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청소년

4회차, HBD

B에게 by H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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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선생님만 즐거운 시험 시간

다음 <보기> 중 가장 나쁜 사람을 고르세요

 

<보기>

① 풍선

② 라디오

③ 고무장갑

④ 긴수염고래

⑤ 거짓말에 인이 박여서 속은 뻔해도 차라리 다정해 보이는 사람

 

 

드디어 시험 문제 출제 지옥에서 벗어나신 선생님은 교단에서 푸 푸 주무신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으신가요

모든 문제의 답이 ⑤번인 거 말이에요

이러면 공부한 의미가 없잖아요 선생님, 선생님 제발

나는 앞머리 뿌리를 부여잡고 ①번에 체크하며 중얼거린다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온 세상이 나한테 다정하게 군다

그러라고 허락한 적도 없는데 허락한 적도 없는데

 

하굣길엔 미장센 없는 영화를 보러 간다

거기엔 자막도 없고 음성도 없고 화면도 없고 그래 사실 없는 건 미장센이 아니라 영화 자체다 있는 건 오로지 학생들뿐 걔넨 전부 다 ⑤번으로 깔끔하게 OMR을 밀고 온 애들이다 분명 모두가 백 점일 거고 집에 돌아가면 공동 전교 1등을 축하하면서 케이크 먹겠지 좋은 삶이다

 

이 영화관은 너무 다정하다

 

다정한 학생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묵묵히 정면을 바라본다 학생들은 인내심이 좋다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라던 말은 아직도 유행이다 팝콘도 콜라도 나초도 없는 나는 다리를 달달 떨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서 스크린 앞으로 간다 두 팔을 쫙 펴고 인사한다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모르는 척해줘서 무척이나 고맙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 성은이 지극히 망극하옵나이다 이제 집에 가서 싸구려 생크림이나 퍼먹으세요 화목하게

 

그러면 본분을 다한 학생들은 만족스럽게 삶으로 돌아간다 너희와 다르게 나는 오늘부로 가출 청소년이 될 예정이다 경찰이 와도 선생님이 와도 엄마가 아빠가 이모가 와도 돌아가지 않아 그야 우리 집엔 케이크도 촛불도 박수와 노래도 없고 있는 거라곤 닫힌 문뿐이니까

닫힌 문뿐이니까


가끔 제가 통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자낮 발언이라기엔 모든 창작자가 겪는 주기적인 현타가 아닐까 생각을 해요.

스터디를 진행하면서 나의 단점도 장점도 직면할 수 있게 되어서 무척 즐겁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맹점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부재’인 듯합니다. 근래에는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따금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이번 회차에는 확실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느껴주셨을지 궁금하답니다. 편하게 피드백 남겨주세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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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1


  • 수집하는 나비

    하 진짜 이 시는 읽을 때마다 새롭게 좋고 또 좋네요…… 전 유난히 학교 배경을 좋아하는 탓에 어떤 작품이든지 그와 관련된 낌새가 보이면 더욱 환장하고 마는 것 같아요 ㅋㅋㅋㅋ 선생님은 무언가를 알려주는 존재인데 이미 아이가 아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존재로 보여지는 게 흥미로워요 비단 선생님 뿐만이 아니라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어른들이요 앞머리 뿌리를 부여잡고 제발, 제발 하는 화자가 정말 좋습니다 그의 고통과 간절함에 어쩐지 공감하게 되어요 다정함에 울부짖는 모습과 연결되며 시에 큰 동일감이 생기는 것도 정말 좋네요…… 근데 왜 하필 '생크림 케이크'를 퍼먹을까? 하는 건 조금 궁금했어요 앞에 생크림과 유사하게 이어질 수 있는 흰 색감을 넣었으면 더 매끄러운 연결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았답니다 근데 이 시가 정말 너무 좋아서 그냥 케이크처럼 하루종일 퍼먹고 싶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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