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여름엔 성급해지니까

고죠우타

Dusk by 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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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고전으로 고죠 사토루가 온대요. 자료를 넘겨주기 위해 아침 일찍 만난 보조감독이 하는 말에 우타히메는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교내 분위기가 묘하게 들떠있다 했더니, 눈앞의 보조 감독을 포함하여 아직 고죠를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만들어낸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니 그들이나 상대해주면 좋으련만, 고죠는 굳이 온 힘을 다해 그를 거절하는 우타히메를 상대로 신경을 긁어온다. 이미 10년 이상 반복된 패턴이니 이제는 평범하다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우타히메는 그것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최근엔 정말 피곤했다. 오프날까지 임무가 들어오기도 다반사, 그에 딸린 서류 작업만 해도 쉽지 않은데 우타히메는 교사이기까지 했다. 학생들의 임무에 관한 관리에 시험 기간도 겹쳐 일이 산더미라 매일같이 야근 중이었다. 거기에 개인적 고민거리도 있었다.

이 피곤함에 고죠까지 얹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 수업은 오전뿐. 보고가 필요한 일을 점심 이후에 짬을 내어 처리하고 나면 나머지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료가 꽤 무겁긴 하겠지만 고죠를 만나는 것보다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집에 가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허가가 떨어졌다.

보고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책상에 일할 거리를 늘어놓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차가운 커피 한 잔과 함께 앉았다. 눈치 볼 것 없이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보고서를 검토하고 서류를 처리한다. 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마음이 제법 편했다. 가끔은 괜찮을지도. 우타히메는 컵 안에 들어있던 얼음을 오도독 씹으며 생각했다.

 

집중을 깬 것은 딩동 하고 울린 현관 벨 소리였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4시. 찾아올 사람도 없고 시킨 물건도 없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인터폰을 보니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반쯤 까맣게 가려진 얼굴. 무척 수상하지만 눈에 익은 인물의 모습이었다. 고죠 사토루. 사고가 멈춘다. 고죠 사토루? 그 녀석이 왜 여기에?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아니, 그보다 내가 지금 집에 있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어떻게든 상황 파악을 하는 사이 그가 화면에서 멀어졌다. 그대로 돌아가 주었다면 고마웠겠지만, 안타깝게도 고죠 사토루는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우타히메. 안에 있는 거 알아.”

저놈의 육안. 우타히메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짠, 하는 소리와 함께 인사보다도 먼저 들이밀어 진 것은 기념품 봉투였다. 우타히메가 잘 못 먹는 단 과자다.

“필요 없어.”

“기껏 가져왔는데 너무하네. 내가 먹을 수밖에.”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산 것이 분명했다. 우타히메는 현관에 기대어 이마를 짚었다. 기껏 고죠를 만나지 않겠다고 집까지 온 건데, 이래서야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별달리 용건도 없는지 고죠는 우타히메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결국 우타히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온 거야.”

“아니, 우타히메가 벌써 집에 갔다길래 어디 아픈가 해서.”

독신이라 서러워서 혼자 울고 있기라도 하면 위로도 해줄 겸. 그런 소리를 늘어놓으며 고죠는 기념품 봉투를 든 반대쪽 손을 슬쩍 들어 올려 보였다. 약국 봉투가 움직임에 따라 바스락거렸다. 하는 말이 짜증 나긴 해도,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하기도 어렵다.

“안 아파. 그보다 내가 집에 온 건 누구한테 들은 거야? 집은 또 어떻게 알았고.”

“다 방법이 있지. 우타히메는 아픈 것도 아니면서 왜 집에 있어? 근무 태만 아니야?”

무슨 방법인데. 정말 묻고 싶었지만 고죠에게 물은들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고죠 사토루가 아닌가. 뭘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걸 캐내겠다고 파고드는 건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우타히메는 간단하게 용건만 말하기로 했다.

“집에서 근무 중이니까 방해하지 말고 가.”

말을 남기고 닫으려고 한 현관문이 고죠에게 간단하게 막혔다. 우타히메가 노려보아도 고죠는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괜히 울컥한 우타히메가 소리쳤다.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일이라도 돕든가!”

“응, 좋아.”

너무나 쉽게 대답이 돌아왔다. 우타히메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승낙의 답이었다. 불의의 일격에 멍해진 우타히메를 두고 고죠는 느긋한 ‘실례합니다’와 함께 우타히메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우타히메가 일하던 자리의 맞은편에 앉은 고죠는 안대를 내리고서는 정말로 서류를 들춰보더니 그중 몇 개를 빼내 일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현관 근처에서 그가 무슨 속셈인가를 가늠하던 우타히메는,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는 음료라도 대접해야 한다는 뇌내 프로세스를 작동 시켜 일단 아이스티를 한 잔 타서 고죠의 옆에 두었다.

