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모음

냥멜냥/ 스팸

2023. 8. 30.

TYYYYYYYYYYY by 칙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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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AU

오전 10시 20분.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아이메리크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가 보낸 것은 1분 15초짜리 음성 파일이었다. 그 앞뒤로 어떤 설명도 없다. 하지만 에스티니앙은 이 음성 파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도 알 수 있었고.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에스티니앙은 음성 파일을 재생하지도 않은 채로 스크롤을 올려 아이메리크의 그 이전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했다. 2주 전, 약속 장소에 도착했느냐는 물음이다. …그러니까, 2주 동안 에스티니앙과 아이메리크 사이엔 어떤 메시지도 오가지 않았다는 뜻과 같다. 이유는 명확했다. 2주 전 그날 헤어졌으니까.

 

'도착했나?'라는 간단한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던 아이메리크를 보며 피식 웃었던 기억이 떠올라 에스티니앙은 재차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후우우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메시지를 읽었단 걸 확인하고도 남았는데 아이메리크는 무어라 더 연락을 하지는 않는다. 현재 시각은 오전 10시 30분. 에스티니앙은 10분간 음성 파일을 재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답장을 하지도 않은 채로, 그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기만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싸운 게 하루 이틀 일인가, 한두 번 일인가. 헤어졌다 다시 사귄 세월을 헤아리면 한두 해 일도 아니다. 그래 봤자 이러다 화해하겠지 싶은 순간도 있었고, 이러다 잘못하면 정말 헤어지겠다 싶은 순간도 있었다. 이번 다툼과 헤어짐은 에스티니앙의 입장에선 명백히 전자였다. 아니, 아무래도 그렇잖아. 기껏해야 날씨가 더워서 신경이 날카로웠던 아이메리크와 저녁으로 뜨거운 음식을 먹느냐 차가운 음식을 먹느냐 하는 문제로 다퉜던 일이 '이러다 진짜 헤어지겠다'라는 쪽으로 발전하는 건 오히려 신기하지 않느냔 말이다.

 

아이메리크도 그렇게 기억할 테지만 에스티니앙이 보기에도 제가 '너 이럴 때마다 진짜 질린다'라고 말했을 때 아이메리크 안의 무언가가 끊겼다. '그래? 그럼 질리는 놈과는 이제 더 만날 필요도 없겠군.'이라며 식사도 하지 않고 아이메리크는 빙긋 웃어 보이고 휙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니, 그래도 말이지, 이번 일은 진짜 아이메리크 놈의 잘못이었단 말이다. 더위를 타면 차를 끌고 다닐 것이지, 굳이 왜 더운 길을 걸어와서는 그 짜증을 저에게 푸느냔 말이야. 그래도 깔끔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니 더위가 가시고 짜증이 가시고 나면 제가 심했다는 걸 인정하고 '어젠 미안했다'라면서 연락이 오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2주다. 2주씩이나, 연락을 안 한다! 솔직히, 이번 일 네 잘못이 더 크잖아!

 

현재 시각은 10시 40분. 10분간,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채로 한숨을 쉬던 에스티니앙은 음성 파일을 노려보았다. 잠시 재생할까 고민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뭐 하러 이걸 들어 봐. 안 들어도 뻔한데.

 

1주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2주차에 들어서니 에스티니앙도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거, 좀 심상치 않나? 에스티니앙이나 아이메리크나 비슷하게 화가 났을 때는 식는 속도도 비슷했다. 에스티니앙도 이제 별생각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이메리크도 그럴 터인데, 연락도 없다는 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나. …혹시 그날 내가 더 심했나?

 

'너 이럴 때마다 진짜 질린다'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 말이긴 했지. 아이메리크 녀석, 자존심이 강하니까 거기서 화가 났을지도 몰라. 아니면 오해할 만한 말이 있었나. 더위를 끔찍하게 타서 불쾌 지수가 하늘을 찔렀던 아이메리크에게 평소보다 거슬릴 만한 말을 걸러서 하지도 않았으니 뭐가 얼마나 더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어, 이거. 생각보다 큰일인가? 설마 이러다 진짜 헤어지는 거 아냐?

 

에라, 모르겠다, 콱 헤어져 버리지 뭐, 라기에 에스티니앙에게 아이메리크는 생각보다 큰 사람이다. 아마 아이메리크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클 테다. 말하지 않았으니 모르겠지. 그런데 제 안에서 이만큼이나 커져 버린 놈을 훅 놓으라니 그럴 수가 없지 않나. 이제 와서 너 없이 어떻게 살라고. 당장도 이만큼 막막한데, 어떻게 이렇게 평생을 살라고.

