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G3/여러 인물]엽편 모음1
타브아스, 제블로어, 황제타브, 윌에 대한 아주 짧은 글 모음
** 엔딩 이후의 시점을 염두에 쓰고 쓴 글이므로 스포일러에 유의해 주세요.
1. 술집에서 같이 (아스타리온, 타브아스)
아스타리온은 이따금 아득한 옛 시절을 떠올렸다. 동료와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죽지 않은' 시기를. 오래 묵은 브랜디로 애써 목을 축이지 않아도 그럭저럭 취하던 그 어느 젊은 날을. 너저분한 술집의 어느 응달에 몸을 숨긴 채 신선한 피와 살을 욕망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오래 묵은 추억의 단편을 말이다. 많은 늙은것이 그러하듯 그 또한 어리고 무모해서 그때는 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젊은 날의 방탕함이 그리웠다.
"누가 알았겠어,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양지로 나오게 될 줄을."
흡혈귀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내리 쬐는 햇볕은 따사로웠다. 그늘의 묵은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그 어느 순간이 생소했다. 그가 '채 죽지 못한 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의 창백한 두 뺨이 보기 좋게 붉었을 것이다. 그는 문득 목이 말랐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그런 것은 별로 입에도 안 맞는데도. 아스타리온은 가볍게 입맛을 다시고선 타브를 돌아본다.
"자기야, 우리 한잔할까? 저쪽 테라스에서. 경치가 좋네."
그의 어투는 싱그러웠다.
2. 모든 일이 끝난 후에(타브, 타브아스)
흔히들 착각하는 바와는 다르게, 영웅은 쉬이 잊힌다. 영웅의 생명력이란 본디 입과 입, 활자와 활자를 통해 지속되는 바, 더 이상 화자되지 않는 이야기 속의 영웅은 더는 살아있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발더스게이트의 변화무쌍한 패션 트렌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몇 십 년 간은 썩 떠들썩하던 토리 골드버그에 대한 영웅담 역시 새로운 악당과 영웅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수그러들었다. 이따금 늙거나 구닥다리인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선 ‘이야기 속에서보다는 머리 모양이 덜 과감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지만, 그걸 제하면 이 늙은 드워프의 말년은 지극히 평온했다. 희끗희끗하던 머리가 아주 허옇게 셀 때까지 그는 온 페이룬을 떠돌았다. 이따금 악당을 무찌르고 분쟁을 조율하면서, 연인, 동료와 함께 그 숱한 길을 거닐면서. 그는 무엇도 남기지 않고 육신의 세계를 떠나길 바랐다. 어쨌든, 그도 드루이드였으므로 그 또한 그 자신의 치열한 삶을 누군가의 거름으로 기꺼이 바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늙지도, 죽지도 않는 연인에게 말했다.
나를 잊어, 바보야.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애석하게도, 그의 뱀파이어 연인은 지독한 반골이었다.
3. 남겨진 자들 (제블로어)
승리의 이면에는 처절한 상실이 있다. 엘투렐 접경 지역을 누비던 헬라이더는 승리한 전쟁에 널브러진 숱한 시신과 낭자한 선혈들을 알았다. 대 전투가 끝난 후의 발더스게이트의 사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더브레인은 몰락했으나 그렇다고 사라진 것들을 되찾을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제블로어는 불타고 무너져 폐허가 된 그 위대한 도시 사이를 거닐었다. 고향 엘투렐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떠올렸고, 그 찬란한 문명이 아베르누스로 추락하던 날 역시 반추했다. 도려낸듯 깔끔하게 사라진 그 거대한 공동 너머로 풍기던 유황냄새와 온전히 상실된 그의 가족과 벗들에 대해서도. 그 엘투렐로부터 쫒겨남으로써 연명하게 된 목숨은 동족을 배반함으로써 다시금 부지되었다. 그 사실이 티플링 전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빚은 갚았고, 이제 임무는 끝났다. 이제 누구에게로, 무엇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가 주름진 뺨을 쓸어올리며 그을음을 닦아내고 있노라면, 멀리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채 눈도 뜨지 못한 인간 아이였다. 그 작고 어린것을 조심스럽게 안아들면 눈도 뜨지 못한 어린 인간은 고사리 같은 손을 세차게 내저었다. 아주 작은 손이 늙은 티플링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제블로어는 그 작고 연약한 손에서 나오는 억센 생명력을 보았다. 비통과 우울 너머서 강인한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4. 황제 (황제, 황제타브)
일리시드는 대관식도 없이 황제가 되었다.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서 황제가 된 이의 사례야 어디 아주 드문 일이겠냐마는, 신하도 백성도 없는 황제가 어디 그리 흔하랴. 한때 발더란이던 자는 ‘황제’라는 호칭이 주는 모욕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기꺼이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타브는 이따금 검은 로브로 몸을 휘감은 채 그늘 속의 왕좌 위로 드리운 그를 상상했다. 황제는 제 이름을 딴 도시의 가장 퀴퀴한 곳에 몸을 웅크린 채 뒷골목을 굽어 살폈으리라. 낡고 전통적인 방식-폭력-으로 말미암아서. 마인드 플레이어도 고독과 우울에 사로잡힐까? 그것들이 다른 인간 종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다른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할까? 학자가 아니었으므로 명확히 증명할 길은 없었으나, 타브는 황제와의 공명에서 느꼈던 그의 생각과 심정만큼은 분명하다 여겼다. 어쨌든 그는 동료가 필요했고, 누군가의 온기를 원했다. 비정한 통치자라고 할지라도 결국 사람이거나 사람이었던 것은 그 알량한 갈망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브는 기꺼이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신하가 되기로 했다. 이 마인드플레이어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5. 대물림 (윌)
울더 레이븐가드는 윌 레이븐가드의 영웅이었다. 오래도록 그랬다. 강직하고 정의로운 발더스게이트의 대공은 플레이밍 피스트의 훌륭한 지휘관이자 선량한 시민이었다. 바알 사교의 용감한 처단자이자 발더인의 용맹한 수호자인 그는 발더스게이트에거 가장 사랑받는 영웅 중 하나였다. 이 영웅의 헌신을 그 누가 의심할 수 있으랴. 그리고 소년은 으레 제 아버지를 영웅으로 삼는 법이다. 어린 윌 레이븐가드가 그토록 제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라했던 데에는 이러한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윌은 레이븐가드 대공만큼이나 고향 도시를 사랑했고, 그 안에 거하는 시민들을 아껴 마지 않았다. 그는 제 아버지를 완전히 모방함으로써 이상적인 수호자가 되고자 했다. 그 위대한 아버지조차 완벽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후의 일이었다.
언젠가 윌에게 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적이 있다. 그가 대공 자리를 계승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다음의 일이었다. 윌은 아주 유쾌하지도, 그러나 아주 우울하지도 않은 얼굴로 그의 유년 시절을 털어놓곤 했다.
아버지가 널 실망시켰구나?
실망이라고? 하하, 아니야, 타브. 난 아버지에게 실망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그냥, 깨달은 거지. 아버지의 영웅됨이 똑같은 방식으로 내게 대물림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야. 당연한 일이지, 안 그래? 아버지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윌 레이븐가드는 꽤나 후련해 보였다. 오랜 짐을 벗어던진 워록의 외눈은 영웅적으로 빛났다. 악마와 손잡은 자의 것치고는 썩 거룩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