
"니가 싫다 하면 바로 갈아입고 올 게."
"...됐다. 이제 와서 무슨...."
"아이다. 내 지금 갈아입으러...."
"아, 됐다니까! 그냥 있어라."
일어서려 몸을 반쯤 일으킨 진재유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겨서 기어코 도로 제 옆에 앉히더니 승대는 다시 또 고개를 팽 돌려버렸다. 하지만 진재유는 알았다. 아까 그건 진짜로 삐진 거고, 이거는 삐진 척을 하는 거다. 여기서 조금만 더 풀어주면 승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애교 많은 여자친구로 돌아온다. 진재유는 오른손을 뻗어 무릎 위에 올려진 승대의 왼손을 붙잡아 깍지를 끼었다.
"승대야, 내 맨날 니 맘도 몰라주고 잘 못 해줘서 미안타. 내 눈치가 없어가 그런다."
"...알긴 아네."
"그래도 승대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다. 내가 그럴 리가 있겠나. 우리 승대, 내한테 얼마나 이뻐 보이는데."
"흥. 이제 와 무슨 수작이고. 됐다, 필요 없다!"
"아이다. 우리 승대 내 눈엔 맨날 이삔데? 승대야, 이쁜 얼굴 좀 보여도. 응?"
이쯤되면 다 풀렸겠지 싶었다. 그러나 승대는 여전히 무릎 사이에 파묻은 고개를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깍지 끼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서 승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더니 몸을 움찔 떨었다. 이내 가만히 손길을 느끼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눈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물 탓에 흐려진 시야에 걱정 가득한 진재유의 얼굴이 보였다.
임승대는 억울했다. 아무리 연인 사이여도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제가 더 사랑하는 건 분했다. 유치하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임승대는, 진재유가 저를 '승대야'라고 불러주기만 해도 좋았다. 화는 진작에 다 풀려있었다. 그런데도 저 다정한 얼굴과 손길이 밉기만 했다. 수도 없이 이쁘다고 사랑한다고 해줘도 마음속 불안함이 가시질 않는데. 정말이지, 진재유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깍지 낀 손을 잡아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승대가 재유의 가슴팍에 안겨 왔다. 여전히 꽉 잡은 손은 그대로 둔 채로 훌쩍이는 등을 토닥여주니 점차 울음이 잦아들었다. 조금 진정하고 나니 승대의 얼굴 근처에서 문제의 물 빠진 수건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걸 보니 다시 또 화가 치밀어올랐다. 승대가 짜증스런 손짓으로 수건 끝을 잡아채서 바닥으로 휙 던져버렸다. 진재유는 그걸 보고도 귀엽다는 듯 웃으며 품에 안긴 어깨를 꼬옥 끌어안았다. 반면, 임승대는 아직도 무슨 불만이 남았는지 진재유를 올려다보며 볼을 한껏 부풀렸다. 그리고 잡힌 손을 뿌리치더니 양손으로 진재유의 양 볼을 쭈욱 잡아 늘였다.
"진잼민! 니 밉다! 니는 진짜 내 맘도 몰라주고!"
"아, 아니, 내 미안타고...."
"됐다, 마! 이미 분위기 다 조졌다!"
"그라믄.... 승대 니 그냥 갈 거가?"
에, 에-?
자신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오는데도, 승대는 말문이 막혀서 더는 대꾸하지 못 했다. 기분은 이미 잡치긴 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가기는 또 뭐 하고. 버벅거리는 사이 진재유가 승대의 양 손목을 각각 붙들더니 자신의 얼굴을 붙잡은 승대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더니 붙잡은 손목을 그대로 천천히 뒤로 밀었다. 풀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등이 침대에 맞닿아 있었다. 바로 위엔 붉게 달아오른 진재유의 얼굴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승대는 제 얼굴도 비슷하게 벌게졌을 거라 생각했다. 둘 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만 꿀꺽 삼키는데, 먼저 입을 연 건 진재유였다. 그.... 승대야, 니....
"속옷 이쁜 걸로 입었다며.... 안 보여줄 기가?"
임승대는 자기 이름에 불만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여자애 이름이 '승대'인데, 불만이 없으면 그게 사람이냐. 보살이지. 아무튼 임승대는 제 이름이 너무 싫었다. 승대네 형제들의 돌림자가 '승'자인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끝 자가 '대'인 건 너무하지 않은가! 씨바, 이게 어딜 봐서 여자애 이름이냐고! 속상한 마음에 이름을 이렇게 지어주신 아빠를 원망해 봐도, 튼튼하고 커다랗게 잘 자라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왜 난리냐는 소리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 이름 탓인지, 승대는 키가 쑥쑥 자라긴 했다. 문제는 너무 많이 자랐단 거다.