“아, 고마워,”

한 모금 정도 마시고서는 손에 든 서류를 마저 읽어내려간다. 집중했는지 평소의 웃음기가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글자를 쫓아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쪽에 임무 때문에 온 거 아니야? 저녁에 끝나는 거 아니었어?”

“어라, 우타히메. 생각보다 나한테 관심이 많나 보네?”

“아침에 보조 감독한테 들은 거거든.”

둘 사이의 조용한 분위기를 차마 견디지 못하고 말을 꺼내 보았지만 고죠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장난치듯 받아칠 뿐이었다. 그리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평소에 이런 걸 물으면 보통 ‘약한 누구랑 달라서 일찍 끝내고 왔다’는 식의 대답이 돌아오고는 했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말투 때문에 잠깐 의식하지 못했는데, 사실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주술계는 만년 일손이 부족하다. 그리고 고죠는 셋밖에 없는 특급 주술사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금 빠르게 일을 해치운다 한들 여유를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스케줄이 넉넉하게 짜여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얼버무린 대답을 다시 묻는다고 답해줄 리 없을 것 같아, 우타히메도 그냥 입을 다물고 잠자코 서류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임무가 두 개인데, 앞의 임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어서 시간이 비었어. 좀 이따 다시 나가봐야 돼.”

“그런데 왜 여기서 일을 하고 있어!”

잠시간의 정적이 무색하게 불쑥 꺼낸 대답을 듣고 우타히메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고죠는 왠지 키득거리며 ‘왤까?’하고 되묻더니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를 내려두고서 새로운 것을 몇 개 더 들고 갔다.

 

우타히메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아플까 봐 찾아왔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잠깐 비는 시간에 그런 수고를 들일만큼 대단한 사이도 아니었다. 결국 아픈 것도 아니었으니 돌아가서 쉬기나 하면 될 텐데, 여기 앉아서 말없이 일을 하고 있다. 혹시 이상한 쪽으로 발전된 장난인가? 사람을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 놀릴 일인가?

게다가 도대체 집은 어떻게 알고…… 아니, 잠깐.

우타히메는 여기서 자신의 옷차림을 눈치챘다. 민소매에 반바지. 여름에 자주 입는 홈웨어이다. 이런 차림 괜찮은 건가? 이성이긴 하지만 10년 이상 아무것도 없던 선후배 사이에다 고죠는 지금도 일밖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니 상관없나. 고죠와의 거리감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잘 가늠이 가지 않는다.

아냐. 우타히메는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잡다한 생각이 드는 것은 집중을 못 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심호흡을 한 후 학생들의 보고서에 시선을 던졌다. 다시금 방에 적막이 깔렸다.

“아, 슬슬 나가봐야겠는데.”

한창 집중하던 중 들린 고죠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어보니 시곗바늘이 5시 10분을 조금 넘기고 있었다. 남아있는 아이스티를 단숨에 마셔버리고서 일어선 고죠를 따라 우타히메도 일어섰다. 신발을 신는 넓은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고죠.”

“응.”

“혹시…… 임무 끝나고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래?”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내뱉은 순간 후회했다. ‘우타히메와 달리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서.’ 혹은 ‘그렇게 나랑 같이 있고 싶어? 우타히메 대담하네.’ 따위의 대답이 나올 것이 뻔했다.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할 수 없어 그저 각오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오, 조금 늦을 수도 있는데 괜찮아? 기왕이면 우타히메가 직접 만들어준 게 좋은데.”

순간 당황하여 우타히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면 임무 끝나고 연락할게. 그렇게 말한 고죠가 틈도 없이 손을 흔들며 나가버려서, 우타히메가 할 수 있는 것은 닫혀버린 현관문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뒤 고죠가 정리해둔 서류를 슬쩍 살펴보았다. 고작 1시간 정도였는데, 전부 말끔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정말 성격 말고는 흠잡을 곳이 없네. 왠지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덕분에 일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날 듯했다. 이번엔 확실히 도움을 받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뭘 해줘야 하나.’

남은 일을 하나씩 정리해가며, 우타히메는 결국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 다시 등장한 고죠의 손에는 디저트 두 종류와 샴페인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최근 일이 많아 술은 자제하고 있었는데, 샴페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몇 잔 입에 대었다. 생각보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역시 이상했다.

