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咲 저택 수칙서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할게. 네가 왜 이딴 곳에 기어들어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유감이야.
이곳은 평범한 관광이나 숙박 목적으로는 들어올 수도 없고, 애초에 찾을 수 조차 없는 곳이거든. 네가 제정신 아닌 미치광이라서 굳이 이곳을 찾아온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네. 운 나쁘게 휘말렸다고 하면 너무 불쌍하잖아. 그래도 어차피 들어오게 된 거 기왕이면 살아 돌아가길 바라며 이 메모를 남긴다. 잘 숙지하고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쪽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강조해. 그래도 모자라.
나는 이곳의 처음이자 마지막 관리자. 이름은 뭐... 말한다고 알아?
아마 네가 있는 곳은 저택의 입구일 거야. 1층 정문. 문은 당연하지만 안 열려. 공포게임 해본 적 있어? 정문은 애초에 페이크거나 모든 과제를 달성해야만 열리게 되어 있지. 여기도 비슷해. 문 딴다고 헛수고하느라 힘 빼지 말고 그냥 저택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카펫은 들춰보지 마. 들추는 순간 뭐 막 징그러운 피와 시체 더미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고 그냥 청소한 지 좀 돼서 먼지 쌓여 있을 거라서.
여기 일단은 대저택이라 꽤 넓어. 그만큼 문도 많이 있는데 하나하나 열어보지는 마. 어차피 보통 인간 정신으로는 감당 못 할 것들이 많고, 문 너머의 것들은 기본 매너를 중시하거든. 너도 손님이 네 방문 벌컥벌컥 열면 짜증날 거 아냐? 그런 거야. 그리고 짜증난 그것들이 너한테 뭘 하겠어? 생각 많이 하고 신중하게 행동해.
2-1. 가끔 네가 안 열었는데도 문이 조금 열려있거나, 아니면 아예 반쯤 열려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최대한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말고 그냥 가던 길 가. 정말 혹시라도 '눈이 마주쳤다'는 기분이 들면 고개만 숙여서 인사하고 지나쳐. 물론 실제로 눈은 없어. 그냥 눈이 마주쳤다는 걸... 설명하기 애매한데 어쨌든 그 때가 오면 느끼게 될 거야. 이 저택 자체는 손님에게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아. 하지만 네가 침입자라면 말이 달라져.
1층 중앙에는 넓은 계단이 있어. 지하로 내려가는 방향과 2층으로 올라가는 방향이 있을 텐데 2층으로 올라가지는 마. 지하로 내려가. 2층은 온전히 그 애의 영역이고 1층과 지하는 내가 조금 더 관여할 수 있는 구역이거든. 네가 2층에 가서 개죽음을 당해도 난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지하로 내려갔으면 최대한 숨을 참으며 전진해. 정 숨을 쉬어야 할 때는 입으로 쉬어. 냄새가 지독해서 토하거나 그러면 너한테 이목이 끌리게 돼. 내가 청소를 안 해서 그런 건 아니고, 벌레들이 썩은 음식을 좋아한다나 뭐라나. 하여튼 지하 복도의 끝에 고깃덩어리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썩고 있을 거고 그 위에 구더기든 파리든 뭐가 많을 텐데 크게 신경쓸 건 없어. 만약 네가 소지한 것들 중 음식 같은 게 있으면 하나 던져줘도 되고. 걔넨 사람한테 우호적인 편이거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보험 정도로 생각해. 조금 큰 벌레가 있을 수도 있어. 날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릴 수도 있고. 놀라도 되는데 싫은 티는 내지 마.