남들이 들으면 키 크면 좋은 것 아니냐며 복에 겨운 소리라고 하겠지만 막상 여자애 키가 2미터가 넘는다고 하면 다들 학을 뗐다. 길거리를 걸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한 번씩은 돌아봤다. 그런데 꼭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려 드는 놈들이 있었다. 그 불쾌한 시선에 넌더리가 나서 일부러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다. 그랬더니 이번엔 멀리서도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냐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남들보다 훨씬 커다란 키와 특이한 이름은 한창 예민한 사춘기 여자아이에겐 불행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 불행이 더 이상 불행하다고 느껴지지 않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진재유였다. 중학교 입학 하자마자 끈질기게 입부를 권유하던 코치가 있었다. 네 키에 농구를 안 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면서 지겹게 쫓아다녔는데 승대는 콧방귀만 뀌었다. 애초에 키를 가지고 들먹인 순간 승대에겐 밉보인 거나 마찬 가지라 농구부 입부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농구부가 꽤 큰 지역대회에 진출하는 바람에 단체로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진재유를 처음 본 건 그날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진재유는 그때도 농구부에서 제일 작았다. 그런데도 코트 위에서 제일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리고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초짜의 눈으로 봐도 제일 농구를 잘했다. 그렇다고 임승대가 진재유한테 한 눈에 반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저렇게 작은 애도 잘할 수 있는데 나도 한 번 해볼까 싶었던 것 뿐이었다. 아무튼 그날을 계기로 임승대는 농구부에 입부했고, 거기서 진재유를 만났다.
이석중 농구부는 남자부와 여자부가 따로 있긴 했지만 연습은 종종 같이 했다. 신장에 장점이 있긴 했으나 남들보다 늦게 운동을 시작한 탓에 승대는 처음엔 드리블을 하는 것부터 애를 먹었다. 연습 초반엔 코치님이나 선배들도 괜찮다고, 처음엔 다들 어려워한다며 다독이는 분위기였지만 뒤에서는 다른 말이 들려왔다.
거 봐, 키 큰 애들은 드리블을 못 한다니까.
저럴 줄 알았어. 하여간 키가 크면 노력을 안 해.
근성이 없다니까. 애초에 타고난 키가 큰데, 무슨 노력을 해봤겠어?
아, 키가 커서 데려왔더니만. 이거 영 키 큰 거 말곤 쓸모가 없네.
그건 잠자코 있던 승대의 자존심을 긁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임승대는 지는 걸 정말 싫어하고 실수하는 모습을 남들 앞에서 보이는 걸 끔찍하게 여겼기에, 부 활동 시간에는 좀처럼 열의가 생기질 않았다. 그런 승대의 모습을 보며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났다. 속상함에 몰래 우는 날도 늘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쪽팔리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은 울음을 그치고 남들 다 귀가한 늦은 시간에 몰래 체육관으로 향했었다.
이상하게도, 분명히 비어있어야 할 체육관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농구공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있는 건지 몰래 봐야겠단 생각에 문을 살짝만 열어서 빼꼼 들여다보았더니, 안에서 홀로 연습 중인 진재유의 모습이 보였다. 임승대는 망설였다. 어차피 쟤 혼자인 거 같은데, 들어가서 같이 연습해? 아니면, 더 기다렸다가 쟤 가고 나면 혼자 해? 열어둔 문을 닫지도 못 한 채 가만히 서서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먼저 인기척을 느낀 진재유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도둑이 제 발 저린듯이 당황한 임승대를 보면서 진재유는 잠시 멀거니 서 있다가 이내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여기 골대가 하나 더 비었다며. 같이 연습하자며.
남들이 보는 앞에선 연습을 못 하겠다며 예민하게 굴던 것이 무색하게 진재유 옆에선 연습이 잘 됐다. 물론 그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근데 분명 그것만은 아니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봐도 딱히 답이 떠오르진 않았다. 어쨌든 좋은 선생님에게 남몰래 특훈을 받은 덕에 승대의 농구 실력은 쑥쑥 늘어만 갔다. 실력이 늘자 자연히 농구도 재밌어졌다. 어느덧 모두가 떠난 빈 체육관에서 둘만 남아서 하는 농구 연습은 지루한 보충 수업이 아닌 재밌는 비밀과외가 되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둘이서 해가 지고도 한참을 남아서 공을 튀기고 있었다.
'와, 승대 니 진짜 많이 늘었다.'
'내가 쫌 한다.'