왜 이렇게 즐겁지? 살짝 취기가 도는 머리로 우타히메는 생각했다. 약속처럼 신경을 긁어오던 그가 오늘따라 별말이 없어서일까. 평소엔 좀 더 귀찮고 짜증 나게 굴었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상냥한 느낌이다. 차려진 음식에도 분명 무언가 꼬투리를 잡을 거라 생각했는데 맛있게 먹어주었다.

고죠가 사 온 디저트는 놀랄 만큼 입에 잘 맞았다. 과하지 않은 은은하고 깊은 단맛에 재료 본연의 맛이 어우러져 부담스럽지 않은 덕에 하나를 금세 먹어 치웠다. 고죠 앞에 놓인 것은 쳐다만 봐도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아 보이는 것이었으니, 아마 우타히메의 입맛에 맞춰 사 온 것일 테다. 역시 오늘 고죠는 뭔가 이상하다…….

“우타히메.”

“응?”

“결혼한다며?”

갑작스러운 그 말에 우타히메는 하마터면 목구멍으로 넘기기 직전이었던 디저트의 마지막 한 입을 뱉을 뻔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다니, 역시 고죠는 고죠였다.

이 화제는 현재 우타히메의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물론 자꾸만 몰려오는 많은 일과 눈앞의 이 남자도 피곤함에 한몫했지만, 정신까지 갉아먹는 근본적 원인은 최근 부모님 등쌀에 못 이겨 나가고 있는 맞선이었다.

맞선은 결국 결혼을 위한 것이고, 그런 의미로는 곧 결혼하느냐는 물음은 타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타히메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맞선 역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나가고 있는 탓에 '결혼 생각이 없다'고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 결국 이거였나. 오늘의 미묘하게 상냥한 태도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초석이었던 모양이다. 우타히메는 땅이 뚫어져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고죠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눈앞의 그릇을 정리했다.

“설거지할 테니까 마저 먹고 있어.”

그렇게만 말하고 우타히메는 개수대로 향했다. 물을 틀고, 그릇을 하나하나 씻는 동안 고죠는 정말로 남아있는 디저트만 먹고 있었다.

그래서 정리를 대강 끝내고 뒤를 돌았을 때 눈앞까지 다가와있는 고죠의 존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타히메, 결혼해?”

숨을 다 삼키기도 전, 아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고죠가 다시 물어왔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역시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결혼을 하든 말든 고죠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흐음. 엄청 싫다는 얼굴이네.”

사람이 이렇게 피곤해하는데, 고죠의 말투는 어딘가 신난다는 듯 들렸다. 내 불행이 그렇게까지 즐거운 걸까. 고죠한테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이 있었던가. 급기야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반성할 점을 찾기 시작한 우타히메에게, 고죠가 갑자기 폭탄을 던졌다.

“그러면, 나랑 할래?”

“……뭐?”

“나랑 하자고. 결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너무 놀라 말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표정에는 분명 그런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을 것이다. 고죠는 웃고 있었고, 온종일 당황하여 굳어버리길 반복하던 우타히메는 드디어, 폭발했다.

“너랑 결혼하라고? 진심이야? 결혼할 마음도 없이 맞선 나가는 것도 피곤해 죽겠는데, 너까지 갑자기 결혼을 하자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과로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거 아니야? 고죠, 반전 술식이 고장 난 걸지도 몰라. 지금 당장 쇼코한테 연락하자.”

화를 내다보니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타히메는 정말로 쇼코에게 전화를 걸 기세로 전화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미친 소리를 하는데 걱정이 안 되게 생겼어?”

“걱정해 주는 건 기쁜데, 좀 들어보라니까? 우타히메도 짐작하겠지만, 나도 주위에서 결혼하라는 소리 때문에 제법 귀찮거든. 물론 내가 당주니까 우타히메처럼 선보러 다니라고 강요할 사람은 없지만, 그런 것들도 다 피곤하단 말이지. 계약 결혼, 이라고 말하면 좀 촌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서로 이용해서 편해지자는 거야. 어때?”

내일의 일정을 말하듯 평온한 어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타히메의 마음도 점차 진정됐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싫어.

고죠랑 결혼?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였다. 애초에 이 남자 자체가 우타히메의 오랜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게다가 그 이름도 드높은 3대 가문의 당주의 아내 자리. 서로 편해지자니? 한 쪽은 전혀 편해질 수 없지 않은가.