그것들을 지나면 문이 하나 있을 거고, 그 옆에 화분 하나 있는데 화분 들어보면 아래에 열쇠가 있어. 열쇠로 문 열고 나가. 여기서부터는 조금 조심해야 해. 문 너머는 정원이야. 정원에서 지내는 녀석은 성격이 나쁜 건 아닌데 예민한 편이라서... 심기 거스르면 위험하거든. 문 열기 전에 옷에 뭐 묻어있지 않은지, 손이나 얼굴이 깨끗한지, 단정한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해. 거울 없어도 그냥 손으로 머리를 빗든 뭘 하든 최대한 신경쓰고 정원으로 가. 최대한 조용히. 만약 걔가 널 부르거나 말 걸거나 다친 곳을 봐주겠다고 하면 못 들은 척 하고 그냥 지나가. 대답하지 마. 아무리 평범하고 다정해 보여도 대답하지 마.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우리의 호의가 네게 꼭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보장은 없어. 특히 걔가 뭐 주사기 들고 미친 사람처럼 쫓아온다 그러면 그냥 차라리 난동부리면서 소리라도 질러. '도와줘'라는 말을 꼭 포함해서 소리를 질러. 네가 만약 아까 그 벌레들에게 충분히 상냥했다면 벌레들이 너를 도와줄 거야. 정원의 그것은 벌레한테 상당히 약한 편이라 당장은 상황이 무마될 건데 장기적으로는 그게 마이너스라서... 이때부터는 타임어택이야. 이렇게 됐다면 그냥 뛰어!
6. 뛰어서 다시 지하 복도로 돌아오면 돼요! 돌아와서 2층으로 올라오세요. 손님을 위한 다과와 만찬을 마련해 뒀어요.
다시 저택 내부로 들어오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정원 뛰면서 바닥 봐. 잔디밭이 흙바닥으로 변하는 경계에서 고개를 들면 아마 작은 화단이 보일 거야. 화단 안쪽에 꽃이 없고 흙 묻은 운동화 한 켤레가 있다면 럭키, 꽃이 가득하다면 넌 상당히 운이 나쁜 거야. 운동화가 있으면 그냥 거기 서서 주인을 기다려. 발소리가 들릴 때쯤 운동화는 사라져 있을 거고, 근처에 농구공이든 축구공이든 야구공이든 뭐 하나 굴러갈 텐데 그 공 굴러가는 방향 따라가면 돼. 대신 가는 도중에 다른 길로 새거나 한눈팔면 안 돼. 야비하게 뭘 이용해 먹거나 그럴 생각도 하지 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생각조차 조심해. 걔는 기회를 딱 세 번까지만 주거든. 그 이후는 아웃이야. 그렇게 되면 차라리 1층으로 돌아와. 방 한 칸은 내어줄게.
만약 운동화가 없고 꽃만 가득한 경우라면, 그 꽃을 꺾거나 뽑아서 가지고 싶다는 생각 혹은 화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 수 있는데 어떻게든 참아. 정신력이 약한 편이면 뭐 손톱으로 팔을 긁든 주먹으로 네 머리를 내려치든 어떻게든 참아내라고. '호러 장르 클리셰: 꽃(특히 장미나 국화.) 혹은 배우나 뮤즈 하여간 무대 서는 놈들이랑은 엮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음.' 이거 알아? 모르면 지금부터 알아둬. 여기도 클리셰가 통용되는 세계관이라서 그쪽은 위험해. 정말 정말 정말 만약 배우가 나타나면 그 땐 도망쳐도 늦어. 그냥 네게 닥친 현실을 받아들여. 그래도 그 배우가 착하긴 착해서 네가 원한다면 주연 자리를 양보할 수도 있어. 그나마의 위안이 되려나?
사실 내가 이곳에 대한 모든 걸 적지는 않았어. 이 저택이 늘 허기진 상태인 것처럼 내 입장에서도 인력이 늘 부족하거든. 요즘은 메이드라는 직업이 생소하게 느껴지겠지만, 존재는 하니까. 네가 운이 좋고 적당히 손님인 척을 잘 하고 이곳의 존재들에게 친절했다면 무사히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 그럼, 불운을 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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