'맞다. 니는 키가 커가, 쫌만 더 하면 덩크도 금방 할 수 있을 거다.'
'재유, 니도 내는 키가 크니까 쉽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뿔싸. 키 얘기가 나와서 저도 모르게 민감하게 반응해버렸다. 대충 얼버무리려 서둘러 말을 이으려는데, 진재유의 반응이 더 빨랐다.
'와? 누가 니한테 그런 말 했나?'
'아니, 뭐.... 다들 그런다 안 하나.'
'키는 뭐 아무나 크는 줄 아나. 다들 니가 부러워가 그런다. 신경 쓰지 마라.'
그러면서 옆에 나란히 앉은 승대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는 게 아닌가. 이 자슥이 미칬나?! 갑자기 남사스럽게! 아, 잠깐. 지금 내 땀 많이 흘려서 냄새날 텐데 너무 가까운 거 아이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돌아다니는데 진재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또, 승대 니 만큼 열심히 하는 아가 농구부에 또 있나? 없제? 니는 재능도 있는데 노력도 한다 안 하나. 그니까 남들 하는 소리 다 무시해라. 금마들 니가 다 따라잡고도 남는다.'
'...내도 안다. 인제 머리는 쫌 그만 만지라.'
'아, 미안타. 승대야.... 내도 모르게....'
화들짝 떨어져 나간 손이 아쉽다는 생각도 잠시, 시방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지금 진재유 입에서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이 나왔다고?
'...니 방금 내한테 뭐라했노?'
'응?'
'아니, 니 내한테 승.... 승대야라 했잖아....'
'기분 나빴나? 그런 거면 미안.... 내도 모르게 그래 나왔네.'
벌렁거리는 심장을 감추려는 듯 승대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려버렸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이대로 둔다면 다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뭐지? 내 진재유 좋아하나? 아니면.... 진재유가 내한테 관심 있나?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어보아도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후에 들려온 말은, 임승대가 평생 잊지 못 할 말이었다.
'근데 승대야라 부르면 안 되나? 니 이름이 이뻐가 이래 부르니까 좋은데?'
그 순간 임승대는 깨달았다. 진재유와 함께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를.
진재유는 단 한 번도 임승대에게 여자애가 무슨 키가 이렇게 크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진재유는 단 한 번도 임승대의 큰 키가 불편하다는 눈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진재유는, 임승대의 이름을 듣고도 여자애 이름이 그게 뭐냐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승대? 승대야? 니 갑자기 와 우는데...? 아니, 승대야....'
그 누구도, 빈말로라도 이쁘다는 소리를 하지 못 하던 이름을 이쁘다고 불러주었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평생 못났다고 생각했던 이름도 누군가의 이쁘단 말 한 마디에 그간의 서러움이 눈 녹듯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그건 네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줬을 때 내게 온 작은 기적이었다.
"...내는 니가 고잔 줄 알았다."
임승대의 폭탄 발언에 진재유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체 건강한 남자한테 그 단어는 금기시되는 건데. 아무튼 이번엔 제아무리 목석같은 진재유여도 타격이 크긴 했던 모양이다. 이어서 나오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그럴 리가 있나."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 않나! 니 그동안 내를 꼬박꼬박 들여보내기나 하고, 오늘도 이래 이쁜 여자친구가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꼬라지를 하고 나왔다!"
"아니, 그건 내가 미안하다 캤는데...."
진땀 빼며 시선을 피하는 진재유를 보자 그간 겪었던 설움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아유, 고소해. 임승대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옆에 누운 진재유의 맨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러자 위에서 진재유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모르는 소리.... 내도 그동안 다 참은 거다."
"뭐라고? 니는 미련하게 그걸 와 참고 있는데?! 앞으로 참지 마라! 알겠나?!"
위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강하게 피력하자 진재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이 제법 만족스러워서 승대는 다시 재유의 가슴팍을 꽉 끌어안았다. 진재유가 팔을 들어서 승대의 맨 어깨를 감싸자 그 사이 생긴 틈으로 승대가 더욱 파고들었다. 둘 다 홀딱 벗은 상태에서 상체가 바짝 밀착되자 진재유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승대의 뺨 바로 아래에서 진재유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승대야, 그.... 니가 참지 말라 해서 그런 건 아닌데...."
고개만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말을 빙빙 돌리는 진재유가 보였다. 음, 저 얼굴은.... 아까 전에 내한테 수작 부리던 얼굴이랑 똑같은 거 같은데? 역시나 여자의 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한 번 더 해도 되나? 응? 승대야?"
아, 진잼민! 니 그렇게 부르면 반칙이라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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