그걸 심지어 자신에게 제안하다니, 고죠에게 무슨 득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역시 고죠는 고장 나 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반전술식이 있고 최강이라고 해도, 특급 주술사에 당주에 이런저런 견제를 받고 있는 그가 떠안고 있는 일의 양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판단한 우타히메는 조용히 타이르기 시작했다.

“고죠. 확실히 난 지금 이거 때문에 피곤하긴 하지만, 조금만 버티면 돼. 얼굴에 이런 흉터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까 조금 지나면 결혼하겠다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쯤 되면 부모님도 포기하시겠지. 네가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설령 네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나는 너한테 전혀 도움이 안 될 거고. 너 정도면 다른 괜찮은 사람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보다 결혼이 너한테 정말 필요한 일인지부터 잘 생각해 봐.”

아무리 짜증 나고 싫어도 고죠는 우타히메의 후배였다.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진심을 담아 조언하자, 고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받아들여 주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아아, 이것도 안 통하네.”

 

평소와 같은 경박한 톤. 그러나 우타히메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오늘 하루 중 가장 고죠 답지 않은 고죠였다.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고죠는 웃고 있었지만, 10년 이상의 경험으로 저것이 정말 웃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화가 나 있다. 하지만, 왜?

“우타히메는 말이야.”

고죠가 한 걸음 다가왔다. 우타히메는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지만, 등은 이미 개수대에 닿아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우타히메의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내가 정말 돌아버려서 이러는 것 같아?”

“……그거 외에 이럴 이유가 있어?”

“정말 둔하다니까. 그런 주제에 이렇게, 무방비하지.”

몸이 밀착되는 느낌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단단한 허벅지가 다리 사이에 밀고 들어왔다. 우타히메도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고, 고죠?”

“이래 봬도 조금 조급해졌거든.”

얼굴이 가까워진다. 거기서 우타히메는 정신을 차리고 고죠의 어깨를 밀어냈다. 물론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더 다가오지도 않았다.

“오늘 너 정말로 이상해.”

“말했잖아, 조급해졌다고. 조금 더 기다려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타히메가 멋대로 앞서가려고 하니까.”

이쪽이 잘못했다는 듯한 어조가 어이없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가까워지는 얼굴에, 입을 열면 그대로 입술이 닿을 것 같아서.

“우타히메.”

숨이 닿는다. 우타히메가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이내 숨결뿐 아니라 몸에 닿던 감각까지 떨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 됐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죠는 가볍게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우타히메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야……?”

“나 정도 되는 대단한 사람이면 말이야, 원하는 걸 얻는 방법이 너무 많거든.”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손에 들어오는 것들. 고죠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했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무엇도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예외.

“우타히메에게 선 자리가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도, 여차하면 나랑 결혼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도 간단해.”

“너…….”

“하지만 그런 건 의미가 없으니까.”

우타히메가, 직접 선택해야지. 속삭이듯 중얼거린 그 말이 너무나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어쩐지 힘이 빠져 살짝 비틀거린 우타히메가 개수대에 몸을 기댔다. 고죠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듯싶더니, 저녁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뭐야, 도대체.”

한참이 지나 흘러나온 목소리는 도저히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새삼 떠올렸다. 자신의 인생 속 가장 큰 스트레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고죠 사토루 뿐이었다.

 


 

“선배, 이러다 과로사하겠어.”

쇼코의 말에 고죠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잠시 그 눈 밑에 드리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쇼코도 나도 잘만 살아있는데,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잖아.”

“우리랑은 달라. 뭐든 열심히 해버리는 사람이니까. 몸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 그게 목적인가.”

“음? 무슨 소리야?”

뻔뻔한 얼굴로 모른 체하는 모습을 보며 쇼코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죠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말했다.

“정말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우타히메도 알아야지.”

“지난 10년 동안은 뭐 했어? 도대체 인내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급해져서 그래.”

우타히메가 언제쯤 휴가를 낼까?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초조하기보다는 즐거워 보였다. 그래, 그동안 안 어울리게 겁쟁이였던 거지. 다시금 한숨을 내쉰 쇼코가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우타히메와의 대화창이 떠 있는 화면을 톡톡 두들기며, 아마도 의미가 없을 말을 남겼다.

[모쪼록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들어오는 일은 못 하겠다 싶으면 거절도 하고요. 그리고…… 휴가는 되도록 조용히 다녀오세요.]


제목은 내용과 별 상관이 없고, 그냥 쓰면서 자꾸 생각나는 노래 가사가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夏はとても気が早いから のんびりなんてしてちゃダメだ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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