 

그래도, 조금은 버틸 생각이었다. 아이메리크가 기 싸움을 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어제 회식에서 과음하는 바람에 집에 돌아오는 길엔 마음이 잔뜩 약해져 버렸다.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아이메리크. ……………너, 진짜, 이럴 거냐? 매정한 놈 같으니. 어떻게 저녁 메뉴 가지고 싸운 걸로 2주씩이나 연락을 안 하고… 이러다 헤어지기라도 할까 봐 너는 겁도 안 나는 거냐? 난 정말 네 속도 모르겠다… 하… 어이없는 자식. 모른다, 네 맘대로 해라, 어차피 난 못 헤어지니까. 벌써 뭘 헤어졌어, 난 그러자고 한 적도 없고, 네가 그만 보자느니 뭐라느니 하고 혼자 씨불이고서 집에 간 건데. 아… 됐어…… 시끄러워. 몰라… 됐어. 내일 나와라. 됐어, 나오라니까. 네 집 앞 카페에서 12시에 봐. 얼굴 좀 봐…… 맘대로 해라, 나오든 말든. 뭘 기억을 못 해, 별로 안 취했어. 시끄러워… 12시야. 나와. 알았지. 끊는다. 됐어, 끊어….'

 

젠장.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제 말을 떠올리고서는 머리를 부여잡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젠장, 조금만 더 참을걸! 전화해 보니 아이메리크 녀석, 잔뜩 딱딱하게 굴기는 했어도 정말로 그만둘 기색은 없어 보였는데.

 

현재 시각은 10시 45분. 25분째 대화 창은 음성 파일에서 멈춘 채다. 그나저나 나오면 나오고,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거지 남의 창피한 통화 내용은 녹음해 뒀다가 보내긴 왜 보내? 툴툴거리던 에스티니앙이 두 잔째 커피를 속에 부어 넣었다. ………그때였다. 창을 열어놓은 탓에 어떤 알림도 없이 아이메리크의 메시지가 하나 날아들었다.

 

[Aymeric] 기억나나?

 

…이 자식 보게. 누구는 속이 타서 약속 장소에 몇 시간 전부터 나와 있는데, 슬슬 떠보기나 하고. 가뜩이나 잔뜩 밑졌다는 느낌에 심사가 뒤틀려 있었는데 한술 더 떠서 떠보는 꼴을 보고 있으니 속이 비비 꼬인다.

 

[Estinien] ?

[Estinien] 뭐가?

[Estinien] 스팸인 줄 알았다

 

통화할 때도 말이다, 벌써 헤어진 거 아니냐느니 이럴 거면 그날 왜 그랬냐느니 탓하는 소리만 잔뜩 하더라니. 하나도 아쉽지 않아질 것 같다. 콱 집에 가 버릴까 보다. …그렇게 생각만 하며, 슬슬 바닥을 보이는 두 잔째의 커피를 털어 마셨다. 속 쓰린데…… 커피를 더 시켜야 하나.

 

[Aymeric] 어제 과음하기는 한 모양이군

[Aymeric] 쉬어라, 에스티니앙

 

커피 말고 다른 건 없었던가, 하고 메뉴판을 기웃거리는데 그새 핸드폰으로 날아든 메시지가 가관이었다. 두 개의 메시지를 보고서는 결국 에스티니앙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쪽이 마저 밑지고 들어가지 않는다고 나오지도 않겠다, 이거냐?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둘 것 같냐. 이미 헤어졌다느니 뭐라느니, 불러내서 다시 싸우든 어쩌든 해야만 성이 풀릴 것 같아 핸드폰을 붙잡고 메신저 창을 닫았다. 그리고 아이메리크에게 전화를 걸고,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대고서 씩씩거리며 고개를 드는 순간.

 

습관처럼 앉은 자리였다. 이곳에 앉으면 아이메리크가 오는 모습을 저 멀리서부터 볼 수 있었으니까, 먼저 와서 기다릴 때면 늘 앉아 있는 자리였다. 아이메리크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늘 에스티니앙이었고, 아이메리크는 조금 더 걸어와서야 에스티니앙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며 웃어주곤 했었다. ………에스티니앙이 앉은 자리의 통창 저 멀리로, 작지만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현재 시각은, 10시 50분. 에스티니앙이 꼬부라지는 혀로 웅얼웅얼 말했던 약속 시간은 12시.

 

피식 웃었다. 이럴 거면서 쉬라고는 왜 한 거야? 아이메리크가 전화를 받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저 멀리에서 작은 아이메리크가 핸드폰을 꺼냈다가 잠시 멈춘다. 대체 무슨 짓인가 생각하고 있겠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곧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에스티니앙을 발견하고는 제법 크게 웃을 테다. 그 얼굴을 떠올리며 에스티니앙은 재차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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